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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4.11 조회 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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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투르기 인 유즈 Dramaturgy in Use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는 무용의 창작 환경에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는’ 개념과 실천의 방법들을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공개강연과 워크숍을 진행한 후 이를 정리하여 싣습니다. 이 코너는 ‘영리한 땅’과 협력하여 진행합니다.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드라마투르기 인 유즈 Dramaturgy in Use

김재리_드라마투르그

ⓒ 영리한 땅
왜 드라마투르기가 필요한가?

안녕하세요? 저는 2010년대 초반부터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고요, 2014년도부터 2년간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상주 드라마투르그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독립 드라마투르그로 일하고 있고, 무용과 퍼포먼스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드라마투르기의 개념과 실천의 방식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저의 경험에 비춰볼 때, 최근에 한국에서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무용 공연 팸플릿에서 드라마투르기라는 크레딧을 자주 볼 수가 있는데요, 이미 무용 현장에서는 하나의 현상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상과는 반대로 드라마투르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대를 통해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의상이나 조명, 장치처럼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나 기능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품에 개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죠. 그래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해요.
왜 무용의 분야에서 드라마투르기가 요구되고 있을까요? 실제로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작품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존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많은 물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드라마투르그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할 때도 드라마투르그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진 않았어요. 매번 다른 작가들을 만날 때마다 제가 하는 작업의 내용과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도 저는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시도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의 관심은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춤, 안무, 퍼포먼스, 그리고 신체에 대한 다른 생각들을 불러오는 것에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정도의 수업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요. 첫째는 무용에서 사용하는 드라마투르기라는 용어를 연극에서 사용하는 것과 구분하는 것입니다.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극Drama’ + ‘작업turgy’는 드라마의 구성, 연극적 행위를 뜻합니다. 드라마투르그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고요.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 이후 연극에서도 드라마투르그는 글보다 더 다양한 매체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장르적 특성상 텍스트에 기반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강조된다고 봐야겠죠. 90년대 초기 벨기에의 드라마투르그였던 마리안느 반 커크호반(Marianne Van Kerkhoven)은 연극과 무용의 드라마투르기는 무대의 재료를 다루며, 구조를 구축하고, 세계관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차이점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용의 메커니즘과 내재되어있는 속성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과 방법은 다를 수 있죠. 그래서 무용의 드라마투르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무의 과정에서 드라마투르기적인 실천을 밀착해서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극과는 다른 방향에서 무용에서 왜 드라마투르기를 수용하게 되었는지,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안무의 영역에서 드라마투르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유럽에서는 안무에서의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서 드라마투르그란 용어 대신 ‘코레오투르그(Choreoturg)’라는 용어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안무가 마틴 낙바(Martin Nachbar)와 드라마투르그 예룬 피터스(Jeroen Peeters)는 ‘데 코레오투르그(Der Choreoturg)(2016)’라는 프로젝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고요, 다이애나 데오도어스(Diana Theodores)에 의해 언급되기도 했지만, 많이 쓰이는 용어는 아닙니다.
두 번째는 무용의 드라마투르그를 텍스트에서 해방시키고 안무의 ‘실천’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무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전적 연극에서 사용하던 역할을 비판 없이 사용하다보니 무용 드라마투르그들도 텍스트를 담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작품 내용을 쓰거나 홍보문구를 만들고, 또 안무가가 텍스트를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거나 글쓰기에 대한 도움이 필요할 때 안무가의 의도나 안무 노트 등을 대신해서 쓰기도 합니다. 저도 물론 여기에 주력했지만, 지금은 안무가를 위한 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더 이상 하지 않고요, 텍스트 담당자로서 드라마투르그를 바라보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한국의 무용계에서는 아직도 이론과 실기(실천이 아니라)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 아래에서 드라마투르그는 이론에 역할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드라마투르그의 실천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고 사례를 통해서 텍스트에 제한되어있는 드라마투르그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포스트 댄스(Post Dance) 시대의 안무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무용의 역사에서 ‘드라마투르기’라는 용어가 처음 언급된 것은 80년대 피나바우쉬(Pina Bausch)의 드라마투르그였던 라이문트 호게(Raimund Hoghe)를 통해서입니다.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라이문트가 탄츠 테아터 형식의 작업에 초대되면서 텍스트를 주로 담당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라이문트의 인터뷰를 보면 오히려 안무의 구조를 만드는 것에 더욱 주력했고, 피나와 음악에 관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라이문트는 피나의 초기 몇 작업에만 참여했고요, 그 이후 안무가로 데뷔합니다. 피나도 라이문트 이후에는 다른 드라마투르그와 작업하지 않았어요. 의리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피나에게 드라마투르그라는 역할보다는 라이문트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다 제 추측입니다. 그런데 피나는 본인의 안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춤의 영역을 신비롭고 설명되지 않은 부분으로 남겨두고 있죠. 라이문트도 본인의 작업 외에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개념화나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하나의 현상으로서 드라마투르그를 이해하고자 할 때, 피나와 라이문트의 사례보다는 9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안무가들로부터 전개된 실천으로부터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투르그라는 용어가 무용의 영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개념과 실천의 방식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는 시점도 90년대 이후에요.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안무라고 생각해왔던 움직임을 개발하는 방식, 움직임의 나열과 콤퍼지션(composition)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안무가 확장되면서 그것에 적합한, 최적화된 창작의 방식을 탐색하고 다른 역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죠. 저는 드라마투르기 증상이 나타난 이유를 이처럼 확장된 안무의 맥락에서 보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의 무용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이전과는 어떤 점이 변화되었나요? 2006년도에 출간된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는 『Exhausting Dance-Performance and the politics of movement』(한국에서는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학』으로 번역, 출간됨)>에서 초기 컨템퍼러리 댄스에 대한 철학적이고 비평적인 논의를 전개했는데요, 이 책에서는 모던 댄스에서 운동성을 강조했던 것을 근대성, 즉 모더니티의 증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의 안무가들은 무용의 역사에서 모던댄스까지 춤과 움직임을 같은 것으로 고려했던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춤을 운동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을 제안했습니다. 춤추는 것에 대한 정지 행위, 즉 춤추지 않는 공연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레페키와 컨템퍼러리 댄스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계열의 춤들을 ‘춤 이후의 춤’, 즉 포스트 댄스(Post Dance)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롬벨(Jerome Bel ), 자비에 르 로이(Xavier le Roy)와 같은 안무가들의 작업들을 통해 농당스(Non-Danse), 안티 댄스(Anti-Dance), 개념 무용(Conceptual Dance)라는 형식이 제안되었고요, 이들의 초기 작업 이외에도 춤을 움직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안무 실험들과 담론이 강조되는 무용 공연을 포스트 댄스의 경향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춤추지 않는 무용 공연’, ‘말하는 공연’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죠. 말과 함께 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행위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테크닉 위주의 댄시 댄스(Dancey Dance)보다 무용수의 퍼포머티브(Performative)가 강조됩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말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좀 더 맥락적이고 구조적으로 접근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여기 그림을 보시면 농당스 계열의 춤과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춤에 대한 관계를 알 수 있어요. 농당스에서도 여전히 춤이 핵심에 있고 그 주변, 그러니까 춤과 춤 이외의 것들을 모두 포섭하는 방식이거나 춤의 주변을 우회하면서 춤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농당스 계열의 안무가들이 춤을 추지 않으면서 본인들을 안무가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작업에서 춤에 대한 질문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 Etc.라고 표기된 부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춤을 뺀 나머지 전부, 그러니까 모두 춤의 영역을 끌어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들을 의미합니다. 춤의 주변에 있는, 그것이 춤과 가까운 곳이든, 멀리 있건 간에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춤으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그러한 것들을 안무의 재료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춤과 안무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게 된 거죠. 사실 개념무용 같은 경우, 논쟁 지점이 있는 용어이기는 합니다. 현장에서는 사용하고 있지만 아카데믹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아니고요, 하나의 용어를 주조하기 위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개념 무용은 그런 과정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무용의 특수한 장르처럼 구분하는 것보다 이것을 무용의 내부에서 안무의 형식적 실험으로 바라보며 춤과 안무의 영역을 어떻게 확장시키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컨템퍼러리 댄스의 하나의 경향이라고 말하는 다학제적인 접근들도 확장된 안무의 한 부분, 혹은 접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다른 장르, 학문들과 춤을 연결시키고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예측불가능한 것들을 안무의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향들은 포스트 댄스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드라마투르기도 이러한 안무의 경향의 미학적 측면에서 다학제의 전문가이면서 공연이론, 철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드라마투르그가 가진 지식이 공연의 질을 담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한 유럽의 맥락에서는 극장을 중심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에서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극장의 전체적인 성격을 구축하고 관련된 작업을 제작하기 위한 공연예술의 다양한 부분을 아우르는 드라마투르그의 미학적 시각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의 드라마투르기 현상은 개별 작품에 개입하는 창작자로서뿐 아니라 극장에서의 제작, 기획이나 페스티벌의 예술감독, 공연예술과 관련한 심포지엄 등에서 발표자로 자주 초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약간 거리를 두어서 비평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벨기에의 드라마투르그 미리암 반 임슈트(Myriam Van Imschoot) 드라마투르기의 현상을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나타나는 ‘포괄적인 불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투르기가 제도화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이 있어요. 안무가에게는 하나의 압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고, 또한 드라마투르그 각자의 실천에 반하는 역할이 요구되기도 하거든요. 드라마투르기라는 하나의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평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개별적인 입장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드라마투르기 방법: 테이블 드라마투르기 & 스튜디오 드라마투르기

80년대 공연예술에서 장르적 교차가 일어나고 고전적인 방식을 거부하는 운동과 미학적 전개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드라마투르기(New Dramaturgy)라는 용어가 제시됩니다. 공연에서 형식적 실험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텍스트에 기반했던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이 확장되고 안무의 과정 안에서 실천의 과정에서 안무의 재료들과 드라마투르그와 안무가와의 협업의 방식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드라마투르기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outside view, 미학적 조언자, 제 3의 관점, 코레오그라픽 어시스턴트 등으로 많이 언급이 되었어요. 이런 용어들에서 볼 때, 드라마투르그가 작업의 내부인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안무가와 작업의 참여자들과 유대감을 갖지만 작업의 외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드라마투르그의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작업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역할이 실제 내부와 관계를 맺고 있고, 작업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구조를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결국 작업에 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래서 작업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것은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준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 연결되는 지점이 있고, 또 개별 실천들에서 드라마투르그의 행위는 어떤 경계를 두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안무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하고요, 창작 과정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수행성도 무용수와 강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드라마투르기를 발견할 수 있나요? 미리암 반 임슈트(Myriam Van Imschoot)는 ‘좋은 드라마투르기란 작품에서 그 역할이 사라져 무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창작과정에서 드라마투르기의 수행이 완전히 작품에 체화되어 구분이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죠. 따라서 드라마투르기의 행위를 밀착해보려면 작품의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정 중심적’이라는 말이 하나의 레토릭처럼 사용하는데요, 우리는 이것의 실증적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요.
드라마투르기는 안무의 과정에 개입을 합니다. 안무가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설정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을 채택할 것인지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방법에 대한 제한점은 없다고 생각하고요, 안무가의 생각이나 작업의 주제, 방향에 따라 어떤 방식을 취할지에 대해 ‘결정’하면 될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작업에 착수했을 때 방법에 대한 논의와 선택의 가능성을 다 늘어놓고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죠.
유럽에서 활동하는 드라마투르그 예룬 피터스(Jerone Peeters)는 안무가 맥 스튜어트(Meg Stuart), 마틴 낙바(Martin Nachbar) 등과 작업을 했는데요, 그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대화(Dialogue)’입니다. 저는 여기에 드라마투르기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대화는 ‘언어’가 중심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문자언어(written language)가 아니라 ‘말(speech language)’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논리적으로 구성된 글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고 나의 생각을 발언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겠죠. 이런 의미에서 대화란 작업에 밀착해서 말하는 행위, 실천이 강조되는 언어의 종류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좀 더 감각적일 수 있고 또 감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안무의 과정 안에서 이미 대화의 장을 만들고 관객이 여기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요. 안무가는 작업에 드라마투르그를 어떤 방식으로 초대할 것인지, 대화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소통을 위한 방법을 어떻게 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리서치나 혹은 리허설의 과정에서 ‘실증적인 재료’를 토대로 하는 것이 중요해요. 만져지는 대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상상이나 관념적인 말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기를 바라지만, 드라마투르그와 같이 다른 사람과의 협업을 전제로 하는 작업에서는 이러한 태도는 좋지 않고요, 리서치를 수행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죠.
피터스는 드라마투르기 방식을 두 가지로 얘기하고 있어요. 주로 작업의 개념이나 방향성, 안무의 구조에 관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테이블 드라마투르기’, 즉 책상 위에서 개념적인 작업을 하는 것과 실제 무용수들과 함께 움직임을 만들고 재료들을 다루는 ‘스튜디오 드라마투르기’입니다. 테이블 드라마투르기는 주로 텍스트 작업에 관련된 것을 의미합니다. 작업과 관련된 책이나 영화, 이미지 자료 같은 것을 안무가와 함께 보면서 작업의 재료를 선택하거나 맥락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특히 테이블 드라마투르기에서는 컨셉을 명확히 하는 것에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디어 상태에 머물러있는 것들에 좀 더 분석적이고 비평적으로 접근하거나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연결시키면서 작업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튜디오 드라마투르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장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감각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현장에서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 발견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의미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용에서의 즉흥은 스튜디오 드라마투르기를 수행할 때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테이블 드라마투르기를 수행하면서 집어들었던 개념들과 신체, 시간성, 움직임, 재료들과의 연결성을 지속적으로 발견해가는 것도 스튜디오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안무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드라마투르기와 협업하는 안무가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테이블 드라마투르기와 스튜디오 드라마투르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안무의 과정과 타임라인을 구성하듯이 드라마투르기 작업 과정을 단계별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안드레 레페키는 맥 스튜어트와의 드라마투르기 단계를 제시하기도 했는데요, 맥이 제안하는 책을 함께 읽기, 영화나 시각자료 등을 이용해서 안무가가 관심을 갖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리허설을 녹화한 영상에서 의미있는 것들을 선택하거나 버리는 과정, 신체적인 행위들을 언어화하는 과정 등과 감정적인 부분에서 서로를 지지해주는 것까지 작업의 포괄적인 부분에서 접근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선택되거나 무시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안무와 달라붙어있는 드라마투르기의 과정은 단지 작품으로서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이미 과정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의미들, 그리고 이것이 작업에서 담론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거든요. 컨템퍼러리 안무가인 마르텐 스팡베르그(Marten Spangberg)은 모던 댄스가 ‘살(flesh)의 춤’이라면 컨템퍼러리 댄스는 ‘담론(discourse)의 춤’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컨템퍼러리 안무가들은 자신의 리서치를 내보이는 것에 익숙하고, 안무의 과정을 곧 담론 생산의 과정이라고 얘기합니다. 작업의 과정을 강조하고 실천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미 있는 것들을 생산하기 위한 드라마투르기의 수행은 담론이 핵심이 되는 컨템퍼러리 댄스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어요.
테이블 드라마투르기나 스튜디오 드라마투르기는 안무의 과정 내에서 실증적으로 존재하는 재료들을 읽어내고,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이는 곧 안무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무가와 함께 작업의 구조를 만드는 것에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있다고 볼 수 있겠죠.

ⓒ 영리한 땅
드라마투르기 협업: 공유된 언어, 장소, 그리고 책임감

드라마투르그는 안무에 밀착해 있다는 것이 작업의 다른 참여자들과 다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으로 무용 작품을 만들 때에는 ‘안무는 안무가가, 의상은 의상디자이너가.’식의 고유의 영역을 지키며 작업을 했습니다. 따라서 컨템퍼러리 댄스의 경향에서 드라마투르기가 안무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미학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이슈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어요. 나중에 ‘이 작품은 누구의 것입니까?’하는 지분(?)의 문제도 있을 수 있고요. 저는 창작 현장에서 묘한 텐션들을 많이 발견해왔던 것 같습니다. 안무가와 무용수가 밀착해서 작업을 해왔던 습성들은 드라마투르기는 불편한 존재이기도 하고, 드라마투르기의 역할 때문에 무용수와 안무가의 신뢰감 같은 것들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는 특히 안무가가 지시를 하고 무용수들이 따르는 위계가 있는 작업 방식, 즉 안무가를 선생님이나 교수님으로 부르는 한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고요, 이런 경우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안무가, 무용수, 음악이나 조명 등의 스테프들이 누구라도 작업에 대해서 말하고, 대화를 나누고, 만드는 과정에서 피드백이 자유로운, 즉 수평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에서는 드라마투르기가 그렇게 불편한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안무가와 드라마투르기뿐만 아니라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드라마투르기의 역할과 작업 방식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무용수들에게 드라마투르그가 함께 하는 작업 방식을 이해시키는 것은 안무가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작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상한 텐션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친밀감을 생성하기 위한 노력들은 안무의 과정으로 봐야 하겠죠.
그래서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위해서는 먼저 협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협업은 제도적으로도 많이 권유되기도 하고요, 또 안무가의 새로운 실험을 위해서도 많이 시도되고 있는 것 같아요. 협업을 위해서는 먼저 창작자들 사이의 공유된 언어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작업의 형식이 공연예술이라면 공연의 매커니즘을 구성하는 용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관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겠죠.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움직임의 반대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이 안되면 몸이 나서라’ 하는 식의 이분법적인 태도는 협업을 하는 창작의 주체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말로 설명이 안되서 몸의 표현으로 보여주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는 결국 언어의 영역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드라마투르기와 안무가의 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실증적인 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했는데요, 협업을 하기 위해서는 작업에서 사용될 수 있는 공통의 재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재료는 리서치나 리허설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마치 무용 작업에 특성화된 용어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안무의 과정에서 작업의 주제가 결정되고 방향성이 결정되면 이것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재료를 수집하게 됩니다. 재료의 범위와 종류는 제한되지 않아요. 그것은 사물일 수도 있고, 이미지일 수도 있으며, 음악과 같은 감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신체 움직임이거나 텍스트여도 괜찮습니다. 다만 작업의 주제나 개념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드라마투르그와 안무가는 선택된 재료의 속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재료에 대한 실험과 탐색을 통해서 실제 작품의 소스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예룬 피터스는 협업을 위한 재료적 접근, 공간적 접근, 그리고 책임감을 주요 개념으로 제시했습니다. 먼저, 안무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재료를 모으고, 펼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이미지적으로 표현한다면, 펼쳐놓은 재료들을 자유롭게 맵핑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그 풍경 사이로 이동하면서 재료와 신체의 관계성을 만드는 것을 작업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재료와 신체, 그리고 재료와 다른 재료가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맥락이 만들어지고요, 이러한 맥락은 외부의 담론이나 사건들이 아닌, 작업 안에서 선택된 재료들에 의해 구성된 내재된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고전적인 안무는 움직임으로 하나의 콤포지션을 만들고, 이것의 외부의 역사,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었죠. 춤과 신체를 내재적인 것으로, 그것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외재적, 맥락적인 것으로 구분해서 바라봤어요.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아닌 재료의 탐색을 통해 춤의 내부 외부의 구분 없이 재료로부터 발생하는 춤과 사건, 맥락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협업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관점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작업에 참여할 때, 낯설고 이질적인 상황에서 함께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맞춰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지향하거나,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한 것은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방법은 아닙니다. 협업을 할 때에도 개인 작업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관점을 제시하고 개별성을 강조합니다. 다만, 작업에 개별적으로 접근하더라도 공유된 공간, 공유된 장소의 내부에 함께 있다는 인식을 담보해야 합니다. 서로 공유된 재료를 가지고 있고, 공유된 장소를 전제하고 그 위에서 자유롭게 개별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유된 공간 위에 재료를 펼치고 이미지를 만들고, 또한 관점을 나누며, 이질적인 것들이 충돌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유된 공간을 갖기 위한 노력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될 있을 것 같아요. 예컨대, 안무의 과정에서 더 이상 공유하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재료를 더 많이 초대한다거나 제 3의 관점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물질적으로 비물질적으로 지속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협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작업에 대한 책임감을 함께 나누어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생각과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것은 안무가의 몫이지만 그 결정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의견이 필요하고 작업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참여자들의 생각을 좀 더 견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각자의 위치에서 작업에 대한 책임감을 다 하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황과 매커니즘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흔히 드라마투르그들에게 안무가를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은 작업에서는 어떤 중심이 있고, 그것을 보조하는 방식을 전제하는 것인데, 저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안무가를 좀 더, 혹은 덜 도와주는 것으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드라마투르그는 작업에서 드라마투르기를 수행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관점을 가지고 개별적인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참여자들도 마찬가지이고요, 나름의 입장에서 작업의 주체가 되는 것이 드라마투르지컬한 작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협업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책임감은 누군가를 보조하거나, 희생하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서 작업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공유된 책임감이란 개인의 특이성, 개별성을 담보로 개별적인 수행들이 펼쳐지고 서로 관계를 맺거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포함해서 컨템퍼러리 댄스의 작업 방식은 협업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요, ‘창작’에 대한 인식론의 변화와 함께 제작 방식이 변화해 온 것에 대해 확장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던댄스에서 개인의 내적충동으로 나만의 고유한 것을 ‘창조’해내는 것을 예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안무에서는 기존의 것들을 어떻게 만나게 하고 편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도록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대한 예술가의 저항적인 태도일수 있고요, 작품을 사적인 것으로 묶어두었던 ‘소유의(possessive) 무용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드라마투르그 없는 드라마투르기

오늘 강의에서 드라마투르기의 개념이나 방법 등에 대해 파편적으로 이야기를 건낸 것 같아요. 정리가 잘 안된 지점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하나의 개념을 구축하기보다는 여러분 스스로 드라마투르기 실천의 다양한 지점을 연결하고 맵핑을 해보는 것이 드라마투르그의 특성에도 맞는 방식인 것 같아요. 제가 다룬 내용들은 드라마투르그라는 사람에 대해 탐색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드라마투르그는 기본적으로 작업의 개념들을 명확히 하고, 개념들로부터 발생하는 것들을 고고학적으로 탐색하는 것, 실제로 창작과정에서는 안무의 구조에 관여하고, 안무에서 다루어야 할 재료를 모으고 관점에 대해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주로 담당하고요, 이것은 안무가나 무용수, 혹은 기획자, 스테프 등도 모두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리암 본 임슈트는 ‘드라마투르그 없는 드라마투르기’를 강조하며 작업에서 드라마투르기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드라마투르그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업에서 다루었던 드라마투르기적인 기술은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충실하며, 자신의 개별 작업을 전체 맥락에서 바라보며 ‘행위’에 대한 책임감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의 주제와 그것에 대한 질문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작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책임감있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의 역할에 머무르지 말고, 누군가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누구라도 작업에서 발생하는 이슈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투르기적인 관점에서 안무의 과정이란 예술적인 성취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들을 끊임없이 발굴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한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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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ma.be/docs/1325.

김재리_드라마투르그 안무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14-2015년에 국립현대무용단 드라마투르그를 역임했다. 현재 안무 및 시각예술 분야에서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고 있으며 몇몇 잡지에 컨템퍼러리 댄스와 퍼포먼스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영리한 땅 <영리한 땅>은 장르 중심이 아닌 그 경계로부터 창조적 다이나믹을 실험하는 예술 단체이다. 2019년부터 예술생태계 내부의 창작 플랫폼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웹진 <춤:in>과 함께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구성원으로 권령은, 지미세르, 김선주, 구본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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