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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20.08.18 조회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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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춤추는 그대를 기다리며

우주에서 춤추는 그대를 기다리며

박상준_서울SF아카이브 대표

<스타댄스(Stardance)> 사진 제공, 서울SF아카이브
2019년에 소백산천문대에서 경험한 일이다. 과학자들과 문화예술인들이 한데 모이는 융합 워크샵이었다. 서윤신 무용가가 특강을 진행하며 과학자 한 분을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어떤 동작이라도 좋으니 마음 가는 대로 춤을 춰 보라고 했다. 과학자가 쭈뼛거리며 어색한 동작을 취하자, 서윤신 무용가가 바로 곁에서 그 동작에 맞춰 함께 즉흥 안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과학자의 움직임이 한순간 세련된 소통의 마임처럼 보이는 마법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손과 몸이 서로 조응하는 모습에 머리가 아닌 가슴이 반응하며 나도 모르게 전율이 일었다. 그 신비로운 경험에는 뭔가 기시감이 있었는데, 그 정체를 기억해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을 읽었을 때 얻은 바로 그 느낌이었다. 주인공이 눈을 가리고는 장님의 손을 따라 대성당의 그림 윤곽을 더듬어가면서 깨닫는 새로운 감각의 우주.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몸짓이면 충분한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건 외계의 지적 존재와 소통하려는 상황에서도 유효하지 않을까. SF 작가는 물론이고 현실의 과학자들도 외계인과 대화를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해냈다. 우주 공통의 언어라는 수학도 있고, 우주 만물을 이루는 기본 원소들을 나타내는 화학적 구조도 있다. 모두 다 어느 수준 이상의 지적 존재라면 이해할 가능성이 100%에 가깝다. 음악이 우주 언어가 된다는 설정의 SF도 있었다. 좀 재미없게 표현하자면 특정 주파수 대역에서 나름의 패턴을 지닌 채 연속적으로 재생되는 음향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몸짓, 흔히 우리가 ‘춤’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주의 생명체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초적인 표현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숱한 동물 중에서도 춤을 추며 의사 표현을 하는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 구애의 몸짓이든 적대나 친밀함의 표현이든.

한 여성 무용수가 있다. 춤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에 정말 열심히 노력하지만 어쩐 일인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무용계에서는 그의 춤사위를 과잉, 혹은 결핍으로만 해석하며 주류에 편입시키지 않는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그는 어느 날 우주정거장에서 춤을 출 기회를 얻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안무에 모든 이들의 찬사가 쏟아진다. 지구 중력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그의 춤 동작들이 무중력상태에서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즈음 우주 저편에서 정체불명의 외계인들이 지구로 접근한다. 인류는 그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온갖 방식을 시도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고, 오히려 뭔가 오해를 키운 듯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며 공격하려는 징후를 보인 것이다. 그때 주인공은 그 외계인들의 모습을 보고는 뭔가 자신의 춤과 공명하는 동질성을 느낀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 앞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이자 마침내 그 외계인들은 적대적인 태도를 멈출 조짐을 보이고, 주인공은 과감하게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에게 보일 그다음 안무를 구상하면서.

위 이야기는 미국의 SF작가 부부인 스파이더 로빈슨과 진 로빈슨이 1977년에 한 SF잡지에 처음 발표한 중편소설 <스타댄스(Stardance)>이다. SF 문학계의 양대 권위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모두 받았으며, 나중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덧붙여져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춤이야말로 우주 공통의 소통 수단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한 편의 스토리텔링으로 잘 형상화한 작품인데, 아쉽게도 이와 비슷한 제재를 담은 작품들은 그 뒤로 별로 나오지 않았다.

<스타댄스>와 결은 다르지만 중력을 거스르는 자유로운 춤의 상상력을 담은 또 하나의 작품으로 윤이형의 단편 <스카이워커> 역시 주목할 만하다.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트램펄린 무용을 하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나름의 성취를 쌓아 가지만 어느 순간 무력감에 빠진다. 사실 인류는 스스로 초래한 엄청난 재앙 때문에 가까스로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난 뒤였는데, 그 사이에 ‘스카이워커’라고 하는 돌연변이 초능력 인간들이 태어난 상태였다. 그들은 중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트램펄린 무용을 할 때도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환상적인 동작들을 얼마든지 선보일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과는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트램펄린 무용계에서는 오히려 스카이워커들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철저히 무시했고 그들의 퍼포먼스나 창의성도 외면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애써 의식하지 않을 뿐, 사실은 아무도 스카이워커를 이길 수 없다. 주인공의 좌절은 바로 스카이워커에 대한 무력감이던 것이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저마다 태생적으로 불평등한 조건을 타고날 수밖에 없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를 은유한 것으로 봐야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중력을 거스르는 스카이워커라는 존재들도 흥미롭다. 중력을 제어할 수 있기에 육체적인 속박이 느슨할 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가치관도 더 자유분방할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소수자일 뿐이며 주류에게 존중받지도 못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위의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노라면 춤을 추는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도전 중의 하나는 아무래도 지구의 중력일 것 같다. 오래전에 어떤 SF 출판사에서 ‘지구 중력을 벗어난 상상력’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무용가들이야말로 간절하게 지구 중력을 벗어난 퍼포먼스를 갈망하고 있지 않을까? 지금도 ISS(국제우주정거장)에서는 온갖 연구며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무중력 안무를 시도해봤다는 소식은 접하지 못한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우주비행사들이 무중력상태에서 가능한 동작들을 보여주는 모습을 수십 년 동안 지켜봐 왔다. 허공에서 끊임없이 공중제비를 돈다거나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우주정거장 안에서 이동을 한다거나 거꾸로 선 상태에서 정지해 있거나 등등. 왜 누군가가 그런 동작들로 진작 안무를 짜 보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든다.

지구 중력을 벗어난 것과 비슷한 환경에서 안무를 시도할 기회가 없지는 않다. 흔히 실내 스카이다이빙으로 알려진 것인데 풍동, 즉 거대한 수직 선풍기 위에 떠서 낙하산 강하 체험을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춤을 추는 사람의 영상을 우연히 접하고는 몰입해 봤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새로운 무용 장르의 탄생을 목격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일반인들이 좀 더 쉽게 무중력 춤을 시도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VR을 통한 가상 환경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시각이나 청각 등 제한적인 감각만 적용 가능하지만, 앞으로 동작 센싱은 물론이고 운동신경과 직접 연결되는 VR 장비가 나온다면 실제 무중력과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춤을 추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지금도 하늘을 날거나 하는 등의 VR은 실제로 케이블에 몸을 매단 채로 비교적 생생하게 즐길 수 있기는 하지만 몸동작 하나하나를 그대로 반영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앞으로 VR기술이 더 발전하면 무중력뿐만 아니라 지구보다 더 중력이 강한 외계 천체에서 춤을 추는 체험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무용과 과학기술이 결합하면 미학적 퍼포먼스의 가능성도 그 스펙트럼이 훨씬 확장되는 셈이다.

최근에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영상을 즐겨 찾아보곤 한다. 나 역시 이날치 밴드와의 콜라보 <범 내려온다>를 통해 그들을 알게 되었지만 김보람 안무가의 인터뷰를 보고서는 좀 더 그들의 철학이며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무중력상태에 그들 특유의 자유로운 영혼과 실험 정신이 결합하면 과연 어떤 퍼포먼스가 나올까? 그들이 우주정거장에 올라가서 춤을 출 날을 한껏 기대해 본다.
박상준_서울SF아카이브 대표 박상준은 SF 및 교양과학 전문 칼럼니스트이자 기획번역가, 강사로 활동해왔다.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의 편집장과 SF전문출판 ‘오멜라스’의 대표를 지냈으며 《미래에서 온 외계인 보고서》 등의 책을 냈다. 근현대 한국 과학기술문화사 자료들을 수집, 연구하여 광주디자인비엔날레(2017), 국립과천과학관, 서울시립과학관, 문화역서울 284 등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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