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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0.08 조회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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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탄츠메세 방문기

김다엘_서울문화재단 서울무용센터

※ 본 에세이는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으로, 단편적이고 주관적임을 미리 밝힙니다.
1장. 상황에 대한 설명과 변명
입사 첫날, 내가 다섯 달 뒤 독일 출장을 갈 거란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빡빡하게 짜인 업무 스케줄 덕분에 당황할 틈도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 사이 시간은 잘만 흘러 출국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친 몸뚱이를 비행기에 실으며 언제 도착하려나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뒤셀도르프였다. 몸만 지쳐서 갔으면 다행이었지, 스트레스는 진작 받고 있었다. 막 무용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입문자가 무용계에 수년을 몸담아온 이들을 만나 서울무용센터를 알리고 미팅을 해야 한다니! 밀려오는 부담감과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시차도 우리를 힘들게 했다. 오프닝 세레머니가 있던 첫날, 우리가 예매한 공연 2편은 꽤 늦은 시간에 시작했다. 마르코스 모라우(Marcos Morau)와 수잔나 레이노넨(Susanna Leinonen)의 안무작을 봤는데, 감기는 눈을 어찌할 수 없었다. 시차 적응도 못 하고 지칠 대로 지친 탓에 띄엄띄엄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눈을 뜨고 있을 때 보았던 움직임과 조명, 음악은 잊으려야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공연을 제정신으로 보지 못해 너무 아쉽다. 덧붙이자면, 피칭, 오픈 스튜디오, 공연 모두 사전 예약이 필요한데 촉망받는 안무가나 유명한 댄스 컴퍼니 작품은 금방 매진됐다. 늦으면 그만큼 선택의 폭이 줄어들기 때문에 빠른 예약을 추천한다.





2018년 탄츠메세 포스터 ⓒ김수연
탄츠메세가 열리는 NRW-Forum 전경 ⓒ김다엘
2장. 탄츠메세를 찾는 이들
탄츠메세(Internationale Tanzmesse)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최대규모의 국제무용마켓이다. 공식적으로 등록한 부스만 110여 개, 사람은 900명 가까이 되니 비싼 등록비를 내지 않고 그냥 방문하는 개인과 '선수'들까지 합치면 탄츠메세를 위해 이 작은 도시를 방문하는 이들은 천 명이 넘을 테다. 부스가 위치한 NRW-Forum은 이런 종류의 박람회가 많이 열리는 장소였다. 더위가 한풀 꺾인 시원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내뿜는 열기로 건물 내부는 후끈했다. 이 많은 사람이 무용계에 몸담고 있고 여기서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구나, 신기하고 신기했다.
첫날 오후,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며 벨기에 한 무용단의 기획자가 찾아왔다. 앉자마자 그녀가 일하고 있는 컴퍼니의 작품 스틸컷을 한 뭉텅이 꺼내더니 투어가 가능한 작품들을 꽤 시간 들여 설명하고서는 센터가 어떤 공연을 선호하는지 물어왔다. (설명하는데 중간에 끊기가 미안해서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해외 작품을 초청하는 곳이 아니라고 설명하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는 서로의 목적이 분명하니까. 그래서 이런 마켓이 있고 여기로 모이는 것 아니겠어? 그럼 너희는 어떤 걸 하는지 설명해줄래?" 참, 여기가 마켓이었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쿨한 대답에 정신이 들었다.



매일 아침 각종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고,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있던 건물 중앙 카페테리아. ⓒ김다엘
3일 동안 이곳에서 오고 가는 얘기와 만남들을 보면서 확실하게 와 닿았던 것은 작품을 초청하고 사들이는 축제 관계자와 무용기관의 프로그래머 보다는 작품을 팔기 위한 프로듀서, 컴퍼니 매니저, 안무가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탄츠메세 부스 참가자로 등록을 하고 난 후 서울무용센터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미팅을 잡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을 엄청나게 받았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탄츠메세에 등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Visitor's List(방문자 목록)을 미리 받아 사전에 등록된 방문자의 사진까지 넣은 일종의 'to meet list'를 들고 부스 이곳저곳을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래, 목적이 확실한 마켓에 왔다면 앉아서 누군가가 그 컴퍼니와 작품에 관심 가져주기를 바라며 앉아있을 게 아니라 이 정도의 준비와 수고는 필요한 것이겠구나 싶었다.
작품을 사고 팔려는 사람들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협력할 만한 무용 기관을 찾는 댄스필름 프로덕션, 댄스필름 페스티벌에 한국작품 공모 홍보를 부탁하는 프로그래머, 무용 저널리스트, 레지던시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보던 안무가들까지. 마켓이라는 플랫폼과 형태가 지닌 한계가 있음에도 이 짧은 시간 동안 무용계 내 수많은 정보가 오가며, 서로의 파트너십을 만들고 각자의 것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메인 베뉴 tanzhaus nrw와 바로 옆에 위치한 Capitol Theater. ⓒ김수연
tanzhaus nrw 입구를 들어서면 보이는 매표소. 오프닝 세레머니가 있던 날이라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김다엘
3장. 탄츠메세에 대한 짧은 단상
1) 최대 규모의 국제무용마켓이라 하여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는데, 그곳에 있는 동안 운영에서의 미숙한 부분이 꽤 보였다. 올해 탄츠메세 운영진들이 대부분 변동이 있어 예전 같지가 않으며, 다른 부스들도 불만이 꽤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나중에 얼핏 들었다. 내가 이런 행사를 완벽에 가깝게 준비하는데 익숙한 한국 사람이라 이런 부분이 더 크게 보인 건가 싶기도 했다.
2)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작품을 팔려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 돼버렸고 수준 높은 공연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지다 보니, 오랫동안 탄츠메세를 방문해온 사람들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이제 안 올 거다."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전해들은 말이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좋은 공연 한 편이더라. 기립박수가 흔하지 않은 탄츠메세에서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 좋았던 공연을 보면 내 후년에도 이런 공연 하나 기대하며 뒤셀도르프를 오지 않을까?
3) 마켓은 마켓이다. 돈이 많은 부분을 좌우한다. 저마다 부스 크기도, 나눠주는 굿즈도 제각각이지만 양과 질의 차이는 확연해 보였다. 또 소셜 아워라고 해서 부스마다 작은 리셉션을 1시간 가지는데, 각자 가져온 샴페인, 맥주 등을 풀어놓으면 안 그래도 좁은 부스 간 통행로가 막혀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인기였다. 이제는 꽤 흔해져 버린 에코백이지만 어딜 가도 찾기 힘든 특이하고 예쁜 색 조합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던 에코백부터, USB, 부채, 팔찌, 맥주 코스터까지 참 다양했다.
4) 최근에 가까워진 독일 안무가가 있는데, 그녀는 나를 통해 탄츠메세라는 행사를 처음 알게 됐다. 최근까지 독일에서 무용을 공부했고, 꽤 활동했는데도 이런 마켓을 몰랐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탄츠메세 일정을 마치고 만날 기회가 있어 나에게 탄츠메세에 대한 얘기를 조금 듣더니 그런 마켓은 독일답지 않은 것 같단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독일인도 탄츠메세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독일다운 것이 뭔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tanzhaus nrw 로고를 이용한 홍보 사인물(왼쪽)과 체코&슬로바키아 부스 홍보물 맥주코스터(오른쪽) ⓒ김다엘
4장. 짧지만 강렬했던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번 탄츠메세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신입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크지도 많지도 않았지만 더 넓은 곳의 얘기를 보고 들으며 우리네 부족한 부분, 한계,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과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메인 베뉴인 tanzhaus nrw 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빨간 조명 아래 디제이가 남미 느낌 물씬 나는 신나는 음악을 틀어주고 그 비트에 맞춰 춤추던 사람들이다. 골반을 튕기며 기다란 기차로 큰 원을 만들고, 그 무리에 끼지 않은 밖의 사람들도 혼자서 또는 둘이서 몸을 들썩이고 박자를 타며 수줍게 춤추는 걸 봤다.
'아- 이 사람들은 춤을 좋아하는구나, 국적이 다르고 가진 직업과 분야가 다르지만 춤을 좋아하는 마음은 같구나.'



한국관 부스 'Dance of Korea' 소셜 아워를 준비하던 중(왼쪽), tanzhaus nrw 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오른쪽) ⓒ김다엘
나는 이제 막 무용에 발을 들여 나름의 재미와 취향을 알아가는 중인데, 아직 직접 춤추는 데 까지는 가지 못했다. 사람들 많은데 나서는 것도 꺼리고 누구 앞에서 춤을 춘다는 건 상상도 못 하는데, 요즘 센터에서 열리는 워크숍을 먼발치에서 구경할 때면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러다 언젠가 내적 흥이 폭발하면 나도 그들처럼 신나는 음악에 함께 몸을 맡길 수 있는 날이 오려나?


김다엘_서울문화재단 서울무용센터 서울문화재단 서울무용센터 사원. 학부에서는 연극을 배웠다. 졸업 후에 부다페스트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보낸 1년 동안 클래식, 발레, 현대무용에도 눈을 떴고, 덕분에 지금은 서울무용센터에서 국제교류를 담당하고 있다. 장르를 불문하고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보고 싶은 공연이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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