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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1.09 조회 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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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라보라토리오 : 콘덴사시옹(Laboratorio : Condensacion)에서의 <미소서식지 몸>

장혜진_안무가

2018년 8월에 멕시코에서 개최되었던 래보라토리오 콘덴사시옹(Laboratorio : Condensacion)의 주제는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로 멕시코 예술가 4인과 미국 안무가, 일본 사운드 아티스트, 그리고 한국인 예술가로 내가 참여했던 공연 실험과 협업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사실 협업(collaboration)이라는 표현 보다는 침투(permeability)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8월 5일부터 21일까지 약 2주간의 기간 동안, 한 주는 멕시코 툴룸의 정글 스튜디오에서 레지던시를, 둘째 주는 멕시코 시티의 카사 델라고(Casa De Lago)에서 리허설과 공연을 계획하고 우리는 여정에 몸을 맡겼다. 이 에세이에서는 툴룸 정글 레지던시 경험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 멕시코 시티에서의 공연에 대해서도 간단히 반추하여 그려내 보고자 한다.



멕시코행 비행기 안 창 밖 풍경 ⓒ장혜진
주소 없는 레지던시
멕시코의 래보라토리오 콘덴사시옹은 2013년 멕시코인 디렉터 마틴 란즈(Martin Lanz)에 의해 창설되었다. 마틴은 멕시코, 미국, 쿠바, 덴마크, 우루과이, 오스트리아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안무가이자 다원예술가 그리고 큐레이터이다. 안무와 다원예술을 위한 리서치와 레지던시, 워크숍, 공연 등의 국제교류 플랫폼을 예술가 스스로 만드는 ‘스스로 해내자. DIY(Do It Yourself)’의 접근을 매우 지지하고 지향하고 있었기에, 나 또한 그간 마틴의 행로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콘덴사시옹은 주소지와 국경을 지속적으로 넘나들면서 그 둥지를 펼쳐내고 있었다. 멕시코, 미국, 일본,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콜롬비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푸에르토리코, 핀란드 및 독일 등과 교류하며, 다원예술가와 안무가를 비롯, 시각 및 사운드 아티스트, 건축가, 시인, 과학자, 인류학자 등 폭넓은 예술인들을 지원해왔다. 콘덴사시옹은 멕시코 국립 예술 기금, 외무부 장관 기금, 국립 미술 연구소 기금 외에도 독일 괴테 인스티튜트 기금, 오스트리아 문화 포럼 기금, 네덜란드 프린스 클라우스 재단 기금과 멕시코/일본 우호 신탁 기금 등 경계를 넘나드는 지원을 받아 실현되었다.
콘덴사시옹 레지던시를 위한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던 중, 이 기관의 주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출입국 신고서에 기입해야 했던 도착지 정보는 콘덴사시옹의 디렉터인 마틴 란즈의 집 주소를 사용해야 했다. 구글 혹은 네이버로 위치를 검색하고, 사진 그리고 리뷰까지 사전에 습득할 수 있는 여행자의 빠른 손놀림은 이번에는 별 의미가 없어보였다. 센터가 없는 레지던시, 내가 추구하던 ‘뭉쳤으면 빨리 흩어져라’의 표류주의와도 맞닿아있어 흥미로웠으나, ‘미리 알 수 없음’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정글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 함께하게 될 예술인들은 다행히도 낯익은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처음 멕시코 2018 콘덴사시옹 레지던시에 초청받게 된 계기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17 한국-멕시코 커넥션을 통해 작년 여름 멕시코 시티를 방문하게 되면서였다. 일주일 먼저 도착하여 개별 리서치를 진행했었던 나는 2009-11년 뉴욕 무브먼트 리서치(Movement Research) 상주예술가 시절 동료였던 마틴 란즈와 만났고, 그 다음해인 2018년 레지던시 참여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는 1년이란 기간 동안 드문드문 이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위해 소통하였고, 2018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협력 우수 프로젝트 개발지원 기금에 선정되어 멕시코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올해 콘덴사시옹의 테마인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은, 그간 마틴과 미국인 안무가 어술라 이글리(Ursula Eagly), 그리고 일본인 사운드 아티스트 코지 세토(Kohji Setoh)가 지난 3년간의 인큐베이팅을 통해 공연으로 이미 발전시켜 놓은 적이 있는 프로젝트다. 어술라의 경우 반갑게도 뉴욕체류 시절 자주 교류해왔던 안무가였고, 동시에 지난 2017년 10월 서울무용센터의 <Space RED-Movement Research>의 아티스트로 3주간 거주하면서 함께 작업한 바 있다. (참고 링크 : 춤:in, <두 개의 ‘보기’>, 2017. 12. 28) 코지는 2018년 3월 뉴욕을 방문했을 때, Sundays on Broadway에서의 공연을 통해 인사를 나눈 바 있었다.
프로젝트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의 뜻은 ‘서로를 위한 틈새가 있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2015년 멕시코 라보라토리오 알떼 알라메다(Laboratorio Arte Alameda)에서의 콘덴사시옹에서 처음 실험되었고, 2016년에는 일본 키타 가마쿠라의 도케이지 템플에서, 그리고 가장 최근 2017년에는 미국 뉴욕의 초콜릿 팩토리 극장에서의 레지던시와 공연으로 구현된 적이 있고, 이는 뉴욕타임즈 등에서 좋은 평을 받은 바 있다. (참고 링크 : The New York Times, ‘Work’ and the Feel of Private Practice Made Public, 2017. 4. 17) ) 올해는 이 프로젝트의 피날레로, 콘덴사시옹에서 새로운 버전을 발생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멕시코에서 나를 비롯한 해외 작가들과 몇몇의 멕시코 예술인이 합류하여 정글에서의 레지던시를 함께 하는 것이 취지였다. 내가 실험하고자 했던 것은, 나의 프로젝트 <미소서식지 몸>이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 안/밖에서 어떻게 서식할 수 있을지 였다.


툴룸 숙소 앞 대문 ⓒ장혜진
툴룸 숙소 앞 걸려있는 해먹들 ⓒ장혜진
도달한 시각은 8월 5일 일요일 오후 1:35분 멕시코 동부 시간
햇볕이 쨍쨍한 8월의 일요일 오후, 창공을 가로질러 나는 멕시코 칸쿤 공항에 도착했다. 어술라와 코지를 기다리기 위해 터미널 밖 야외 레스토랑에 타코를 먹으며 앉아있는데, 누군가 “He Jin!”하고 반갑게 소리질렀다. 가족들과 함께 도착한 어술라였다. ‘어떻게 나를 바로 알아봤지?’ 신기한 일이었다. 옆 터미널로 이동했을 때 인파 속에서 우리는 코지도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어떤 장력에 의해 서로를 이렇게 빠르게 발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벌써 신이 난 우리는, “환전은 어디에서 얼마나 해야 하지? 툴룸으로 가는 버스는 몇 시에 어디에 있을까? 버스가 나을까? 셔틀 택시를 잡아타는 것이 나을까?” 등 타국에서의 방향/방법 찾기를 레지던시의 첫 단추로 수행하고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셔틀택시를 잡은 우리는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마틴의 툴룸 숙소로 향했다. 칸쿤 공항에서 차로 달린지 100분 즈음 후 비포장 도로 속에 짙은 갈색의 대문이 보였고, 드디어 우리는 ‘모르는 곳'에 도착했다. 함께 머물 숙소는 두 층으로 이루어진 전통 멕시칸 스타일의 빌라였고, 그 앞에는 자그마한 수영장도 자리하고 있었다. 툴룸에서의 일주일 동안 나는 아래층의 거실에서, 코지는 아래층의 방에서, 어술라의 세 가족은 윗층의 방, 그리고 마틴과 그의 파트너이자 올해 함께 합류하게 된 멕시코 아티스트 아렐리는 2층의 복도 구역을 나누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집의 구역을 나누어 합숙하게 되는 상황이 친숙하고 반가웠던 것은 ‘곳’과 ‘음식’을 나누는 레지던시 공동체 의식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서였다. 서로의 공간에 침투한 채로 짐을 대충 정리하고, 집 앞 수영장에 바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미팅이 시작되었다. 안무가로서 다원예술가로서 또 교육자, 페스티벌 디렉터 등으로 여러 가지 역할을 맡고 있는 우리의 호스트 마틴을 바라보고, 그의 집 앞 마당 수영장에서 맥주를 들고 레지던시 첫 미팅을 시작하자니, ‘아, 예술가에 의한 진짜 레지던시!’ 미소가 지어졌다.





콘덴사시옹 레지던시 첫 미팅 ⓒ장혜진
툴룸 숙소에서의 나의 잠자리 ⓒ장혜진
정글, 모기, 그리고 프랙티스
월요일 아침이 밝았고, 우리는 멕시칸 스크램블 에그와 과카몰레 그리고 토스트로 아침식사 만들어 먹고는 드디어 정글 스튜디오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20분 가량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오가며 달리고 나니 아렐리가 결연하게 ‘무장(?)’ 할 것을 권고했다. 먼저 강력한 모기들에 대비하기 위해 각종 모기 기피제를 온 몸에 뿌렸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옷가지와 스카프 등으로 감싼 뒤, 다시 옷 위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아렐리는 지난번에 다른 지역의 밀림에서 모기에 물려 고열과 환각작용이 있었던 몸서리치는 경험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 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자, 이제 차에서 내릴 거야. 이 엄청난 모기들이 차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도록 빠른 속도로 내려야해! 하나, 둘, 셋, 액션!” 달려드는 모기떼를 뚫고 5분 남짓을 걸었더니, 드디어 정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 스튜디오는 마틴과 마틴의 남동생 알베르토 그리고 고용인들이 손수 짓고 있다고 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정글 숲이 시선에 그대로 들어오는 창 없는 원형 스튜디오, 그리고 그 아래 지어질 것이라는 커뮤니티 응접실, 레지던시 아티스트들이 묵을 수 있는 침실들, 공공의 주방, 화장실, 그리고 급수탑 등이 손수 지어지는 모습이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다. 또한 공사 중에 작은 세노떼1)를 발견했다며, 이를 어떻게 개발할지 고민하기 위해 직접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다는 알프레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이 스튜디오는 아직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고, 주소도 없었다. 우리가 있었던 일주일 동안에 부엌의 벽면이 만들어져서 세워지는 것을 보았고, 또한 재활용 유리병들로 지어지고 있는 급수탑의 벽면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간이화장실은 모기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면사포 모양의 천이 나무의 높은 가지에 걸려 흙바닥까지 늘어뜨려져 있었다. DIY 예술인 마틴이 레지던시 건축까지 직접 도맡아 진행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이미 예상하기는 했었지만 여전히 놀라운 일이었다.

1) 낮은 편평한 석회암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함몰 구멍에 지하수가 모인 천연 우물.

정글 스튜디오 가는 차 안 ⓒ장혜진



정글 스튜디오에 도착 ⓒ장혜진



정글 스튜디오 2층의 작업실 ⓒ장혜진





정글 스튜디오 부엌의 벽면이 만들어지는 모습 ⓒ장혜진
완성된 부엌 벽면의 모습 ⓒ장혜진







유리병들로 지어지고 있는 급수탑 ⓒ장혜진
재활용된 유리병들 ⓒ장혜진
정글 스튜디오의 간이화장실 ⓒ장혜진
정글 스튜디오에서의 일주일 레지던시 중에 우리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각자의 질문들과 프랙티스를 공유함으로써 서로의 실험과 그 틈새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마틴은 거의 매일의 도입부에 ‘해부학적 도달(Anatomical Arrival)’에 관한 움직임 세션으로 우리의 몸과 감각을 열어주었다. 비오듯 땀을 쏟아내며 비포장도로를 지나 모기와의 혈투를 통해 도착한 정글 스튜디오에서의 이 첫 프랙티스는, 긴장했던 우리가 다시 차분하게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첫 날의 경우, 나와 어술라가 지난 해 가을 서울에서 개발한 ‘7분 빌드업 프랙티스(build-up practice)’를 이끌었다. 이것은 7분간의 바디 워크(body work) 교환, 7분간의 눈을 감은 채 수행하는 어센틱 무브먼트(authentic movement), 7분간의 서로를 위한 어센틱 공연, 그리고 마지막 7분 동안의 서로를 위한 완전한 공연으로 이루어진다. 아렐리는 ‘자취를 찾다(tracing)’를 키워드로 몸의 질량/무게를 감각하고 이를 그려내어 움직임과 사운드 스코어를 삼는 프랙티스, 그리고 정글 속을 리더를 교차하여 걷고 걸은 길들에 대한 감각을 기호와 지도로 그려내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몸 위에 종이를 직접 몰딩하여 흔적의 형태를 남겨보는 것을 제안하여 진행하였다. 넷째 날에는, 나의 <미소서식지 몸>의 작업에 중요부분을 차지했던 ‘단위, 보기, 코멘터리 프랙티스’를 공유하였고, 다섯째 날에는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의 ‘표면 스터디(surfacing)’을 다함께 실행해 보았다.





질량/중량 감각 스터디 ⓒ장혜진
질량/중량 흔적의 스코어 되기 ⓒ장혜진







유리병들로 지어지고 있는 급수탑 ⓒ장혜진
재활용된 유리병들 ⓒ장혜진
정글 스튜디오의 간이화장실 ⓒ장혜진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 그리고 미소서식지 몸
본 프로젝트의 취지에는 마틴, 어술라, 코지의 프로젝트인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과 이에 참여하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미학이 틈새 속에 어떻게 같이 기대어지거나 등질 수 있는지 실험해 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술라와 마틴과 코지는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의 3가지 구현 원리를 우리와 공유하였다. 그 원리의 첫 번째는, ‘모든 재료적 물질은 이미 존재한다(All materials are already here).’인데 이는 프로젝트 내에서 이루어지는 ‘표면 스터디’를 위한 재료들이 모두 눈에 보이는 물체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원리는 ‘작업은 물질성 ? 연극성 ? 물질성(materiality ? theatricality - materiality)의 순서로 넘나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작업이 공연의 형식으로 공유될 때 그려질 시간과 그 안의 상태들의 곡선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중복되는 솔로들의 젠 가든이 펼쳐진다(zen garden of overlapping solo)’였는데, 이것은 각자의 솔로들이 상호독립적(inter-dependent)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러 모로 혼돈스러울 수 있는 협업과 침투의 순간 속에서, 이 원리들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더 단단한 관계와 독립성으로 나아가는 민주적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원리를 안고, 나는 미소서식지 몸이 이 틈새에 둥지를 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다.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의 원리와 스코어 ⓒ장혜진
정글 스튜디오에서의 셋째 날, 나는 <미소서식지 몸> 작업 뒤의 중요 개념인 ‘1이라는 단위의 미소성(1 unit and micro)’, ‘없는 사람(missing body)’, 그리고 ‘봄과 봄봄(haptic visualization and seeing-seeing)’에 대해 협업자들에게 설명하고 이와 관련된 1+0.5 프랙티스, 1² 프랙티스와 1+1 프랙티스, 그리고 (1+1+1)+1 프랙티스를 공유하였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발효시켜온 <미소서식지 몸>에 대해서 더 가깝게 들여다보는 동시에, 어떻게 보면 더 멀리 그리고 더 작고 미소하게 내다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내가 왜 이 프로젝트를 계속 해야만 하는지 당위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사라진 나(I and missing I), 나와 사라진 너(I and missing You), 너와 사라진 나(you and missing I), 너와 사라진 너 (you and missing you), 그리고 사라진 나와 사라진 너(missing I and missing you)에 대한 작업을 프랙티스로 설계해야하는 이유, 그리고 그 프랙티스가 공연(practice-as-performance)이 되어야하는 이유, 또한 내가 안무 작업과 드라마터그 작업을 동시에 계속해야하는 이유가 다 <미소서식지 몸> 안에 있었다는 것을 정글에 도달해서야 알았다. 다시금 나는 상기했다. “보는 것이 구성이다(To see is to create).” 이것은 바로 이 프로젝트를 위해 레퍼런스로 삼았던 김산하 야생영장류학자가 밀림에서 수행했던 ‘보기’에 가까워지는 ‘보기’의 정글 버전 연습이었다. 프랙티스 중간에 갑작스럽게 출현한 어린 도마뱀의 봄(seeing)을 우리가 다시 목격하는 봄-봄(seeing-seeing)의 사건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작은 도마뱀의 등장 ⓒ장혜진



2018년 2월 <미소서식지 몸>의 안무실험 리플렛 (designed by 김동규)
자유시간 그 속의 서식과 사유
툴룸에서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가끔 오후나 주말에는 자유시간이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들도 이 레지던시의 아주 큰 묘미였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세노떼라는 마야 문명 특유의 천연샘인데, 이는 석회암 암반이 함몰되어 지하수가 드러난 지역으로 예전에는 인신공양 의식을 행한 중요한 우물이기도 했다. 우리의 정글 스튜디오 바로 옆에는 도스 오호스 (Dos Ojos)라는 매우 유명한 세노떼가 있었고, 연습을 마친 어느 날 우리는 모험을 결심하였다. 세노떼 앞에서, 우리가 준비한 식빵에 감자칩과 햄을 넣은 샌드위치를 맨손으로 뚝닥 만들어 먹고는, 구명조끼와 오리발과 스노클링 장비 그리고 손전등을 가지고 세노떼에 입수했다.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물이 점차 익숙해져 갔고, 세노떼의 물 속과 물 밖의 세계를 감상하고 있자니 정말로 경이로웠다. 수중동굴 속 박쥐들의 서식지에 들어가는 것은 태어나 처음하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정글 아니면 동굴, 이런 레지던시!’



세노떼 입수의 순간 ⓒ장혜진
수중 동굴의 박쥐 서식지 ⓒ장혜진
그 외에도 맑고 투명했던 칸룸 라군(Laguna Kaan Luum)2) 을 방문하여 지역주민들의 주말 여가를 경험해본 것, 또한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초호화 지역에 구겐하임에 의해 세워진 아이 케이 랩 갤러리(IK Lab Gallery)를 방문했던 것, 툴룸의 시내와 피라미드 유적지를 다니며 본 것, 그리고 지역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요리를 비롯하여 소 혀, 사슴고기 등이 들어간 타코를 먹어보았던 것도 잊지 못할 경험들이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돌보는데 에너지를 쏟아도 금방 소진될 것 같은 하루 속에서도, 레지던시 아티스트로, 툴룸을 관광하는 여행자로, 가족과 함께 레지던시에 임하며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해내는 어술라의 모습도 큰 감동이었다. 이런 레지던시, 이런 예술인, 이런 사람, 이런 가족 - 계속 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내게 미소서식지적인 경험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예술하는 방식들이 고착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틈새에 끼어든다.

2) 라군(laguna) : 석호. 바다와 격리 되었지만 지하에서 해수가 섞여 염분농도가 높은 호수를 말한다.



칸룸 라군 ⓒ장혜진
도시, 그리고 레코드 릴리즈와 공연
한 주 동안의 정글 레지던시를 뒤로 하고,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로 향했다. 합숙을 했던 툴룸에서의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뿔뿔이 흩어져 이동을 하고, 도착해서도 각기 다른 숙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마틴과 아렐리는 차를 타고 토요일에 미리 출발하여 2박 3일의 여정으로 멕시코 시티로 향하였고, 나는 일요일 이른 아침 7시 홀로 버스에 탑승하여 2시간 후 칸쿤 공항에 도착하여 정오 비행기에 탑승했다. 또, 코지와 어술라의 가족은 12시 경 셔틀택시로 이동하여 각 오후 3시 비행기와 오후 4시 비행기에 따로 탑승했다. 숙소의 경우도 마틴과 아렐리는 본인들의 작은 아파트에, 어술라의 세 가족은 다운타운 근처의 에어비앤비에, 코지는 함께 협업 공연하게 될 멕시코 사운드 아티스트 안드레스가 마굿간을 개조해서 만들어낸 초원 같은 들판 속 집에, 나는 사립 경찰과 메이드를 둔 마틴의 어머니 지젤라의 저택에서 묵게 되었다. 이 순간들이 매우 은유적이라고 느꼈는데, 툴룸에서의 생활과 다르게 뭉쳤다가 흩어지는 이 형태가 마치 도시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을 뒤로한 우리는 어느 덧 빠른 속도로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찾아가고 있었다.
특별히 멕시코 시티에서는 공연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소위 말하던 ‘정글 타임’은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매일 공연 베뉴인 카사 델라고를 방문하여 탐색하고, 명상하고, 논의하고, 구조와 움직임을 실험해보았다. 야외 콘크리트 바닥에서의 연습이었고, 툴룸과는 사뭇 다른 쌀쌀한 날씨였기에 쉽지만은 않은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합류하게 된 아나 파울라(Ana Paula)와 다시 안무적 사유를 나누게 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순간이었다. 아나는 미국 무브먼트 리서치의 국제교류아티스트로 2017년 초 뉴욕을 방문하였고, 이때 나의 <표류하는 몸> 레지던시와 일정이 맞아 함께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 당시 그녀 작업 속 키워드들에는 ‘맞닥뜨림(encounter), 취약점 (frailty), 서로를 알아차림(recognizing each other), 반체제(dissidence), 통제/권력(control/power), 생정치학(biopolitics)’ 등이 있었고, 또한 그녀가 던진 관계성에 대한 질문들에는 “어떤 점에서 우리는 함께 있습니까?(In what way are we together?)”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해킹합니까?(How do we hack into our relationships?)”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연장선상의 리서치를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고 했고, 최근에는 ‘내 신체보다 더 큰 물체’와 물리적으로 작업함으로써 위의 키워드들과 질문들을 흔들어 보고 있다고 하였다. 그녀의 작업이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의 틈새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멕시코에서 있었던 또 다른 이벤트 중에 하나는 바로 레코드 릴리즈 공연이었다.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는 그간의 작업들을 가시화하는 아카이브 작업 중 하나로 스코어를 담은 레코드를 출판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현상학적인 것에서 환상적인 것(phenomenological to fantastical)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서 극적인 것(material to theatrical)으로의 양방향 흐름의 흔적을 남기는 데에 아주 적합한 형식이었다. 레코드에는 코지의 음악이 두 가지의 트랙으로 나뉘어 실려 있었고, 파란 투명 표지와 하얀 속지에는 뉴욕에서의 공연 사진과 움직임을 위한 스코어들, 그리고 참여 예술인들의 에세이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참고 링크 : Kohji Setoh,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 디지털 앨범) 멕시코 시티의 헤르데르 서점(Editorial Herder Mexico)에서의 레코드 릴리즈 공연은 코지와 현지 아티스트 안드레스의 협업으로 진행되었고, 코지의 움직임 스코어였던 ‘베뉴의 피부로부터 소리를 수집하기’를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0여 분 간의 공연과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오하칸 스타일 멕시코 음식점에서 메뚜기 타코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헤르데스 서점에서의 레코드 릴리즈 ⓒ장혜진
서점에서의 공연을 위해 소리를 수집하고 있는 코지 ⓒ장혜진



레코드 릴리즈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 ⓒ장혜진
8월 18일 토요일 오후 3:30에 있었던 90분 가량의 공연의 경우,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비록 준비 기간 동안 함께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공연을 준비하였더라도 장시간의 공연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각각의 아티스트들은 본인들의 몫을 수행함과 동시에 틈새를 채워나갔고 전체 그림을 구성해 나갔는데, 이를 위해 필요했던 각자의 작업 조건들은 매우 달랐던 것 같다. 어술라는 하루 일정 중에 우리가 많은 것을 해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추진했어야 했고, 아나와 나는 우리의 미학적 흥미지점을 작품 안에서 계속해서 실험하기 위해 때로는 전체를 잊고 지체했어야 했다. 코지의 경우 보다 정확한 지도를 개별적으로 필요로 하며 엑셀로 새로운 공연 스코어를 정리했고, 마틴과 아렐리는 호스트로서 공연 제작을 위한 전반적인 소통을 주로 맡았어야만 했다. 이쯤에서 나에게는 이 공연이 수도가 아닌 툴룸에서 이루어졌으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발생했던 것 같다. 공연의 엔딩으로 실험되었던 <미소서식지 몸>의 경우, 아쉬움으로 남았던 점은 이것이 <Piece with gaps for each other>의 틈새에서 서식했을 때 어떠한 화학작용을 했는지에 대해 참여 아티스트끼리의 비판적 대화가 부족했다는 것이었고, 반면 만족한 지점은 공연 당시 관객의 ‘견인’을 매우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어 ‘보다’라는 행위의 방향성과 동원성을 나의 몸 하나로 완전히 재설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마틴과 아렐리의 피드백처럼 나의 시야가 관람자의 입장으로 머무르는 것에서 벗어나 ‘봄’을 수행할 수 있는 ‘0.5의 봄’이 유기적으로 발생되었고, 어술라의 피드백처럼 공연 자체의 껍질이 뒤집어져서 흘러나가는 것을 엔딩으로 설정해볼 수 있었다.



카사 델라고에서의 공연 ⓒ장혜진



카사 델라고에서의 공연 ⓒ장혜진



카사 델라고 공연 스코어(정리: 코지 세토)



멕시코 시티 공연을 위한 홍보물 이미지
모였으면 바로 흩어지는 주소없는 레지던시답게, 마틴과 아렐리는 공연이 끝난 당일 밤 비행기를 타고 미국의 어스 댄스 국제 다원예술 예술가 콘소시움(Earth Dance - International Interdisciplinary Artists Consortium)으로 향했다. 이들은 우리의 레지던시 과정과 공연이 큰 의미와 무게 그리고 힘을 가지고 고착되기 전에, 바로 떠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흩어져 남은 채로 이틀을 더 탐색하고 현지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고, 나름대로의 반추의 시간을 가지고 화요일 새벽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글 스튜디오가 완성된 후 2019 콘덴사시옹 래바르토리 레지던시는 <미소서식지 몸>을 테마로 가져가 보고 싶다는 것이 지금 마틴의 생각이다. 그때는 한국에서, 보다 여러 명의 아티스트들이 합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흩어진 채로, 각각 살아보다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주소는 없다.
장혜진_안무가 장혜진은 북중미와 한국을 오가며 '사는 곳(Habitat), 없는 몸(Missing body), 그리고 봄을 봄(Seeing-seeing)’에 관한 안무 작업을 지속해왔다. 미국 Movement Research 상주예술가, New York Live Arts Fresh Tracks 상주예술가, Knowing Dance More 초청안무가, New York Foundation for the Arts 안무멘토, Hollins University 무용과 조교수, 멕시코 Laboratorio: Condensacion 초청예술가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안무가/드라마터그/교육자/에세이스트 등 예술가를 support하는 예술가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 프로젝트로는 <미소서식지 몸>, <거울뉴런 퍼포먼스 워크숍>, <living without ( )>, <드리프팅 바디>, <이주하는 자아 문의 속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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