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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0.12 조회 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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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투르그에 대한 단상: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 선정작 박유라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

송주호_공연예술가

대다수 예술가에 주어진 창작의 고통은 예술적 감각을 형식화하는 고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계비 외 창작 비용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이다. 예술과 창작 활동의 기준이나 범위는 각자 다를 수 있다. 자본과 무관한 예술의 방식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많이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편, 어떤 예술가들은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을 통해 데뷔작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이 글은 박유라의 안무 데뷔작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 ⓒ박유라 (사진_popcon)
드라마투르그는 누구인가
언제부터인가, 서울의 무용계는 연극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 개념을 빌려와 창작 과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무용 공연에서 드라마투르기가 생소한 분야였다는 걸 떠올리면, 유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춤과 관련한 모든 장르에 드라마투르그(Dramaturg)가 고용되는 실정이다. 일차적으로 안무가 홀로 작업 구축한다는 지난한 과정의 외로움과 곤란함을 생각하면, 드라마투르그와의 협업은 꽤 고무적이고 생산적이다. 지난 몇 년간 공개된 크고 작은 규모의 무용작들을 살펴보면, 직업적인 전문 드라마투르그, 또는 다른 분야 전문가(연극 연출가, 학자, 문학인 등)와의 협업뿐 아니라 동료 안무가 또는 무용수, 그리고 기획자 모두 드라마투르그로 개입하고 있다는 걸 크레딧을 통해 알 수 있다. 드라마투르그가 안무가에게 정서적 독려를 하거나 심리를 상담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또는 영감을 주는 영매로서 기대하는 게 아니라면, 안무가에게 드라마투르그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면, 안무가는 왜 드라마투르그를 필요로 하는가?
드라마투르그가 공연 제작의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창작자가 제시하는 작업 논리와 작품의 방향성에 대하여 객관적인 조언을 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또 다른 형태의 창작자로 협업함으로써 비평의 언어를 통해 작품의 변곡점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상주 비평가’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드라마투르기를 전제로 했던 연극의 경우, 드라마투르그는 극작가와 해석자라는 이중의 관점을 취하며 희곡을 다룬다. 혹은 분석-재해석으로의 각색자다. 연출가가 작품의 외면으로 총체적 책임을 진다면, 드라마투르그는 스토리텔링 뿐 아니라 극의 전반적인 내러티브, 즉 작품의 내면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친애하는 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충돌할 수 있는 매우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의 차이는 극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 층위를 발생시킨다. 서사 영화로 비유하자면, 시나리오 작가로 얘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과 영화, 이 두 매체는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드라마투르그는 최소한 이론적으로 명확한 역할이다.
그렇다면 무용에서의 드라마투르그는 어떻게 개입하는 것일까. 언뜻 떠올리기 쉬운 사례는 피나 바우쉬와 라이문트 호게의 관계일 것이다. 두 사람의 작업이 무용과 연극이 만나는‘탄츠테아터(Dance Theater)’임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수월할 것 같다. 혹은 고전 발레의 스토리텔링을 생각해도 될 것이다. 아무래도 무용의 맥락으로 드라마트루기의 토착성을 찾는 것은 안무가의 몫인 것 같다. 안무의 방식이 다양할수록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더 공고해지지 않을까. 혹은 드라마투르그야말로 동시대 무용의 진정한 안무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 ⓒ박유라 (사진_popcon)
안무가와 드라마투르그
공연 예술가인 나 역시, 동료 창작자들 서로가 서로를 드라마투르그로 개입시키는 최근의 크고 작은 공연의 방식처럼 올해 최초예술지원 무용분야에 선정된 박유라 안무의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에 참여했다. 개인 작업에 집중하는 시간에 더 할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드라마투르그를 하거나 비평가를 자처하진 않지만, 비평적 태도와 관점이 예술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올해 박유라와의 작업 제안은 누군가의 데뷔작에 참여한다는 기쁜 마음으로 선뜻 수락했지만 어쩐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용에서의 드라마투르그는 내게 적어도 안무가의 전담 심리 상담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모호함보다는 , 안무가가 제시하는 주제의식과 미학적 쟁점이 주로 신체 감정의 모티브에서 시작하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도 결국 신체의 피상성에 봉착하기에 십상인 작업들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무의 방식이 단지 신체 서사에 대한 도착증적 탐색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설령 그것이 안무가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드라마투르그가 구조와 형식을 제시할 때, 안무가의 관성적 언어는 그것을 어떻게 수용해왔는가. 두 역할의 페어플레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무용계가 별점평가식의 인상 비평만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면, 행여 무용계에서 비평이 최소한의 존재 가치로도 존중받지 못한다면, 비평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고하는 드라마투르그와 어떻게 공생할 것인가. 관객에 공개된 순간부터 희석되고 은폐될 수밖에 없는 공연의 숨은 조력자에 대한 고민은 안무가가 던지는 질문보다 먼저 도착한 걱정이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 ⓒ박유라 (사진_popcon)
드라마투르그를 처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세영 연출의 <내진>(2017)과 최승윤 안무의 <초연>(2016)에 이은 세 번째 드라마투르기 작업이다. 그렇지만 박유라와의 작업은 다른 두 사람의 작업 과정과 비교하면, 혹은 앞서 내비친 먼저 도착한 걱정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곤란함’이 있었다. 그건 창작자의 각기 다른 성향으로 발생하는 차이이거나 드라마투르그에 관한 박유라의 견해 때문이 아니라, 지원금 제도로 가능했던 제작진 구성의 ‘데뷔작’이 매우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세영과 최승윤의 경우, 그들이 지난 몇 년간 해왔던 작업과 태도를 레퍼런스로 두고 새 작업이 발전하는 데 있어 작가의 맥락을 보다 공고하게 세우는 것이 나의 일차적인 목표였기 때문에 가능한 개입이었다. 하지만 박유라의 경우, 그가 신체적으로 잘 훈련된 탁월한 무용수라는 레퍼런스를 제외하면 내게 누적된 작가의 작업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의 직면은, 작업 구상 이전에 흐트러진 주제 의식을 탐색하고 그러모으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는 박유라가 과거에 무용수로 참여했던 작업 경험과 사적인 감정의 정보에서 시작됐다. 무대 위에 선 무용수가 안무가가 기쁜 형태와 무관하게, 무용수 스스로 자신을 레퍼런스로 두고 그가 가장 기쁜 마음의 상태로 춤을 춘다는 형식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공연의 형태라는 사후적 객관성을 어떻게 도출해낼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것이 작업 과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총 네 명의 퍼포머가 출연한다. 두 명은 연습 기간을 거치고 두 번의 이틀 공연 내내 출연한다. 다른 두 명은 그와 다르게 연습 기간이나 리허설에 참여하지 않고 그날의 상태만을 염두에 둔 채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 두 퍼포머는 각자 하루씩 출연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연출하거나 즉흥 움직임으로 공연의 시간을 전개해야 했다. 이렇게 공연의 형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을 보고 싶다던 안무가의 마음은, 그간 무용수로서 안무가가 정해주는 움직임과 그가 원하는 형태에 최대한 맞춰 그대로 수행해야 했던 한 예술가의 살의의 추억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고단함이었을까. 자신이 경험했던 관습적인 안무의 형태를 따르지 않겠다는 태도는 결국 형식에 관한 도전이었을 테다. 자신이 무용수의 직업윤리을 가졌을 때와 매우 상반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안무작에 출연하는 퍼포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것은 창작의 자유와 상충하는 것이 아닐까. 안무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무용수의 적극적인 최상의 상태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안무가가 신체의 형태나 춤 동작을 구체화하는 관습이 아닌 구조와 형식이 최대한 개입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용수의 (순수하다 일컫는) 주관적 상태와 관객의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공연의 객관적 형태에서 ‘우리’라는 주체성은 누구인가.



<우리를 기쁘게 하는 형태> ⓒ박유라 (사진_popcon)
데뷔작의 자유
극장에 들어선 이후 무대 세팅과 리허설을 하는 시간은 다른 안무가의 작업에 출연하며 몸을 풀며 대기했던 무용수 박유라의 시간과, 공연을 책임지는 안무가 박유라의 시간이 매우 달랐을 거로 생각한다.
첫 작업 이후, 업계에 내던져진 예술가는 점점 자신의 예술적 이상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버티며 예술적 이상을 재고하거나 변주하게 된다. 어쩌면 데뷔작은 한 예술가가 ‘자유’에 대한 최대한의 환영을 꿈꾸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드라마투르그가 작품의 양심을 맡고 있다면, 안무가에게 드라마투르그가 하는 일은 도덕적 행위보다는 자유의 가치에 대해 상기시키는 것일 테다. 최초예술지원을 통해 데뷔작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의 혜택이거나 선정자의 개인적 기쁨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제작비의 규모는 작품의 형태에 큰 영향을 미치며 창작자가 예상하지 못한 예술적 과제를 낳고 작업 윤리의 방향성도 떠올리게 한다. 예산 없이 독립적으로 작업을 하는 경우, 가까운 동료나 개인으로서 예술 활동을 하게 되지만, 제작비가 있으면 제작진을 이전과 달리 좀 더 체계적으로 구성하거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특정 제작진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특히 작품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드라마투르그가 참여하게 된다면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 프로토콜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드라마투르그란 예술의 질문에 대답하기 보다는, 질문의 예술로 안무가의 답변을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문화재단을 제외하면) 최초로 예술을 지원하는 이는 드라마투르그가 아닌가.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단상을 마친다.


송주호_공연예술가 디오라마비방씨어터에서 연출과 무대 디자인을 맡고 있다. 대표작으로 <하얗게 질리기 전에>(2018, 남산예술센터 서치라이트), <금지된 계획>(2018, 유망예술지원MAP), <퍼포먼스 연대기>(2017, 플랫폼엘, 플랫폼 라이브), <응원 세포>(2016, 국립현대무용단, 아르코예술극장), <유익한 수난>(2015, 국립현대무용단, 예술의전당) 등이 있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2017/2016), <연말연시>(2015, 인사미술공간) 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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