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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9.09 조회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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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의 관점에서 읽는 CTS

무용수의 관점에서 읽는 CTS
- 무용수의 삶과 자존을 위한 연습

이소영_안무가

일시: 2019년 8월 6일 화요일 오후 5시
대담자: 이소영(안무가), 전강희(드라마터그, 비평가)

이소영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CTS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CTS의 번역자인 전강희가 다음 소개 글을 작성해 주었다.
CTS는 Chicago Theatre Standards의 약자로 미국의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는 연극계 종사자들이 안전한 공연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자료다. 몇 년 전 시카고에서도 미투가 있었다. 한 극장의 대표가 연기를 지도한다는 명목하에 여자 배우들을 성적으로 괴롭혔다. 두 배우가 사실을 폭로했고, 똑같은 사람에게 같은 피해를 겪은 적이 있는 선배 배우가 두 배우를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소셜 미디어에 ‘우리 극장에서는 안돼(Not in Our House)’라는 말을 공유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리 극장에서는 안돼’가 소셜 미디어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15년 1월이다. 이후 3월에 스탠다드를 만들기 위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1년 정도 토론 과정을 거친 후, 그다음 1년 동안 시카고에 위치한 극장 20여 곳에서 파일럿 프로그램들을 실시했다. CTS는 정부나 지자체가 중심이 아닌 지역의 연극인들이 모여 만든 규약집이다. CTS의 첫 페이지 목적선언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명시되어 있다.

“창작환경이 안전하지 못할 때, 예술가와 예술, 두 가지 모두가 위태로워진다. 폭력적이거나 위험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공간은, 대처가 필요할 때, 예방 절차나 의사소통이 없으면 어느 순간 안전하지 못한 영역이 되고 만다. 예술가들은 괴롭힘/학대나 안전하지 못한 관행에 대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힘의 차이가 있는 경우 더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새어 나와 공연을 망치거나 자신의 평판을 망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심한 괴롭힘/학대 행위를 견디다 업계를 떠나기도 한다. 위험에 곧바로 노출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안전하지 못한 환경과 괴롭힘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예술가와 관련 기관들이 일을 성실하게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CTS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다. 나와 동료를 위해 ‘안전한 작업환경 만들기’가 주된 목적이다. 특히 다음 4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 성적으로 괴롭히거나 인종, 젠더, 종교, 민족, 피부색, 장애를 근거로 괴롭히지 않는 공간.
  • 우리(예술가)가 스스로에게, 관객에게, 지역사회에 문제 제기할 수 있고, 정신적, 육체적 위험을 감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하는 연극을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성장 환경.
  •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글로 명시되어 있고, 앞으로 내용이 추가될 수도 있는 표준 항 목들이 포함된 실천방안에 대한 공통된 이해.
  • 멘토쉽, 온라인 소통과 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얻는 동료의 지지.


CTS는 시카고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 각 나라의 예술지원제도와 여러 단체의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 적용되거나 하나의 사례로써 연구되고 있다. 한국의 연극계에서도 CTS 스터디를 몇 차례 진행했고, CTS 만들기를 시작한 사람인 로라 피셔(Laura Fisher)를 초청해 워크숍을 열었다. 현재는 KTS(Korea Theatre Standards, 가제)를 만들기 위한 준비 모임을 진행 중이다.

* CTS 전문을 볼 수 있는 곳: https://www.notinourhouse.org
* 참고기사: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8404§ion=sc2§ion2
* CTS 완역본은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홈페이지의 아카이브실에서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 국제워크숍 자료집’ 항목에서 볼 수 있다. ‘수잔나 딜버 초청포럼 자료집’도 추천한다.
두 단어
“참담하다”, “분노한다”. #미투 운동 기사 내용 속에서 이 두 단어는 그야말로 나의 뇌리에 박혔다. 그리고 더는 이대로 참을 수 없음을 자각하게 했고 무용실 밖으로 나가 행동하게 했다.

“참담하다. 분노한다. 참담하다. 분노한다. 참담하다. 분노한다. 참담하다. 분노한다…….”

페미니즘 실천에 관한 최근 저서인 <두 번째 페미니스트>의 저자 서한영교는 언어를 바르게 다루기 위해 한 단어를 50번 반복하여 인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젠더 관성이 내포된 단어들을 고쳐 불러보고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고, 금칙어를 정하여 훈련한다”고 말하며, “기존에 습관적으로 써오던 언어의 용법을 바꾸면 내 언어의 경계가 달라지고, 내 세계의 경계도 달라진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현재 처한 환경으로부터 느껴지는 내 몸의 언어를 목소리로 내어 보았다. “참담하다!, 분노한다!” 내 것이 된 말은 다음 단계로 진화했다, “더이상, 무용실에서 어떤 폭력도 안돼!”
삶과 자존을 위한 연습
내가 시도한 변화의 노력에는 자기 몸의 주체로서 언어를 가지기, 발화하기. 그리고 실행에 옮겨질 때까지 연습하기가 있었다. 이런 과정은 무용수에게 익숙한 것이다. 다만 그 목적이 작품이 아니라 무용수 자신의 삶과 자존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방향성이 다르다. 내가 CTS 워크숍에 참여하게 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삶과 자존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을 더욱 정확히 인식하고 대응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2019년 2월 8일부터 9일까지 양일간 ‘KTS(Korea Theater Standard)워킹 그룹을 위한 CTS(Chicago Theater Standard) 집중 워크숍’이 있어서 참여했다. #미투운동이 극장의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CTS’가 소개되었고, CTS 코디네이터인 로라 피셔(Raura T. Fisher)가 초청되어 강의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작년에는 스웨덴에서 수잔나 딜버(Suzanna Dilber)가, 올해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로라 피셔(Laura Fisher)가 한국으로 오면서 국제적인 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박영희 연출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의 노력이 손을 뻗어 한국 공연예술계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연령과 역할들에 연결되었다.
자각과 자각 너머
나는 많은 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했다. 하지만 그 폭력들은 사진처럼 멈춰 있는 이미지와 규정할 수 없는 감정으로만 남아있다. 탈의실 문 바깥으로 날아올라 바닥에 나뒹굴던 후배의 몸. 머리를 더 뒤로 젖히라고 내 머리카락을 잡아 내린 손. “너 병신이야?”라고 관객석에서 마이크를 타고 나오는 목소리. 가족에게 큰 사고가 났다는 연락이 왔는데도 병원으로 가지 못하고 리허설을 해야 하는 몸. 레슨에 빠졌다고 따귀를 때리는 소리. 오지 않는 선생님을 망연자실한 채 기다리는 어린 몸들. 잘 나가는 오빠에게 간택된 예쁜 신입생의 얼굴. 월마다 연습복 가방 안에 들려오는 흰 봉투들. 공연이 있을 때마다 티켓 수십장이 들려가는 흰 봉투들. 후배를 째려보고 있는 눈들. 입에 털려 들어가던 술. 예술을 가르쳐 주겠다며 허벅지를 만지던 손. 이렇게 수없이 많았으나 한 번도 제대로 불려 나오지 않은 가해와 피해의 순간들……. 이 모든 일 앞에서 나는 그저 묵묵히 무표정으로 받아내고 있는 몸이었다. 그것이 최대의 방어였다. 지금까지 목격했던 폭력에서 기인한 불분명한 감정들은 나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상태로 만들었고, 나의 창작과 예술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미투운동으로 밝혀지는 사건들에 나를 대입하면서 관성적으로 스스로를 약자로 여기고 있었음도 자각했다. 얼마 전 ‘서울성평등활동연구소’의 로라주희선생님이 진행한 성인지 감수성 교육에 ‘무용희망연대 오롯’의 초대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 교육을 통해 깨어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나 자신이 안무가나 선배무용수가 행하는 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님에 안도하지 말아야 하며, 나 역시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목격했던 폭력의 상황을 묵인하거나 침묵함으로써 나보다 취약한 이들에게 폭력이 가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민감하고 힘든 상황의 젊은 무용가와 안무가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지지하며, 안전한 환경을 앞으로 구성해 나가야 한다는 책임을 알게 되었다.

한창 진행 중인, 제자 성폭력으로 고발된 O무용단의 O대표의 재판을 방청한 동료는 ‘재판장에서 그는 아무도 아니다.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도 자질도 없는, 예술가도 안무자도 아닌, 누군가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위계질서는 허상으로 존재했다. 재판의 과정을 목격하면서 허상의 질서가 깨지는 것을 느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느낀 공통의 감각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더이상 가해자와 춤출 수 없다. 선생님, 안무가, 무용수, 예술가 사이에 그 어떤 위계의 이름도 없어야 한다. 우리는 피해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춤출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더이상, 무용실에서 폭력은 안돼!”
- 건강하고 안전한 무용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약속
학생과 선생님, 무용수와 안무가, 지원자와 심사위원들이 만나는 곳에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지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합의와 조율을 통해 약속이 정해지고 실행되어야 한다. 다음 내용은 무용실 환경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한 언어 샘플로, CTS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CTS의 목표는 안전하지 않거나 학대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에 대비하고 대응하기 위함이다. 이 샘플은 구성원 모두가 괴롭힘의 정의를 함께 읽고 공통된 이해를 통해 학대와 차별 없는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예시로서 연습 초반에 함께 읽고 토론할 수 있다. 건강하고 안전한 무용 생태계가 되길 바라며, CTS가 무용계의 변화에도 활용되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첫 연습을 위한 연습실 언어 샘플>

괴롭힘/학대는 다음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다음으로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1. 누군가의 인종이나 민족적 배경, 피부색, 태어난 곳, 시민권, 집안, 종교, 장애에 관한 적절하지 못하거나 모욕적인 말, 행동, 농담, 빈정거림, 조롱
  2. 예술가의 사생활에 관한 불필요한 질문이나 언급
  3. 금지하고 있는 것들을 근거로 들어 굴욕, 악의, 거북함을 일으키는 자료, 기사, 낙서 등을 붙여놓거나 펼쳐놓는 것
  4. 성적 괴롭힘
    • 젠더나 성과 관계되는 유형의 말이나 행위로, 상대가 원하지 않고, 악의적이고, 모욕을 주고, 위축되게 하고, 화가 나게 하고, 부적절하다고 알려진 표현들, 예술가들은 다음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 혜택이나 승진을 가능하게 하거나 방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성적인 유혹이나 접근
      • 혜택이나 승진을 가능하게 하거나 방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성적인 유혹이나 접근을 거부했을 때 발생하는 보복이나 보복 위협.
    • 성적 괴롭힘은 다음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다음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 누군가의 신체, 복장, 젠더, 성적 지향성에 관한 적절하지 못한 말, 농담, 빈정거림, 조롱
      • 몸을 만지고, 키스하고, 쓰다듬고, 안고, 꼬집는 등 상대가 원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못한 신체 접촉
      • 누군가의 성생활이나 성적 취향에 관한 적절하지 못한 질문이나 언급
      • 음흉한 웃음, 휘파람, 다른 외설적이거나 모욕적인 소리
      • 복장, 신체적인 특징이나 행동에 관한 적절하지 못한 언급
      • 성과 관련된 자료, 기사, 낙서 등을 붙여놓거나 펼쳐놓는 것
      • 성관계 제안 수락에 대한 보상(예. 승진 기회)을 약속하거나 강하게 암시하는 요청이나 요구, 혹은 반대로 성관계 제안을 거절할 때 받게 될 처벌 위협(예. 진급이나 승진 기회를 박탈)을 암시하는 요청이나 요구

ⓒ 서울시성평등지원센터 자료실
이소영_안무가 현재, 몸춤과 움직임탐구그룹 14feet를 운영하고 있다. 안무가이자 무용수이며 한 개인이고 여성이다. 요즘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의 춤이 어떻게 바뀌며 나아가고 있는지 탐구중이다.
전강희_드라마터그, 비평가 서울변방연극제의 대표이자 프로그래밍 디렉터이다. 공연 관련 글을 쓰면서 드라마터그와 축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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