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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19.06.27 조회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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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새로운 기회를 주는 공간이기에 떠날 수 없어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 김매자

창무예술원 연습실 ⓒFotobee_양동민
1.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아직도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작품을 만들고 싶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싶고, 지금까지의 작품들도 정리하고 싶어요. 작품을 정리하면서 저 자신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보고 싶고 관객들에게도 그저 공연으로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이렇게 저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냥 마무리되는 건가, 환경이 나를 소멸시키는 건가 싶죠. 기회는 주어지지 않지만 제가 직접 이곳에서 오픈 클래스를 열고 듣고 싶은 사람은 와서 함께 이야기하자는 의미로 몇 년간 계속하고 있어요. 그리고 해외로도 많이 나가고 있어요. 북경무용대학은 명예교수와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중앙 희극원과 연변 대학에도 객원교수로 다니고 있죠. 만약 이런 기회조차 없었다면 생각이 없어지고, 저 자신이 소멸해가는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놓지 못하고 있나 봐요. 어느 누군가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욕심이 지나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즐겁고 제자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재밌는걸요.

2. 당신에게 이곳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춤 전용 소극장이에요. 제가 한국 창작춤을 시작한 이후, 국립극장 대극장이 만들어졌는데 운동장이 연상될 정도로 정말 넓었어요. 그렇게 무대와 관객과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표현보다는 형태가 강조되기 시작했죠. 실제로 그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무용수들의 표현력이 감소하고 대형화된 무용이 늘어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잘 표현하고, 제자들의 표현력을 드러내기 위해선 소극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게 1985년도에 창무예술원의 전신인 춤 전용 소극장을 만들게 되었죠.
그 이후, 이 공간에서 춤과 타 장르의 만남을 시작했어요. 춤은 몸으로만 추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와 소재가 필요한데, 그 당시에는 춤은 춤. 문학은 문학. 이렇게 별개인 것처럼 생각되곤 했죠. 그래서 작품을 할 때 다른 소재를 가져오는 걸 어려워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게 춤과 시의 만남이었어요. 구상 선생님처럼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들과의 만남을 시작했죠. 춤과 시인의 만남을 시작으로 춤과 미술작가의 만남, 춤과 건축가의 만남 등을 진행했어요. 지금 융복합이라고 일컬어지는 걸 그때 시작했던 거죠. 이런 만남이 시작되자, 우리 제자들의 움직임이 섬세해지고 표현력이 좋아지는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죠. 당시의 공간은 오래돼서 지붕이 뚫리고 하늘이 다 보이는 공간이었어요. 공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5년 만에 정리하고, 이 건물을 92년도에 짓기 시작해서 93년도에 오픈했어요. 제가 너무 앞서가서 건물 전체를 아트센터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정말 힘들었죠. 어렵게 공간을 지은 만큼, 제 춤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작품에 대한 사상과 철학을 완성 시켜준 장소가 되었어요. 처음에는 건물을 지으면서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5년 동안 춤을 만들지 못했어요. 그렇게 힘들었던 시기를 극복하니 비로소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마침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에 가서 솔로 작품을 만들 기회가 생기면서 다시 춤을 추게 되었죠. 그 당시 작품이 <일무>라고 해를 부르는 춤인데, 이곳에서 5년 만에 만든 작품이에요. 그게 일본에서는 1998년에 올라갔을 거예요. 이 작품에서 사용한 음악을 그대로 가져와서 <하늘의 눈>이라는 군무를 새천년을 맞이하는 1999년에 제자들과 함께 추기도 했어요.
이 작품을 시작으로 제 춤의 화두가 만들어졌어요. 그동안 건물을 지으면서 마주했던 어려움이 많았지만, 춤을 추며 밝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면서 제 화두가 밝음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밝음을 지향하는 춤을 추고 있어요. 그리고 2000년에는 우리나라 판소리에서 시작된 작품, ‘심청가’를 1시간 50분짜리로 만들었어요. 마지막에 심봉사가 눈을 떠서 밝음의 세상을 마주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밝음’에 대해 이야기해요. 다음은 제 인생의 자전적인 작품인 ‘얼음곽’이에요. 북한 강원도 북고성에서 탈북할 당시,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내딛던 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담긴 작품이죠. 그래서 무용수들에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때의 어려움을 표현하게끔 했어요. 이 작품에는 우리 민족이 그런 어려움을 겪었기에 이렇게 평화롭고 밝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죠.
이처럼 이 장소에서 1시간이 넘는 작품들을 매해 창작했어요. 말 그대로 창작산실이죠. 이건 제 평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작품들 모두 이곳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소극장을 운영하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를 떠날 수 없죠.

3. 이곳에서 춤은 어떻게 발견되나요?

이 공간에서 공연이 이루어지고 젊은 사림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면 저에게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고 느끼게 돼요.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직도 하고 싶은 거예요. 전통춤을 새롭게 보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완전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또 새롭게 만들고 싶어요. 여기서 많은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제 마음에 계속 새로운 기회를 주는 공간이죠.

4. 이곳에서 춤은 어떤 모양인가요?

사람마다 이 공간을 굉장히 다르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떤 이는 현대적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전통적이라고 이야기하죠. 어쩌면 전통과 창작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유럽에서 오는 사람들은 이 공간에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도 해요. 불길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영감을 주는 것 같은 거죠. 그리고 아늑하고 산만하지 않아서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어떤 무용가들은 이 공간을 조명이 잘 먹도록 다 까맣게 칠하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빨간 벽돌 자체가 모던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벽돌 하나하나에서 호흡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이대로가 좋아요. 이처럼 지나가는 사람의 손길도 느껴지고. 전통과 현대를 넘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니까 계속 이곳에서 춤이 추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는 이런 공간이 없으니 더욱 특별하죠.

김매자 김매자는 한국 창작춤 무용가이다. 1971년부터 1991년까지 이화여대 무용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으며, 창무예술원을 설립하여 한국 춤의 새로운 양식을 이끌었다. 안무작으로는 <침향무>, <비단길>, <꽃신>, <봄날은 간다>, <Shining Light>, <춤본1,2>, <하늘의 눈>, <심청>, <FULL MOON>, <얼음강>, <대전블루스> 등이 있으며 , 현재 창무예술원 이사장, 무용월간지 《몸》 발행인, 중국 북경무용대, 연변대학, 중앙희극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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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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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윤우2019-09-17

    조동화 선생의 <춤>잡지를 오래전에 받아보면서 많은걸 배우고 간직하여왔어요 시인겸 화가 고,김영태와도 오랜 세월 가까히 지내왔습니다. 모든걸 아우르는 종합 퓨전의 앞서가는 공간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간직합니다 연면한 발전을 지켜가며~ 시인 장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