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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8.13 조회 4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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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The Object in Use : 사물_Thing, Object, Matter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무용인을 위한 렉쳐 시리즈>는 무용의 창작 환경에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는’ 개념과 실천의 방법들을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공개강연과 워크숍을 진행한 후 이를 정리하여 싣습니다. 이 코너는 ‘영리한 땅’과 협력하여 진행합니다.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The Object in Use : 사물_Thing, Object, Matter

정세영_공연예술가

정세영 ⓒ서울문화재단
김재리: 안녕하세요? 이번 강의는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의 세 번째 회차입니다. 첫 번째 회차에서는 ‘드라마트루기’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었고, 두 번째 회차에서는 ‘아티스틱 리서치’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정세영 작가가 지금까지 이루어졌었던 작업과 자신의 작업을 중심으로 퍼포먼스, 무용, 안무, 오브제의 관계에 대한 강의를 준비해봤습니다. 정세영 작가는 무용과 연극, 미술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분입니다. 프랑스 몽펠리에 학교에서 안무와 무대미술을 전공하셨고 대학에서는 연극을 공부하셔서, 다양한 매체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여러분께 재미있고 유익한 강의를 들려주실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정세영: 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브제에 대해 강의해달라고 하셔서 덥석 수락하긴 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여러 생각을 해보니, 오브제를 사용하는 방법이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방법 역시 획일적이지 않고, 다른 작가와 안무가, 연출가가 사용하는 방법도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는 임의적인 기준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저는 작업에서 오브제를 많이 사용하는 편인데, 처음부터 오브제 자체를 사용하고 싶었던 것보다는 환경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까 소개해 드린 것처럼 무용을 공부했지만 무용에 관한 기술과 지식이 많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신체에서 생산되는 운동성을 사물로 전가하고 전이시키는 방식으로 작업 방향이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방식이 어떻게 이어졌고 다른 작업자들은 사물을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작업에서 발견되는 오브제

처음 보여드릴 영상은 프랑스 마임이스트 에띠엔느 드쿠르(Etienne Decroux, 1898~1991)의 작품입니다. 함께 영상을 보고 각자 제목을 상상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나무(Les Arbres, The Trees)> Excerpts from Decroux's show at New York's Carnegie in 1960 Filmed in his studio in New York
정세영: 지금 봤던 공연의 연상되는 제목이 있으신 분은 서슴없이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청중: 항아리
정세영: 항아리요? 정답을 들으시면 어이없어하실 수도 있는데, 이 작품의 제목은 그냥 <나무>입니다. 마임은 표현하는 방식이 직설적이어서 다음 영상도 쉽게 유추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공장(L' Usine, The factory)> Excerpts from Decroux's show at New York's Carnegie in 1960 Filmed in his studio in New York
청중: 개구리
정세영: 이 작품은 다소 난해한 것 같으니, 바로 정답을 말씀드리면 <공장>입니다. 정답을 들으면 제목과 움직임의 결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상징은 무언가를 표현할 때 매우 경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굳이 공장을 무대 위에 올리지 않아도 되고, 그 사람이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데, 사물을 가져와서 이야기를 대체할 때 그 효과가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수단을 경제적으로 잘 활용하는 안무가 중에는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가 있습니다. 피나 바우쉬는 상징과 은유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합니다.

다음으로는 <카페 뮐러(Cafe Muller)>라는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카페 뮐러(Cafe Muller)> / Pina Bausch, 1978
정세영: 탄츠테아터(Tanztheater)는 무용과 연극의 특성이 결합한 형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표현주의 무용과 상징주의 무용 형식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그 형식 안에서 신체만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나 바우쉬는 무대 위에서 언어로 대체 가능한 상징체계와 신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징체계를 양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전자는 이야기 배경과 장소를 무대화시켜서 관객이 언어로 치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후자는 관객이 신체를 통해 육체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을 자아낼 수 있도록 배치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연극에서 고전적으로 사용되었던 무대와 대소도구를 그대로 재현한 후, 그 위에서 춤을 추는 방식을 선택하여 언어와 신체가 양립하게 만들고 연극의 산문적인 특징과 무용의 시적인 특징이 양립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사람은 칸 토르(Tadeusz Kantor, 1915-1990)입니다. 폴란드 연출가이자 무대미술가이며, 제가 좋아하는 연출가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이 연출가는 상징과 은유 자체를 매우 고전적으로 무대 위에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데, 바로 연출가 자신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연출가가 무대 위로 등장하는 것은 ‘사건의 재현‘에서 ‘연극 현장‘으로 돌변하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거리감은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와는 성질이 다른 것 같습니다.

다음에 보실 작업은 <데드 클라스(Dead Class)>라는 작업입니다.

<데드 클라스(Dead class)> / Tadeusz Kanto, 1977
정세영: 지금 보시는 것처럼 칸 토르의 작업에는 인형, 특히 어린아이 인형이 많이 나옵니다. 그는 매우 고전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상징하곤 했지만, 자신이 무대 위에 올라가서 갑자기 개입하거나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만드는 방식으로도 작업하곤 했습니다. 조금 더 보고 싶지만 (웃음), 지금까지의 영상을 보면 실질적인 오브제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연극과 무용에서는 오브제의 역할보다 오브제와 다른 요소들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무엇인가를 실질적으로 오브제라고 이야기할 때, 시각예술에서 나오는 오브제와 성향의 차이가 조금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레디메이드 혹은 파운드오브제라고 불리는 작업의 경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위를 박탈하고 새로운 지위를 덧입혀놓습니다. 그런데 연극과 무용공연에서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물에 의지하기보다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주요 소재가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레디메이드 오브제와 파운드오브제는 다른 요소와 연결이 되었을 때 작동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오브제를 사용한 초창기 미술 퍼포먼스에서 사용했던 방식인데, 그 예로 언급되는 마리아 아브라모빅과 울라이(Maria Abramovic & F. Ulay)의 작업을 보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디 아더 : 레스트 에너지(The other : Rest Energy)> / Marina Abramovic & F. Ulay, 1980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위를 박탈하고 새로운 지위를 덧입힐 때, 오브제가 사람과 함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이올린의 경우, 부수고 불태우고 절단하거나 입으로 뜯는 작업이 가장 흔하게 이루어집니다.

다음으로는 사물을 오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보셨던 것처럼, 대상을 바꾼다거나 용도를 바꾸는 방법으로 새로운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테칭 시에(Tehching Hsieh)의 <원 이어 퍼포먼스(One Year Performance)>라고 1년 동안 린다 몬타노(Linda Montano)와 끈을 묶고 1년간 지냈던 작업이 있습니다. 이렇게 묶어야 할 대상과 기간을 일반적이지 않게 설정하여 다른 이야기를 창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원 이어 퍼포먼스 1980-1981(One Year Performance 1980-1981)> / Tehching Hsieh Nick, 2014 ⓒ Rococo Productions
Thing, Object, Matter
이쯤에서 미술류 퍼포먼스와 공연류 퍼포먼스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그 경계가 매우 희미해졌으나, 그 잔재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변모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미술류 퍼포먼스가 행위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했던 것과 달리, 공연류 퍼포먼스에서는 이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미술류 퍼포먼스에서는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며, 공연류 퍼포먼스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관람하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구분 짓는 게 큰 의미는 없지만, 관람하는 데에 있어선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상적으로 많은 공연예술가가 오브제의 본래 의미를 곡해하거나 왜곡하여 다른 의미를 창출해내는 방식을 취해왔는데, 근래에는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오브제 사용방법을 ‘오브젝트(Object)’라고 칭하기보다는 ‘띵(Thing)’이라고 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띵(Thing)’은 기호와 상징을 무력화시켰지만, 무대 안에서 작동되는 어떠한 것을 찾으려고 하는 행위는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에는 이러한 모습이 ‘의미 없는 행동’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자에게 주어진 이름(nom donne par l'auteur)> / Jerome Bel, 1994 at Teatro CineArte for the festival Skite
제롬벨(Jerome Bel)의 초기작 <저자에게 주어진 이름(nom donne par l'auteur)>입니다. 이 작업에서는 여러 가지 기호(사물)들을 계속 충돌시키지만 아무런 의미가 생성되지 않으며, 우연히 상징이나 기호가 생성되는 것조차 경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보실 작업은 <탱고(Tango)>라는 애니메이션입니다.

<탱고(Tango)> / Zbigniew Rybczy?ski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하는 행위를 보면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관객이 기대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관객이 목격한 것은 추상적인 상징이나 계몽적인 메시지가 아니며, 움직이는 행위에서 느껴지던 운동성뿐입니다. 다음으로 볼 작업도 운동성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해리슨 앤드 우드(Harrison and Wood)> / TateShots
퍼포먼스에서 기존의 사물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서 사물을 무명화하여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게 되면서, 관객의 관람 태도가 환영을 관람하던 것에서 현장을 바라보고 즐기는 것으로 변화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연계하여 사물을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브젝트(Object) 대신 매터(Matter)라고 이야기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어떠한 문제의식을 무대 위에 상징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무대 위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빈 의자’는 ‘부재’나 ‘그리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상징은 작가의 의식에 따라 사물의 지위를 새롭게 부여하거나 멀리 이탈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매터(Matter)가 취하는 방법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의자의 존재에 대해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자가 있으면 ‘이게 왜 여기 왔는가?’, ‘누가 앉을 것인가?’, ‘왜 이것을 버리지 못하는가?’, ‘이것이 만들어진 과정이 공정한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공연을 예로 들면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 <언캐니 벨리(Uncanny Valley)>라는 작업이 있습니다. 저기 있는 분을 똑같이 복제해서 로봇을 무대 위에 세우고 그 로봇에게 다른 지위를 부여한다기보다는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현장을 만드는 거죠.

<시야바쉬의 죽음을 애도하며(SAVU?UN, Grieving for the death of Siyavash) / Darabi, Sorour
다라비 소로(Darabi Sorour)라는 안무가는 이란 출신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란에서는 여성이 춤을 추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지하에서 춤을 몰래 췄었고, 프랑스로 넘어오면서 마음껏 춤을 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성전환을 하고 무대에서 춤을 춥니다. 무대 위의 그(녀)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알 수 없는 혼돈에 휩싸입니다. 덥수룩한 갈색 수염 아래로 여성스러운 젖가슴이 보이고, 그 가슴 위에 털이 수북하게 나 있는 상태로 애도를 표하는 이란의 전통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춤이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에서 ‘누가 추는 것인가’라는 실질적인 질문이 극장 안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간 동안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의응답

정세영 ⓒ서울문화재단
청중 1: 강의를 시작하실 때, 농담조로 본인이 춤을 추지 못하니까 사물에 자신이 할 일을 전가하면서 작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춤을 출 수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셨을 것 같은지 궁금합니다.
정세영: 춤을 출 수 있더라도 지금의 작업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전적인 방식을 추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큰데, 고전적 카타르시스인 관람의 즐거움을 현대에서도 죄책감 없이 느낄 수 있을지가 제 고민입니다. 만약에 제가 춤을 추더라도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굳이 사물을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물을 사용하는 건 필요에 의해서였지 선택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청중 2: 변방연극제에서 하셨던 <쉐임쉐임쉐임(Shame Shame Shame)>이라는 공연을 보면서 오브제가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가만히 있는 오브제를 들어 올려서 움직이게 하거나, 포그머신과 같은 장치로 오브제의 상태를 변화시키면서 오브제를 움직이게 하여 미장센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께서는 서사구조에 의해서 오브제를 선택하는지, 오브제와 오브제의 연결성으로 선택하는지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정세영: 오브제를 선택할 때마다 다른데, 그 장면은 제가 춤을 추는 것처럼 만들어야겠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그럼으로써 춤을 추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요소를 노출하였고, 그냥 막대기를 돌리는 게 아니라 발레바를 돌렸던 것 역시 이것이 춤과 가까운 행위라는 것을 피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오브제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운동하는지에 따라 선택하곤 합니다.
청중 3: 저는 작가님 작업에서 오브제들이 가지고 있는 운동성으로 작품의 서사구조와 이미지 연출을 하는 걸 목격하는 게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아까 무대 위의 모든 것을 오브제로 보신다고 하셨는데, 무대 위에 오르는 퍼포머가 오브제라면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정세영: 저는 무대 위에 올라간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관객에게 피력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연출의 중심에 두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무대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배우와 퍼포머, 오브제의 레벨이 같습니다. 동일한 권력을 갖고 있으나 역할이 다를 뿐이며 적극적이고 적극적이지 않고, 움직이는 계기가 되는 역할을 하고 그렇지 않은 역할을 하는 정도의 차이를 가진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용인을위한 렉처 시리즈 <사물> ⓒ서울문화재단
청중 4: 최근 작업에서 텍스트를 많이 사용하고 계신 것 같은데,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텍스트에서 오브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춤과 연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텍스트를 춤 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연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두 방식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세영: 저는 나름의 기준대로 장르적인 특성을 정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무용을 한다는 인식이 있을 때는 운동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떠한 구조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보다 움직임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움직일 수 있는지와 그 움직임이 어떤 연상작용을 만들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무용 작업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기본구조라고 생각하므로, 몸과 오브제를 통해서는 그렇게 잘할 수 없으니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연극을 할 때는 이와 다릅니다. 연극의 역할이 무엇이며 연극의 특성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니 다른 장르보다 조금 더 많이 이야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고 느꼈으며 발설함으로써 부끄러움이 생기고, 사람들이 언어에 익숙해지면서 작품에 담긴 제 의도가 쉽게 파악되면서 제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연극은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에 쉽게 파악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텍스트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극의 이야기 구조는 방향성으로 치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시간과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며, 다각적인 방향으로 동시에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구현할 방법에는 어떤 게 있을지 연구하는 중입니다.
청중 5: 고전적인 방식을 지향하신다고 하셨는데 앞으로의 방향성이나 공연의 형태를 관객과 공유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방향성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정세영: 요즘 어디를 가더라도 연극을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모든 대상을 거시적으로 봤던 태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 판단하며 스스로 그것이 맞다고 여겼는데, 그게 꼭 맞는 게 아니며,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서 판단하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간단히 말하면, 거시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신을 비판하고 그렇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연극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밖에서 보고 선택하는 것이 불균형하고 합리적이지 않아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어느 순간 합리적이지 않고 불균형한 판단이 필요할 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시적인 태도만 지니고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선택이 필요할 때 선택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름대로 안에서 바라보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청중 5: 무용에서 작가님이 원하고 상상하는 걸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브제를 사용한다고 하셨는데, 사실 무용을 하고 춤을 춘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그걸 구현하는 도구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작업이 연극이라고 했을 때, 무용과 현격히 다른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세영: 방식은 그렇게 다르지 않은데, 덜 사용했던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을 때, 단순히 연극이라는 이유로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밖에서만 보면 많은 단어가 필요 없는데 안에 들어가면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언어적 요소 외에는 형식적으로는 상당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청중 7: 강의 전반부에서 시각예술에서는 오브제가 본래 가지고 있는 상징에 새로운 상징을 집어넣는 형태로 존재했고, 공연을 중심으로 하는 최근의 경향에서는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해체하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의 작업에서 오브제는 둘 중 어떤 형태와 가깝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작가님의 작업 중 운동성을 기준으로 의미를 해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 역시 춤추는 신체의 운동성을 지닌 오브제라고 한다면 상징성을 가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정세영: 저는 모든 작업에서 연출로 의미를 창출하지 않으려고 상당히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일단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과 운동성이 제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발현되고 있을 것 같고, 실제로 저는 제 작업을 보면서 제 상태가 이렇다는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향성은 제가 없애고 싶다고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저절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정세영 ⓒ서울문화재단
청중 8: 말씀을 들으며 오브제가 인간과 동일한 권력을 지니는 작업의 연습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오브제를 활용하는 연습을 한다거나, 고전적인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는지 궁금하고, 본인의 방법이 고전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정세영: 저는 상당히 고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관람할 때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거나 서로 왕래하는 것보다는 벽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는 게 가장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연습이 힘들었습니다. 처음에 함께 작업했던 분들은 연극배우였는데 그분들은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는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어도 그렇게 되어버리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우들도 저와 계속 작업하면서 역할을 전가할 수 있는 타이밍과 전가하는 상태에 익숙해져서 수월하게 연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청중 9: 말씀하셨듯이 연극배우는 역할에 따라 자신의 신체를 위치시키거나 몰입한다고 생각하는데 무용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미술에서는 퍼포머의 신체가 어디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정세영: 저는 연극을 하다가 무용학교를 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무용학교에 갔는데, 대뜸 움직이라고 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연극배우는 어떤 동기가 있어야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다녔던 미술학교에서도 퍼포먼스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그곳에서의 퍼포먼스는 행위의 결과가 중요해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온몸에 타투를 하고 미술관 가운데 서 있다면 그건 자신의 행위가 이미 끝나버린 상태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공연에서는 자신이 춤추고 연기하는 이유를 결말에 이야기하거나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웃음)
청중 10: 무용에서는 오브제가 배경이 되거나 춤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거나 행위할 수 있는 무기를 구현해주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술이랑 연극과 섞이면서 오브제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서사에 집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무가들이 미술관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면 자신의 신체를 오브제로 취급하는 걸 견디지 못하곤 합니다. 자신이 대상으로 다뤄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까 이야기하셨듯이 오브제와 신체의 권력이 동일하다는 전제에서는 공연의 맥락과 방법론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신체와 오브제가 어떤 방식으로 다뤄져야 하며, 실제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정세영: 개인적으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용공연을 보다 보면 결국 모든 게 무명화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체를 오브제스럽다고 느꼈던 경우가 많기도 합니다. 실제로 무용학교에 있을 때 이본느 라이너의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고등학교 학생들이 공연을 관람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연이 어떤 것 같은지 묻자, 매우 컨템포러리한 무용 같다고 하면서 옷 색깔이 알록달록 하다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검은 옷을 입었다면 모던 댄스였을 것 같다고. (웃음) 이렇게 무용에서도 장르마다 그것에 적합한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대상화가 되는가 안되는가는 퍼포머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큰 부분인 겁니다.

다른 질문이 없으시다면 이상으로 강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어주셔서 모두 감사합니다.

무용인을위한 렉처 시리즈 <사물> ⓒ서울문화재단
정세영_공연예술가 정세영은 다양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극장이라는 공간을 탐구하고 있다. 특히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극장의 환영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매체의 융합보다는 그것의 고유한 성질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영리한 땅 <영리한 땅>은 장르 중심이 아닌 그 경계로부터 창조적 다이나믹을 실험하는 예술 단체이다. 2019년부터 예술생태계 내부의 창작 플랫폼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웹진 <춤:in>과 함께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구성원으로 권령은, 지미세르, 김선주, 구본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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