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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1 조회 4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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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의 근대성으로부터 탈주하는 ‘안무적 전환’의 흐름들

안무의 근대성으로부터 탈주하는 ‘안무적 전환’의 흐름들
-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개인주의자의 극장>, <원래 다 원래>

조형빈_자유기고가

우리는 무엇을 안무라고 정의하는가? 춤이 만들어져 온 유구한 역사에 걸쳐 안무의 개념이 있었지만, 안무가 실제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근대의 이름이 인간의 사유와 사회를 하나하나 점령해나가고 있던 그때, 안무는 무용이 하나의 장르로 구분되기 위한 개념적 수단으로 출현했다. 몸을 기반으로 한 운동성과 그것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총체적인 과정을 이르는 개념으로서의 안무는, ‘바로 이것이 안무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무용을 다른 예술장르에서 분리해내고 무용에 장르라는 화관을 씌워주기 위한 유용한 방편 중 하나였다. 안무를 ‘어떤 것’이라고 정립함으로써 무용은 스스로 '예술'이 되었고, 안무가 ‘무용예술’의 존재적 근거가 되었으므로 모든 무용가들은 안무의 존재적 기반을 목숨 걸고 수호해야만 했다.

모더니즘의 시간이 지나고 그것을 해체하고 깨부순 포스트모더니즘의 책장도 바래가고 있는 지금, 근대성을 추종하고 소환하는 도구로서의 안무는 더이상 우리에게 유용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는 저서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Exhausting Dance)>에서 이미 만료되어버린 안무의 개념을 지적하며 2000년 전후의 여러 작품이 바로 이 ‘근대적 안무’를 어떻게 소진시키고, 안무의 개념을 어떻게 새롭게 보여주고 있는지 설명하기도 하였다. 안무(choreography)라는 단어는 사라지는 춤을 기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출발했는데, 사라지는 공연을 붙잡아두는 것으로서의 (근대적)안무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성과 저자성이었다. 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어야 했으며, 또한 안무는 '안무가' 1인에 의해 창작되고 펼쳐져야 하는 것이었다. 모더니즘의 구조에서 무용은 흔들리지 않는 개념으로서의 안무를 ‘정치적으로’ 필요로 하였고, 안무는 외워서 실행하는 운동성을 상징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1인 저자에 의해 창안되고 퍼포머(때로는 안무가 본인)에 의해 무대 위에 상연되는 퍼포먼스란, 그것이 구성되고 발생되는 근본적인 물리/시공간적 한계에 의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운동성이 만들어지는 곳과 그것이 펼쳐지는 곳은 물리적으로 일치할 수 없으며, 그것이 수행되는 육체와 시간은 시공간을 점령하여 휘두르려는 안무가의 시도를 언제나 무위로 되돌린다. 우리가 춤으로 정의하는 수많은(그리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경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들을 새로운 안무의 개념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안무는 단순히 ‘외워서 쓰기’가 아니라 육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들을 길어 올리는 또 다른 '운동성'의 작업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것이 바로 안무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몇 가지 공연들은 바로 이 근대적 안무를 해체하는 작업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안무의 개념을 뜯어보고 새롭게 정의하는 일종의 ‘안무적 전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존재와 상태, 몸뚱이로서의 안무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올린 카럴 판 라러(Karel van Laere)의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The Non-Present Performer)>는 퍼포먼스를 만들어내는 퍼포머와 안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었다. 물리적 운동성으로서 안무와 공연을 구성하는 퍼포머의 상태, 존재, 작동의 방식에 대해 색다르게 접근함으로써, ‘무엇이 안무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공연은 네덜란드의 무용수 카럴 판 라러가 최면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최면은 이 공연의 퍼포머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실제로 무대 위에 퍼포머와 최면술사가 등장하여 직접 최면을 거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퍼포머는 이내 최면에 빠지고, 의식이 없는 그의 몸이 바닥에 눕혀지고 나면 네 명의 무용수가 무대로 등장하며 '안무'를 시작한다. 네 명의 무용수는 최면에 빠진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밀치고, 끌어당기면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최면술사의 주의 깊은 주시 아래, 네 명의 무용수는 훈련한 대로 몸뚱이의 맡은 부분들을 이리저리 조작하기 시작한다. 의식을 잃은 몸은 당연하게도 스스로의 육체를 통해 어떤 움직임도 자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으며, 여기에서 춤은 오로지 타인의 조작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바닥에 눕혀진 몸의 팔 다리를 움직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몸뚱이는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거나 관객의 무릎 위에 잠시 놓이기도 한다. 모든 움직임이 끝나고 나면 최면술사가 다시 무대 위로 등장해 퍼포머의 최면을 해제하고 의식을 일깨우는 것으로 공연은 마무리된다.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박수환,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퍼포먼스에서 신체를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은 최근 다양한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무용수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고 오브제를 통해 무대를 전개하는 공연들이 그런 종류의 것들인데,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성을 제거하고 움직임(혹은 멈춤) 그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안무적 움직임이나 움직임과 연결된 개념의 정치성을 극대화하는 공연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런 공연들에서 몸은 단지 상징으로만 남아 개념을 부각하거나, 혹은 부재함으로써 그 육체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역할만을 맡게 된다. 반면 카럴 판 라러의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는 일련의 공연들처럼 무대에서 신체를 제거하는 대신, 물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신체를 남겨두고 혼을 제거하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안무를 새롭게 바라본다. 비록 감각이 살아있어 주위를 인식하고 오감을 느낄 수 있을지라도 최면에 빠진 퍼포머는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며, 안무는 퍼포머의 의지 대신 육체 바깥의 것들을 통해 강제로 구성된다. 퍼포머의 육체를 통해 구현되는 안무가, 퍼포머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발현되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안무 개념이 1인 저자에 의한 지시와 그것의 수행이라는 완전무결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여기에서 안무를 직접 수행하는 퍼포머는 ‘쓰인(written)’ 안무를 실행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치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도 안무가-저자 본인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무용수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때로는 극한까지) 육체를 단련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퍼포먼스가 ‘완성’되는 것은 무용수가 안무를 무대 위에서 ‘쓰는’ 과정을 통해서인데, 여기에서 무용수의 단련된 몸과 그것을 움직이는 의지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에서 안무는 퍼포머 자신의 몸으로부터 나오지도 않고, 안무가의 안무적 지시에 의해 암기된 동작들을 펼침으로써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육체는 단지 감각만 남겨두고 정신을 상실한 상태에서 다뤄지고, 나머지 네 명의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조작'이 안무를 구성할 뿐이다.

이 공연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인지가 살아있지만 스스로 ‘쓸’ 수없는 최면에 빠진 퍼포머의 흔들리는 상태다. 퍼포머인 카럴 본인은 최면을 통해 몸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잃었지만, 동시에 최면을 통해 확장된 감각을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몸을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호흡을 냄새 맡고 흐르는 땀을 맛볼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된 감각은 최면에 빠진 육체가 의식을 지녔을 때 이상으로 살아있는 인지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퍼포머는 자신의 몸뚱이를 오브제로 인식하고 안무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관객이면서, 동시에 무대 위의 (다른 무용수들은 채 인식하지도 못할) 모든 감각들을 쓸어 담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퍼포머로서 이 불안정한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수행자의 통제권을 육체로부터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안무는 안무가-저자와 수행자라는 수직적 구조로부터 탈피하여 감각과 인지의 운동성, 조작되는 오브제로서의 신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지각으로부터 발생하는 안무 <개인주의자의 극장>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진 또 다른 작품인 룸톤(ROOMTONE), 이장원, 정세영의 <개인주의자의 극장>도 역시나 다른 방식으로 안무에 새롭게 접근했던 공연이었다. 공연 연출가 정세영, VR 아티스트 룸톤 그리고 로보틱스 아티스트 이장원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개인주의자의 극장>은 지각과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반응을 무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안무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공연은 특이하게도 VR을 이용한 공연이면서 VR을 착용하는 관객과 그것을 착용하지 않는 관객을 구분한다. 관객은 공연을 예매할 때 본인이 VR을 쓰고 공연을 관람할지, 혹은 쓰지 않고 관람할지 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VR을 쓰지 않은 관객들이 극장으로 입장하고, 무대 한가운데 놓여있는 로봇 팔과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잠시 후 VR을 쓴 관객 네 명이 무대로 등장하고, 무대(그리고 VR을 착용하지 않은 관객들)을 볼 수 없는 VR 착용 관객들은 VR 속 영상을 따라 공연을 '체험'하게 된다. 미착용 관객은 무대 위에 쏘아지는 일부 VR 영상과 VR을 착용한 관객들 모두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극장은 같은 공간이면서 동시에 VR 안과 밖, 두 가지 층위에서 만들어진다.

<개인주의자의 극장>은 다층적인 레이어를 가지고 있는 작업이다. 먼저 VR을 착용하고 있는 관객의 경우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VR을 벗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있어 이 공연은 VR 안에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VR을 착용하지 않은 관객의 경우 VR 바깥 무대에 설치된 텍스트, 로봇 팔, 그리고 VR을 착용하고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관람 중인 VR 착용자들로 구성된 공연을 보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극장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VR 착용자들을 관찰하는 관객들과 VR을 착용하고 영상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착용자들이 한 공간 안에서 각기 ‘안무적’으로 무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수행적인 것은 VR을 착용하고 공연을 ‘관람’ 중인 관객들이다.
<개인주의자의 극장> ⓒ박수환,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VR 착용 관객들은 VR 기기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에 따라 앞으로 걸어가거나 고개를 기울이거나 혹은 징검다리를 건너듯 점프를 하기도 한다. VR을 쓰지 않고 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는 관객들은, 어느 순간 VR을 쓰고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관객들이 무대 안에서 무언가를 수행하고 있는 퍼포머임을 인지하게 된다. 말하자면, VR을 쓴 관객들이 일종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춤을 추고 있는, 안무를 색다른 방식으로 ‘쓰고’있는, 무용수인 것이다. VR을 쓴 관객들은 체험으로서의 극장을 경험하는 관객이자, 동시에 VR을 통해 지시받은 움직임을 수행하는 퍼포머다. 여기서 지시는 무대 위, 퍼포머가 무대(VR 영상)를 '관람'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시각과 청각을 통해 무대를 지각한 퍼포머는 특정한 움직임을 수행하여 (VR 바깥의) 무대를 구성하게 된다.

<개인주의자의 극장>에서 (퍼포먼스 자체를 VR 관람자가 수행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한다면,) 안무는 VR 관객이 받아들이는 시각적/청각적 지각과 그것에 대응/반응하는 관객의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 관객은 실재하지 않는 '없는 것'에 대해 반응하고, 이 반응은 움직임을 통해 곧 안무가 된다. 여기에서 근대적 안무가 요구했던 완벽한 재현으로서의 퍼포먼스는 깨어지고 만다. 안무는 빗나갈 수 없는 완성형으로서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관객이 지각하여 그 즉시 만들어내는/만들어내지 않는 어떤 생성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잘 짜인 동선과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기에, VR 영상은 그것을 강요하지도, 의도하지도 않는다. 다만 무대는 ‘지각하는 자(눈 먼 예언자)’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지각자(관객)들을 모두 무대 위에 올려놓고, 육체가 아닌 것(기계 팔)과 함께 어우러져 움직임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한다. 무대 위에서 관객은 곧 퍼포머가 되어, 커다란 이야기 안에서 안무를 수행하는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잘게 쪼개진 것으로서의 안무와 저자성 비판 <원래 다 원래>
안무에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서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최종공연인 <차세대열전 2019!>의 공연으로 올려진 김건중의 <원래 다 원래>를 꼽아볼 수 있다. <원래 다 원래>는 움직임이 어디서부터 발생하는지를 탐구한 공연으로, 몸과 움직임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원래'의 움직임을 찾고자 하는 공연이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세 명의 퍼포머가 무대 위로 등장하고, 안무가는 무대 한쪽에 만들어진 소파에 나와 앉는다. 제각기 다른 옷을 입고 등장했던 퍼포머들은 무대 위에서 같은 사이즈의 옷으로 갈아입고, 안무가가 마이크를 통해 지시하는 것들을 수행한다. 안무가는 발을 움직이라거나 손을 들어 올리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퍼포머들에게 직접 발을 움직일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질문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지시는 단순히 움직임을 만들어내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퍼포머의 상태를 퍼포머들 본인의 입을 통해 묘사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럼으로써 움직임이 발생하는 순간 퍼포머가 어떤 것을 인지하고 어떻게 그 움직임에 대응하는지, 관객들은 매 순간 그것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게 된다.
<원래 다 원래> ⓒSang Hoon Ok, 2019 Arko Academy 제공
앞선 두 작품과 다르게, <원래 다 원래>는 안무 자체를 쪼개고 그것을 퍼포머가 스스로 나누어 인지함으로써 안무라는 것이 어떻게 분절되고 나아가 ‘조립’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안무가가 특정한 움직임을 지시하면 퍼포머는 그것을 들음으로써 지각하고, 지각한 지시를 분절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거쳐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단순하게 퍼포머가 자신의 신체와 움직임을 인식하는 감각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안무가에 의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명령과 퍼포머의 몸을 통해 움직임이 쌓여가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퍼포머의 입을 통해 일련의 과정들이 잘게 쪼개져 발화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과정들은 저마다 퍼포먼스를 세분화하여 구성하고 있다.

특히 세 명의 퍼포머가 각각 다른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동일한 명령을 수행하면서 그 찰나에 나타나는 차이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차이들이 육성으로 발화되면서 보여주는 저마다의 다름은, 관객에게 각각의 퍼포머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 '안무'의 과정이 단순히 일방향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안무가가 똑같이 내린 지시(예를 들어 “발을 들어 뒤로 옮기세요”)는 각각의 몸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의 퍼포머는 발이 이동되는 순간을 저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표현한다. <원래 다 원래>는 안무라는 것이 얼마나 촘촘하게 쌓아 올려지고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근대적 안무의 구성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각각의 몸들로부터 만들어진 개별적 발화에서 오는 차이를 통해 움직임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안무가-저자에 의해 건축된 세계가 필연적으로 불안하고 붕괴하고 마는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정치적 전략으로부터 떠나 새롭게 말 걸기
안무가 ‘안무’로서 정의되기 시작한 것은, 춤이 이론가나 비평가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누구나 인식 가능한 방법론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장르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움직임을 기록하고, 그것을 단순한 감정의 발흥이 아닌 저자의 창작물로 구성하기 위해 '안무의 개념'이 필요했었다. 말하자면 무용이 스스로 고유의 장르로 인정받기 위해 일종의 정치적 전략으로서 ‘안무’를 가져온 것이다. 춤은 안무의 개념 정립을 통해 근대적 예술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근대적 안무의 개념이 있기 전에 춤은 춤이라기보다 음악이거나, 회화, 혹은 연극의 일부였다. 말하자면, 춤은 모든 것들에 들어가 모든 것들을 점령할 수 있는 희끄무레한 불확실성과도 같았던 셈이다. 이랬던 춤이 모더니즘의 준엄한 명령 아래 줄 선 예술들 사이 틈바구니로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안무'라는 지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모순 속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춤은 다시금,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안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세 개의 공연들은 저마다 각각의 방식으로 안무의 저자성과 운동성을 흔들고 있었다. 저자성은 무대 위에서 파괴되거나 생성되고 있고, 운동성은 움직임의 개념이 몸을 넘어서 다양한 것들로 확장되면서 재구성되었다. 운동성의 정치학을 건드린다는 것, 안무적 실험을 통해 안무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은 춤의 정치적 존재론을 다시 들여다보게끔 하는 것이다. 카럴 판 라러의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에서 안무는 비의지적 육체와 확장된 의식 사이에서 재구성되어 정신없는 신체가 만들어내는 움직임들을 조명한다. 룸톤, 이장원, 정세영의 <개인주의자의 극장>은 VR을 통해 무대를 다른 차원에서 구성함과 동시에, 관객이 퍼포머가 되고 지각을 통해 안무가 생성되는 무대를 만들어내었다. 김건중의 <원래 다 원래>는 지시와 수행, 발화의 과정을 통해 저자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안무가 어떻게 촘촘히 쌓아 올려 구성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공연에서 안무는 이제 근대적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전략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원래 안무가 자리했던 희끄무레한 불확실성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시점에서 ‘안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춤은 이제 더 이상 ‘근대적 안무’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해체함으로써 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다른 것들을 춤의 영역 안에 포섭시키고 있다. 이제까지와 다른 ‘안무들’이 스스로 틀을 깨고 뛰쳐나가는 전환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안무적 전환’의 시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조형빈_자유기고가, 드라마터그, 문화연구자 대학에서 사회학과 문화학을 전공하고, 무용에 관한 문화연구를 해오고 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 글을 쓰며 몇 번의 무용 작업에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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