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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9.07 조회 2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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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5개월, 이곳의 공연씬을 바라보며

최은진_안무가

펠로우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뉴욕에 온지도 벌써 5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프로그램 관련 활동도 하고, 이곳저곳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공연 관련 행사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또 적당한 가격의 식당을 찾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에 심취하기도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 동안 낯선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은 물론 작업과 작업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잡다한 생각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특히 예술을 매우 사랑하면서 아주 바쁘게 생활하는 뉴욕 기반의 예술가들을 보며 몇 가지 질문이 생겨났는데, 많지 않은 경험들과 추측에 기반한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내어보려 한다.


Watermile Center, 로버트윌슨의 오픈 리허설 모습 ⓒ최은진
바쁜 도시와 바쁜 예술가들
그렇다, 이들은 바쁘다.신호등 사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은 대부분 관광객들이다. 반면에 늘 한발 빨리 출발해서 사람들 사이를 노련한 무용가처럼 능숙하게 미끄러져 나가는 사람들은 뉴요커들이다. ‘빨리빨리’라는 말이 한국 사람들의 급한 마음을 대변하는 형용사라는 게 조금은 억울해질 정도의 속도가 대낮의 도시에 가득하다. 나는 관광객인 듯 뉴요커인 듯 애매한 발걸음으로 인파 속을 지나쳐 연습실로 향한다. 아무도 늦지 않게 도착해 리허설을 진행하고, 다들 다음 일정을 맞추기 위해 바쁘게 이동한다. 이들에게 밥 먹을 시간은 있느냐고 물으면 하루에 두 끼 먹으면 운이 좋은 거라며 괜찮다는 손짓을 한다.그간 친해진 친구들과 차 한 잔 하러 만난 자리에서 다음번 약속을 잡으려 할 때, "나는 딱히 일이 없어서 다 맞출 수 있어", 라고 하자 한 친구는 "그럼 안 돼, 일단 바쁘지만 시간 보겠다고 말해야 해. 네가 뉴욕에서 아직 배울 게 많다"고 애정을 담아 말해주기도 했다.바빠야 해서 바쁘거나 적어도 바쁨이 미덕인 도시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미드 맨하탄의 한 거리 ⓒ최은진
예술가에게 성실함은 뭘까? 규칙적으로 스튜디오/작업실에 출석하는 일, 펀딩을 받기 위해 지원서를 작성하는 일,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월급을 주는 회사에 가거나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일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에겐 특히 가만히 있을 시간, 생각과 작업을 우려낼 시간, 아니면 그냥 숨이나 쉬고 아무데나 바라보면서 헛짓을 할 시간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예술가들도 이 기류에 속해 자본주의가 갖는 생산성의 정의를 예술 장에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얼마 전 여기에서 만난 한국의 김경미 안무가를 통해 한 뉴욕 베이스의 예술가와 저녁을 먹는 자리를 가졌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한국과 미국의 무용 기반 예술 씬으로 흘렀고 나는 이틈을 타 그녀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여기 작업자들 정말 열정적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말이야, 예술은 가만히 있는 시간 같은 걸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닐까?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맞아, 때로는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 이들의 바쁨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라고 답해주었다. (너무 신이 나 이야기를 나누느라 기억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술과 돈, 복잡한 공생관계
여기에 있는 동안 내가 많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감탄했던 부분 중 하나는, 자신들의 작업을 홍보하고 유통하는 일을 포함해 예술가들 스스로 자신들의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구조를 만드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능숙하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두 번의 뉴욕 방문 모두 역시 런 바이 아티스트 올가니제이션들의 프로그램을 통해서였고, 이른바 살아있는 전설들이 공연을 한다는 업타운과 달리 다운타운 공연 씬은 실제로 많은 런 바이 아티스트 올가니제이션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속한 프로그램의 경우, 펠로우 아티스트들이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동시에 페스티벌을 운영하는 일까지 다함께 했는데, 거기엔 서로의 작업설명을 손보는 일, 홍보영상을 만드는 일, 뉴스레터를 쓰는 일, 작가 펀딩 페이지를 만드는 일, SNS의 해시태그를 고민하고 한 눈에 들어오는 키워드를 고르는 일 등이 포함되었으며 모두들 맡은 일에 진지하고 꼼꼼하게 임했다.모두가 모두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예술가들도 관객과 펀더들의 관심과 집중을 끌어오기 위한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나중에 친구와 다른 페스티벌을 보러간 어느 날, 나름대로 이름난 작은 극장에서 우리를 포함한 5명의 관객이 무려 3명의 서로 다른 작가의 작업을 다소 뻘쭘하게 관람 했을 때, 나는 그때 그 펠로우 멤버들의 열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얼마 전 미팅에서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로컬 안무가 친구에게 이미 세 명의 보드 멤버와 펀더1)가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들은 무려 돈도 받지 않고 이 일을 한다고 하는데,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하나는 예술에 대한 애정, 작가에 대한 관심, 마지막으로 사회적 지위 획득을 위해 이 직함을 자원한다고 들었다. 나는 그녀의 능력에 감탄함과 동시에 감동한 채 물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을 수 있다니, 비록 국가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나 기금은 적지만 사기업들, 개인들의 힘으로 이곳의 예술이 자라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친구들은 정말 좋은 해석이지만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세금환급 이라며 이곳 예술계를 움직이는 모티브는 사랑보단 돈에 가깝다고 답해주었다. 본인들이 속한 예술계에 대해 다들 조금씩은 시니컬하니 온전히 객관적인 비판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지만.



Gibney 댄스 컴퍼니의 Mobile Dance Festival ⓒ최은진
기억이 난다.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10명 남짓 되는 무리의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2시간에 달하는 대화 속에서 우리들의 주제는 돈, 그리고 신분(비자)유지였다. 한 예술가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뉴욕에서 돈 있는 예술가들은 예술 얘기를 하지만 돈 없는 예술가들은 돈 얘기 해.” 라고. 물론 그리 깊지 않은 사이에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난 이 자조적인 농담에 사실 조금 화가 나기도 했고, 나중엔 역시 이것도 무리마다 달라서 어떤 예술가들은 돈이 없어도 예술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적은 돈으로 생활해본 뉴욕은 예술로 유명한 도시일지는 몰라도 가난한 예술가에게 친절한 도시는 아닌 것은 확실했다. 모든 대도시가 그렇겠지만 여긴 명성답게 물가가 정말 높아서 삼시 세끼 밥 먹고 내 몸 누일 방을 확보하고 나면 남는 돈이 정말 하나도 없는데다, 돈이 있으면 경험할 수 있는 고 퀄리티의 공연들과 양질의 수업들이 정말 많아서 빈곤함에 대한 감각이 상대적으로 더욱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2)

1) 보드 멤버란 댄스 컴퍼니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재무상의 문제들을 대신 해주는 것이 주 업무로, 컴퍼니에 해가 된다면 작가를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펀더는 말 그대로 재정적 지원을 해 주는 사람들을 뜻한다.

2) 물론공짜인 좋은 이벤트들이 많기도 한데 접근성이 좀 떨어진다. 페이스북을 통해 찾는 방법이 있지만 뉴욕에 오래 작업 했거나 학생이거나 어느 기관에 속해 있는 친구가 많지 않는 이상 저가이면서 고 퀄리티의 이벤트를 발굴하거나 친구를 만들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펀딩과 올가니제이션, 뉴욕 예술의 시스템
고도로 상업화 된 도시에서 돈 안 되는 예술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일까? 일주일동안 리허설과 공연과 알바를 하느라 어떤 주는 20시간을 겨우 잤다는 한 지인 - 20대가 아니다 - 은 그 와중에도 연극과 예술 얘기를 하면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렇게 재능 있고 열정 있는 예술가들이 왜 꼭 뉴욕에 와서 고생을 하는지 의아할 때도 있지만 올 9월과 10월 두 달 동안만도 보리스 샤마츠, 얀 파브르, 이보 딤체브, 메레디스 몽크가 공연을 해대는 극장들과, 많은 오픈 콜들, 수많은 - 어쩌면 너무 많은 -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게 된다.



Chimney NYC 오픈 마이크 세션 ⓒ최은진
돈이란 건 있을 땐 몰라도 없을 땐 티가 확 난다. 기본적인 생존을 위협받을 때 세상과 객관적인 거리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세상을 관찰할 여유를 허락하는 이 최소한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저런 생업을 병행하지만 작업을 할 시간을 남겨주는, 시간투자 대비 고소득의 일자리가 모두에게 주어지진 않는다(그리고 이걸 개개인의 능력 탓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치사하고 그럴 능력 있는 사람만 예술 하는 것도 또 좀 재미없지 않을까). 그래서 외부로부터의 금전적 지원이 언제나 예술양생에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큰 지지가 되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돈 자체로 부터의 적당한 거리 또한 ? 쌍방이 - 갖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니까, 부모가 아닌 바에야 누군가의 금전적 지원에는 언제나 ? 당연히 - 그의 희망과 기대가 따라붙고 때로 그것은 구체적이다. 이 필수불가결한 협업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지 않을 수 있다면 정말 다양하고 풍성한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작업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뉴욕 예술가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고 지속시키는 능력과 그것을 지지하는 여러 펀딩/올가니제이션의 존재에 대해서 감탄의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로 예술가는 물론 예술 전반에 대한 공적 투자의 부재/부족함이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들기도 했다. 그것의 실행방식이나 기준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기본적으로 공적기금과 제도의 투자는, 돈의 흐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라나는 예술이라는 텃밭에 예술가의 독립적인 활동만큼이나 꼭 필요한 양분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로컬 예술가로부터 미국 내의 예술교육에 대한 비판을 듣거나 시내에 나가 조금씩 아쉬운 공연들을 볼 때마다 같은 생각이 고개를 들곤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방문객의 입장으로 한정된 경험과 정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과 다양성
글을 마치기 전에, 뉴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다양성' 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의, 생각의, 관점의, 예술의 다양성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나로선 여러 민족과 인종이 뒤섞인 뉴욕에서의 생활은 이들이 다양성을 어떻게 다뤄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흥미로웠던 점은, 언뜻 생각하면 그러한 특성이 예술장 안에서의 다양함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사실 그보다는 다양성 자체를 말하는 작업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토론이나 포럼들도 다양성을 화두로 한 것들이 많았는데, 크고 작은 마찰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슈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다양성을 주제로 한 토론이 곧 다양한 사람들 간의 대화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것에 주목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의 장을 만든다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이 다양성의 일상이라는 게 전쟁터에 가깝기 때문인지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도 사회에 대한 저항 및 과감함을 담음과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을 가장 먼저의 가치로 삼는 특징이 보였고, 많은 경우 분명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구성되곤 했다. 한때 이곳에 살았던 지인의 말에 따르면 짧고 효율적이며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서로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장치라고도 했는데 내가 영어로 말할 때마다 직접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어쩌면 짧은 영어 탓이 아니라 문화적 배경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여기서 만난 한 로컬 안무가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첨예한 감각이 형식적 완성도나 예술적 실험에도 같은 양으로 분배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지만서로의 다름과 거기서 발생하는 힘의 불평등은 물론, 공평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안들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려는 예술가들의 모습에서는 강하고 긍정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Pioneer works 오픈하우스 ⓒ최은진
앞으로 한 달 여의 남은 기간 동안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모르겠다.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서서 느낀 세상의 끝을 보는듯한 불안한 감동도,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마술을 보여주는 할아버지를 보며 느낀 따뜻한 설렘도, 허가받은 구간 안에 모여서 트럼프 아웃을 외치던 몇몇 사람들의 외침도, 민스코프(Minskoff) 극장에서 새끼사자의 탄생을 지켜보며 흘렸던 눈물도, 모두 간단하게 정리되기 어려운 다양하고도 다이나믹한 뉴욕의 모습들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경험들이 지금의 생각들을 또 어떤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키고 질문들을 수정하게 할지 기대해 본다.


최은진_안무가 안무를 발견하고 고안하는 일을 즐겨 한다. 크고 작은 공연들을 만들고 출연했으며 특히 현재라는 요소를 극대화하는 작업들을 주로 해왔다. 요즘엔 미리 쓰여진 것들의 힘과, 사적이고 구체적인 얘기들에 관심이 있다. 최근까지 작업보다 작업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더 자주 생각했으며 그 반경을 확장하는 것을 개인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 얼마전에는 뉴욕에서 신작 <미스언더댄스>의 일부를 쇼케이스 했다. 불편하고 웃기게 사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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