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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9.11 조회 6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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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며 부모가 되는 법

허영균_웹진 <춤:in> 편집부

일시: 2018년 9월 2일 일요일 오전 11시

참석: 허성임(모더레이터), 이소영 안무가, 밝넝쿨 안무가, 김연임(본지 편집장), 허영균(에디터)



(왼쪽부터) 허성임, 밝넝쿨, 이소영 안무가 ⓒ양동민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의 단절과 육아 노동의 분담 문제는 무용인들에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나 몸을 매개로 활동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트레이닝을 필요로 하는 무용수의 컨디션은 이슈가 된다. 지속적인 트레이닝, 팀원들과의 작업 시간을 조율하는 것도 육아 무용가들에게 난관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며, 삶과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세 명의 무용가를 만났다. 각각 8년 차(+4개월), 7년 차, 30개월 된 아이를 키우는 밝넝쿨, 이소영, 허성임 세 사람은 육아와 함께 달라진 작업의 방향, 작업의 밀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뿐만 아니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의 문제를 보완할 제도적 제안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부모가 되다
허영균: 그 어느 때보다 시간 내시기 어려운 분들을 모셨습니다. 아이와의 시간은 가장 조율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자리해 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이 좌담은 육아와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무용가들의 삶과 작업 이야기를 가까이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출산과 육아에 따른 일상의 변화와 그것이 작품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솔직하고 깊은 이야길 나누고 싶습니다. 또한 제도적인 제안과 대안까지 논의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자기소개와 함께 기르고 계신 아이도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소영: 저는 이소영이고요. 아들은 일곱 살 김태경입니다. 태명은 ‘야호’였어요. 내년에 초등학생이 되어서 고민이 많아요. 어디서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허성임: 제 이름은 허성임이고, 아들 이름은 ‘마루 베로큰 허’에요. 엄마 성도 넣었어요. 30개월 된 남자아이이고, 일주일에 두 번 놀이방에 보내고, 나머지 3일은 제가 봅니다. 오늘은 주부, 오늘은 아티스트. 이렇게 파트타임 예술가, 파트타임 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가 좀 크고, 남편도 이해해주고 하여 지금은 예술가 타임이 더 늘어났어요. 다만, 아이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트레이닝하며 몸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허영균: 패널인 밝넝쿨 안무가는 아이가 밤새 아팠대요. 병원에 들렀다 지금 급히 오시는 중이라 하니 잠시 기다리면서, 대화를 먼저 시작하면 좋겠어요. 본격적인 좌담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육아의 고단함을 토로했는데요. 예측할 수 있던 그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소영: 공연 활동을 한참 하고 있을 때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어요. 한참 활동할 때는 외부 환경에 따라 작업을 하거나, 하지 않고를 결정하게 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도 어렵고 해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어차피 결혼 했으니까 아이를 가지고 싶었어요. 저는 옛날부터 내 삶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변화는 예상보다 더 컸어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관계의 단절인데요. 삶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관계도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나는 순식간에 동네아줌마가 되었어요. 신랑은 나를 춤추는 사람으로 만났지만, 그에게도 자기 아이의 엄마, 아내 이상이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 힘들 더라고요.
춤추는 사람들은 춤 외에 다른 관계를 만들기 힘들잖아요. 그래서인지 무용 활동을 멈추니까 관계도 가위로 자르듯이 싹둑 잘리더라고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 데도요. 원래는 SNS를 전혀 하지 않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한 3년은 SNS에 몰입했어요. 환기 창구가 없으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아이가 3살이 되면서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그 전까진 그랬어요. 알고는 있었지만, 출산과 육아라는 것이 이렇게 거대할 줄 몰랐고 나의 모든 것이 뒤바뀔 거라고 생각 못했죠. 춤을 안 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허성임: 벨기에 무용단에서 활동하며, 영국에 있는 남편하고 가끔 만나는 삶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아이는 최대한 늦게 가지려고 노력했었어요. 근데 제 모토가 남들 하는 건 다 해보자는 거거든요. 남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여자로 살면서 출산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계속 시도는 했는데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유산이 여러 번 됐어요. 세 번 정도 유산을 했고 그럴 때 마다 무대 위에 바로 올라갔는데 나중에 후유증이 오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다 서른아홉에 임신을 했어요.
애기를 낳고도 바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남편도 있고, 또 유럽에는 투어할 때 아이를 같이 가게 하는 ‘보리스 사마츠’같은 컴퍼니도 있어요. 워낙 가정적인 컴퍼니라 투어마다 내니를 고용해주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시부모님이 당연히 봐주시겠거니, 서로 얘기도 없이 혼자 믿고는 아이를 벨기에에 맡기고 투어를 할 생각이었어요. 출산 후 2개월 뒤부터 그 다음 해까지 모든 작업을 예약해 놨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까 정말 자그마한 생명을 떼어놓고 어딜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시부모님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으셨어요. 그래서 남편이 있는 영국으로 갑자기 옮겼어요. 영국은 춤도 재미없고, 이민자에 대한 배척도 심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벨기에에 모든 걸 다 두고, 가족도 직장도 없는 영국에 지금 머무르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그 단절감이 몇 배는 심했는데, 내가 힘들어하니 남편도 너무 힘들고 가족 전체가 힘들었죠. 고생했어요. 아무리 얘기해도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를 거예요.
이소영: 나도 유산을 세 번 정도 했는데, 내가 피 흘리며 다시 활동을 재개하려고 할 때에는 유산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사람들이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자연유산의 개념도 없는 거죠. 주변에서 날카롭게 날 찌르지 않았는데도 혼자 찔려서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거리를 둔 것 같아요. 이때 남편은 전혀 도움이 안 돼요.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몸을 쓰던 사람인데, 몸을 풀 수 없으니 너무 힘들었고, 거기서 헤어 나와 내 두 발로 서는 데까지 3년이 걸렸어요.
김연임: 왜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요?



이소영 안무가 ⓒ양동민
이소영: 신체 자체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미친 듯이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신체적으로 회복되어 원래의 상태로 호르몬이 돌아오는 시간이 3년에서 5년 이후라고 하더라고요. 생리학적으로요. 아기가 뱃속에서 나왔지만, 떨어진 게 아니에요. 3년 정도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분리되지 않은 상태라 해요. 쉽게 케미라고 하잖아요. 이때 아이만이 아니라 엄마도 분리불안을 느껴요.
결혼할 때는 ‘네가 결혼할지 몰랐어’, 아기 낳을 때도 ‘네가 아기 낳을지 몰랐어’라는 말 많이 들었어요. 선생님들이 저를 아낀다는 마음으로 ‘결혼 하지마, 아기 낳지마’ 하셨고요. 아마 제가 무용계와 단절된 여러 이유는 출산과 육아를 통해 제가 더 이상 춤추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인식된 것 같아요.
허성임: 아기를 낳으면, 아기의 시스템을 따라가야 해요. 애기 잘 시간, 밥 먹을 시간, 그 시간을 다 피해서 아기 자는 한두 시간 정도밖에 제 시간이 없는 거죠.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인데, 그걸 만들어주고 지탱해주기 위해서는 우리 삶이 바뀌는 수밖에 없어요.
이소영: 태경이가 요맘때 하루 두 번 잤어요. 그 시간에 애를 재우지 않으면 하루 내내 힘들어요. 재워만 주면 잘 잤어요. 그래서 그런 탐구나 탐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어요. 주위를 보면 어른들의 시스템으로 키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임 씨가 말한 것처럼 아이에게 시계를 맞춰주어야 해요.
김연임: 말씀을 들어보니 일단 주로 아기를 돌보는 건 엄마네요. 아빠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육아를 함께할 수 있었나요?
이소영: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남자의 경우, 성역할에 대한 인식이나 아기를 낳은 뒤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어요. 제 남편도 일반적인 한국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하게 한국남자였어요. 애는 당연히 엄마가 키워야 하는 거라 생각하는.
허성임: 이런 이야기까지 깊숙이 하고 결혼을 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죠.
이소영: 이런 대화가 부부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 신랑은 그 대화가 필요하단 사실 자체를 몰라요. 어느 정도였냐면, 애기가 갓 태어나면 2시간 자고, 2시간 만에 먹는데 그 신호만 보낼 줄 아는 백지 같은 상태거든요. 그런데 그 시간동안 신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새벽에 밥 먹일 때 일어난 적도 없고, 안아준 적도 없고, 내 밥을 챙겨준 적도 없어요. 내가 씻은 지 안 씻은 지도 몰라요. 한번은 내가 너무 똥이 마려웠는데, 애를 안고 쌀 수는 없으니까 애를 잠깐 안아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그냥 나갔어요. 똥 따위에 내가 회사를 지각할 수 없다는 거죠.
허성임: 언니 부모님은 안 도와 주셨어요?
이소영: 물론 도와주셨지만 연로하셔서 부탁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지금 성미산에 공동육아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으로 이사 온 것도 남편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였어요. 어느 날은 너무 화가 나서 아이랑 남편을 두고 그냥 나가버렸어요. 홍대를 막 걸어 다니고 그나마도 갈 데가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있었어요. 씻지도 않고 갔는데도 너무 좋더라고요. 신랑에게 나를 이해해 보라고 한 일인데, 집에 들어가니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있더라고요. 나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기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 전투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차차 남편도 육아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어요.
내가 택한 육아의 방식
허영균: 그렇다면 이런 상황, 어쩌면 무용인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내가 택한 육아의 방식은 뭔가요?
이소영: 부부, 부모와 교사, 마을이 함께 육아하는 공동육아를 택했죠. 공동육아에 오고 나서부터 남편은 나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어요.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는 마실 문화가 있어요. 엄마 아빠 외에도 친숙한 이웃이 있는 마을이에요. 옆집 가서 늦게까지 놀고 오고, 저녁도 얻어먹고요. 이 동네에 예술인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래은 연출, 오성화 프린지 대표 덕에 저도 여길 알게 됐고요. 비슷한 환경의 예술인들이 사니까 서로 공연이나 연습 때 맡아주기도 해요.



허성임 안무가 ⓒ양동민
허성임: 저는 애기가 혼자 자라는 줄 알았어요. 어쩌면 제가 소영 언니 남편 같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그랬듯이. 저는 제 일이 중요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남편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고, 네가 뭘 위해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라는 등 절 많이 설득했어요. 결혼하기 전에 시아버지를 보라고 하잖아요? 벨기에 사람들이 참 가정적이거든요. 제 남편도 시아버지도 그래요.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오히려 귀찮을 때도 있어요. 남녀의 역할 분담이 전혀 없어요. 애기도 아빠를 더 좋아해요. 서운할 정도로.
이소영: 맞아요. 제 남편도 그러려고 마음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몰랐던 거예요. 그걸 모르니까 내가 자기를 쥐고 흔든다고 생각한 거죠.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허영균: 밝넝쿨 님 오셨네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 자기소개와 함께 자녀 소개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육아하고 있는지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밝넝쿨: 큰 아이가 8살이고 북한산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지금 너무 허겁지겁 와서 제정신이 아니네요. 차 안에 있는 아들 초콜릿을 20개 정도 먹었더니 너무 혼미하네요. 큰 아이 이름은 박큰강물이고, 얼마 전 태어난 둘째는 딸 박해솔이에요. 한글이름이에요. 아이들 엄마는 무용가 인정주 씨고요. 지금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산 밑에 살고 있는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오면서, 사교육 없이 아이가 뛰어 놀 수 있을 만한 학교를 찾다 보니 이사하게 됐어요. 전에는 남양주에 살았는데 그때도 좋은 유치원이 있다 해서 이사한 거였고요.
이소영: 혁신학교에요? 대안학교?
밝넝쿨: 혁신은 아니지만, 잔디가 깔려있고 학생 수도 적어요. 130명 정도 된다고 들었고요. 남양주에서 이사한 것은 6세 정도 되니까 주변 가정에서 선행학습을 시키더라고요. 우리 애는 선행학습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거든요. 유치원 끝나면 다들 학원에 가버리니까 애가 친구를 사귈 수 없었어요. 그 또래에는 친구 관계가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사교육 없이 교육하는 부모들이 많은 곳을 찾아서 이사한 것이죠.
저랑 아내랑 만난 지 19년 됐어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만나서 함께 정말 많은 이사를 했는데요. 여기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주변에 엄마 아빠들도 친해요. 제가 떡 돌리고 그런 걸 되게 잘하거든요. 25가구 정도 되는 빌라촌인데, 15가구 정도가 다 애 있는 집이에요. 밑에서 애들끼리 놀고 친하게 지내요.
소영: 저희 동네가 도시 중심에서 그런 육아 환경을 추구하는 거예요. 넝쿨 씨 동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네요.
허성임: 부모님이 80대가 넘으셨는데, 딸 넷이 아무도 한국에 없어요. 그래서 저도 한국에 들어올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저는 한국을 좋아하고, 남편도 마찬가지인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까 교육 때문에 걸려요. 저도 사교육 시킬 마음도 전혀 없거든요. 벨기에는 박사과정까지 다 무상교육이고 평준화가 잘 되어 있어요. 한국에 오면 그런 환경 찾기도 힘들고, 국제학교 같은 곳은 학비가 한 학기에 3천 만 원? 연예인 자녀들 다니고 한다는데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밝넝쿨: 저희도 중간에 한 번 이민을 생각했어요. 저도 다비드랑 친하니까 벨기에로 갈까 생각도 해보고, 사실 무용단 콜을 받기도 해서 생활도 될 것 같았죠. 고민하다가 둘째가 생기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일단 부모가 언어가 잘 안 되니까 아이도 힘들 것 같았고, 무엇보다 저야 할 일이 있지만 아내가 타지에서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니 안 되겠더라고요.
이소영: 4~50대 무용가 부부만 봐도 남자 안무가만 활동하고, 같이 무용했던 여자들은 작업을 멈춘 경우가 많아요. 지금 활동하는 많은 중견 무용가들 부인 또한 대부분 무용가였거든요.
밝넝쿨: 제 또래에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남자 무용가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해외 진출을 하지 않은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아내가 더 고립될 것 같아서였어요. 아내와 제가 무용단을 함께 창단했고, 아내가 더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어요. 제가 팔불출이라서가 아니라 아티스트로 좋은 면모를 지닌 예술가인데, 남편이 아닌 동료로서 격려해주고 기대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문화가 남자 쪽이 더 편하게 되어있는 것 같아요. 둘째 계획은 정말 없었거든요. 첫째도 계획에 없었긴 한데…. (웃음) 아내가 올해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어요. 오마라이프 무용단이 상주단체 선정도 됐고 해서 아내가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거든요. 상주단체가 되고 나서 가장 기뻤던 일도 아내가 제도권 안에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지금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서 이소영, 허성임 안무가가 참 대단하신 분들이라 생각해요.
육아가 변화시킨 작업의 방식
허성임: 아이를 맡겨 놓은 10시부터 5시까지 모든 걸 해내야 하니까,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해요. 그래서 작품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자기에서 굉장히 솔직해 지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요.



밝넝쿨 안무가 ⓒ양동민
밝넝쿨: 저는 요즘 남편들 그렇게 안 하면 쫓겨나요. 저는 일단 작업 스케줄을 잘 잡으려고 해요. 저에게 최대한 맞추는 거죠. 제 위주로 세팅을 해요.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 무조건 지키는 것이 원칙이에요. 오전에 나갔다가 2~3시간 시간이 뜨고, 오후에 다시 스케줄이 있으면 집에 들렀다 다시 나가요. 왜냐하면 아내가 밥 먹을 시간이 없어요. 첫애 때 두 달 동안 독박육아를 했던 경험이 있는데 정말 할 게 못 되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요.
허성임: 무용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애보는 게 제일 힘들어.
밝넝쿨: 시골에 이런 말이 있어요. 애 볼래? 밭 맬래? 하면 밭 맨다고 해요. 저는 첫 애 때 그걸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만큼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아티스트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에 안 익숙하잖아요. 멍도 때리고, 여유도 부리다가 작업 얘기도 하고 하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효율적으로 시간을 운용해야 하는 거예요.
이소영: 지금은 집중력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허성임: 내년 1월에 창작산실 작업을 하는데, 저희 스태프들도 제 스케줄에 맞춰야 돼요. 프로젝트는 런던에서 잠깐 하겠다, 준비는 가능하면 영상 통화 등으로 하자, 이렇게요. 지금 대구시립무용단 안무 중인데요. 비디오로 계속 작업했어요. 테스크를 이메일로 던져 주고 비디오로 매일 체크 했어요. 오디션도 비디오로 보고요. 정말 필요할 때 아니면 안 나가게 돼요. 효율성이 확 살아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가끔 낭비되는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시간 낭비 해보고 싶다. (웃음)
밝넝쿨: 첫 애도 1학년이라 돌봐줘야 하고, 갓난아기도 있고요. 집에 가면 난리에요. 집은 쉬는 곳이란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해요. 청소하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이건 기본이에요. 이건 남편이 해줘야 해요. 아내가 제가 없으면 똥도 못 싸요.
이소영: 아까 우리 그 얘기 했어!
밝넝쿨: 저도 애기 안고 똥 싸봤어요. 너무 작으면 업지도 못하잖아요. 목욕도 제가 시키거든요. 손목이 끊어질 것 같아요. 여자는 아이를 낳고 나면 골격이 열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 목욕같이 힘쓰는 걸 하면 부담이 돼요. 작업처럼 집에서도 수행해야 할 스케줄이 있는 거죠.
이소영: 제 남편은 회사를 다니다 보니까 상사나 동료 눈치를 봐야 해요. 아침에 나가면 12시간 있다가 오거든요. 공연을 올려야 하니까요. 요즘엔 그나마 주말엔 쉬는데 전엔 주말도 없었어요.
허성임: 오페어(Au Pair) 제도라고 독일에서 많이 활용되는데, 일종의 입주 유모에요. 문화교류 겸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주로 하는데요. 우리나라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일주일에 15만 원 정도 주고, 아기랑 한 주에 30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주는 제도죠.
이소영: 저는 남편에게 퇴사를 종용하기도 했어요. 돈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고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우리에게 맞추라고 한 거죠. 네 회사에 우리 삶을 맞추지 말고. 자기 주변의 친구를 보면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아내나 친정 식구가 육아를 전담하니, 우리 집이나 내 제안이 어이가 없었나 봐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우리 삶의 방식을 찾자고 제안한 거죠. 이제야 자신이 보수적이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대요. 웬만한 한국 남자는 아마 제 남편과 비슷했겠죠. 여자들은 단순히 남편, 아이만이 아니라 시댁에서 일을 제어하기도 해요. 내가 원래 삶으로 돌아가는데 장애와 걸림돌이 너무 많은 거예요.
허성임: 다들 알겠지만, 그만 해야 되는 이유나 하지 말아야 하는 만 가지지만, 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잖아요. 하고 싶으니까, 그게 내 삶이니까. 저희 벨기에 시부모님이 “너도 고집이 대단하다.” 이러시더라고요.
육아 이후 복귀를 위한 제도적 제안
밝넝쿨: 문제는 하고 싶은 상황이 만들어지고,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할 수가 없다는 거죠. 공연예술, 특히 무용은 일 년 정도만 활동을 안 해도 이미 재껴져요. 빨리빨리 물갈이가 돼요. 특히 40대는 허리 세대라고 활동할 계기를 잡는 게 참 어려워요. 35세 미만의 젊은 창작자를 위한 사업은 참 많이 생겼지만, 오히려 중견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40대 창작자를 위한 사업은 전무해요. 그러니까 더 쉽게 도태되고요.
그래서 육아 이후 복귀하는 무용가들이 작업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작은 작업, 소소한 작업을 종종 하시더라고요. 놀이터에서 프로젝트를 하거나 집에서 하거나요. 중요한 건 제도권 안에서 지원금을 받을 때, 이러한 활동 이력은 인정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런 작업이 이력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지원금을 받은 작업만 작업이 아니잖아요.
이소영: 전반적 인식이 문제라고 봐요. 모든 연령층의 공연이 계속 활발하게 이뤄지는 장이 있었다면 재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거예요. 잠시 육아에 집중하고 다시 돌아와 작업하는 게 일상이었겠죠. 작품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메시지를 존중하는 환경이라면 지금과 달랐겠죠. 저는 이 또한 위계라고 봐요. 사소하다고 치부되는 일상, 집에서 하는 공연은 가치 없다고 인식되는 것도 마찬가지죠. 이게 다 연결되어 있어요.
밝넝쿨: 저의 경우 제 아내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여성 무용가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무용하는 사람이니 무용의 생태계를 들여다보는 눈이 필요해요. 제도권 안에서 작업하는 남자 무용가들은 이 문제 대해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아요. 애 키우고, 작업하는 상황 자체를 경험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허성임: 영국은 제도를 잘 만들잖아요. 꼭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BAME 아티스트(Black, Asian, Minority, Ethnic)에게 항상 일정 부분 이상 지원을 해줘요. 제도적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밝넝쿨: 젊은 무용가들에게 미안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지원하는 수많은 사업 중 하나 정도만 육아중인 무용가들을 위한 것으로 바꿔도 충분할 거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작업으로 검증이 되었던 분들이기 때문에 좋은 작업이 나올 가능성이 훨씬 많거든요.
무용가라는 특수성이 육아에 주는 영향
이소영: 육아 이후 제 작업의 방식은 바뀌지 않았어요. 다만 관점이 바뀐 거죠. 그 전에 무용실 안에서 했던 것들이 생각해보니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어요. 내 이야기였을지라도 진짜가 아니었어요. 지금은 일상이 생겼고, 이것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됐어요.
허성임: 아이를 낳고 나서 여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이 사회에서 여자는 무엇인지, 여자의 몸은 뭔지요. 극장 안에서 나와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까요. 내 몸과 관객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어요. 극장 안에서 소수의 관객을 위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이 사회의 어떤 이야기와 춤, 몸이 연결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이소영: 지원금과 제도권의 안정이 이제는 필요 없어요. 공연을 집에서 하든 문 앞에서 하든 그걸 하고 싶으면 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것도 작업이라는 인식, 이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으면 하는 거예요. 지원금을 벗어나 내 세계를 펼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우려했던 것보다 관객이 훨씬 많이 왔어요. 이제 저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공연하지 않아요. 제도권 안에서 예술을 이해한 사람들만 만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가진 메시지만으로 부딪힐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요. 애를 낳고 나면, 작업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싸움이에요. 문을 열고 나오기 까지가 싸움이고, 거기서 작업실까지 가는 길이 싸움이에요.
허성임: 전쟁이죠. 애를 데리고 준비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놓는 것만으로 너무 힘든데 그 상태로 작업을 하러 가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요.
이소영: 연습의 형식은 바뀌지 않았지만, 댄서와 스태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전에는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던 감성적인 질문들을 하는 과정이 있을 때 더 작업이 효율적임을 경험했어요. ‘체크인’한다고 하는데, 연습에 오기 전까지 그들의 일상을 듣는 시간을 거쳐요. 그러면 연습에 자연스럽게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요. 내가 섭외한 댄서들이 나에게 최선의 컨디션을 주지 못하거든요. 다들 바쁘고 작업에 치이죠. 다 소모되고, 소진되어서 나에게 오니 처음엔 서운했는데, 이들이 진짜 춤추고 싶은 이유를 들어주니 더 좋은 작업이 나오더라고요. 이제는 배터리처럼 기량 좋은 무용수들이 소모되는 공연을 하거나 보고 싶지 않아요.
밝넝쿨: 아이 하나 낳고나면 2년 농사 말아먹는다고 하거든요. 실제로 2~3년은 작업을 할 수 없었어요. 젊을 때는 클래스도 많이 하고, 작업을 할 수만 있으면 기뻤어요. 페스티벌에 많이 참가했는데, 한국의 페스티벌 컨디션이라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거든요. 아티스트 피는 생각도 안하고, 스태프한테 항상 아쉬운 소리 해야 하고요.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페스티벌에 나가지 않아요. 그 시간에 애를 봐야지, 무용수 고생시키고, 스태프들 돈도 못 주면서 애도 못 보면 무슨 작업이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거절을 많이 했었는데, 그런데 모 페스티벌에서 저희 작업이 너무 보고 싶다고 초청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4인무인데, 말도 안 되는 페이를 제시했어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그 조건으로는 못할 것 같다고 했죠. 그 뒤로 다시는 그 페스티벌에 불려가지 못했어요. 국내 페스티벌이 그런 식이에요.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아이가 5살 될 때까지는 신작을 하나도 안 했어요. 해도 거의 솔로나 해외 작업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고요. 그러다 항상 아내와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홀로서기를 해 나가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다른 작업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때 신작 <공상물리적춤>을 만들었는데, 이건 큰 아이에게 영감을 받아서 만든 작품이에요.
전 제 스스로 육아와 작업을 이렇게 정리했어요. 아이를 키우는 건 20년짜리 작업이라고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흥미로워요. 육아라고 생각하면 노동이고요. 아이랑 놀아줄 때 항상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매일 같이 연습실에 함께 나갔어요. 남양주로 이사 가면서는 연습실을 치웠는데, 집에서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면서 맨날 춤추고 놀아줬어요. 노동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20년짜리 작업이라고 생각하니까 새로운 작업의 가능성이 열렸어요.
이소영: 내가 춤을 추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를 바라보는 다른 눈이 있다고 생각해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편을 퇴사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춤을 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를 항상 연습실에 데리고 다니다가, 이런 자극이 많은 환경이 마냥 좋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에 다니기를 멈췄어요. 언젠가 무용가, 예술가가 되더라도 평범함 속에서 시작하게 하고 싶었어요, 성임 씨가 말한 것처럼 3살까지는 일상의 구조를 만들어주면서 평범하게 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허성임: 저는 저녁마다 같이 춤을 춰요. 그러면 아이에게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튀어 나오더라고요.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상상들이 떠다니는 게 느껴져요. 이게 교육이고, 창의적인 예술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밝넝쿨: 아이가 네 살 때 시간만 나면 연습실에 갔어요. 엄마는 음악 틀어주고, 셋이 맨날 놀았어요. 그때 스튜디오에 음악하시는 분이 상주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이 시간을 주변과 공유해보라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주변에 엄마 아빠 아이 모두 오라고 해서 마구잡이로 춤추고 놀았어요. 처음에 부모들은 못 움직이고 앉아서 보기만 하다가, 제가 얻어걸리는 애들 들어주고 넘겨주고 하니까 애들이 너무 좋아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나와서 같이 해주더라고요. 그렇게 한 달 정도 신나게 했는데, 내 아이만 침울해하더라고요. 자기 랑만 공유하던 시간을 다른 아이들과 다 같이 하니까 소외감을 느꼈나 봐요. 그래서 바로 과감하게 그만 했어요.
이소영: 내가 몸을 썼기 때문에 육아를 몸으로 느끼는 부분이 있어요. 심장과 심장이 맞닿아 느끼는 교감이요. 애를 안으면 애가 나에게 줘요. 그것만으로 충전이 되어요. 애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데, 처음엔 이상한 도형들만 스케치북에 작게 그리더라고요.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렸는데 밖에 나갔더니, 그 작은 그림들을 다 합친 거대한 그림을 그려놨더라고요. 그걸 기다려주고 바라봐준 것은 제가 춤추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허성임: 아이도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동생이 생기든, 엄마나 아빠가 자기만 바라봐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하거든요. 저도 그래서 한국에 와있는 거고요. 아이도 곧 익숙해져요. 어제는 영상통화를 하는데 저를 안 쳐다보더라고요. “마루 화났어?”하니까 끄덕거려요. “마루 화내지마, 엄마 속상해”하니까 “오케이”하더라고요. 받아들이고 있을 거예요.
밝넝쿨: 큰 애는 미운 네 살, 미운 일곱 살 이런 시간이 없이 계속 예뻤어요. 그런데 둘째가 생기고 둘째가 생기면서 확 달라지더라고요. 그렇게 말 잘 듣고 착했던 아이가 이젠 반 말썽쟁이 탑 쓰리 안에 든대요. 선생님한테 전화도 엄청 많이 와요.
허성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게 그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부모의 일정 자체가 정규적이지 않으니까 아이한테 혼돈이 오고, 균형을 잡는 게 힘든 거요. 경제적으로 힘든 건 우리 두말 안 해도 될 거고요. 영국에 ‘마더 아티스트(Mother Artist)’라는 공간이 있어요. 피아노도 있고, 테이블도 있고, 야외 가든도 있어요. 3만원인가, 4만원을 내고 하루 종일 이용하는 건데, 유모가 아이들하고 놀아주고 엄마들은 거기서 예술 작업을 하는 거예요. 여기선 춤추고 저기선 피아노 치고요. 처음엔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나 혼자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나중엔 융화가 되더라고요. 아이도 안전하게 엄마의 사정권 안에 있고, 나는 내 작업도 할 수 있어서 애도 저도 안정이 됐어요.
무용가 부모를 고민하게 하는 것
밝넝쿨: 아이가 생기면서 공연 관람 기준 연령을 없애고 싶었어요. 아이가 울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정작 공연자는 괜찮은데 극장에서 반대로 나이 제한을 요구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고요. 그래서 저는 큰 아이 나이에 맞춰서 제한을 두고 있어요. 5살 때는 5세 이상, 6살 때는 6세 이상. 당연히 제 아이가 봐도 되는 공연이어야 하고, 아이는 당연히 우니까, 울면 달래서 다시 들어오면 되는 거고요. 연극협회였나, 연극 쪽에는 연극인 부모들이 함께 자녀를 돌보는 협동조합이 있다고 들었어요. 연극놀이도 하고, 간식도 굉장히 좋은 거 준대요. 직접 해먹이고. 연극하는 분들에게 아르바이트도 되고 상부상조잖아요. 무용은 일단 사람이 너무 적어서 그런가 이런 게 안 생기네요. 모아봐야 백 명도 안 되겠죠?
이소영: 언젠가 스태프로 자유소극장에 아이를 데리고 갔더니 분장실 입구에서 못 들어가게 막더라고요. 심지어 아동청소년을 위한 극이었는데도요. 강아지는 되는데 아이는 안 된대요. 또 애가 기어 다닐 무렵에 아이를 데리고 연습실에 갔는데, 아이가 기어서 집중이 안 된다고 방해가 되니 데려오지 말란 얘기를 들었어요. 제가 가고 나서는 ‘프로냐 아니냐’ ‘용기가 가상하다’는 얘기까지 나눴대요. 예전에 외국에서 보았던 공연자들의 아이를 자연스럽게 그 환경에 있게 해주고, 육아를 위해 작업을 멈추거나 퇴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존중해 주는 환경을 봤던 것이 지금 저에게는 영감과 용기가 돼요.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몸춤 작업실을 동네에 만든 거예요. 원래 이름은 ‘몸춤삶’이에요. 몸춤삶이 건강하게 순환 될 수 있는 곳에 작업실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밝넝쿨: 첫째 때 아내가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어요. 임산부건, 아이 엄마건 생각보다 사회가 배려해주지 않는 다는 것도 잘 알아요. 만삭 때 아내가 운동을 다녔는데, 늘 데려다 주는데 가끔 혼자 보내게 되면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불안하더라고요.
허성임: 만삭인 상태로 임산부 자리 앞에 서 있는데도 안 비켜줘요.
이소영: 이 나라는 30-40대 남성만이 시민이에요. 노인도, 아이도 아니고요. 임신한 여자도 배려하지 않는데 하물며 장애인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지하철 타고 가는데 아이가 칭얼대니 어떤 사람들이 노려보듯 쳐다보는데, 예전 같으면 불합리함을 참지 못하고 항의했을 거예요. 강하게! 하지만 할 수 없이 견딜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이가 다칠까봐. 아이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허성임: 벨기에는 그러면 큰일 나요. 아이 바구니 들고 나가면 다들 도와주고요. 출근길 꽉 막힌 버스나, 지하철에 유모차를 끌고 타도 다들 자리를 내줘요.
이소영: 무용하는 젊은 친구가 어떤 학교에서 있던 이야길 해줬어요. 연습 중에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장면을 줄여준다거나 연습을 좀 줄여준다거나 배려를 해줘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대요. 결국 유산을 했는데 수술을 하거나 회복할 시간도 주지 않았대요. 바로 콜. 눈물을 흘리면서 연습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로 20대에는 내가 여성의 몸을 가졌다는 인식이 없었어요.
밝넝쿨: 결국 지금의 자기 삶에 관계된 부분만 보이는 것 같아요. 지금 사는 곳 근처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어요. 군대 있을 땐 군인만 보였는데, 지금은 애 엄마만 보여요. 언젠가 가만히 정신 차리고 다시 보니 군인들 되게 많더라고요.
오늘 ‘춤추며 부모가 되는 법’ 좌담에 초대 전화가 왔을 때, 꼭 나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제 아이도 아프고, 아내도 아파서 못 나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을 때도 꼭 나오고 싶더라고요. 오늘 나눴던 제도적인 부분들 꼭 목소리 내고 싶었어요.
이소영: 춤을 추며,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내 세계가 바뀌었는지 말하고 싶지만,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면서 나는 춤추는 사람이 아니라 쓸모없는 존재가 됐어요. 내가 나 스스로 춤추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춤추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지 않거든요. 무용은 누군가와 접촉을 통해 이뤄지는데 고립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안무가를 인식하는 것이 참 어려운 듯해요. 저는 지금 제가 더 춤을 잘 추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춤을 어떻게 유지할 지도 이제는 알겠어요. 하지만 이야기할 곳이 없다는 것이 힘들더라고요. 내 작업 의지에 대하여 쓰라면 너무 잘 쓸 수 있지만, 최근 3년 이내의 경력을 쓰라고 하는 지원서 앞에서는 작아지는 거죠.
허성임: 결국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건 같은 것 같아요. 주변에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들 포기하려고 하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오늘 나왔어요. 저 또한 아이를 낳고 나서 예술과 춤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어요.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로 포커스가 옮겨갔고요. 왜 지금까지 그 검은 공간에서 열 두 시간 동안 열정을 다 한 걸까? 날 위해서 했을 거예요. 지금은 일반 사람들과 더 소통하고 싶어요.
밝넝쿨: 내가 예술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동료 작업자는 연습실에서 나와서 집에 가더라도, 화장실에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한 문장에 매달릴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되잖아요. 그래도 다른 식으로 받아 들여야죠. 나는 그냥 이런 컨디션의 아티스트라고 인정하는 거죠. 그게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내가 스스로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니까요. 저도 그리고 제 아내도 아직 아티스트에요. 의욕도 재능도 넘쳐나는. 그래서인지 육아하는 여성 무용가들이 저에겐 가장 안타깝고, 가장 가능성이 많은 아티스트예요.
허성임: 애기 낳고 곧바로 계속 무용단 생활을 하겠다는 저랑 남편이랑 맨날 싸우고 울면서 잤었어요. 어느 날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너는 정말 네 직업을 사랑하는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우리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작업이 곧 우리니까요. 그래서 이런 싸움이 있는 것 같고, 좋은 예가 되고 싶은 것 같아요.



밝넝쿨, 허성임, 이소영 안무가 ⓒ양동민

이소영
2016년 5년 만에 다시 <14feet>라는 작업을 시작으로 나 자신의 몸과 타인의 몸, 그리고 세계와의 소통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더 많이 분리, 해체되었다고 느낀다. 사람에서 딸, 여성, 아내, 엄마, 무용수, 안무가, 선생님 등등으로 나뉘었다. 그 각각은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 몇 개의 자아들은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 얼굴을 바꾸고 적절한 자세, 태도를 취한다. 춤추는 44세의 여성인 이소영은 현재 이러한 자신의 몸을 탐구하고 있다.

허성임
벨기에 P.A.R.T.S 안무자 과정이수 하였으며 얀파브르(Jan Fabre), 레 발레 세 드라 비(Les ballets C de la B), 니드 컴퍼니(Needcompany), 아바토와 페르메(Abattoir Ferme) 와 작업을 해 왔다. 현재는 니드컴퍼니 객원단원으로 활동 중이며 개인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이민자의 외로움을 담을 솔로 작업 “ You Are Okay!” 은 벨기에 Nona, De grote Post, De Woeker 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으며 야외 공연인 "Human Wall" 은 V&A Museum 과 British Museum 에서 선보였다

밝넝쿨
2005년 지금의 아내인 인정주와 오!마이라이프 무브먼트 씨어터를 창단하여 ‘몸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는 화두로 협업작업을 해왔다. 2011년 아이가 생긴 후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게 되면서 홀로서기를 하였고, 삶과 작업이 공생하며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로인해 ‘아이’라는 삶의 화두는 그가 춤의 본질로 향해 있다고 믿는 ‘회귀하는 몸’이라는 작업의 화두와 그 맥락을 같이하며 ‘작업으로써의 삶과’, ‘삶으로써의 작업’ 안에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다.


허영균_웹진 <춤:in>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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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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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샘2018-09-18

    넘 좋은 인터뷰네요. 감동적으로 잘 읽었습니다~^^ 퍼갈께요!

  • 이리오2018-09-17

    멋져요 멋져요! 모두들 잘한다~

  • 이은서2018-09-14

    이 인터뷰를 읽는 것 자체만으로 굉장히 가슴떨리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좋은 기획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