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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2.10 조회 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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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문학]발레교습소에 나가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박연준_시인






ⓒ엄유정
“나 기린 같아 보여?”
가끔, 실은 자주 그에게 묻는다. 고개를 숙여 모가지를 길게 빼어 보여주면서. 그는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우리 집에 웬 기린이 사나 했잖아!”하고 과장하거나, 귀찮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를 슬쩍 밀쳐내기도 한다. 그렇다. 나는 기린처럼 길고 우아한 목을 가지고 싶어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사람이다. 꽤 오래 배웠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는, 그저 꾸준히 발레를 배우고 있는 사람. 왜 하필 (어울리지도 않는) 발레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변명거리는 많다. 어느 날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피나 바우쉬를 다룬 영화 <피나>를 보았거든요. 피나의 자태, 고매한 분위기를 닮고 싶었어요.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팔다리와 목이 전보다 짧아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충격이었어요. 다시 늘려보고자(예전엔 분명 이렇지 않았다고요) 발레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어쩌면 당신은 그건 짧아진 게 아니라 ‘살찐 것’이 정확한 표현 아니냐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요. 글쎄요. 거울 앞에 선 저는 “이상해… 전보다 자꾸 짧아지잖아.”하고 자꾸 중얼거리게 되는걸요. 그래서 발레를… 시시콜콜한 변명들.
내가 두려워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사지가 짧아 보이고 거북목이 되어가는 것이다! 목! 목은 중요하니까. 목은 머리와 몸 사이에 난 ‘복도’다. 머리통과 몸통을 구분 짓고 이어주는 좁고 기다란 통로. 발레는 목과 어깨가 친해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장르다. 내 발레 선생님은 언제나 “목과 어깨를 가능한 멀어지게 하세요”라고 주문한다. 둘이 붙어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친해져서 좋을 게 없는 사이도 있는 것이다. 목과 어깨처럼. 그녀는 주문한다. “머리통을 누가 위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길게 계속 자라나게 하세요!” 진짜 자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주문한다. 어깨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견갑골은 뒤에서 모으고 턱은 들고, 미간을 위로 끌어올리고, 코끝으로 앞을 본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주문한다. 무릎과 허벅지 사이에 지퍼가 있다고 상상하고 그 지퍼를 위로 쭉 끌어올리듯 당기세요. 절대 지퍼가 열리지 않게 하세요. 아랫배는 배꼽 위로 바짝 끌어올린다고 상상하고, 엉덩이는 꽉 조이고, 갈비뼈는 꽉 닫으세요. 그녀는 주문한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선반에 올려놓은 것처럼, 일자가 되도록 팔꿈치를 드세요. 팔이 마치 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길게 늘려 알라스콩(a la second)! 그녀는 주문한다. 손가락 마디 마디가 길어지도록, 끝까지 에너지를 전달하세요. 어쩌고저쩌고. 계속되는 까다로운 주문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정신은 멍해지고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여기저기를 끌어올리고 조이고 닫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데, 사실 지나치게 힘을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발레는 버티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근육을 조이는 동시에 늘이는 게 관건이랄까. 어렵다! 그러나 내가 나무처럼 자라는 중이라고, 태양을 향해 뻗어나가는 중이라고 상상하는 일, 잠시 상상에 빠지는 일은 짜릿하다.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고수는 ‘춤추듯’ 한다. 짐승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도축업자, 건반을 주무르는 피아니스트,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종하는 프로 게이머,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사, 무대 위를 거니는 연극배우, 발끝으로 턴하는 발레리나… 고수의 동작엔 ‘억지’가 없다. ‘쓸 데 없는 힘’이 없다. 힘을 뺀 듯 자연스럽고 에너지가 넘친다. 몸에 밴 리듬이 모든 동작을 춤처럼 보이게 한다. 그들은 다음 동작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행동한다. 나처럼 아마추어로 발레를 흉내 내는 초보자들은 언제나 동작을 만들기에 급급하다. 동작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은 춤이 아니다. 고수가 되기 전엔 춤이 아닌 것들(두려움, 흉내 내기, 어설픔, 고심, 망설임, 진지함) 속에서 춤을 흉내 낼 수밖에 없다. 진정한 무용수는 몸, 마음, 음악이 삼위일체가 되어 피어난다. 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고수에게는 동작이 보이는 게 아니라 어떤 근원적인 감정, 뉘앙스, 에너지가 보인다. 음악이 보인다. 춤추는 자는 음악을 몸에 입고 춤춘다. 춤추는 자의 옷은 음악이다!
무대 위에서 새처럼 날아다니는 발레리나를 보고 “나는 왜 저렇게 안 될까”라고 탄식하자 옆에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마디 한다. “이런 날도둑!” 그의 말이 맞다. 무용수가 저렇게 춤추기까지 자기 시간과 열정과 땀과 마음을, 그러니까 그의 인생 전부를 지불했을 텐데. 고작 일주일에 세 번, 잠깐씩 취미로 배우는 자가 언감생심 저런 실력을 바라다니! 그게 도둑 심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꽃기린 위를 걸어오는 바람

발톱을 세운 봄의 구두

바닥에 세워놓은 염색체 무리

뿌리에서 놓여난 식물

유연한 나뭇가지

척추가 늘어나는 밤과 낮
시치미를 발목에 달고
허밍으로 비밀을 발설하는 무희들

감은 눈으로 긁적이는 먼 나라의 문자

목숨을 담보로 춤추는 포식자 앞의 새

잃었다는 기억을, 잃은, 날개

수천송이 코스모스들이 이룬 벨벳혁명

- 졸시, <무용수> 중에서

무용수를 새나 춤추는 고양이로 비유할 수 있다면, 그건 ‘날아오르기에 적합’한 몸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새처럼 완만한 유선형의 상체, 고양이처럼 유연한 관절을 가졌기 때문이다. 군살 없이 가볍고 부드럽고 탄력 넘치는 몸! 애초에 발레를 하기에 내 몸은 적합하지 않다. 가슴과 엉덩이에 살이 많아(육감적이라고 우겨볼까 싶지만 없어도 되는 곳까지, 살이 분방하게 분포되어 있다) 중력을 거스르고 높이 뛰는 일에 몹시 방해를 받는다. 그렇지만! 내 목표는 발레 무용수처럼 한 점의 군살 없이 완벽한 몸을 가지는 게 아니다. 다만 튼튼하고 곧은 몸으로, ‘춤추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계속 배워보는 거다. 지금은 춤이 아니라 동작을 만들어보기에 바쁘다지만, 언젠가는 음악을 입고 춤출 수 있기를. 그게 목표다.
뭐든 어릴 때 배워야 한다. 어린 아이들은 ‘그냥’ 하다가 잘하게 되고, 어른들은 ‘잘’ 하려다 그냥 하게 된다. 아이처럼,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냥’ 해야겠다. 생각 없이 그냥 하다가 잘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기쁨은 클 테니까. 계속 할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 발레 교습소에 나가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오전에는 발레를 배우고, 오후에는 공책을 펼쳐 시를 쓰는 할머니. 공책을 새것으로 바꿀 때마다 맨 앞에 적어 놓는 문구를, 할머니가 되어서도 적어놓을 것이다.

“춤추지 않으면 무용수들은 길을 잃는다.”

- 피나 바우쉬

시를 쓰는 내 정체성과 무용수의 정체성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시는 ‘언어가 추는 춤’이라 믿는 까닭이다. 길을 잃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엄유정


박연준_시인 시인.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취미 발레를 배운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가 있고, <소란>등 네권의 산문집을 냈다. 얼마 전 첫 그림동화책 <정말인데 모른대요>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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