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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1.12 조회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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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문학]춤추는 눈사람

이근화_시인



ⓒ엄유정

나는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남자다, 아니 조금 여자다

고깔모자를 썼다

모자는 대책 없이 뒤통수 쪽으로 자꾸 흘러내린다

눈사람에게 코를 만들어주는 사람

팔을 꽂아주는 사람

성기를 만들어주는 사람

단추를 끼우는 사람

나는 역시 여자다, 아니 가까스로 남자다

눈사람은 보호가 필요 없다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다

기침과 고열과 콧물이 없고

연대와 고통과 피가 없고

구름과 오래 눈을 맞춘다

사랑일까 아니 회색이다

눈사람은 눈사람을 낳지 않는다

친구가 없고 이웃이 없고

발밑만 있다 스르르 사라지며

축축한 입술만 남긴다

나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자다, 아니 비로소 남자다

눈사람에게는 배움이 없다

깨달음과 명상이 없고

눈동자가 비었고

허공과 침묵으로 배가 부르다

눈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잠들면

나는 여자도 남자도 될 수 있고

즐겁게 녹아내릴 수 있다

밤사이 눈사람이 한걸음 걸었다


이근화_시인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2006),「우리들의 진화」(2009),「차가운 잠」(2012),「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2016) 동시집으로「안녕, 외계인」(2008)「콧속의 작은 동물원」(2018), 산문집으로「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2015) 등이 있음. 김준성문학상(2010) ? 현대문학상(2013), 오장환문학상(201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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