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4.12 조회 2001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식물 초심자의 배움과 탐구: 초봄 가로수 관찰기

[춤과 과학]



<춤:in>에서는 2019년 한 해 동안 춤과 과학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한다. 춤과 과학이 공유하고 있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춤과 과학 그 사이를 탐험한다. 과학 전문가와 과학을 그 소재로 다루는 예술가들의 글을 통해 새로운 정보와 영감을 전달하고자 한다.


[춤과 과학]
식물 초심자의 배움과 탐구: 초봄 가로수 관찰기

이소요_미술작가

ⓒ안난초
저는 자연사 표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다루는 미술작가입니다. 자연사는 현대 자연과학의 전신 중 하나이며, 역사적 가치관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수 세기 전 자연철학과 자연사를 탐구하던 사람들이 사고와 탐구 방법을 정교하게 다듬어오면서, 오늘날 셀 수 없이 많고 또 변화무쌍한 과학의 갈래들을 이루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업 과학자가 아닌 제가 하나의 과학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출발점에 항상 새로움을 갈망하는 ‘관찰’이 있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회양목
2019년 3월 서대문구 홍은동 길거리의 생울타리 회양목에 무더기로 만개한 꽃.
크기가 작고 꽃잎이 없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일 년 중 가장 먼저 개회하는 식물 중 하나이다. ⓒ이소요
이 글을 쓰는 2019년 4월 첫 주, 봄을 알리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렸고, 화려한 색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들뜬 행인들을 마주칩니다. 이들 바로 옆에 생울타리로 심어진 회양목이 있습니다. 이미 한 달 전에 꽃을 피워 지금은 열매를 키우는 중이지만, 그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가까운 과거에 어느 식물학자로부터 회양목 꽃 한 송이를 선물 받기 전까지 이 식물의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지금은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시내 곳곳의 회양목을 유심히 관찰하고 때때로 채집하거나 사진을 찍어 기록합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이 식물의 형태나 색뿐만 아니라 시간과 숨결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현미경이나 저속촬영 카메라 같은 광학기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식물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자 이제 회양목이 사계절을 보내며 하루가 다르게 변신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역량으로 감지할 수 없는 생명의 세계가 무한히 남아 있을 것을 짐작하며 이 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무심하게 지나쳤던 수십 년의 고집스러운 타성을 반성합니다. 제가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식물의 숨결을 감지하고 동작을 익혀가는 경험은 과학 연구라고 볼 수 없으며 식물 초심자의 배움이자 탐구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 역시 오랜 시간 엄격한 훈련을 거치며 자신과 연구대상을 한 몸으로 맞춰나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에게 회양목을 알려주었던 고마운 과학자는 생물을 자세히 관찰하면 잘 알게 되는 것보다,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은행나무
도심의 회양목은 사철 푸르고 키가 크지 않기 때문에 눈높이에서 관찰하기 쉬울 법도 한데, 너무 흔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건축물의 일부인 울타리로 이용되어서인지 무심코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또 다른 흔한 가로수인 은행나무는 가을이 되어 수명을 다한 잎이 거리를 노란빛으로 뒤덮을 때, 혹은 무르익은 종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구둣발이나 자동차 바퀴에 이겨지고 특유의 향을 뿜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선을 끄는 것 같습니다.
은행나무는 신생대 에오세부터 지구에 번성한 화석생물로 알려져 있으나, 자연 상태에서는 자생지가 확인되지 않아 멸종되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은행나무는 야생 생물을 가져다가 사람의 손으로 육종하고 식재한 조경 식물과 그 후손들입니다. 따라서 숲을 이루며 자생하기보다는 도로변, 공원 혹은 농장 등, 인간 생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도심의 은행잎과 종자는 대체로 포장된 길 위로 떨어집니다. 공원이나 농장에서는 흙을 만날 수 있겠지만, 그마저 관리인의 손에 재빠르게 치워질 때가 많습니다. 떨어진 종자가 발아하여 사람의 간섭을 피해 나무로 자라는 사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2019년 4월 서대문구 대현동 길가 화단에 사람들이 쓸어 담은 작년 가을의 은행나무 잔재들.
한 달쯤 지나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화단을 푸르게 뒤덮을 것이다. ⓒ이소요
제가 자주 지나가는 길가에 그렇게 떨어진 은행나무의 잎과 종자를 한곳에 쓸어 모으는 화단이 있습니다. 이 길을 다니면서 은행나무의 종자가 가을에 모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매달린 채 겨울을 나는 것도 많다는 점을 알게 됐고, 사람이 치워 놓은 종자 더미가 늦봄에 일제히 발아하여 빽빽한 ‘숲’을 이루다가 11월쯤 모조리 얼어 죽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이 화단의 은행나무는 마치 한해살이풀처럼 매년 새로이 싹트고 자라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은행나무가 죽고 썩으며 퇴적되는 흙 속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특별한 재료를 좋아하는 미생물, 곰팡이, 곤충과 동물이 모여 사는 특별한 생태계를 발견하게 될지 모릅니다.
2019년 4월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겨울잠을 마치고 막 움트기 시작한 은행나무의 겨울 눈 ⓒ이소요
초봄의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산책하면서 지난주까지만 해도 겨울잠을 자던 나무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겨울눈이 터진 자리에는 미세한 연두빛 주름들이 잎과 꽃으로 자라나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밀쳐댑니다. 두 주쯤 더 지나면 꼬불꼬불하고 단단하지만 제법 은행잎의 형태를 갖춘 어린잎들이 꽃송이처럼 서로 뭉쳐 가지에 매달린 귀여운 장면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편, 지난가을에 나무들에서 떨어져 화단에 쓸어 담긴 은행나무 종자들은 겨우내 과육이 말라 더이상 냄새를 풍기지 않았고, 미동도 없이 고요해 보였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코를 틀어막고 밟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던 사람들이 지금은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종자 몇 개를 주워 갈라보니 딱딱한 껍질 속에서 뿌리와 잎을 내기 위해 열심히 배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은행나무가 영겁의 세월 동안 이 동작을 반복했을 터인데 이제야 그 모양과 숨결을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9년 4월 성북구 석관동에서 모은 은행나무 파편들.
작년에 떨어져 월동을 마친 종자들 속에는 조만간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올 뿌리와 잎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소요
식물 관찰 초심자를 위한 간편 도구
[위] 전문적인 광학 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저렴한 30배율, 혹은 60배율 핸드폰 현미경 렌즈를 활용하여 육안으로 보기 어려운 식물의 미세 구조를 대략 식별할 수 있다. 겨울눈을 벌려 이 렌즈로 살펴보니 은행나무 겨울눈이 잎과 꽃을 한데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의 겨울 눈에는 수꽃이 들어 있다.



[아래] 지난 해에 떨어진 은행 종자를 열어보면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말라 죽은 것, 그리고 수정이 이루어져 배아가 발달 중인 것이 섞여 있다.
이소요_미술작가 생물을 시각 정보와 예술로 환원해온 문화적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생물학-자연사-예술이 공유하는 방법론과 가치관을 탐구한다. 서울에서 일인출판사 ‘생물과 문화’를 운영하면서 생물을 다루는 예술 작품을 책의 형식으로 펴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주 국립미술관, 미국 뮈터 의학박물관 등에서 작품을 보였다.
안난초_일러스트레이터 식물을 보는 것, 그리는 것을 좋아하다가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는 일이 주는 즐거움과 마감의 괴로움이 혼재된 삶을 살고 있다. 언젠가 마당이 생기면 목련나무와 라일락, 배롱나무를 심고 싶다.


목록

댓글 0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