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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계 다양한 전문가들을 소개합니다.

2019.07.10 조회 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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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작업은 노동입니까?”, 예술에 던지는 질문의 의미

조형빈_자유기고가

ⓒunsplash
“당신의 작업은 노동입니까?”
이 질문은 어떤 맥락에서는 매우 평범하며 의미 없는 질문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이것이 ‘예술가’라는 특수한 직종의 사람들에게 던져졌을 땐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몇 년 전부터 숱하게 거론되어왔던 예술과 노동에 대한 질문과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들은 과연 ‘어떤 종류의 노동’이냐는 질문은 이제 더는 새롭지 않다.

2011년 한 안타까운 예술인의 죽음으로 촉발되어 사회적 이슈가 된 예술과 노동에 대한 문제는, 예술인들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고 복지 제반을 지원하기 위한 ‘예술인복지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이 법을 기반으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되었고, ‘예술인’은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다루어져야 할 이슈가 되었다. 최근 이어진 예술계의 미투 운동을 통해 올해 초 예술인복지법은 다시 한번 개정을 맞았고, 예술인들의 예술 활동과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예술인들은 정말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위치에 놓여 있을까?

예술가들을 복지의 대상으로 묶고 지원이 필요한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예술가를 어떤 ‘특정한 형태’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 집단으로 바라본다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여기서 예술가가 하는 일들은 노동의 기존 개념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특수한 것이며, 그 특수성을 기존의 법령이 포괄할 수 없기에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시행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 특수한 ‘노동’, 그것이 작동하고 뒤틀리는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노동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과 노동을 주제로 이루어졌던 뜨거운 토론 속에서 두드러진 것은 두 개의 상반된 입장이었다. 첫 번째 입장은 예술가들이 하는 일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노동에 속하는 것으로, 예술가들의 작업은 당연히 노동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는 두 번째 의견은 예술이 가지고 있는 반/비노동적 특질에 주목하여, 예술 자체가 노동의 기본적 속성이 배태되어 있는 자본주의 자체를 뛰어넘어 다른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의 개념으로 예술을 포섭할 수 없다는 견해였다. 두 가지의 주장은 ‘예술은 노동이다’라는 명제를 두고 팽팽히 맞섰는데, 사실 같은 명제를 두고 대립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두 견해는 서로 맞선다기보다 각각의 방식으로 예술의 특성을 드러내는 주장들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하고 있고, 그것을 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수단으로서 예술가들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너무도 당연하게) 노동이다. 더불어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들은 단순히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장 재화로서 기능하지 않으며,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창작을 불러일으키는 생산 주체의 정동을 고려해보았을 때 당연하게도 가장 반자본주의적이다. 따라서 두 개의 주장은 양립 불가능한 성질의 것으로 볼 수 없다. 예술을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근거하고 있는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 위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 위에서 만들어지는 예술 작품은 자본주의의 동학으로부터 뛰쳐나가 자본주의 자체를 공격한다. 예술은 노동인 동시에 노동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예술의 가치와 구조적 왜곡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작업이 어떻게 가치 매겨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매겨지는데, 예술 작업 역시 하나의 ‘노동’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가치 역시도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선에서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예술에 부과되는 가치는 이미 통용되고 있던 노동의 결과물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에 있어서 과업 수행의 주체가 되는 예술가는 단순히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지고 예술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성 속에서 ‘예술가의 노동’은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왜곡되고 폄하된다.

다양한 예술 중에서도 무용은 공연예술의 형태를 띠고, 협업의 과정을 통해 결과물이 완성되는 예술 장르다. 안무가와 무용수를 비롯한 여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에 참여해야만 작품이 완성될 수 있고, 특정한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에 창작의 결과물이 상연되고 나서는 어떤 형태로든 작품이 더는 남아있을 수 없는 특징을 가지는 예술이다. 안무가 전승되어 다른 곳에서 공연이 올려진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공연’일 뿐이고, 작품이 작품 그 자체로 보존되는 게 공연예술에서는 불가능하다. 특히 이것은 인간의 육체를 재료로 삼기 때문이기도 한데, 무용이 (거의) 언제나 협업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특성과 더불어 여기에는 벗어나기 힘든 근본적인 권력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작품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이끌어가는 근대적 의미의 안무가는 무용수를 (다른 여러 재료와 함께) 재료로서 소비하고, 무대 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작품 안에서 안무가의 지시, 가이드, 권유, 제안은 절대 명령과 같은 것이 되며, 다른 협업자들은 이 권력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이것은 무용 안에서 예술 노동으로서 이루어지는 안무가와 무용수의 예술 노동이 왜곡될 수 있는 구조적 근거가 된다.

한국에서 예술과 노동을 이야기할 때 또 한 가지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예술이 제도권 교육 안으로 들어와 자리 잡게 된 과정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다수의 문화적 유산이 상실된 역사적 배경 덕분에, 한국에서 예술은 근대화와 산업화가 완성의 단계에 이른 최근에 와서야 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전까지 소수로 활동하던 일군의 예술가들이 후학을 양성하고 제도권 교육으로 들어와 자리 잡으면서, 예술은 ‘직업적 정체성’을 가지고 교육되기 시작했다. 대학교육이 거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학벌’이 중요한 사회자본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예술은 제도권 교육과 결합하여 하나의 특별한 교육 시스템을 형성하게 되었다. 균질적이고 보편적인 작업이 될 수 없는 예술의 특성상 예술은 항상 도제적 시스템을 통해 교육되어왔는데, 이것이 대학교육과 결합하면서 매우 강력한 권력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예술을 선택하기도 했고, 교육이 주는 사회자본을 벗어던지기 힘든 한국에서 예술을 선택하는 것은 곧 이러한 권력 관계 속에 자기를 적극적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이렇게 무용이 가지고 있는 협업적 특성과 제도권 교육의 구조적 특성이 만나, 직업 정체성으로서의 무용은 견고한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견고하고 강력한 구조에는 반드시 권력이 작동하게 마련이고, 예술계에서 권력의 작동은 결국 예술가들의 예술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빠져나갈 수 없는 단단한 구조 속에서 노동의 가치는 존중될 필요가 없었고, 책임과 부담은 위계질서의 아래쪽을 향해 계속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예술이 지닌 특수성은 예술 노동 자체를 보편적 노동과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예술의 특수성은 단지 노동의 가치를 왜곡하고 폄하하기 쉽게 만드는 단초가 되어버렸다. 창작의 가치는 온전히 보존 받지 못했고, 예술 노동은 ‘노동’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예술가들 본인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노동’의 대가는 다른 곳에서 구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생계를 위한 곳에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하면서 쉽게 소진되고 주저앉고 만다.
‘노동’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
예술을 단순히 노동으로 치환해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예술이 노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예술인의 처우와 환경을 개선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이 점차 파편화되고 불규칙한 것들로 변화하는 가운데 노동을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단순한 형태의 비숙련 노동에서부터 역대 연봉의 전문직까지, 노동은 그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계약직과 연봉직의 형태로 변화해 나가는 중이다. 이제 사람들은 노동자적 특질, 계급적 공통점을 바탕으로 연대하지 않는다. 이 불안정 노동의 형태는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흐름이지만, 실상 이것은 바로 예술가들이 오래전부터 행해 온 작업의 구조와 유사하다. 따라서 예술과 예술 노동을 잉여와 유희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노동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다면, 비정규적이고 불안정한 지금의 다양한 노동들을 온전히 노동으로 받아들이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단초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이 논의는 예술을 노동화 하자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의 노동 자체가 비물질화되는 사회적 변화의 과정을 예술 노동의 비균질성, 불안정성을 통해 바라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예술이 노동의 개념을 해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노동이 다양한 국면에서 충분히 ‘미학화’ 되었다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예술이 자본주의 안으로 충분히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술은 그 특질 상 본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최후까지 노동과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수단이자 마지막으로 참조할 수 있는 상상력의 근원이다. 체제 안에 종속되지 않고 구조를 마음껏 넘나들며 가로지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예술의 특징이자 특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이 구조에 편입(제도권 교육을 통해 예술가들이 길러지는 과정)되면서 그 부작용이 사회적으로 대두된다고 하여 단순히 예술의 문제를 노동의 문제로 치환할 수는 없다.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것을 예술의 배반과 예술의 타락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의 상태가 변화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예술을 통해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이다. 단순히 예술을 노동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닌, 예술을 통해 노동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을 묶여있는 지금의 상태에서 건져와야 한다. ‘예술계’라는 자신만의 성채를 짓고 수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을 발 아래로 끌어들여 착취하는 구조로부터 탈출해, 선생 대 학생, 안무가 대 무용수가 아닌 예술가 대 예술가, 작업 대 작업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계로 만나야 한다.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 예술은 비로소 사회 안으로 한 발자국 걸어들어올 수 있다. 하나의 사회적 생산물로서 그 필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야만 예술가의 작업 역시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어떤 예술가들은 마치 사회구성원이 아닌 양 행동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천상계에 있는 요정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또 다른 부류는 개인이 홀로 건사할 수 없는 구조적 적폐 속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혹은 이것을 해결함으로써, 우리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공적인 것’과 호흡하고, 동료와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지, 스승이나 혹은 그 다른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쓰고 만들고 다루는 몸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함께 움직였을 때 거기에 어떤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대척점으로서 권력의 구조를 타파하고 극복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예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조형빈_자유기고가 대학에서 사회학과 문화학을 전공하고, 무용에 관한 문화연구를 해오고 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 글을 쓰며 몇 번의 무용 작업에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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