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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9.09 조회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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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움직임, 움직임의 글쓰기

글쓰기의 움직임, 움직임의 글쓰기

김태용_소설가

먼저 무대 위나 영상 속 움직임을 바라보는 행위는 제외하고 시작하자. 미적 충격에 대한 격발장치를 제거한 뒤의 일상을 떠올려보자. 어떤 목적과 보상 없이, 무언가에 열중해 움직이는 사람들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공을 빼앗기고,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고, 아주 천천히 발을 내딛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경이로움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비단 그것은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움직이는 생물체와 이동 수단들, 뒹구는 비닐봉지,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 흘러가는 구름 등등. 세상의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움직임을 멈출 관찰자를 기다린다. 하지만 움직임이 우리감각을 붙잡는 순간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왜 하필 익숙한 장면이 그날 낯설게 보였던 것일까? 그 움직임은 최초에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멈추게 될까? 과연 멈출 수가 있기나 할까?

오래전,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않는 글을 보다가 핑곗거리를 찾은 것이다. 적당한 자리에 핸드폰을 놓고 동영상으로 얼굴을 찍어 보았다. 몇 번의 재촬영이 이어졌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더이상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글을 쓰는 자신을 기록하려 애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왜 하고 있지, 하면서도 미련이 남았다. 나는 정말 내가 모르는 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영상을 떠올려보면 의식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카메라를 보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 뒤에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진 않고 발음할 수 없는 언어를 되새김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종의 옹알이 글쓰기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 잠시 찾아왔다 사라졌다.

“쓰는 몸짓의 변증법은, 낮은 목소리/sotto voce/로 속삭이는 말의 단어들과 나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아직 가상성 속에서 버티고 있는 단어들과 나 사이의 변증법이다. 바로 이것이 글쓰기의 아름다움이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에서
글쓰기의 아름다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환영적 착각에 빠져 글을 쓸 때마다 습관적으로 입술을 움직여보곤 한다. 방금 또 입술을 움직였구나, 하고 소리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옹알이 글쓰기를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는 나의 얼굴을, 표정을, 인상을, 움직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영영 글을 쓰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얼굴이 아니라 손에 초점을 맞췄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손은 어떻게 카메라를 의식하며 움직이게 되었을까. 그렇다고 지금 손을 찍어 볼 수는 없다. 글을 쓰는 나의 손(의 움직임)마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들처럼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손과 손짓, 손의 움직임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목소리와 입의 악력, 혹은 발가락의 힘이나 온몸 자체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주 손쉽게 손으로 글을 쓰고(치고) 있다. 연필을 잡은 손보다는 작은 계란을 가볍게 움켜쥔 채 키보드를 치는 경우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손의 놀림과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기 위해서 글을 쓸 수는 없을까. 글을 치지 않을 때 손은 잠시 어디에 있게 될까. 키보드에서 미끄러지는 손, 허공에 떠도는 말들을 잡으려 하는 손, 어깨를 주무르는 손, 머리를 쥐어박는 손, 창문의 손잡이를 만지는 손, 분주하게 책을 찾는 손, 그리고 언어의 포로가 되어 포기를 선언하는 손. 손은 달아나고 싶다.

나의 양손은 화상으로 본래의 형상과 피부를 잃어버렸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만 제대로 기능하고, 손바닥에는 귀여운 강아지 모양의 피부가 이식되어 있다. 손바닥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 강아지가 손에서 달아나려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손바닥 강아지에게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

2011년부터 사운드아티스트 류한길씨의 제안으로 시작한 소리 공연이 간헐적으로 낭독, 매체, 움직임 퍼포먼스로 이어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감추는 데에 익숙한 손을 가진 사람이 손을 전면에 드러내 수동타자기를 치고, 마이크를 잡고, 카세트 레코더와 라디오를 만지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행위가 스스로 의아하게 느껴진다. 관객들이 손(만)을 쳐다보면 어쩌지. 지금 내 손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손을 감춰야 할까. 하는 생각들에 공연에 집중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녹화된 공연 영상을 보면서도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것이 나의 손이고 그다음이 손을 옮겨놓는 몸의 움직임이다. 나의 손이 저렇구나. 내가 저렇게 움직이고 있구나. 손바닥 강아지가 춤을 추려다 말았구나.

2015년 아르코 필룩스. 류한길, 로위예와 결성한 A.Typist 공연 ⓒ류석주
공연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의 손은 홀로 쓸 때와 읽을 때와 다를 것이다. 그 차이를 명확한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손으로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흑백의 명암 속에서 확대된 손으로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까. 노출된 손의 움직임, 손을 가진 몸의 공연 이후 나의 글은 이전보다 더 소리와 움직임을 쫓게 되었고, 문장의 소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2019년 7월 미술가 연기백의 임대 공간. 라삐율 작가와의 공연 ⓒ라삐율
글을 쓸 때는 키보드라는 좌표에 소릿값을 입력하는 것만 같다. 그 소릿값의 점을 이어 하나의 스코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손을 위한 글자의 타격음와 움직임을, 그리고 어긋남을, 향해.

2018년 4월 2일 1시. 국립현대미술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바이올린 페이즈(Violin Phase)>를 보았다. 흰 모래에 움직임의 궤적을 만들고 안느는 퇴장했다. 안느의 발에 집중하느라 안느의 손(움직임)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공연이 끝나고 다섯 명의 사람이 초록색 삽을 들고 모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긋난 리듬을 갖고 모래를 고르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발을 멈춰 동영상을 찍었다. 아무도 찍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과 소리는 진공관 같은 머릿속에서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무대극 <쿼드Ⅰ(QuadratⅠ)>의 장면으로 이어졌다.

“각 배우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지만…….”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쿼드Ⅰ(QuadratⅠ)>인물 소개 중

인물들은 얼굴뿐만 아니라 손도 보이지 않는다. 발도 보이지 않는다. 동영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지만 내가 보았던(찍었던) 모래를 고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손을, 발을 나는 기억할 수 있을까. 기술할 수 있을까. 움직임을 따라가는 글쓰기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만큼 어렵다.

이 글이 끝나면 나는 가방을 들고 작업실을 나와 집까지 걸어갈 것이다.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움직임이 나타났다 사라지게 되는가. 온전히 나의 팔과 다리와 수많은 근육과 뼈와 관절을 이용해 나를 이동시킨다, 고 확신할 수 있을까. 글을 쓰는 동안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자문하곤 한다. 글을 쓴 뒤에는 나의 가장 예민해진 신체 부위가 말한다. ‘내가 어떻게 움직였고,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요?’ 나는 대답할 수 없다.
김태용_소설가 서울예대 문예창작전공 교수이다.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 《음악 이전의 책》, 장편 《숨김없이 남김없이》, 《벌거숭이들》을 출간하였다. 음악가, 미술가 등과 언어와 소리에 대한 협업과 퍼포먼스를 종종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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