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0.15 조회 2247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이야기의 방식 춤의 방식-공옥진의 병신춤 편> 제작 노트

김민승_작가, 드라마터그



<이야기의 방식 춤의 방식-공옥진의 병신춤편> ⓒ남산예술센터(photo_조현우)
공연을 보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간단히 공연 소개를 하겠습니다. 극단 그린피그가 이번에 남산드라마센터와 함께 기획한 공연은 <이야기의 방식 춤의 방식-공옥진의 병신춤 편>입니다. 이 공연은 일종의 연작 공연의 성격으로 기획되었는데 전작은 <이야기의 방식 노래의 방식-데모 버전>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전작은 판소리를 다루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판소리 공연이 아니라 판소리‘에 대한’ 공연이었고, 그래서 소리꾼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극단 배우들이 직접 판소리를 배워가면서 공연하였습니다. 저는 두 공연에서 모두 프로덕션 드라마터그로 활동했고 두 공연의 공통된 고민거리는 우리에게 ‘전통’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짐작하시듯이 저는 무용 혹은 춤과는 무관한 사람이고 연극판의 언저리를 맴돌던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저희 극단에서 무엇이 되었든 ‘춤’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극쟁이들의 관점일 뿐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공옥진’에 대해 다루었다는 점은 더욱이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요.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춤에 대해, 더 나아가 춤의 전통에 대해 논해야 한다는 부담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만들어보려는 수작이기도 합니다만.
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옥진에 대해 다룬다는 것이 왜 논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아마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이번 작품을 공동창작 하면서 다소 당황스러웠던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공옥진의 생애사와 관련하여 몇몇 모순들이 발견되고 일치하지 않는 증언들이 나타났다는 점 역시 우리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처음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린피그의 공동창작 작업 중에서 시인 백석, 화가 나혜석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있었는데 한 인물의 생애사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한 만큼 멋지거나 탄복할만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며 앞뒤가 안 맞거나 실망스러운 지점들도 꽤 있다는 점을 이미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옥진의 춤은 전통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공연을 넘어서서 연작의 주제를 관통하는 만큼 더욱 무거운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공옥진의 문화재 지정과 관련된 논란 때문인 것이리라 짐작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사실 그 부분은 저희로서는 그다지 크게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문화재만이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공옥진이 한국무용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저희가 공옥진 춤을 전통의 관점에서 논하려 했던 것은 좀 더 아슬아슬하면서도 사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통예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 인물을 탐구함으로써 무엇이 우리에게 ‘전통’이라는 자격을 부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공옥진의 춤 중에서도 특히 ‘병신춤’에 주목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병신춤에 내재했던, 혹은 여전히 내재해 있는 논란거리가 우리를 더욱 자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신춤은 원래 탈춤 등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공옥진에 의해 좀 더 독자적으로 개발된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장애 비하의 관점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장애의 애환을 반영’한다거나 ‘장애로부터의 해방’을 드러낸다는 관점들이 이러한 논란을 잠재운 것 같습니다. 공옥진의 병신춤에 대한 논문들을 검색하면서 저도 그러한 긍정적인 입장들을 여럿 발견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몰고 가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데가 없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흉내를 내면서 과연 ‘장애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설사 표현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은 아닐지(공옥진의 병신춤이 장애로부터 해방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던 몇몇 비장애인 연구자들처럼), 그리고 과연 병신춤의 기원에 장애에 대한 비하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이런 질문들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채 맴돌았습니다. 저희는 장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학적 논의들도 함께 공부하였고 배우들이 직접 장애인 예술가들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문들이 너무나 어렵고 무거웠던 탓인지, 이미 무대 위에서 공연이 한창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질문의 형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저희는 이상의 논란들을 공연 작업 내내 정면으로 마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달리 표현하자면 열심히 하는 만큼 자가당착적으로 공연을 준비하였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프로덕션의 어느 누구도 공옥진을 직접 만나거나 그의 공연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공옥진의 수제자’임을 주장하는 공연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배우들은 열심히 한국전통무용을 배웠습니다. 살풀이와 승무를 관절이 흐물거리도록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공옥진의 춤을 직접 전수받은 일이 없다기에, 현존하는 모든 관련 영상물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분석해 가면서 그의 춤사위를 흉내 내고 게임센트럴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동작들을 재구성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우리는 공옥진의 춤을 제대로 구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물론 실패할 것이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실패하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한 셈이지요. 그런데 궁금한 점은, 과연 우리가 공옥진의 병신춤을 완벽히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러면 우리는 공옥진의 춤을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공옥진의 수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공옥진의 병신춤을 춘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미래완료형 시제처럼도 보이는 이 이상한 질문들은 아마 그린피그의 공연에 대해서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은 아닐 것 같습니다.


김민승_작가, 드라마터그 <구름>(2013), <원치않은, 나혜석>(2012)의 작가이며, <이야기의 方式, 노래의 方式―데모버전>(2014),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2013), <두뇌수술>(2012), <나는야쎅스왕>(2011) 외의 작품의 드라마터그를 맡았다. 2009년 제6회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목록

댓글 0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