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8.16 조회 6544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미술관에서의 춤

웹진 <춤:in> 편집부

일시: 7월 22일 월요일 오전 11시
참석자: 김재리(드라마투르그), 김지연(전시기획자, d/p디렉터), 박수지(큐레이터, AGENCY RARY 대표), 송주원(안무가, 댄스필름 감독), 김연임(춤:in 편집장), 이주연(춤:in 에디터)

왼쪽부터 김재리, 박수지, 김연임, 송주원, 김지연 ⓒFotobee_이병곤
김재리: 오래전부터 춤과 시각예술, 안무가와 미술작가는 만남과 해체를 지속해 왔는데, 이렇게 장르가 교차하는 현상을 각 분야에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실제로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의 춤이 미술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안무가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거든요. 무용에서는 매체의 교류나 합류, 새로운 방식의 실험 등 확장된 영역에서 중요한 지점이 되고 있어요. 이 시점에 시각예술과 춤의 교류,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 발생하는 춤에 대해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취지로 ‘미술관에서의 춤’이라는 화두를 던지게 되었어요.

일단 시작에 앞서 간단하게 서로를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면서 안무 확장의 측면에서 다학제적이고 매체 교류적인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는 김재리입니다.
송주원: 저는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춤을 추고 만들며 일일댄스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고, 현재는 도시공간 무용프로젝트인 장소특정적 퍼포먼스와 댄스 필름 작업을 하고있는 송주원입니다.
김지연: 저는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쓰고, d/p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김지연입니다.
박수지: 저는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의 우정, 사랑, 종교, 퀴어에 관심이 있고 이를 전시, 비평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박수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각예술과 춤/안무/퍼포먼스
김재리: 저는 시각예술에서 춤과 안무, 퍼포먼스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와 미술관이라는 장소에 몸과 춤이 왜 필요한 것이며, 시각예술에서 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요. 안무가들이 미술관으로 진입하거나, 시각예술 작가들이 작업에서 춤을 다루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요. 먼저, 국내 미술의 역사에서 퍼포먼스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할게요.

현재 춤과 안무, 퍼포밍 아트, 퍼포먼스 아트, 라이브 아트 등의 용어가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작업에 따라 그 개념과 범위가 달라질 수 있어요. 신체와 행위를 매체로 한다는 지점에서 미술관에서의 춤과 퍼포먼스의 폭넓은 지점에서 말씀해주시고, 점차 춤으로 좁히는 방식으로 이야기 나누도록 할게요.
김지연: 한국의 시각예술계에서 최초의 퍼포먼스는 1967년의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50년 정도 된 셈인데, 그 역사 안에서 ‘행위미술’이라고 불렸던 퍼포먼스들은 실험과 전위의 위치를 차지했어요. 기성에 반하는 실험을 하는데 몸은 가성비 좋은 매체였던 것 같고요. 대개 작가 자신이 직접 퍼포먼스를 했는데, 움직임을 훈련받은 몸은 아니었어요. 작가들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그 매체로 연습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몸을 매체로 쓰는 데에는 그만큼의 훈련을 하지 않았죠.

2000년대 초반에는 전시장에서 라이브 퍼포먼스를 보기가 어려웠어요. 떠올려보면 낸시 랭 생각밖에 안 나요. 2000년대 초반까지 전문 무용수나 안무가가 전시장에서 퍼포먼스를 한 사례가 있나 떠올려보는데 별로 생각나는 게 없어요. 민중미술계열 전시가 열릴 때, 이애주 무용가가 공연하셨던 것 정도가 떠오르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행위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던 퍼포먼스에 대해 약간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박수지: 거기에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그 당시에 미술작가 선생님들이 했던 퍼포먼스에서의 몸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되고 오브제가 되는 거죠. 그러한 부분이 춤과 달리 비무용적이고, 비 공연적인 성격을 지니게 하는 것 같아요.
김지연: 말씀하신 건 이애주 선생님의 사례인 것 같은데, 작가들은 자기 작품으로 퍼포먼스를 했어요.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에 훈련이 필요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몸으로 걷는 작업을 하는데 그게 꼭 걷는 훈련을 받고 걸어야만 작품이 된다고 하는 건 곤란하잖아요.
김재리: 그래서 포스트모던의 안무가들이 미술관에서 작업할 때, 무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장르를 드러내지 않은 작업(Work), 피스(Piece)로 지칭하곤 했어요. 컨템퍼러리 댄스에서도 무용의 전문교육을 받고 극장에서 작업하는 안무가들도 미술관에서 작업할 때는 크레딧을 안무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춤’이라는 용어가 포스트모던 이후의 안무가들이 하는 실험과 생산한 담론의 지점을 모두 담을 수 없는 게 맞아요. 그래서 공연의 형태를 보고 ‘이것은 춤이다.’, ‘이것은 퍼포먼스다.’라고 말하는 게 애매해지는 경우가 있죠.
송주원: 요즘 많이 드러나는 것 중 하나가 작업의 방식에서 신체가 어떻게 다뤄지느냐인데, 말씀하신 80년대 이전의 작가분들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퍼포먼스를 구현했다면 지금의 시각예술 작가 중에는 자신의 행위로 작업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스스로 행위나 행동을 한다기보다는 안무가나 무용수를 고용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작가가 직접 퍼포먼스 하시는 경우는 거의 못 본 것 같네요.
김지연: 이불(Lee Bul)같은 작가의 초기 퍼포먼스는 굉장히 힘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퍼포먼스 작품은 전혀 없고 설치 작업에 집중하고 있죠. 작업 초기에 자기 세계를 선언하는 방법으로 퍼포먼스를 하고는 지속하지 않았어요. 2000년대 초반에는 라이브 퍼포먼스가 드물었고, 영상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던 것이 최근 5~6년 사이에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전시장 퍼포먼스는 정말 깨끗한 공백기가 있어요. 움직임을 라이브로 보지 못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재리: 같은 매체를 사용하더라도 질문과 환경이 변하면서 형태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면, 퍼포먼스나 신체가 나왔을 때는 저항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감정이 강하고 오브제가 고정되어 있기에 접목할 만한 매체를 들여왔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테크놀로지나 미디어가 유행하면서 상업적인 형태가 나오게 된 것 같고요.
김지연: 2000년대 중반 한국 미술계는 시장의 힘이 강력했어요. 마켓 안에서의 퍼포먼스는 판매가 곤란했기 때문에 주춤했을 수도 있겠네요.

김지연 ⓒFotobee_이병곤
미술에서 퍼포먼스의 의제들, 페티쉬와 리얼리즘
박수지: 요즘에는 갈수록 모든 작업이 물신화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의 몸과 신체가 자꾸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전시의 이데아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이게 일종의 리얼리즘적인 행위로 보이는 거예요. 예술이 워낙 힘이 없고 시각예술이 작동하는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지다 보니까, 몸이라는 강력한 매체가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리얼리즘적인 성격을 지니고 실천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는 거죠. 이게 아무리 가증스러운 전시로 포장되더라도요. 리얼리즘이 결핍될 때마다 미술관에서 퍼포먼스가 등장했어요. 아까 말씀하셨던 시장의 논리에 반대하는 것으로 비물질적인 퍼포먼스가 들어온 것처럼 역사가 계속 돌고 도는 과정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물론 과거와는 판이한 상태로 작동하지만요.
김지연: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미술은 유연한 척하지만 닫혀 있기에, 많이 받아들이지만 안착시키지 않고 계속 흘려보내요. 지금이 많이 받아들이는 시기인 것 같아요.

저는 최근에 작가들이 작품 안에서 본인이 직접 퍼포먼스를 하기보다 훈련된 몸을 선호하고, 그 훈련된 몸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해요. 이런 조짐은 10년 전부터 시작되지 않았나요? 그보다 더 이전인 2005년 다원예술분과의 출발이라든가, 2007년 스프링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페스티벌 봄이나,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무브전이 그 계기가 되었을까요? 훈련한 몸이 들어오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연습이나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던 몸이 아니라 안무를 가진 몸이 오브제처럼 전시장으로 들어온 것을 본격적으로 접한 건 그 무렵인 것 같아요. 미술 쪽에서 그런 몸들과 일하면서 본 효과라면 잘 움직이는 기운, 제어된 에너지가 직접 움직이고 있는 전시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어요.
박수지: 퍼포먼스가 되었든 춤이 되었든 항상 목격자를 두고 있잖아요. 목격자를 둔다는 차원에서는 이질성이 없는 거죠. 그런데 김지연 큐레이터의 질문은 그렇다면 왜 훈련된 몸, 즉 무용수가 들어오냐는 것이죠?
김지연: 훈련에서 벗어나려고 하든, 미술 쪽에서 영상을 찍든, 퍼포먼스 무대를 꾸미든 간에, 그들이 왜 훈련된 몸을 가진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는지와 이들이 왜 안무자적 태도로 몸들을 디렉팅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는 정말 유명한 배우를 캐스팅해서 영상 작업을 만드는 시각예술 작가들처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고 비싼 물감을 쓰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리고 미술관에서 선호하는 건 확실하게 내러티브가 강한 춤보다는, 개념 지향적이고 이미지적인 춤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류가 미술 쪽에서 익숙한 움직임인 것 같아요. 요새 전시장으로, 선명한 메시지를 직접 설명하면서 전달하는 몸이 들어오는 것 같진 않거든요.
김재리: 미술에서 지금까지 화두로 다루는 신체성(corporeality), 시간성(temporality), 수행성(performativity)과 같은 개념들에 대해 논의가 있었고, 영상이나 미디어와 같은 기술적인 것이 들어오고, 이제는 두 가지가 섞여서 사용되는 것 같아요. 퍼포먼스를 영상 매체나 다른 애니매이션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해요. 그렇다면 송주원 선생님은 안무가로서 무용이 미술과 만나려고 하고, 미술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셨던 게 있으신가요?
송주원: 특별히 그 이유를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근 몇 년간 미술관에서 무용작업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경험으로 생각해보면 90년대에 매년 과천현대미술관의 야외 잔디밭에서 공연을 했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본래 우리가 하는 공연을 편집해 이벤트처럼 시연 한 거죠. 2012년 무브전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과 무용 <MOVE : Art and Dance Since 1960s>를 경험하면서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에 대한 이해와 시선이 달라졌어요. 해외에서 안무에 대한 스터디를 하건, 뭘 하건 저는 무브먼트가 먼저였고 개인적인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작업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Xavier Le Roy & Marten Spangberg의 작업 <Production>에 출연했을 때 경험으로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에 대해 사회적이 맥락이나 어떤 현상을 춤 안에 같이 한다기보다는 춤 작업으로 담론이라는 것이 오고 간다는 걸 처음으로 몸으로 겪게 되었죠. 그때 미술관에서 좋은 작가의 좋은 작업, 퍼포먼스를 많이 접하게 되어 춤의 세계가 확장된 것이죠.

그 후 갤러리 팩토리의 홍보라씨의 제안으로 미술관에서 작업을 해 봤는데 소극장에서 경험하는 것과 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갤러리에서 작업하는 과정과 공간이 색달랐고, 작업에 대한 관객의 피드백도 달랐어요. 왜냐면 무대에서 공연할 때는 기술이 어떻게 들어가고 이 작품을 어떻게 풀어갔는지가 중요한데, 미술관에서는 퍼포머가 가진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히 감각적인 교감이 일어날 수도 있더라고요. 작품의 동기와 미학적 완성도, 혹은 무용수의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에너지와 운동성이 중요하게 작동되는 것을 보았어요. 몇 번의 퍼포먼스 후 2017년 <풍정.각(風情.刻)> 시리즈의 퍼포먼스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게 되었는데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다가 미술관 안에서 하니까 일단 무용수들이 안전하고, 훨씬 많은 관객이 볼 수 있었어요. 같은 작품을 시리즈로 하는 작가로서 다양한 관객층을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뭔가가 더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어요. 무용이라는 매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소개되는 기분이 들었죠.

대학 중심의 무용사회에서는 여전히 무용이라는 매체가 체대 안에 있고 ‘기술적인 신체성’을 우위에 둔다면 보다 포괄적인 예술이라는 범위로 소개되는 기분이 들어요. 농댄스나 개념무용등 컨템포퍼리 댄스라고 칭하는 무용기술 내부를 확장고, 공연에서 다뤄지는 신체성에 대한 해석과 블랙박스와 다른 플랫폼에서 동시대적인 시선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작업으로 확장하고 싶은 안무가들이 미술관에서의 무용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요. 지난해 창동 레지던시에 이어 올해 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시각예술작가로 입주 중이라 미술관에서 자주 보이는 안무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듣게 돼요. 미술관에서 안무가들에 대한 정보가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쉽기도 하고 또 안무가들도 궁금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노크를 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박수지: 송주원 안무가의 경험을 들으니 관객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춤과 댄스를 하는 사람이 무대에서 공연하게 되면 관객과의 거리를 매우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데 미술관의 관객은 객석에 앉은 관객이 아니라 퍼포먼스의 행위 전체에 개입되어서 역할을 부여받은 거예요. 그래서 좀 더 거리를 좁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송주원: 왜냐면 블랙박스에서의 관객은 고정된 신체이며 관찰자잖아요. 공연을 보다가 중간에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런데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를 보는 사람들은 그냥 가요. 움직이는 유동적인 신체인 거죠.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있고, 블랙박스는 없는 거죠. 그런데 안무가들은 작업할 때 작품을 만들거나, 무대를 만들거나, 장소를 생각할 때 대상을 생각하는 건 똑같아요. 관객에 대한 태도가 없을 수가 없어요. 안무가들에게는 그게 훈련되었고 체화된 선택이니까요.

최근에 미술관에서 퍼포먼스가 일어나고, 시각예술 작가가 플랙서스 활동과 비슷한 지시문으로 작업을 하는데, 이는 안무작업의 초기 단계에 해당해요. 이렇게 무용수들과 즉흥으로 움직임을 만들기 위한 기초단위의 방식이 하나의 작품이 되고, 심지어 그게 좋은 작업으로 여겨져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어요. 선보여진 건 안무의 초기 단계일 뿐인데 말이죠. 실제로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 관객석에서 ‘저건 나도 할 수 있는데!’ 라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거든요. 사실 안무는 테마를 정하고 구조를 짜고, 공연으로 읽힐 수 있는 수많은 장치를 만들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작업인데, 어떤 면에서 너무 쉽게 유통되고 있지 않나 싶어요. 미술관의 큐레이터들도 안무가 또는 무용수와 함께 작업할 때, 몸을 좀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작가로 매체를 플레이하는 사람으로 선택해야 하는데, 안타까운 부분들을 자주 경험하게 돼요. 안무가를 고용해서 퍼포먼스를 만들었는데 못 볼 정도였던 경험도 많고, 그 작업에 출연했던 무용수들에게는 애썼다고 하고 수고했다고 하는데, 무용수 역시 그냥 아르바이트한 거라고 말하는 거죠. 그럴 때마다 회의감이 들어요. 어쨌든 하나의 작품이고 그것은 관객들에게는 파장이 일어나고 발화가 되는 건데, 그냥 이렇게 소비될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죠.

송주원 ⓒFotobee_이병곤
퍼포먼스의 담론들
김재리: 제가 질문을 드렸던 이유는, 춤에서 바라봤을 때 미술관에 어떤 매력이 있어서 들어가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질문으로 돌아가서, 미술관에서는 관객에 관한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거고, 장소에 대한 매력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미술 안에서 안무가가 소비되는 방식과 무용수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부정적인 사례도 있지만, 작업에 의해 고정된 매체가 열리면서 새로운 경험과 자극을 주는 긍정적인 사례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선 어떤 자격증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안무를 할 수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거죠. 스코어나 지시문을 다시 불러왔을 때 작가의 질문과 구조가 어떻게 당대의 문제와 맞닿아있는지 이해하고, 자신의 예술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있는지와 그 구조를 작동시키기 위한 도구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각예술가도 분명히 안무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누구나 할 수 있죠. 훈련된 테크닉과 젊은 무용수로 대변되는 관습적인 춤이 아니라, 안무적 접근이요. 이런 상황들이 일어나면서 아까 이야기했던 행태들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이러한 안무적인 접근에서는 작품 생산뿐만 아니라 담론적인 부분이 현장에서, 창작자나 큐레이터들에게도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 같아요. 최근 미술관에서 춤/안무/퍼포먼스를 통해 생산되는 담론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수지: 미술씬에서 퍼포머티비티를 받아들이는 시점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큐레토리얼 실천의 영역에서 퍼포머티비티가 작동될 수 있고, 단순하게는 무용과 춤, 무브먼트가 들어있기 때문에 퍼포머티비티가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사회문화적인 경향성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을 해요. 이를테면 우리가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점점 더 활발하게 하고 있잖아요. 젠더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발현된 탈 이분법적인 것, 이렇게만 언술하면 포스트모더니즘 같은데 그것과는 다르고요. 수행적으로 계속 유동하고 탈주하고 변형되는 그것 자체를 사용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기 때문에 퍼포먼스가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맥락도 계속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라고만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반복되는 역사의 또 반복인 건 아니죠.
김재리: 이러한 인식은 큐레이터들에게 중요한 부분이 될 것 같은데요, 박수지 큐레이터님은 안은미 안무가의 전시 매니저를 했고, 김지연 큐레이터님이 계시는 d/p 갤러리는 워낙 춤과 퍼포먼스가 많이 있는 장소라 잘 아실 것 같아요. 큐레이팅하실 때, 퍼포먼스 전시를 할 때, 중요하게 주안점으로 두는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궁금해요.
박수지: 작년에 보안여관에서 한 작은 기획전이 있었는데, 거기에 안은미 선생님을 참여 작가로 요청드렸던 적이 있어요. 그때 주제가 ‘접촉’이었어요. 접촉과 수행성 사이를 오가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부탁드렸어요. 그 당시 예산으로는 퍼포머 사례비도 불가능한 수준이라 다른 작품을 주셨는데 그 작품은 안은미 선생님이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하면서 만났던 할머니들의 첫 경험을 녹취한 사운드 설치 작업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안은미래 전시는 안은미 안무가의 30주년 개인전이에요. 그 전시에서 어떻게 하면 안은미 선생님의 신체가 미술관에 계속 있을 수 있을까를 계속 고심했었어요. 안무가를 전시장으로 부른다고 했을 때, 안은미 선생님이 그동안 디자인했던 무대 세트를 시각화한 오브제들을 설치작품으로 들여오고, 안은미 선생님이 드로잉한 의상들이 들어가고, 공연 영상들이 아카이브처럼 편집되어 들어가지만, ‘안은미’라는 신체 없이는 안은미 선생님이 해왔던 작업에 대해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걸 하기가 어려웠어요.
김재리: 그런데 안은미래 전시가 3개월 동안 진행되는데, 퍼포먼스 없이 3개월이라는 시간을 전시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으셨나요? 퍼포먼스의 시간성과 전시의 시간성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박수지: 8000개의 비치볼에 안은미 선생님의 사진을 넣어서 깔아놓기도 하고, 여러 가지 오브제로 장치를 마련했지만 사실 그건 아무런 힘이 없고 소용없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이 수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나와 계세요. 전시장에서 개인레슨과 단체레슨, 리허설을 하시죠.
박수지: 그런데 어쩌면 자본이 없어서 그녀의 신체가 왔을 수도 있어요. 자본이 있었다면 신체 대신에 시각화된 모든 것이 운동성을 가지겠죠. 그런데 이 경우는 안은미 선생님 특정적인 케이스예요. 제가 옆에서 짧게나마 지켜본 내용으로는 안은미 선생님은 일종의 사람을 바꾸는 작업을 하고 계시고 무용은 그녀에게 확실한 미디엄이에요.
김지연: 저는 제주도에서 했던 작업과 낙원상가에서 했던 작업의 예를 들어볼게요. 둘 다 전시였지만 축제의 성격을 요구받는 전시였고, 공간 역시 실내 전시장 외에 야외공간도 소화해야 하는 전시였어요. 먼저, 제주비엔날레라는 행사를 할 때, 전시 사이트 중 한 곳이 알뜨르 비행장이었거든요.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만든 비행기 격납고가 있는 장소예요. 지금은 다크투어리즘의 성지가 되어있는데, 격납고 자체가 굉장히 조형적이고, 대지미술처럼 보여요. 그 장소에서 전시해야 하는데, 오브제로는 공간을 다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춤이 있으면 좋을 장소다 싶었고요. 그래서 제주도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김미숙 선생님이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진행하는 안무를 구성하셨고, 관객과 무용수 모두 같이 이동하면서 장소와 호흡하는 춤을 봤어요. 기획자로서 춤을 선택했던 이유는 그 장소에 신체의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오브제를 세우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펼치기에 가장 좋은 매체였죠. 이건 기획자로서 제 입장일 수 있어요.

낙원상가에서 송주원 안무가와 작업을 했을 때는 저에게 미션이 있었어요. 서울시의 후원을 받았던 작업인데, 서울시 공무원들과 지역민들이 낙원상가를 항상 짐처럼 느끼는 거예요. 삼일대로 위에 서서 익선동과 인사동 사이를 단절시킨다는 거죠. 건물 아래는 너무 어둡고 지저분하고, 걸어다니고 싶지도 않은 분위기인데, 어떻게 하면 이 양쪽을 제대로 연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곳은 차도잖아요. 오브제를 설치하고 기둥에 벽화를 그린다고 해서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변하지 않아요. 좀 더 근본적인 설계와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죠.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한 번은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둡다고 하니까 조명을 밝혔고, 소통이 안 된다고 하니까 정체되었다고들 말하는 기운을 한번 흔들어 보기로 했어요. 장소에 대해 생각하는, 에너지가 좋은 몸들이 낙원상가 차도와 지하상가에서 춤을 추니까 좋더라고요. 영원할 수는 없지만, 무용수들이 공기를 흔들어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고정된 오브제와 작업을 하는 큐레이터 입장에서 몸이 가지고 있는 특장점이 확실히 있는 거예요. 매우 한시적이지만 어떤 효과가 있긴 했어요.
김재리: 기존에 있는 오브제를 흔드는 데에 사용되는 게 아니라, 다른 오브제나 풍경이 없는 상태에서 퍼포먼스 자체에 집중하는 것도 있나요?
김지연: 안느 테레사(Anne Teresa)가 브뤼셀의 비엘에서 했던 <워크/트라바이유/아르바이트>가 그런 예 아닐까 싶어요. 별다른 장치 없는 전시장 안에서 캐주얼한 복장의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좋았어요. 그들의 긴장이나 호흡이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화이트큐브냐 블랙박스냐에 따라, 같은 춤도 관객에게 다른 체험을 주는 것 같아요. 전시장 안에 몸 이외의 다른 오브제가 없어서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당연히 인위적인 무대와 객석도 없었고요. 내러티브, 직접적인 메시지가 없는 추상적인 춤의 전형처럼 보였어요. 뭔가 다른 주제의식에 복무하지 않은 느낌이었던 거죠. 물론 안무가는 다른 콘셉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추상화되어 있었고, 변하는 동작이 주는 에너지를 계속 따라가는데 교조적인 느낌이 아니었던 거죠. 계몽적으로 뭔가를 가르치려는 몸짓이 아니었어요. 전시에서의 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어요.
김재리: 미술관에 퍼포먼스나 춤이 개입했을 때에는 관객의 색다른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김지연: 요새는 고착되지 않고 고정되지 않는 걸 선호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고정되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해요.
김재리: 거기에 에너지가 있는 게 아닐까요? 누구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고 각자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니까 각자 개별적인 작업을 갖게 된다는 다른 의미에서의 소유인 거죠.
김지연: 그랬을 때는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송주원: 가장 반응이 빠른 SNS가 전체적인 평인 것 같아요. 그리고 고착되고 싶지 않은 것보다는 깊게 보고 천천히 보는 것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게 아닌가 싶어요. 시각적으로 분업하거나 사라지고 사라지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박수지: 그런데 저는 큐레토리얼에서 구현된 퍼포먼스에 대해서 일종의 반성적인 성격도 있다고 봐요. 시각예술이 그동안 주로 사용하던 물성이 짙은 매체에 대한 전반적인 판단 유보와 반성적 태도가 분명하게 퍼포먼스에 개입되어 있다고 보여요.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장소에 들어있는 몸들이 있잖아요. 그 몸들이 가지고 있는 점들이 쭉 그려지듯이 몸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시간이 예술계 안에서 너무 필요한 거죠. 그래서 비판적으로만 보고 싶진 않아요.
김지연: 미술계는 안무가가 주제를 세팅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훈련이 덜 되어있지 않을까요. 시각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춤을 바라볼 때 어떤 한계가 있겠죠. 더 깊게 들어가지 못하고요. 어쩌면 전시기획자는 안무가들이 전시장에서 하는 이야기 자체에 관심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저 아름다운 몸이 잘 움직이는 상황 자체에 만족할 뿐, 그 작품에의 관심도 기대도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봐요.
박수지: 시각예술이 무용을 바라볼 때의 한계라는 게, 시각예술 쪽 사람들이 안무가들이 이야기하는 스코어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있어요.
김지연: 그런데도 매체가 몸이다 보니 어떤 익숙함이 있어요. 그래서 큐레이터도 노력하면 무용에서 중요한 요소들, 무용이 포기해서는 안 될 어떤 것들과 접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아직은 작가나 기획자가 훈련된 몸을 만나서 작업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준비할 시간도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잘 만난 사례도 있겠죠.
송주원: 황수현 안무가의 작업 같은 경우,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작업할 때 안민혜씨가 큐레이팅을 했잖아요. 그 작업에 대해 말씀하시길, 관객들이 조용히 퍼포먼스를 보는 게 놀라웠다고 해요.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미술관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 때, 전시퍼포먼스 자체가 놀라웠다는 거죠. 영상이 전시될 때도 영상이 길면 사람들이 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데, 퍼포먼스도 길다 보니 전체를 다 보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해요. 그렇게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이벤트와 해프닝은 짧게 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김지연: 최근 미술계에서 퍼포먼스를 많이 다루고 있잖아요. 수행성 담론도 몇 년째 가져가고 있고요.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요. 정치적인 작업에서 퍼포머티비티가 강조되고 있어요.
김재리: 그런데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신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성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게 돼요. 신체가 들어가면 정치적인 맥락이 들어가기 때문에 퍼포먼스나 안무에서 고려해야 하는 시간성과 장소성에 대한 탐색도 촘촘해지지 않는 거죠.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영상에서도 퍼포먼스의 테크놀로지와 도구로 사용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영상에 들어오니까 편집이 가능해지면서 그냥 해도 될 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마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것처럼. 이렇게 도구가 개입되거나 다른 매체가 합류되면서 발생하는 현상도 있는 것 같아요.
송주원: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학예 역량강화 큐레이터 워크숍에 초대되어 강의를 했어요. 안무가들이 바라보는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운영부장님께서 마지막에 무용과 퍼포먼스는 굉장히 다르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안무가들이 이야기하는 작품(Piece)과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들이 기획하는 퍼포먼스랑은 정말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안무가를 선택하거나 큐레이팅을 할 때 무용에 대한 매체를 미술의 언어 안에서 무용을 읽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시각에서 선택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정치적인 욕망이나 유행이나 기류에 적당한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춤이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가 낯설기에 어떻게 큐레이팅이 필요한 것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전혀 다른 매체를 대하는 것처럼 다루는 거죠. 미술관에 들어가서 처음 전시를 보는 기분으로 무용이라는 매체를 대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김지연: 저는 그것을 미술계의 전반적인 산만함과 분주함 탓이라고 봐요. 모든 요소를 미술로 수용하면서 얇고 넓게 산만하고 밀도 없이 분주하게 흡수하니까 사색이 없고, 사색이 없으니까 공부가 없고, 공부가 없으니까 접근이 게으르게 되는 거 아닌가.

왼쪽부터 송주원, 김재리, 박수지, 김연임 ⓒFotobee_이병곤
퍼포먼스의 매커니즘: 시간성과 장소성
김재리: 무용을 기반으로 안무를 하면서 다른 작업을 하는 작가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저는 안무가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춤 그대로 미술관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데에서 오류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생각했던 춤이 다른 공간, 다른 작가와의 협업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전환 되는가를 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자신이 계속 해왔던 대로 미술관에 가지고 가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 오류가 생기지 않을까요?
김지연: 공연예술의 기본 요소가 장소에 대한 탐색과 시간에 대한 고민이라고 했는데, 왜 전시장으로 들어올 때는 그 고민이 휘발되는 건지 궁금하네요.
김재리: 익숙한 극장도 매번 새롭게 탐구하고 질문하는 안무가라면 미술관에서의 작업과 리서치에 안무와는 다른 특별한 무엇인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장소나 시간을 다루는 방식과 몸이 위치했을 때나 다른 오브제를 만났을 때 형성되는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죠.
김지연: 전시를 기획할 때, 작가의 기존 작업을 가지고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고, 주제에 맞게 커미션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커미션 작업을 할 때는 기획자가 작가와 협력하기도 하지만, 기존작업을 전시할 때는 있는 그대로 가져오거든요. 그건 기획자가 만들어 놓은 퍼즐판 중 A가 비어있는데 그 작업이 A에 적합할 것 같아서 가져오는 거예요. 라이브 퍼포먼스는 이미 완성해둔 작업이라고 해도 계속 움직여요. 고정되어 있지 않은, 유동적인 작업과 치밀하게 만나는 방법을 저를 비롯한 많은 기획자들이 잘 모르는 건 아닐까요.
박수지: 기획전시에서 안무가를 시각작가와 동일선에 두고 전시하는 경우가 있나요? 분류해서 프로그램처럼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김재리: 퍼포먼스와 운동성이 기획의 메인이 되는 곳은 퍼포먼스로 구성되긴 하는데, 아까 말씀하셨던 전시들은 큐레토리얼한 작업이라 그에 적합한 작업을 들여오는 거죠. 작업을 어떻게 포섭할 것인지와 컨텍스트 안에 어떤 순서로 놓을 것인가에 따라서도 큐레이터가 개입할 부분이 굉장히 많이 있을 것 같아요. 큐레이터가 고민해야 할 건 무용과 미술이 아니라, 내용 안에서의 구조와 컨텍스트를 분석하고 비평,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송주원: 다들 그에 대한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는데,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 때문에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김재리: 지금까지 예술의 역사에서 무용을 다뤄왔던 습관들이 있잖아요. 예술로 취급하지 않았거나 다른 예술의 장식으로 썼던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거든요. 그리고 철학자들이 무용을 많이 다루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철학자들이 무용을 다루는 방식은 은유적이고 추상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무용을 장식 효과나 기운을 환기시키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예술이 아니라 취향으로 치부되었기에 그 안에서 미학적 구조가 발전하기 어려웠어요.
송주원: 최근에 어떤 시각예술작가를 만났는데, 무용가와 작업을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생각보다 작업이 어려웠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알기로는 그 작가와 함께 했던 무용가는 안무가보다 무용수의 역할을 많이 했었던 사람이었어요. 사실 어떤 상황을 만드는 안무가와 무용수는 다른 역할인데, 그게 잘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게 어렵죠. 그런데 무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미술관에서의 작업에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고 미술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기대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협업에 대한 기대가 작동하는 거죠.
이상적인 협업: 개별 실천과 복수의 정체성의 사이
김재리: 미술관에서 춤을 가져올 때, 신체가 가진 정치성과 행위의 수행성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아요. 이미 구축된, 개념화된 어떤 상황에 몸을 놓으려고 한다는 거죠. 아까 말씀하셨듯이 안무가가 시각예술가와 작업을 할 때 소통이 안 되는 부분이 있잖아요. 이미 셋팅된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맥락으로 구축해놓고, 신체와 행위를 그 위에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은 안무의 구조와 움직임의 흐름에서 맥락이 생성되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저도 협업을 하고 있지만, 시각예술가와 안무가가 개별적으로 만났을 때 고려해야 할 점이 무엇이며 이상적인 협업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송주원: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시각예술가에게 워크숍을 같이 꾸리면서 작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아서 시작했던 적이 있어요. 제시한 주제가 제가 안무하는 방식과 신기하게도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소통이 가능했고, 제가 발견하지 못했던 신체의 아우라와 훈련되지 않은 신체가 표현하는 것들을 개념적으로 다루는 등 제가 감지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함께 선택하는 작업으로 진행되었어요.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서로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올려놓는 것에 대해 협의했던 게 많았죠. 음악을 쓰느냐 마느냐부터 의상을 어떻게 입히느냐 마느냐 이런 소소한 것 하나까지도 이야기하면서 만들어 나갔기 때문에 좋은 협업의 사례였던 것 같아요. 제가 수동적인 자세로 수행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구조 자체를 서로 이해하고 함께 만들어나가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재미있었고 결과도 좋았어요. 미술관이 작동하는 방식과 선택의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특히 더 서로에게 신선했었죠. 시각예술 작가의 입장에서는 개개인의 이야기가 무브먼트로 작동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는데, 텍스트를 기반으로 질문하고 찾아내며 퍼포머들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보게 되며 무용수들이 왜 이렇게 연습을 많이 하는 거냐고 놀라워했어요. 일반인도들 이렇게 오래 연습할 수 있냐고 이게 가능하냐 하기도 했고요, 저는 무대의 퍼포머로서 전시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연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설득을 했죠. 이렇게 서로의 부분에 대해 계속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며 협의를 해나갔어요.
김지연: 결국 연습을 통해 공동 작업의 완성도를 올리는 건데, 왜 연습이 작업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송주원: 그런데 그들 입장에서는 퍼포먼스의 과정을 처음 경험한 거니까 그런 거겠죠. 그들 역시 동작을 설득하고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배치할 것이며, 어떻게 만나고 헤어질지에 대한 과정을 경험하면서 왜 필요한지에 대해 점차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김재리: 보통 미술관에서 안무가와 협업할 땐 시각예술작가는 콘셉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안무가들은 움직임을 만들곤 해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안무가가 소비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시각예술작가의 전시 안에서의 구성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공연 자체가 다 퍼포먼스예요. 그런데 작가는 개념을 던졌고, 그걸 안무가가 모두 만드는 거죠.
김지연: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각예술작가가 전체 콘셉트를 짜서 퍼포먼스를 구성하는 경우, 대등한 수준의 협업이 안 되는 이유는 작가가 애초에 대등한 수준의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박수지: 그런데 이제 그 무용이 적극적으로 안무를 더 작업으로 끌어오지 못하도록 구조를 짰다고는 할 수 없는 거죠.
김재리: 작업할 때, 안무가들은 작업 안에서 콘셉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거든요?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작업 안에 들어가서 찾다 보니까 콘셉트도 더 풍부해지고 어떨 때는 방향이 틀어지기도 해요. 그런데 시각예술가들이 퍼포먼스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동시대 작가의 지위를 받기 위해서, 혹은 미술관에서 요구하거나 지원금을 받기 위해 퍼포먼스를 하겠다고 이야기해놓고 거기에 대한 매커니즘을 모두 안무가에게 전가해요.
송주원: 그런데 극장에서 하더라도 어떤 연출이고 누가 기금을 받아서 팀을 꾸렸냐에 따라 달라요. 안무가가 움직임을 모두 만들어서 주는 방식이 아니거든요. 동시대적으로 그럴 수가 없는 구조인 동시에 안무자와 무용수의 서로 암묵적인 동의가 있는 거죠. 협업할 때 안무가들은 작업의 섬세함이나 디테일을 더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전시장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있어 보여요. 왜냐면 설명을 해도 작가들이 상상하지 못하니까 시도 자체가 어렵고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 디테일의 차이가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만들 텐데 함께하는 작가가 그런 것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는 경우에는 설명이 어려우니 그냥 포기하고 가는 거죠.
박수지: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도가 아무리 높아도 물리적인 방법론이나 이런 과정을 모르면 성립이 안 되는 걸까요?
김재리: 퍼포먼스를 다룰 때는 리허설과 리서치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거고, 협업에서는 서로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든지, 아니면 실제로 워크숍을 진행한 다음에 시작하든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용어를 풀어내는 작업을 한다든지 어떤 전략을 선택할 것인지 각자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김지연: 그런다고 해서 입장이 바뀔 것 같진 않아요. 상대방의 작업 과정과 제안하는 방식을 이해한다고 해도, 자신의 작업을 하려고 하는 시각예술가가 안무가를 필요로 하고 안무가에게 요구하는 디테일이 점점 더 많아지겠죠. 물론 제가 시각예술가가 아니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지켜보기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시각예술가와 안무가의 협업으로 나온 작업을 각자 자신의 중요한 작업의 하나로 받아들일 것인지 궁금해요. 일생일대의 작업으로 여기고 자신의 소명을 쏟아붓는 게 아니라, 아름답고 적당하게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협의해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예술가였을 뿐, 이 안에서 이루어진 게 협업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결국에는 A 세계와 B 세계를 가진 사람이 협업했을 때 C가 나오는 게 아니라 A’나 B’가 나오는 거예요. 과연 이상적인 협업이 진행되어 C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겠냐는 질문이 있을 텐데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 거예요.
김재리: 서로 다른 게 만나면 기본적으로 충돌이 생기는데, 그 충돌 안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기대하는 것 아닐까요. 실제로 예술이 생산될 때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가 창조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믿고 있으니까요.
김지연: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는데, 자신의 것을 버리고 부딪히다간 결국 빼앗기게 되는 것 같아요.

김재리 ⓒFotobee_이병곤
제도와 탈제도화의 사이에서 수행되는 퍼포먼스의 차원
김재리: 제가 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언어예요. 협업자와 공유하고 있는 언어를 발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 언어로 설명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만 동일한 프로세스에서 함께하는 게 가능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오브제와 재료라는 용어가 중첩되어 사용될 땐, 어떤 용어를 사용할 것인지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보통 자신의 매체에 대한 자의식이 있어서, 협업을 하는데도 원래 무용은 이렇다며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번역하고 전환하는 것도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박수지: 정말 아름다운 생각이고 동의해요. 그런데 작업 중에서는 그런 장르가 분리되어 있어야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김지연: 장르를 분리하는 제도가 묶어주는 다름을 유지하는 거죠. 만약 이 경계가 무너지게 되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서 모든 장르가 똑같아지고 다양성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히려 아무런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어요.
김재리: 무용이냐, 미술이냐의 장르적 특성에서의 용어가 아니라 개별적인 작업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용어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현장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새로운 미학적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실험 안에서 새롭게 언어를 발견하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퍼포먼스 자체가 제도화되는 것 같기도 해요. 예를 들면 행정적인 서류에서 현대무용, 발레, 다원예술로 분류함으로써 다원예술을 지원하기 위해선 반드시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미술관에서도 전시와 렉처가 함께하는 퍼포먼스가 많이 등장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퍼포먼스가 제도화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김지연: 제도화가 이런 현상을 견인한 것 같진 않고, 이런 현상이 있었는데 제도가 그걸 흡수한 거라고 생각해요. 늘 그랬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제도들은 실험의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포섭하잖아요. 강의를 퍼포먼스의 이름으로 하고, 글이 퍼포먼스의 이름으로 상연될 수 있다니 새롭죠. 조금 틀어서 새로워진 것들이 제법 그럴듯해 보이잖아요. 그런 사례가 조금씩 쌓이면서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부분들이 제도의 필요성을 요청해서 제도가 화답한 상황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도의 입장에서는 헷갈리죠. 분류되지 않았던 작업을 다원이라는 이름으로 묶었지만, 다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태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대체할 것이냐가 그들의 주된 논의인 것 같아요.
송주원: 오히려 저는 무엇도 아닌 것을 무엇도 아닌 상태로 두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김지연: 제도는 평가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가장 흔들리고 있는 것을 선택할지, 잘 적응했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하는 거죠. 요즘 퍼포먼스와 고정되지 않은 신체를 미술관으로 들여오는 이유 중 하나는 미술관의 교육 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것도 과거처럼 감상에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 관객의 참여를 독려하는 거죠. 정책의 방향성에 맞게 미술관의 기능의 방점이 달라지는데, 퍼포먼스가 그 방향성을 실행하는데 효과적이지 않았나 싶어요.
박수지: 그런데 아까 김재리씨의 질문 중 제도화라는 용어를 어떻게 해석했냐면, 그것이 기존의 상위 카테고라이징 때문에 결합된 형태가 유형화되고 정형화된다는 것에서 제도화라고 해석했어요.
김재리: 왜냐면 미술관에서 신체를 사용하는 모든 작업이 퍼포먼스라는 하나의 장르가 되면서 무용의 문제의식에서 발생한 것들을 퍼포먼스, 혹은 다원예술로 구분하고 배제해요. 어떤 실험을 하더라도 무용의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퍼포먼스라고 정의 내리는 거죠.

지원금 제도에서도 다원 예술의 매체가 어떤 방식으로 예술적 제안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거시적인 질문을 던지는 대신에 무용 자체를 더 보수적으로 만들고 있어요. 심지어 무용 내부에서도 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로 나뉘어 있기에 지원금을 신청할 때 어떤 장르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잖아요.
박수지: 제도와 현장은 시차가 있기에 절대 일치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도의 분류 방법이 엉망진창인 만큼, 그 틈바구니 안에서 자신의 것을 찾거나 아예 쓰지 않거나 두 개의 태도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죠.
김지연: 현재의 무용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실험적인 작업도 언젠가는 결국 무용의 역사로 편입되겠죠? 그 실험이 ‘무용’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오려면 한 60년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지만요. 여하튼 시간이 흐르면 다 역사가 되겠죠. 제도권 무용계는 무용박물관이 필요한데 여느 박물관처럼 유물을 넣을 수 없기에 유물화된 인간들을 보존하는 건 아닐까요. 젊은 사람들이 기존 무용계의 틀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지를 세우고 실험, 도전하기 전에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특정 개인들의 욕망 덕분에 박제화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게 제도의 역할일지도 몰라요.

현재는 다양한 판에서 다양한 활동, 퍼포먼스들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무용이라면 무용이고 아니라면 또 아닌 그런 작업들이 진행 중이죠. 카테고리는 유동적이고요. 누군가는 무용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무용의 영역으로 편입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도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박수지: 이게 문제인 이유가 결과적으로 예술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인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무형문화재처럼 지켜져야 할 것에 대해선 가치를 매기기도 하고 매기지 않기도 하잖아요.
송주원: 결과물이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냐와 그 계보가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냐는 다른 거죠.
김지연: 시각예술은 그런 면에서 정말 영리한 것 같아요. 매우 보수적이고 굳건한 게 있지만.
박수지: 이미 시각예술이라고 했기 때문에 치고 빠질 수 있는 거죠.
김지연: 고여서 썩을 법도 한데, 뭐든 일단 끌고 들어와서 미술화한 다음에 개념을 다다닥 만들면서 유지해나가요. 미술은 정말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박수지 ⓒFotobee_이병곤
다시 생각하기: 열린 장소로서 ‘퍼포먼스’의 공간들
김재리: 지금 일어나고 있는 퍼포먼스에 대해 아직 이해가 부족하지만 이건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잘 짜인 공연을 하다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는데 그건 어떠한 해프닝이 아니라 그전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드러나는 순간이거든요. 그런데 그 행위를 신체가 어떻게 하느냐는 전략의 문제이며 안무적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선택적 텍스트가 쌓여 있고 형성된 구조 안에서 행동 하나가 일어나거든요.
김지연: 몸이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시대가 온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기획자들이 이런 작품들을 대하는데 서투른 거죠. 지금은 몸 자체가 전시장에서 움직이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만큼 몸에 취해있는 상태이고, 춤이 말하는 정교한 언어까지는 접속을 못 한 것 같아요. 그래서 기획에 잘 맞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초대했을 텐데도 그 작품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요. 작품에 대해 착각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경우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기획자들에게는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춤의 역할이라는 게 아직은 그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시간이 필요해요.
송주원: 이런 현상도 어느 정도까지 가다가 다른 세계가 열리면서 역사에서 그랬듯이 또 사라질 것 같아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핸드폰이 다하는 요즘 시대에 점점 몸이 없어지면서 몸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어요.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가 활발해지기 이전에 다른 태도이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유행병처럼 몸이 화두가 되면서 요가나 필라테스, 휘트니스 등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거든요. 여러 맥락에서 봐야겠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바람은 미술이나 무용이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지더라도 신체를 다루는 방식이나 이유 등을 깊게 사유하고 잘 작동되어서 좋은 작업이 나오고 그것들이 많은 사람과 함께 들여다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김재리: 무용이 스튜디오를 벗어나려고 하는 ‘포스트 스튜디오(Post-Studio)’의 프레임이 미술관의 고민과 접속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경향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고 몸의 실존의 문제를 다루게 된 것에도 분명하게 미술관 작업에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무용에 대한 미학이 풍부해지고 다양한 프레임이 생기면서 안무가들도 미술관에서 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시각예술가와 직접 대화하는 계기도 생기게 된 거죠. 이런 것들이 모두 긍정적인 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박수지: 그래서 전시가 되었든 이론이 되었든 비주얼 컬처를 제작하고 창작하고 그걸 다시 해석하는 과정에서 몸이 결합하는 것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보면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송주원: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신기한 게 2013년부터 일반인을 위한 워크숍을 하는데 신체에 대한 기대나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몸을 움직이는 것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척추가 어떻게 움직여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신기하게도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다양한 감각으로 읽고 표현하더라고요. 신체가 나타내는 어떤 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이 아닌 방법들을 찾고 시도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를 미술관에 맞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안무가 스스로 어떤 언어를 선택해서 자신이 다룰 춤 작업 자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거죠. 오늘 이렇게 막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안무가들, 큐레이터들과도 나누고 싶네요. 좀 더 깊이 있게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와 안무의 작동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김연임: 흥미로운 이야기 고맙습니다! 이후에 기회가 된다면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이야기 해 보아도 좋을듯 합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리. 웹진<춤:in> 에디터 이주연

김재리_드라마트루그 안무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14-2015년에 국립현대무용단 드라마투르그를 역임했다. 현재 안무 및 시각예술 분야에서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면서 컨템퍼러리 댄스와 퍼포먼스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김지연_전시기획자, d/p디렉터 전시제도 안에서 현대미술이 구사하는 비물질적인 전략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기획자 중심공간을 지향하는 d/p를 운영하면서 공간을 비롯한 전시 인프라를 만들고 공유하는 방법들을 실험하는 중이다.

박수지_큐레이터, AGENCY RARY 대표 서울을 기반으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학부는 경제학을, 석사는 미학을 전공했다. 부산의 독립문화공간 아지트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미술문화비평지 《비아트》 편집팀장, 《제주비엔날레2017》 큐레토리얼팀 코디네이터, 통의동보안여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2018), 《유쾌한 뭉툭》(2018), 《우정의 외면》(2015) 등을 기획했다. 현대미술의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의 우정, 사랑, 종교, 퀴어에 관심이 많으며 이 모든 관심을 전시 및 비평과 연계시키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최근 전시기획사이자 아티스트 프로덕션을 매니징하고 패트론 문화를 도모하는 AGENCY RARY를 설립했다.

송주원_안무가, 댄스필름 감독 일일댄스프로젝트그룹 대표, 안무가이자 댄스필름 감독이다.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시간을 축척한 도시의 장소들에 주목하고 그 공간에 투영되는 신체가 말하는 삶에 대한 질문들을 장소특정적 퍼포먼스와 댄스필름으로 구현한다. <풍정.각(風情.刻)>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으며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시각예술 입주작가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포럼영화제, 댄스필름페스티벌도쿄, 런던인터내셔널스크린댄스페스티발 외 에서 상영되었고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작품상(2017)과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상영부문 관객구애상(2018)을 수상하였다.

웹진 <춤:in> 편집부


목록

댓글 0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