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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9.16 조회 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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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소멸(선술집)>에서의 해프닝

김수정_큐레이터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종이에 c-print, edition 2/10, 60 x 90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지금은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선술집’은 나무 탁자에서 간단히 술을 마시는 주점으로, 1960-70년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오늘날의 카페와 같은 장소였다. 1980년대에 출생한 나로서는 수많은 선술집이 그 시대 청년들의 작은 사회, 혹은 아지트로 기능하며 매일 일어나고 없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몸짓들을 견뎌 왔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선술집에 대해 생각할 때면 꽤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1973년에 갓 30세가 된 청년 작가 이강소가 발표한 <소멸(선술집)>이라는 작품이자 동명의 개인전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 <소멸(선술집)>은 이강소가 본인이 자주 가던 선술집의 나무 탁자와 의자를 전부 구입하여 당시 서울에서 유일하게 현대미술을 다루던 갤러리인 명동화랑에 그대로 가져온 초기 해프닝 작업이다. 해프닝이란 일상적인 사물을 생경한 구도 안에서 재인식하게 하거나 감상자가 뜻에 따라 예술작품에 개입할 수 있는 판이 주어지는 사건을 말하는데, 손님들의 흔적으로 성한 곳 없이 낡은 선술집의 나무 탁자에서 막걸리 한잔하며 나누는 대화가 작품 자체였다. 짐작해보건대 추상의 물결로 모두가 한창 서쪽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시기에 이렇게 힘을 쭉 뺀 해프닝 형식에 해방감을 느낀 참여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선술집의 나무탁자들이 성하지 않았다는 앞 문장의 서술은 꾸며낸 말이 아니다. 실제로 이강소가 가져온 나무 탁자와 의자에는 담배를 비벼 끈 셀 수 없이 많은 흔적과 푹 패인 구멍, 냄비 열로 탄 자국들이 가득했다. 그 흔적들이 새겨지던 날들에 들렸을 법한 왁자지껄한 대화와 소음은 사라지고 없지만 실견하는 것만으로도 문신처럼 남은 그것들의 존재가 부르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실재하지 않는 손님들이 술집을 메우고 떠드는 듯한 환영 역시 작품의 기운과 함께하다가 돌연 걷히기도 했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종이에 c-print, edition 2/10, 60 x 90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소멸(선술집)>은 이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에 대해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에서 당시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에 대한 회색빛 시각을 품고 있던 청년 이강소의 모습과 현대미술에 대한 방법론적인 고민을 하던 작가 이강소의 태도 모두를 본다. 한국의 많은 미술 관계자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아카이브 사진, 또는 전시의 형태로 가끔 만나 왔기에 익숙하다는 기분마저 드는 작업이다. 그런데도 결코 작품에 대한 인식이 깊다 자평할 수 없었는데 아마도 나의 수동적인 감상 태도와 전시장의 엄숙한 공기 같은 요소들이 이 작품과 멋지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몇 차례고 흘려보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의 초대로 이강소가 최초로 해프닝을 치른 지 무려 46년이 지난 2019년에 이 작품을 시간예술로 탐구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나를 비롯해 공연을 함께한 아티스트들은 각자의 속도와 몸짓, 시선으로 <소멸(선술집)>과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빚을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공연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한 것은 과거가 만든 오늘을 바라보는 일이었던 것 같다. 먼저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면모와 단서는 작품의 단출한 구성(테이블 몇 개, 의자, 손으로 쓴 메뉴, 주전자, 컵 등)에 녹여 바라보았다. 오래된 얼굴을 하고 있는 50여 년 전 작품이지만 동시대 청년 작가가 오늘의 맥락을 안고 비슷한 작업을 한다고 해도 뜻있을 만한 현대적인 가치가 있음을, 또한 30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가 하는 고민이라는 것이 이강소가 30대를 산 7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작품 안에서 찾기도 했다. 청년 이강소와 작가 이강소의 모습처럼 우리도 여전히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또 예술가로서 무엇을 어떻게 무슨 이유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차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 채드 박
공연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지만 종종 인디밴드에서 멜로디언을 부는 뮤지션 김재훈, 사물과 공간에 대한 탐구를 즉흥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안무가 전보람, 소재에 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신체에 집중한 무용공연을 만드는 정수동, 움직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소통 범위를 확장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현대무용수 정지혜와 함께 만들었다. 우리의 첫 공식 만남은 4월 초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안에서였다. 전시장에서 <소멸(선술집)>을 찾은 아티스트들은 자연스럽게 바에 앉아 작품의 첫인상에 대한 인식을 나눴고 그 대화를 김재훈이 녹취하여 이후 온/오프라인에서 추가로 생각을 보탤 수 있게 도왔다. 우리는 실제로 몸을 움직여보기 전까지 길게 토론을 했는데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은 모두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합일점이었다. 그 이후로는 아티스트 개개인이 작품에서 얻은 영감과 공연으로 연결되었으면 하는 키워드와 단서에 대해, 또 지금 이 작품이 우리의 무대가 되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프로젝트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아티스트들의 개인적인 지향점이 구체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공연을 연 정수동은 <소멸(선술집)>의 상징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신체로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작품의 시간성을 벗어나지도, 갇혀있지도 않은 채 선술집의 나무탁자와 젓가락, 술잔, 막걸리 등의 사물과 액체 자체가 직접 “되어 보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주 막걸리가 되어 후루룩 관객들의 어깨에 쏟아지기도 하고 바닥에서 흔들리는 잔이 되기도 하며 탁자 사이사이를 떠돌았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그 결과 나는 작품의 시간성 안에 벗어나지도, 갇히지도 않은 채 작품을 이루는 사물이 되었다.”

- 정수동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종이에 c-print, edition 2/10, 60 x 90 cm(each),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지혜는 <소멸(선술집)>이 설치되어 있던 공간 한 켠에 걸려있던 사진들로부터 공연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작품의 시대성과 현장을 담담히 증명하는 이 몇 장의 사진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줄곧 설치에 동반된다. 그런데 이 ‘전경' 사진들이 남기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탁자에 올려둔 손, 바닥에 닿은 발의 주인들은 어떤 무의식의 바디 랭귀지를 취하며 선술집에서 시간을 보냈을까.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정지혜는 현장 안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보지 못할 관객들의 손과 발, 몸을 촬영하고 퍼포먼스 중에 프로젝터와 연결되어있는 나의 모바일로 전송해 실시간으로 그 이미지들을 상영하게 했다. 명백히 아카이브 사진으로 남은 70년대의 사진과 대조를 이루는, 주관적이면서도 미시적인 앵글을 보여 준 정지혜의 사진들은 그 순간을 함께하는 관객들만이 볼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삭제되어 관객들의 기억에만 남았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작품 안에서 나의 키워드는 '시간성과 시대성 그리고 흔적'이었는데 50년 전의 청년 이강소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맞닿아 있는 점, 내가 작품을 통해 싱가포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들을 여러 겹의 이미지로 심어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 정지혜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전보람은 낮선 공간(미술관)에 스스로 던져놓았을 때 어떤 순간적인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는지에 대한 작업을 계획했다. 선술집의 의미와 개념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어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을 점검하고 즉석에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을 찾았고, 포스트잇에 바로 직전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적어 관객에게 전달했다. 움직임의 경로에서 스치는 단상과 관객과의 짧은 눈맞춤, 만남은 자연스럽게 숫자나 단어 같은 정보를 남기게 했고, 이를 적어 어딘가에 붙여두는 행위로 그녀의 궤적을 보여주었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만났던 순간 자체는 소멸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곳에 함께 했던 흔적이 쌓이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관객들로 인한 자극과 정보를 남기는 과정 그리고 적극적으로 충동을 보이고 소통해준 관객들과의 해프닝들이 즐거웠다.”

- 전보람

마지막으로 김재훈은 각 무용수들의 파트에 맞는 사운드에 대한 아이디어와 실연을 책임져주었다. 정수동이 선술집의 사물들이 되는 움직임을 할 때는 술집에서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 병 따는 소리, 술을 콸콸 따르는 ASMR 소리 등을 들려주었고, 국악에서 쓰이는 터벌림 장단을 넣기도 했다. 프로젝터 화면에서 정지혜의 사진이 돌아갈 때는 60-70년대의 디바이자 재평가되어야 할 뮤지션 김추자의 히트곡을 틀어 그녀에 대한 헌사를 보냈으며, 전보람이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기며 관객이 그녀의 메시지와 움직임에 집중할 때는 중립적인 사운드를 송출했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세 무용수가 각자의 파트를 마치고 나서 서로의 역할을 바꿔보는 마지막 파트에서는 모두의 소리를 함께 틀어 4성부 자체였던 우리의 공연을 완성했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소멸(선술집)>이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주제로 소통해 온 시간과 형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래서 마치 다성음악과 같이 각기 다른 우리의 퍼포먼스와 음악이 작품의 내적 의미에 잘 부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김재훈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 혼합매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9 ⓒ채드 박
김재훈은 공연 마지막 날 돌발 해프닝을 보여주기도 했다. 갤러리 창밖으로 보이는 국경일 행사의 연습광경과 엄청난 음악 소리가 우리 퍼포먼스에 강렬한 시청각적 개입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리허설에도 없던 즉석 퍼포먼스를 보여 준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인간은 술을 마시다가 평소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미끄러운 코멘트를 주었다.
왼쪽부터: 전보람, 정지혜, 정수동, 김수정, 김재훈 ⓒ채드 박
미끄럽지만 결국 술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 그리고 술집은 힘든 하루를 견뎌낸 사람들이 긴장을 풀 수 있는 장소, 못하고 있던 말을 드디어 하는 장소, 누군가를 더 깊게 이해하는 되는 장소인 동시에 사람들 간의 온갖 갈등과 역학관계를 드러내는 시끄럽고 추한 자리이기도 하다. 시시콜콜한 사연과 함께 술을 한 잔, 두 잔 하다가 비틀거리는 심정으로, 혹은 술에서 나오는 호기로 나눈 결속과 열망의 대화들은 사라지지만 인식은 머릿속에 남아 다음 날의 행동이나 결정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술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또 그 행동은 주로 술을 파는 술집에서 일어나지 않던가. 우리는 <소멸(선술집)>이라는 과거의 술집 안에서 오늘의 관객들과 오늘을 위한 공연을 만들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에 마침내 선술집에서 물러나서면서 이곳에 밀고 들어가 봐야 할 새로운 문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展은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일본국제교류기금아시아센터가 공동주최하는 국제 기획전이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간 아시아에서 진행된 사회·정치·문화적인 변화와 이에 대응한 당대의 시각예술을 조명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 번째로 개막했으며 순차적으로 싱가포르국립미술관과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순회전을 갖는다. 본지에 실린 퍼포먼스는 싱가포르국립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공연된 것으로, 전시 주요작 중 하나인 한국의 이강소 작가의 1973년 작 <소멸(선술집)>을 무대로 하였다.

  • - 퍼포밍 아티스트: 김재훈, 정수동, 정지혜, 전보람
  • - 큐레이터: 김수정, Vanini Belarmino(싱가포르국립미술관)
  • - 사진: 채드박
김수정_큐레이터 김수정은 아라리오 갤러리, 퀸즈 미술관, 시각예술 레지던시 ISCP에서 실무 경험을 했고 2016년부터 서울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공동기획한 전시로는 《사물들:조각적 시도》, 《낭만도시: 모더니즘 이후 미적 비평의 공간》이 있고 《별과 우리의 시간》, 《몽타주는 심장박동이다》, 《Flags》 등을 기획했다. 주로 보는 일, 듣는 일, 쓰는 일에 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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