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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9.16 조회 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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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폭력을 다시 고민하기

웹진 <춤:in> 편집부

일시: 9월 7일 토요일 오전 10시
참석자: 서경선(안무가), 윤상은(안무가, 페미플로어 멤버), 이산(마임배우,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원), 양효실(미학자), 김연임(춤:in 편집장), 이주연(춤:in 에디터)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양효실, 윤상은, 이산, 서경선 ⓒFotobee_이병곤
김연임: 안녕하세요. 폭풍 링링이 오는 주말 아침, 이렇게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성폭력을 중심으로 무용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폭력의 지점을 돌아보고 이야기 나누어보면 좋겠습니다.

다른 문화예술계와 마찬가지로 무용계에서도 폭력의 상황이 없지 않았음에도 꽤 오랫동안 이에 대해 드러내고 이야기하기가 힘든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무용계에서도 ‘오롯’이나 ‘페미플로어’, ‘약속하는 언니들’처럼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고, 페미니즘이나 성폭력 대응 방법을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무용계 내부의 다양한 층위의 폭력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보는 자리를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 자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럼, 먼저 간단하게 서로 소개한 다음에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양효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하는 양효실입니다.
서경선: 안녕하세요. 저는 여성과 나이듦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무용가, 서경선입니다. 최근 SNS를 통해 무용계 미투 기사를 접하고 나서 건강한 무용 생태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몇 친구들과 함께 ‘약속하는 언니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활동을 막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산: 안녕하세요. 저는 이 산이라고 하고요. 마임 하는 배우입니다.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한국 성폭력 상담소에서 상담자로 일했어요. 이후 상담을 그만두고 연극을 하다가 작년에 연극계 미투가 터지면서, 다시 성폭력 상담소 일도 하고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져서 그곳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윤상은: 안녕하세요. 저는 윤상은이라고 합니다. 안무를 하고 있고, 2016년부터 고양시 청년 여성주의 공동체 ‘고양페미’ 멤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후 예술계에서 미투가 터지고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 전문강사’ 교육 프로그램이 생겼었는데, 그 교육을 이수하고 전문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강원대 무용과로 첫 강의를 나갔어요. 처음 자격증을 받았을 때만 해도 제가 과연 강의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막상 무용과에서 강연 의뢰를 받으니까 무용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무시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제 학생들을 만나고 왔어요. 물론 초보 강사로서 실수 연발이었지만, 학생들도 이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사건이 터진 시점이기도 하고 지금 사회적으로 이슈가 많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페미플로어’ 단체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 전문강사 교육’이에요. 교육을 듣는 분 중에는 연극이면 연극계, 문학이면 문학계, 이렇게 이미 장르 차원에서 연대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무용에서 혼자였기에 그들이 연대 활동을 하는 모습에서 자극을 많이 받았고 좋아 보였어요. 무용에서 미투는 화두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 현상도 있었고, 무용에서도 그들처럼 연대 활동을 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페이스북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을 알음알음 모아서 페미플로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시작은 페미니즘 스터디 모임이었는데 지금은 강연처럼 공적인 활동도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윤상은 ⓒFotobee_이병곤
양효실 문화계에서 미투 운동은 잃을 게 없는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어떤 이유로 공론화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잃을 게 있는 사람이거나 아직 용기가 없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역에서 계속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성폭력과 미투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증언대에 오르지 않았거나 오르지 못한 거죠. 그렇게 가장 취약한 사람이 증언대에 올랐고, 그중에 많은 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미투 운동은 남성 권력 구조를 문제시하는 여성들이 성폭력과 성추행 등을 공론화하는 방식이었죠. 제가 미투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것은 ‘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여성의 몸은 이미 가부장제 권력 구조 안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취약해지죠. 순결이라는 단어가 그렇고, 깨끗한 몸을 지켜야 한다는 관습 안에서 이미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볼모로 사용하는 거죠. 그렇기에 성폭력의 쟁점에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정말 복잡한 층위를 생각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장르별로 구체적인 특성이 있을 거예요. 문학은 가난하게 혼자 쓰는 것이라면, 연극은 너무 공동체성이 강해서 공론화는 내부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특성이 있죠. 그렇다면 무용계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무용 전문가분들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희롱과 성폭력은 정말 오래된 여성 문제인데, 우리는 또 예술가잖아요. 예술가에게 폭력은 두 가지의 형태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피해자로 증언대에 서는 것과, 작업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폭력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폭력을 어떻게 몰아내고 폭력에 노출되었던 자신과 어떻게 예술로서 화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어요. 자기화해와 연관된 폭력이 있고, 사회적인 집단적인 연대 안에서 여성을 위한 액티비스트로서 보여줘야 할 것들이 있을 거예요. 이에 대해, 각자의 사례도 있을 것이고 교훈이나 딜레마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자면, 저는 ‘예방 교육’이라는 표현 자체가 정말 근대적이고 남성적인 언어라고 생각하거든요. 성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준다는 생각도 들고요. 성 문제는 남성과 여성, 동성애자들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이나, 미투 운동에서 집중하고 있는 건 이성애자인 남성과 여성 안에서의 권력 구도잖아요. 그리고 그걸 공론화하는 방식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확장해서 정치화하는 거죠. 우리 선생, 스승이란 단어를 여성과 남성이라는 추상성을 통해 해체하고 있어요. 사실 선생님, 스승님이라는 단어 자체가 친밀함과 위계를 함축하는 단어예요. ‘그 남자’, ‘걔’, ‘개새끼’라고 하면 어쩌면 불가능했을 폭력이 그런 단어들과 명사들 때문에 발생했단 말이죠. 결국, 예방 교육은 사적인 영역에서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시민교육인데, 딜레마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계의 복잡함이나 모순을 굉장히 멸균된 언어로 이야기하자는 거잖아요.
윤상은 어제 막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한 입장에서, 학생들이 가장 관심이 있었던 건 ‘우리가 하는 일이 일이냐 노동이냐’의 문제였어요. 지금까지 무용교육이나 무용창작환경은 공적인 영역을 가장한 사적인 영역이었던 적이 많았거든요. 저 역시 선생님들과 살을 부대끼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실제로 선생님과 굉장히 친밀해질 때가 많았고, 친밀함이 잘못 남용됐을 때도 인성교육이라는 명목하에 납득했던 경우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제 인격 자체를 지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죠. 그게 친밀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도를 하는 과정인 건지 모르는 혼란 속에서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또, 무용가는 소위 말하는 노동 시장으로 나아가기 어렵고 학교 안에서 오랫동안 교육받고 창작하다가 다시 교육자가 되는 일련의 루트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인이 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아요. 저 역시 무용계에서 오랫동안 있었기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학생들도 많이 공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노동이라는 점과 교수님과의 공연에서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어요. 비록 제가 하는 교육이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 노동에 대한 내용도 담을 수 있거든요.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이지만 기저에 있는 구조를 따라가서 원인이 무엇이었냐 생각해보니, 시민으로서 당연한 것에 대한 부분이 각성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성희롱 성폭력을 당해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가족 같은 분위기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며 그냥 넘어갈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노동이고 공적인 일이며, 일이고 동료라고 인식하면 비상식적인 일이 발생했을 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록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이라는 이름이 지닌 한계점이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다루는 내용은 단순한 차원의 성희롱과 성폭력 예방이 아니라,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를 밝히고 시민으로서 각성하도록 하는 내용인 거죠.
양효실 맞아요. 무용 예술가이기 이전에 시민의식이 먼저 형성되어야 하는데, 예술계가 선후배라든지 사제 관계 안에서 형성된 관습이잖아요. 표현방식으로 신체를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누군가에 의해 검열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 언어를 가지고 있거나 신체 주권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렇다면, 교육적 차원에서 무용계나 다른 예술계에 성 인지 감수성이나 위계 구조에 대한 감수성을 강화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는지 궁금해요. 노동으로써 예술을 인식할 수 있게끔 하는 시스템이나 장치를 만들어가고 있나요? 지금 무용 쪽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장르에서는 어떤 사례도 있는지 궁금해요.
이 산 연극계에서는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에서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CTS)’를 소개했고, 이후 ‘코리아 씨어터 스탠다드’를 만들어보자는 ‘KTS 워킹그룹’이 생겨서 활동하고 있어요. 이런 활동을 통해 가부장제라는 구조에 대한 그림을 어느 정도 함께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고요. 연극계에서 위력에 의한 상습적인 성폭력 사건들을 보면, 친밀감을 형성하거나 훈육과 교육을 받는 방식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윤택 성폭력 사건에서 이윤택이 법정에서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 중 하나가 성추행의 대부분을 발성과 연기지도라고 진술했다는 거예요. 여기서 의문이 드는 건 왜 여성 배우에게만 추행의 방식으로 지도를 하냐는 거죠. 만약 그러한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성에게도 그렇게 했어야죠. 이렇게 교육이나 훈련 과정에서 성희롱을 하고, 연기하기 위해선 섹스도 할 줄 알아야 한다거나, 성에 대해서 닫힌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면서 성적인 접촉을 요구하고, 옷을 벗어보라고 하는 사례들도 있었어요. 또한,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권력을 지닌 자에게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있어요. 작은말이나 행동에도 칭찬하거나 웃거나 동조한다는 신호를 적극적으로 보내야 하는 것을 어떤 성별의 예술인들이 감당하고 있었느냐에 대해선 치중된 결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이미 성별 안에 다르게 대우받는 구조가 있고, 그 기준 안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형성되어 있으니,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거죠.
양효실 ⓒFotobee_이병곤
양효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남학생들이 역차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놀랐던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말문이 막혔고, 그다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무력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대화는 일방향적인 고지가 아니라 타협이고 설득이니까요. 하지만, 역지사지는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망적이기도 했죠. 그들이 역차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공유와 연대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큰 여성들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누렸던 얼마 안 되는 것을 빼앗으려 하니 분노가 생겼겠죠. 기성세대가 빼앗고, 386이 빼앗고, 이제는 여성이 빼앗는다는. 왜냐면 관계를 형성하고 연대를 경험하거나 박탈을 사유하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는 내 것을 빼앗기는 느낌은 분노로만 다가올 테니까요. 결과적으로 미투 운동은 여성들의 연대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큰 성취가 있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분리나 반목은 더 커진 것 같기도 해요. ‘역차별’이라는 손쉬운 반응에는 구조나 전체, 관계를 생각할 수 없다는 태도가 들어있잖아요.

사회성을 입지 않은 표정, 무표정으로 살아가는 작가들을 간혹 보게 돼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거의 입지 않은 사람들 말이에요. 그들은 그런 상태로도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요. 저 역시 충분히 여성적이지 못하다고 비난받았던 기억과 충분히 여성스러웠기에 스스로 경멸감을 가졌던 기억도 있어요.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여성성과 연관하여 굉장히 복잡한 입장에 위치해 있는 거죠. 그리고, 예술가와 신체의 관점에서 정치적인 행동주의자가 되는 것과 예술가가 되는 것을 별개로 둘 수 있는지와, 그 둘을 연결하고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지도 고민이에요. 현재는 문제를 다루는 아주 다양한 방식과 프레임들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서경선 무용하는 친구 중에, 위계폭력이든 성폭력이든 폭력을 경험했던 친구들이 친한 친구들한테 이야기하면서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곤 해요. 그리고는 계속 그들과 작업하는 친구가 있고, 자신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더라도 공론화하진 않는 친구도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극복해왔으며, 문제를 인식하고 나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가늠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소수자와 여성, 낮은 쪽에 있는 분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남성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은 다 소수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저 역시 소수자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도 나이가 있기에 언제든 가해자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우려하고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 있는 거죠.
양효실 성폭력은 대체로 여성들의 서사로 가시화되죠. 문화계에서 미투는 선후배, 혹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벌어진 건데, 남성인 선생님과 선배에게는 여성들이 이야기하는 성폭력을 들을 ‘귀’가 없어요.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나 친밀함, 가르침, 수업의 일환이었다고 말하잖아요. 그렇다면, 여성들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귀가 있는가 생각해보면 반신반의입니다. 수업시간이나 비평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경험을 듣는 선생님은 주로 남성 선생님이거나 명예 남성이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술자리도 아닌 수업시간에도 들어야 하냐며 불편해하거나 무시하곤 해요. 친구들도 마찬가지예요. 또 그런 우울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핀잔을 주기도 하죠. 일단 지금의 세대는 경쟁을 뚫고 성장한 세대라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친구의 아픈 사정을 감싸 안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예쁘고 행복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는 있지만 어둡고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는 없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들어주는 척하다가 나중에는 “나한테 어쩌라고”,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거리를 드러내죠. 실제로,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소재나 주제가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이에요. 그런데 그런 경험이나 주제는 다른 여성 작가들도 싫어해요. 가장 내밀한 친밀한 폭력들을 공유하고 연대할 내부가 부재한 거죠. 폭력의 경험을 함께 이야기할 무대와 경청해줄 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함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게 미투 운동이겠죠.

이렇게 무시당하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론장이 마련되는 건 중요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떤 프레임에서 하는가도 중요해요. 일단 기존의 프레임은 피해자와 가해자 중심으로 돌아가요. 여기서, 피해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법은 내가 얼마나 피해받았으며, 얼마나 약했기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증명해야 승리하잖아요. 그런 관점에서는 저는 법정이 아닌 예술계에서 ‘증언대’에 여성을 세우는 방식은 달라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남성들의 언어인 법의 증언대에 서서 성공한 소수의 사례와 우리의 무서움을 보여준 사례 중에 어떤 것을 기록할 것인지는 행동주의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윤상은 말씀을 들으면서 온갖 생각이 들었는데, 저 역시 안무작업을 하면서도 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진부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남성 작가의 경우, 자신의 서사로 만든 작품이 많잖아요.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도 있고요. 그래서 저 도 가장 사적인 부분을 정치적으로 꺼내자는 취지에서 안무작업에서 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업도 발레 전공이었던 제가 어떻게 발레를 해 왔으며 어떤 갈등을 가져왔는지 풀어내는 작업이에요. 이렇게 제 이야기를 하니까 작업하는 것도 편해지고, 일단 질러보자는 생각도 들었어요. 지금까지 한국 무용계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서사를 전면에 드러내는 작업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 안무가들이 말하기 시작한다면 그런 작품들에 대해 어떤 논쟁과 논의가 전개될지 기대돼요.

그리고 선생님이 앞서 언급하셨던 남성과의 연대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어제 강의를 다녀왔는데, 남학생들이 정말 집중해서 듣는 거예요. 왜 그런가 싶었더니 무용계 대표적인 성폭력 피해 사례 중 남성 피해자의 사례가 있어서가 아닐까 추측해봤어요. 남성 학생들은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나 봐요.
양효실 미투 이후의 페미니즘에서 길거리에서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 여혐이라고 이야기를 할 때, 또 거기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죠. 지금 말씀하신 남성 피해자들처럼.
윤상은 하지만 성폭력 사건에서는 압도적으로 여성 피해자가 많기에, 굳이 남성 피해자의 사례를 들고 와서 이런 사례도 있다고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이 산 여성들이 주로 당하는 폭력을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당했다는 것에서 정신적인 피해가 가중된다고 하기도 해요. 상상하지 못했던 피해인 거죠. 나는 성폭력 피해를 당할 2등 시민이 아닌데 당하였다는 것. 사실 이건 여성 혐오의 일부이죠. 여성 피해자들도 여성 혐오가 내재하고 있기에 수치심과 굴욕감으로만 피해를 설명하려고 하거나, 피해와 거리를 두려고 할 수 있어요. 누구나 피해와 가해에 대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통계적으로 가해자 중 남성의 비율이 높고 남성이 가해자로 양성될 수 있는 교육을 사회 안에서 받고 있는데도 그런 부분을 돌아보기보다는 여성 피해자를 공격하게 되는 거죠. 여성 피해만 말하지 말아라, 남성도 피해를 보는데 왜 여성만 피해를 본다고 주장하느냐고 말하죠.
양효실 그러면 피해자로서 남성과 여성의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산 그런 경우에는 성폭력을 뒷받침하는 공고한 문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남성 피해자의 피해를 이용하는 거죠. 그리고 이건 피해를 겪은 당사자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 산 ⓒFotobee_이병곤
양효실 저는 성폭력과 폭력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주로 여성들에 대해서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쓸 때, 왜 성폭력이 다른 폭력과 균질한 방식으로 느껴지지 않고, 나의 몸을 짓밟고 더럽힌 특별한 폭력이 되냐는 거죠. 결국은 폭력 중 하나인데, 성폭력이라고 각인하는 순간 여성 혐오라는 게 들러붙곤 하잖아요. 여성들이 성폭력에서 성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할 필요도 있어요.
이 산 ‘손상된 물건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어요. 여성들에게 성폭력은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왜곡된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나 싶어요. 많은 문학작품에서 다수의 남성 인물들이 시련을 겪고 마을이나 공동체로 돌아오듯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 인물들은 미치거나 자살한다고 묘사돼요. 아까 성폭력 피해 서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 서사가 통합된 상태로 말해지기가 어려운 이유는 사람들이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남성 인물이 영화에서 테러범과 맞서서 비행기의 승객을 구하기 위해 두들겨 맞는 건 영웅 서사가 가능하지만, 여성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감금이 되었다는 건 영웅 서사가 되기가 어렵죠. 사람들은 이걸 회복 불가능한 피해의 서사로 볼 거예요.
양효실 여성의 몸에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전쟁일 겁니다. 전쟁 중에 혹은 전쟁이 끝난 뒤 여성은 강간을 통해 더럽혀지면서 민족이나 국가 간 남성들의 싸움에 볼모가 되죠. 배타적으로 남성을 시민으로 가정하는 국가 자본주의는 여성을 교환 가능한 물건으로 치부해요. 손상이 가해지고 흠이 있다면 ‘창녀’로 분류하고, 순수한 씨앗을 담을 수 있는 모성과 더러운 여자라는 이분법 안에서 살도록 강요당하죠. 그렇기에 집 바깥의 여성들은 자기혐오를 일상으로 살아냅니다. 힘과 언어를 가진 SNS에서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영화계와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성폭력의 문제를 페미니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성폭력은 여성들을 규합할 수 있는 아젠다 중에 가장 강한 거잖아요. 분노 정도와 경험 여부, 집단성이라는 점에서 가장 쪽수를 채울 수 있는 방식이 성폭력과 연관된 모임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모임의 내부에서도 찢어지고 살점이 난무하고 오열하는 현장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는 승리의 서사가 되기 힘들어요. 그러다가 그녀들이 현장에서 사라지거나 자기 의심에 빠지게 되었다면 이 현장은 누가 기록하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거든요. 저도 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봤지만, 그들이 제 이야기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 기분이 나빠져요. 왜냐면 제가 원한 건 그저 잘 들어주는 것이었거든요. 이렇게 잘 들어주는 귀를 갖는 것이 중요해요. 모든 여성은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억압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최대한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결론이나 답 없이 죽을힘을 다해서 듣는 실천 속에서 그녀들이 스스로 알게 되거나 선택하게 되는 진실이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오직 그 예술가 한 사람만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 그녀의 작업을 통해서만 구현될 겁니다.
이 산 그래서 저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기록이 되어주는 모임이 ‘오롯’이나 ‘페미플로어’, ‘약속하는 언니들’이라고 생각해요.
서경선 무용이라는 것은 몸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예술이기에, 말의 언어가 없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해요. 연극의 경우에는 작년부터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고, 모임도 많고, 공론장도 생기고 연대를 하는데, 무용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올해 오롯에서 성명서를 냈거든요. 그 성명서를 읽고 놀랐으며 감동을 받았어요. 저는 이게 시작점이라고 생각해요. 그전까지, 왜 무용인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남성 평론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평론가인 이지현 선생님만 초반에 이와 관련된 글을 쓰시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고요. 저는 제가 무용계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건 한 번도 연대의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각자도생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더라고요. 그렇지만, 피해자의 입장이 공감되고 피해자의 옆에 서고 싶었기에 SNS에 글을 하나 쓰게 됐어요. 그러자 ‘약속하는 언니들’이라는 모임도 생기고, 이렇게 <춤:in>에서도 저에게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이렇게 저는 피해자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직접 찾아서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페미플로우’라는 단체가 생기고 토론의 장과 세미나가 생기는 걸 보며, 현시점이 무용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작점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무용계가 침묵했던 이유는 무용인들이 몸의 언어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를 발화하는 데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되었어요. 이제는 말의 언어를 찾고, 기록하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 거죠.
윤상은 말의 언어를 이야기하시니까, 무용인으로 살면서 받아온 수만 가지 편견, 무용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떠오르네요.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 교육을 받을 때, 한 선생님으로부터 ‘무용하는 사람일수록 개념에 대한 설명을 더 많이 해줘라’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약간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무용인들은 몸을 사용하는 사람이니까 개념의 부분이 약하다는 편견이 있는 거죠. 그래서 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고 시민으로서 사회와 합의된 언어를 갖추는 게 더욱 중요한 거죠. ‘무슨 말인지 알지?’ 이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소통이 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해요.
이 산 저는 이번에 오롯에서 쓰신 성명서와 무용인 방청 연대 활동을 보며 느낀 게 있어요. 아무래도 연극은 텍스트를 많이 쓰잖아요. 텍스트는 여러 번 볼 수 있기에 쉽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데, 저도 마임을 해보니 몸으로 하는 것은 확실히 쉽게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하지만 되돌려 볼 수 있지 않기에, 그보다 확실해지기 위해선 계속 말을 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움직임이 축적되면서 이 시퀀스는 이것이라고 명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런데 오롯의 활동을 보고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성명서가 표현되었을 때, 그 언어에 굉장한 시간이 축적되어있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말은 한 번 나와도 금방 고정되는데, 이것과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찾으시는구나 생각했어요.
노트 ⓒFotobee_이병곤
양효실 무용인들은 연대에 대한 경험이 있나요?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 지금까지 계속 이번이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환상과 욕망으로서의 연대는 늘 당연한 것처럼 있지만 그 집단 안에서도 문제들이 발생하잖아요.
이 산 정말로 무용계에서는 성폭력 이슈로 여성들이 연대한다는 것이 처음이라고 느끼시나요?
서경선 저는 끝까지 문제 제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약속하는 언니들’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하게 되었지만, 이 단체 역시 언제든지 해산할 수 있어요. 실제로 해당 단체가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도 굉장히 경계하는 지점이며, 무리가 생기고 추종자가 많이 생기면 권력이 생기게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끊임없이 이런 이야기를 모여서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거죠. 만약 해산되더라도 다른 이슈가 생기면 또 다른 형태의 모임이 생겨나겠죠. 여하튼 모든 이슈는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럴 때마다 저는 이런 모임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 역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 때문에 또 다른 무엇을 만들고자 할 수도 있고요. 지금은 그런 것 같아요.
윤상은 무용계 차원에서의 연대가 처음 가시화된 것은 2~3년 전, 블랙리스트 파문 때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이 출범했을 때인 것 같아요. 당시에 ‘무용인’이라는 단어를 처음 걸고 나온 단체라서 저도 궁금한 마음에 오롯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그 세미나 자리에서 ‘도대체 무용인이 누구냐’는 질문이 화두가 되었어요. 각자 작업의 방향성이 너무 다르다 보니 밖에서는 자신을 무용인이라고 하는데, 스스로는 무용인이 아닌 것 같다며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분은 무용을 하면 할수록 무용과 멀어지는 것 같다는 분도 있었어요. 특히 저처럼 조기 교육을 받지 않고 나중에 무용계에 진입하신 분들은 자신이 무용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용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연대하기에는 혼란이 많았던 거죠. 그런데 이번 ㄹ사건 방청연대 모임에서의 ‘무용인’은 다른 정체성의 연대였다고 생각해요. 방청연대 자리에서 한 분이 자신이 작업 차원에서는 페미니즘, 젠더 이슈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사건은 젠더 폭력, ‘범죄’의 영역이었고 다른 차원의 행동임을 느꼈다고 하셨는데 공감되더라고요. 지금은 우리가 어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냐를 뛰어넘어서 성폭력 범죄를 겪은 무용학도였던 피해자를 연대하는 마음으로 모인 무용인 연대인 거죠.
양효실 오롯에서 발표한 성명서처럼 소수의 격발에 근거하는 선언문은 결국 내부자를 위한 거잖아요. 그런 움직임들의 장기적인 연대의 기록을 한국에서 보고 싶어요. 사실, 무용에서는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몸의 언어는 굉장히 신성하고 낭만화된 영역이잖아요. 그런데도 시작되었다는 게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불가능해 보였던 영역에서 이루어진 거죠.
윤상은 페미플로어는 4명이고, 약속하는 언니들은 3명이고, 오롯의 멤버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무용계의 인구가 상당히 적어요. 3~4명 모인 것도 상당히 많이 모인 거라고 해야 해요. 그런데 무용계의 성희롱과 성폭력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에 학교를 공략해야 해요. 학교가 아닌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폭력의 위험에서 벗어난 면이 있어요. 연대하더라도 학교와 연계하여 연대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왼쪽부터 이산, 서경선 ⓒFotobee_이병곤
김연임 그렇다면, 무용계 안에서는 어떤 상황이나 지점에서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가 궁금해요.
이 산 이윤택이 법정에서 그의 성추행 행위에 대해 ‘발성 연습’을 위한 것이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어요. 실제로 지도를 빙자한 폭력은 굉장히 많죠. 자세 수정을 한다고 해서 신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고, 몸의 중요 부분에 손을 대는 등 지도하에 무한대로 접근이 허락되어 있어요. 연극이나 영화를 하시는 분 중에서도 오디션을 보는 경우, ‘옷을 좀 벗어보라’라고 했을 때, 순간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양효실 그런데 거기에도 벗으라면 벗겠다고 하는 분이 있을 수 있고, 거기서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성폭력 예방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적인 남성 시민성, 동일성을 반복하는 거잖아요. 각자가 자신이 겪은 일을 가지고 이 세계에 이야기하는 방식 또는 자신과 화해하는 방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예술인데, 예방 교육은 정답 같은 메뉴얼이 있잖아요. 미투 운동 이후에 약자들이 느끼는 혼란도 있을 거예요. 무용계의 얼마 안 되는 기금들, 선배와 선생님의 줄을 잘 타야 공연을 할 수 있는 게 현실이기에 찐득찐득한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교육 제도 안에 들어가서 시스템을 바꾸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죠. 실제로 저는 여성들이 제도 안으로 들어가서 여성들에게 기금을 많이 주어야 하고, 카르텔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공공기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결국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상상력이라고 하는 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라, 선배들과 언니들이 해놨던 것에 1을 더하는 거니까 지금 격발하여 움직이고 있는 팀들에 기대하게 되는 바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 팀들도 평범한 사람들이고 이분들도 자기 서사를 얼마나 꺼내야 할지 계산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여성 전체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여성 작가도 있고, 대놓고 이건 폭력이며 우리의 이야기인데 부끄럽지 않냐고 이야기하는 작가도 있고요. 스펙트럼이 정말 다양하거든요.
이 산 저는 그런 언어들에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이야기가 오롯이 읽히면 좋겠는데 사회에서 여성 혐오가 너무 만연하니까 이 역시 혐오의 대상이 될까 봐, 여성 서사로 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 그것을 번역 없이 들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해요.
윤상은 예전에 서경선 선생님이 문화비축기지에서 집 시리즈를 할 때 인터뷰를 하러 간 적이 있어요. 해당 작업에 참여했던 분들은 모두 자녀가 있는 안무가들이었는데, 그 그룹을 엄마 공동체 또는 자녀가 있는 안무가들의 공동체라고 말하기가 싫은 거예요. 실제로 그걸 경계하시는 것 같기도 했고요. 물론 그렇게 말하면 기자 입장에는 주제가 확실하게 잡히니까 좋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가 싫었던 경험이 떠올랐어요. 그렇게 통칭을 해버리면 해석의 공간이 좁아지잖아요. 그래서 번역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초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무용계에서 어떤 부분에 폭력의 사례가 가장 많냐고 하면 폭언, 성희롱, 신체에 대한 접촉이 가장 먼저 이야기될 거예요. 특히 저는 살 빼는 것과 정형적인 미를 갖추는 것에 대한 폭언이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최근에 얀 파브르(Jan Fabre)라는 벨기에 안무가의 미투가 터져서 기사가 나왔던 적이 있어요. 20명의 전 단원들이 고발한 사건이었는데, ‘노 섹스 노 솔로(No Sex No Solo)’라는 슬로건으로 운동을 전개했어요. 자신과 자지 않으면 솔로 파트를 주지 않았다는 거죠. 또 무대 리허설을 할 때, 너무 뚱뚱하다며 무용수가 울 때까지 폭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얀 파브르 사건이 충격을 줬던 건, 그 안무가가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내한공연을 한 유명한 안무가였고, 벨기에 컨템포러리 예술의 프론티어이자 거장 안무가라고 불렸기 때문이에요. 그의 공연을 보면서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무용수들이 그런 식으로 착취를 당하면서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거죠. 저는 그 사건을 통해 좋은 작품에 대한 기준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그렇게 무용수들이 착취당하고 폭력을 당하면서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 과연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긴 거죠.
이 산 그가 그런 발언을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화가 나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폭력을 ‘선생님이 너 잘하라고 그러는 거’라고 포장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런 게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추행이나 강간은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데, 조금이라도 저항하거나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고 할 때 정말 헷갈릴 것 같거든요.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쉽게 인격을 침해하고, 몇 키로냐고 물어보고, 정말 지쳐서 토할 것 같은 상태로 움직였는데도 한번 더하라고 하는 게 가능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지금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가슴을 만진다고 바로 저항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저는 눈에 보이게 일어나는 폭언이나 성희롱들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3자의 포장과 묵인이 더 심각한 폭력을 문제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건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서경선 저는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선후배 간 신고식이 있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예중이나 예고를 졸업한 사람들은 이런 신고식이 어마어마했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때 이런 관례가 이해되지 않았어요. 대학교수님들과 학교 선생님들이 알고는 있지만 묵인하고 있는 상황 또한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러한 경험이 몸에 남아 커서 자신도 또한 똑같이 위계나 권력에 대해 순응하고 같은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거잖아요.

무용은 무용실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어쩌면 친밀함을 위장하고 복종과 순응을 쉽게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실에서 선생님은 쉽게 학생들의 몸을 만질 수 있고 가르침의 범위를 쉽게 남용할 수 있습니다. 학교라는 공간은 선배가 후배에게 쉽게 복종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안무자와 무용수 또한 안무자의 시선과 역량에 쉽게 휘둘려질 수 있습니다. 심사위원과 지원자 또한 권력의 차이에 따른 불균형이 생깁니다. 어떠한 종류의 폭력이든 내가 무용실을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보호받고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전하지 못한 환경과 괴롭힘을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 그리고 예술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CTS’에서는 문제해결경로(해결을 위한 3단계 구조, 소통을 위한 연락처 공유와 기록 등)와 비공식대리인(비밀보장 연락담당 보고채널)이 있습니다. 부록으로 문제해결 경로 샘플, 오디션 공개의무양식 샘플, 계약 샘플, 첫 연습을 위한 언어 샘플 등이 있고요.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또 조금만 고개를 돌리시면 학교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많은 예술가들이 계세요. 지역에서도 활발합니다. 이렇게 규모는 작지만 작은 선례들이 존재합니다. 넓게 퍼진 그물망에서 지지의 기반들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서경선 ⓒFotobee_이병곤
양효실 그런데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기생하고 동조하며 살아온 여자들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건 그들의 정말 오래된 습관이고,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라는 메커니즘과 정당화 논리가 내면화되어 있을 겁니다. 남성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고 분리된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가는 노선도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지리산이나 제주도 이런 곳에 많은 여성이 공동체로 들어가서 작업을 하잖아요. 좋은 것 같아요. 물론 그들도 그 동네의 남성 문화와 싸우느라 힘들겠죠. 그런데 그 남성들의 떡고물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냉소적이면서 교활하면서 복잡한 여성들도 있거든요. 가부장제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의 생존 방식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걸 평가하는 것은 어렵고 불가능한 일일 듯해요. 충분히 여성성을 입은 여성과 부족한 여성과 여성성을 도외시하는 여성 등등을 모두 하나의 기준으로, 억압과 분노와 저항이라는 잣대로 통일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윤상은 사실 무용계에는 이미 사회의 미적 기준에 부합한 사람들이 모여있을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의식의 변화를 도모하기가 힘든 거예요. 제가 나온 발레 학과에는 정말 예쁜 여성들이 많았어요. 실제로 제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글을 SNS에 자주 올리니까, 과 동기 중 한 명이 저에게 자신은 지금까지 여성으로서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이 이해가 되는 게, 그녀는 이 분야와 사회의 미적 기준에 너무나도 부합하므로 지금까지 그걸 이용하며 살아왔을 거란 말이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신이 성적 대상화가 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이 산 그런데 자신이 성적 대상화가 된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나요? 주변에서 보시면 어떠세요? 사실 누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본인보다 젊고 아름다운 무용수들이 나올 텐데. 알 수밖에 없지 않나요.
윤상은 그러면 이제 경쟁 구도로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프레임으로 가는 거예요.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이해하는 거죠. 지금까지 살아온 형태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러니까 연대가 힘든 거죠. 계속해서 말하지만, 학교를 공략하여 강력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요.
서경선 지금까지 교육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는 교육이 훌륭한 도구인 것 같기도 해요. 저 같은 경우는 교육을 통해서 보다는 제가 하는 활동들을 통해서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가령 작품의 주제를 통해서나, 필요한 모임들을 만들자고 제안하거나 일반적인 공연의 형태나 틀을 바꾸는 실험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고해진 어떤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을 선호했던 것 같네요. 나이듦도 그런 맥락에서 탐구 중인데요.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보다 자신이 좀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속으로 품고 있거든요. 어찌 보면 그것도 나이든 사람에 대한 폭력일 수 있어요.
양효실 성적 대상화가 요즘 들어 큰 쟁점인 듯한 데, 그렇다면 과연 능동적 주체는 긍정적인가를 질문해야 해요. 주체는 대상이 없으면,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담지할 목적어 즉 대상이 없으면 주체는 아무것도 아니죠. 대상은 당연히 주어의 자리로 들어가서 스스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려고 할 거고요.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여성 주체를 욕망하는 것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아요. 대상화에 어떤 긍정적인 계기가 있을 거라고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습니다. 근대적 주체, 즉 남성 주체가 해낸 것이 대상들에게 늘 폭력으로 경험되었음에 유념한다면 어쩌면 계속 대상의 자리에 있던 약자들이 이제 그 대상의 자리에 어떤 식으로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상상하는 임무도 사유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상화가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논리는 주체화가 꼭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과 함께 생각할 주제이고 쟁점이고 현실입니다.

미투 이후에도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요. 법정에 가서 싸우는 언니들도 필요하고, 그걸 예술로서 풀어내는 언니도 필요하죠. 그리고 무용 분야에서는 동아시아 여성의 몸이라는 게 과연 발레에 적절한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나와야 하며, ‘예쁜’ 언니들이 교활한 방식으로 남성들에게 폭력을 가했던 이야기도 발굴해야 해요. 여성이라는 것을 절대시하는 것보다는 여성에 대한 다양한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내 안에 있는 여성의 혐오를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거죠. 그리고 저도 미투 운동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남성들과 더 친했고 여성임을 혐오했고, 그래서 지식인이라는 젠더 중립적 ‘직업’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며 내 안에 있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내 안에 새겨진 여성의 일그러진 형상만큼이나 각자 가지고 있는 여성상을 미워하지 않고 바라보도록 하는 게 교육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윤상은 제가 아까 폭언 이야기를 했던 건, 여성 배우나 무용수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중되는 외적 기준이 문제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에요. 연출가나 안무가가 자신의 기준에 맞춘 무용수를 원하고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몸에 대한 평가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단순히 무용수의 표현에 대한 것이 아니고 외적인 것에 대한 게 과도하게 많다는 거죠. 무용은 처음부터 창작자로 길러지는 게 아니고 무용수라는 기능적인 테크닉을 배우는 사람으로 시작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무용교육을 받을 때, 무대에 섰을 때 예쁘게 라인이 나오는 것과 테크닉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어요. 실제로 클래식 무용교육은 이미 있는 레퍼토리를 비디오 보면서 따라 하는 게 기본이잖아요. 이렇게 우리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표현의 완성도를 갖추는 것보다 이미 누군가가 한 것들을 계속하다 보니까, 자신의 신체 주권에 대한 인식보다는 자신의 신체가 타인에게 양도되어있는 것 같은 환경에 놓여서 취약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산, 서경선, 양효실, 윤상은 ⓒFotobee_이병곤
양효실 그런데 페미니즘 연극처럼 페미니즘 무용이 있나요? 아니면 이게 기폭제가 되어 나오게 될까요?
윤상은 아직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 페미니즘 연극제를 보고 너무 좋았어요. 만약 무용에서 페미니즘 무용제가 있으면 되게 이상할 것 같지 않아요? 아무도 안 올 것 같죠.
일동 올 거 같은데요!
서경선 저는 여성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난 이후부터 습관처럼 성비를 항상 관찰해요. 예를 들어 국립무용단 레퍼토리 ‘쓰리 볼레로’나 ‘쓰리 스트라빈스키’에서 안무자를 내세운 공연을 할 때 남자 안무자만 쭉 나오면 남자 안무자만 다 배치되었구나 하는 식으로요. 이런 식으로 성비를 계속 살펴보는데, 전강희 선생님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주최한 자리에 참석하신 후 공유하신 글에서 영국의 사례에 문화예술 기관이랑 민간예술 위원회가 협력해서 자료를 만드는 것에 대한 안내가 있더라고요. 그 글에서 영국에서는 조직원 성비랑 직급 성비, 고위직 성비, 고용 실태 성비, 임금 격차, 지원금 신청 라인, 선정자 성비들을 조사하여 발표하는 것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조사를 누가 할까? 라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해외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양효실 그런데 다른 진영에서 보자면, 여성이 많아져도 결국엔 여성들 안에서도 계급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되면 또 비정규직과 하층 계급 출신의 사람들은 젠더 측면에서는 평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계급적으로는 억압되죠. 그래서 정책과 연관하여 평등을 끌고 갈 사람이 있어야 하고, 페미니즘 무용제를 시작하고 개방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지금은 자율적 예술이 아니라 인류학이 압도하고 있고, 인류학이나 민족지학이라는 단어를 쓰고, 남성 중심의 예술 개념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깨지면서 여성이 생각하는 여성의 몸이 엄청나게 다르잖아요. 저는 50대에 갱년기를 지내면서 이렇게 주변에 여성에게 특수한 암 환자가 많은데도 왜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못 들었지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이렇게 여자들끼리 모여서 상상력이건 현실이건 경험을 공유하면서 연대할 것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여성 무용과 여성주의 무용이 필요한 거죠. 지금까지의 무용은 빼빼 마른 몸을 선호하며 여성에게 억압을 가해왔는데, 여성이 직접 여성을 위한 무용이라는 만들면서 마주하는 쾌락은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때의 경험으로 30년을 버틸 수도 있을 거예요. 이렇게 조그마한 움직임이 출발점이 되어서 외국과 연대하는 등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나비효과가 벌어져요. 이렇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깃발을 꽂으며’ 희망을 보는 거죠. 오롯이든 페미플로어든 약속하는 언니들이든 어쨌든 시작하셨잖아요.
윤상은 ‘월간 시선’이라는 연극 비평지에서 이번 페미니즘 연극제의 모든 작품에 대한 비평을 실었더라고요. 상당히 혹독한 비평이었는데, 저는 그게 좋더라고요. 작업을 단지 그들만의 이야기로, 지금의 이슈를 이야기했다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이것이 얼마나 관객에게 복잡하게 사고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나아갔느냐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랐어요. 관객 입장에서 느꼈던 한계점도 정확히 짚어주는 비평이었거든요. 페미니즘이라는 시의성이 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작품으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써 엄격하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무용에서도 안무가들이 작품을 할 때, 단지 행동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지 않고 누구와 소통하고 어떠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양효실 넷플릭스에서 《우산혁명》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최근 홍콩의 소환법이 철회됐잖아요. 해당 사건은 저에게 정말 놀라운 사건이었거든요.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조슈아 웡’이라고, 열네 살에 학내 문제로부터 저항을 시작한 소년의 이야기에요. 개인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페이스북이었어요. 조슈아 웡도 페이스북으로 지지자를 규합하고, 그 지지자들이 마침내 거리로 나오거든요. 그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예요. 우발적인 시작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과정이 SNS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게 정말 대단했어요. 마찬가지로 미투도 SNS에 의해 촉발되었던 운동이죠. 이렇게 막상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언가가 누군가가 매개자가 되어 시작되더라고요. 그게 어느 순간 점화되느냐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고 희망인 거예요. 그것이 결국 광장을 불러일으키는 점화되는 어떠한 순간이 있는 거죠. 페미플로어와 약속하는 언니들을 시작한 윤상은 씨와 서경선 씨 같은 분들이 이 자리를 가능케 한 분인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연대하실 예정이세요?
서경선 ‘약속하는 언니들’은 9월 23일에 ‘무용 창작 환경 개선을 위한 실행 페이퍼(자치규약) 만들기’ 워크숍을 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타이틀은 <눈물 나는 대물림을 멈추기 위한 몸의 약속 5, 6, 7, 8!>이에요. 자신의 무용실 환경이 어떠했는지 돌아보고 자신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정의할 수 있으며 안전한 창작 환경에 대해 요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해요. 결국, 안전한 환경이 형성되어야만 모험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현재 무용계는 안전한 환경이라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젠더와 권력 구조를 봤을 때 어떤 것도 안전하지 않으니까 젠더, 위계 권력, 성 인지 감수성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장들이 필요한 거죠.
윤상은 저희 단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왜냐면 최근 공개 강의 하나를 진행하고 기진맥진했거든요. 그래도 계속하여 어떤 이슈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내팽겨치는 것보다는 계속 따라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또 약속하는 언니들이 준비하고 있는 몸의 규약 페이퍼를 만드는 워크숍과 비슷한 건데, 제가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행동 강령’ 사업에 무용분야 연구원으로 있거든요. 만약 함께 약속문을 만들고 그 강령이 공신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함께 진행해보면 어떨지 제안 드리고 싶어요.
서경선 저 역시 처음에는 행동 강령으로 무용계를 대변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나중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도 힘든 상태이니까, 행동 강령을 만드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일단 지금은 공감하고 동조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죠. 그래서 이런 성 인지 감수성을 지니거나 지니고 싶은 예비 무용가나 기존 작업자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하고, 내게 적용할 수 있는 것부터 만들어보고, 찾아보면 좋겠어요.
김연임 그런데 한국의 무용계에는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대학교수님이 콩쿠르 심사위원이자, 유명 안무가이자, 기금 평가위원인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학생들이 무용수로 무대에 서는 건 결국 선생님의 공연인 경우가 많고, 교수님과 선후배의 지원을 받으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홀로 독립하지 못하고 눈 밖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특히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거나 클래식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여러 명이 함께 공연하게 되는 한국무용이나 발레를 공부하는 학생은 더욱 그런 두려움을 지닐 수밖에 없겠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자각하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몸의 결정권을 가질 수 있을까, 부당한 폭력에 대해 용감하게 발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해요.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을 직면했을 때, “싫어요”, “하지 마세요”라고 거부하는 행동과 말을 하는 것조차 반복적인 몸의 학습이 필요할 것도 같아요.
윤상은 네, 그런 기본적인 예방 교육이 필요해요. 제가 이번에 강원대 무용과 강연을 나가게 된 건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지원하는 ‘예술인 권익 보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을 나가게 된 것인데요. 해당 대학교의 한 무용과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개인의 의지로 초대하신 거였어요. 그런 교수님이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연임 그렇다면 의무적으로 예술인 복지 교육이나 권익 교육을 하는 제도적 시스템도 필요하고 만들어져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볼 기회가 영 없을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 ‘경험’이라는 걸 만들어야 하는 상황 같네요. 오랜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폭풍이 오는데 조심히 가세요.
<성희롱 성폭력 예방을 위해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영화산업진흥위원회 국고 지원 사업에 지원할 경우, ‘성희롱 성폭력 예방 등에 관한 서약서’ 필수 제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예술인복지재단 국고 지원 선정 시,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 필수 이수
  • 표준계약서 내 성희롱, 성폭력 금지 및 책임 조항 권고
  • 예술인복지재단 ‘문화예술계 찾아가는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 서비스 시행
<성폭력 피해자 지원 서비스 및 신고 기관>
  • 여성긴급전화 1366
    • 성폭력피해상담은 여성긴급전화 1366에서 24시간 가능하고, 평일에는 전국 성폭력상담소에서 가능합니다. 1366에 연락하여 거주지에서 가까운 성폭력상담소나 피해 직후 증거채취 및 진료와 수사가 가능한 원스톱지원센터를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성폭력상담소에서는 여성가족부의 무료법률구조와 성폭력 피해자 치료비 지원제도를 활용한 치료와 법적 진행 과정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성폭력 피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자료나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습니다.
  • 전국 해바라기센터 1899-3075
    •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피해자 및 그 가족에 대하여 상담, 의료, 법률, 수사, 심리치료 지원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
  • 한국예술인복지재단 02-3668-0266
    • 예술계 내 성폭력 발생 시 신고, 의료, 법률, 심리상담 지원
      * 상담시간: 평일 10시~17시 (점심시간 12시~1시)
  • 온라인 상담지원 withu@kawf.kr
    • 예술인경력정보시스템 내 비공개 게시판을 통핸 피해사실 접수
      * 7일 이내 회신을 통해 필요한 지원 안내 및 연계
  • 방문 상담 지원
    • 재단 내 마련된 상담실에서 면접상담원과 직접 상담 진행
      * 예약제로 진행

서경선_안무가 몸 탐구모임 ‘툿 네트워크’, 극장을 벗어난 공연프로젝트 <집시리즈>, 지지와 연대를 위한‘약속하는 언니들’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늑대여 오라!>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는 《몸이 생각》 독립출판물을 발간했다.

양효실_미학자 서울대 강사.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등을 번역했고 <불구의 삶 사랑의 말>,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등의 책을 저술했고 미술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윤상은_안무가, 페미플로어 멤버 안무가로서 창작을 하는 동시에 창작환경에도 관심이 많다. 여성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서 고양시 청년 여성주의 공동체 <고양페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 무용하는 여성주의 스터디 모임 <페미플로어(Femifloor)>를 결성하였다. 2019년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 전문강사 프로그램을 이수하여 무용계 특수성을 반영한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고있다.

이 산_마임배우,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을 하고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를 기획하다가 플레이백씨어터로 연극을 시작했다. 지금은 마임배우로 활동하면서 솔로마임옴니버스 <구름텃밭> <스턴트맘>을 공연한다. 작년부터 다시 일주일에 이틀씩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전화로 성폭력피해상담을 하고 있다

웹진 <춤:in> 편집부 몸 탐구모임 ‘툿 네트워크’, 극장을 벗어난 공연프로젝트 <집시리즈>, 지지와 연대를 위한‘약속하는 언니들’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늑대여 오라!>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는 《몸이 생각》 독립출판물을 발간했다.
양효실_미학자 서울대 강사.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등을 번역했고 <불구의 삶 사랑의 말>,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등의 책을 저술했고 미술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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