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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8.14 조회 1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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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안무하는가: 안무의 개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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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빈_웹진 《춤:in》 편집부

우리가 무용 작품을 만든다고 할 때, 흔하게 ‘안무한다’는 표현을 쓴다. ‘안무한다’는 표현에서는 포괄적인 개념으로서의 창작에서 조금 더 들어가, 어떤 무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안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그것은 과연 ‘안무하기’가 맞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안무하고 있을까? 최기섭은 연구자로서, 또 창작자로서 이 ‘안무하기’에 접근한다. 그는 단순히 움직임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지금의 예술이 ‘안무’하고 있는 것들을 둘러보며 무엇을 소재로 삼고 있는지 관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와 함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안무’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왼쪽부터 조형빈, 최기섭 ⓒ양동민
조형빈: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우선 작업들을 해오셨고, 논문으로 연구도 하셨었는데, 어떤 것들을 해오셨는지부터 먼저 말씀해주시겠어요?
최기섭: 저는 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고, 졸업을 하고 나서는 오!마이라이프무브먼트씨어터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학원에 입학을 해서 공연예술이론과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석사를 마친 이후에 현재는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계속 하고 있어요. 지금은 연구자이자 안무가로서 작업을 계속 해나가고 있습니다.
조형빈: 프로젝트 이인이라는 단체로 작업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업들에 대해서도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최기섭: ‘프로젝트 이인’이라는 그룹을 작년에 결성을 하게 되어서 작품 발표를 했고, 올해도 공연을 할 계획이 있어요. 그동안 제가 했던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보통의 몸이 가진 고유한 특이성입니다. 훈육되고, 재단되고, 완성된, 그런 이상적인 몸의 형태의 무용수나 배우가 아니라, 보통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심지어 보잘 것 없는, 볼품없는 몸으로 보이는 그런 몸일지라도. 그런 몸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 탐구했던 게 공통의 주제고, 앞으로도 그런 주제와 관심사를 계속 가져갈 것 같아요.
조형빈: 연구주제는 어떻게 잡게 되셨나요? 그러니까, 넓게 말하면 왜 안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좀 더 디테일하게,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좀 더 그 주제에 대해 포커스를 맞추게 된 것, 둘 다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최기섭: 우선 먼저 제가 왜 공부를 하고 싶어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해야 될 것 같아요. 대학 무용 교육계라는 것이 상당히 폐쇄적인 형태죠. 저는 무용을 늦게 시작했고, 원래는 독문학과 전공으로 대학을 들어갔다가 한 학기만에 자퇴를 하고 무용 전공으로 다시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이쪽 세계에 충격을 받았어요. 모든 것이 위계화, 질서화가 되어있고. 창의력을 양성하는 곳이라기보다는 고된 인내를 통해서 어떤 것을 습득하고 익혀나가고 완성해나가는 그런 과정, 그런 것을 하는 장소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저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됐는데, 당시에 보고 경험했던 즉흥 움직임이라는 메소드가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이런 춤의 가능성도 있구나, 라는 걸 느꼈죠. 그 전까지 제가 배웠던 춤이라는 것은 늘 익혀야 하는 것이고 더 많이 연습해야하는 고정된 것이었다고 하면, 그 작품에서는 훨씬 더 열려있는 춤이 나타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춤과 춤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번째로 연구 주제를 정한 동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저는 기본적인 관심사가 무용계 전반에 만연해있는 어떤 억압적인 힘, 내재적인 권력의 근원이 무엇일까, 하는 부분에 맞춰져 있었어요. 나를 억압하고 무용수의 몸에게 명령하는 힘의 주체는 무엇인가,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갖다보니까. 이것이 사회 구조, 한국 무용계라는 제도적인 구조의 문제뿐만 아니라, 무용 자체, 춤이라는 매체 자체에도 그런 힘을 발견할 수가 있었어요. 그것을 저는 안무라는 개념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안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된 어떤 주체와 대상의 관계, 억압적이고 운영하는 힘의 출처라든지,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기섭 ⓒ양동민
조형빈: 네, 그러면. 주제로 좀 넘어가 볼까요. 연구주제로 갖고 계신 ‘안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최기섭: 안무란 무엇인가.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 먼저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요즘 어딜 가든지 아이돌이 많이 보이잖아요. 이제는 굉장히 대중적인 용어가 되었는데, 예전에 ‘안무’라는 단어는 어떤 예술적 제도 안에서만 사용되었던 용어였죠. 그런데 어느새,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안무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조형빈: 저는 유투브를 가끔 보는데. 얼마 전에 유투브에서 그런 걸 봤어요. 한국 유투브 구독자 순위를 보여주는 게시물이었는데, 1위가 댄스 스튜디오더라고요.
최기섭: 네, 맞아요. 어마어마한 구독자수를 가지고 있죠.
조형빈: 물론 해외 구독자들이 많아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최기섭: 맞아요. 요즘에 워낙에 먹방이니, 자극적인 컨텐츠들, BJ들, 요즘은 크리에이터라고 하더라고요. 되게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고하게, 사람들에게 많은 구독자를 차지하는 주제는 춤과 안무에요.
조형빈: 그래서 되게 신기했어요. 물론 K-POP이나, 한국에서 산업으로서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많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게 유투브에서 구독자 1위를 할 정도까지 춤과 안무가,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깊숙이 다가가 있나 싶어서 놀랍더라고요.
최기섭: 언제부터인가, 아이돌들은 뮤직비디오 발매와 함께 꼭 같이 푸는 게, 안무 연습 영상이거든요. 사회 전반적으로, 대중문화 속에서 안무가 차지하는 위상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지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형빈: 대중문화 아이돌들의 안무에서, ‘안무’가 기섭씨의 연구 주제와 연결되는 부분은 뭘까요.
최기섭: 제 연구에서 첫 질문은 ‘안무란 무엇인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돌 춤 안무에 나타나는 특징들이 사실상 본질적인 안무의 의미를,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워요. 말하자면, 엄밀한 의미에서 안무 개념을 오늘날 아이돌의 안무가 많은 부분 반영을 하고 있다는 거죠. 오늘날 아이돌 안무는 ‘칼군무’라는 이름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것이 강조하는 것은 춤 자체라기 보다는 춤에서의 ‘대형’이에요. H.O.T 같은 그룹이 나왔을 때부터 춤이 강조되기는 했었지만, 그때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자기 파트에는 무조건 가운데, 중앙으로 나와요. 그리고 카메라는 그 가운데 중앙에 있는 사람만을 비추죠. 나머지 멤버들은, 그리고 춤은 사실상 병풍인거예요.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당시 퍼포먼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다면, 요즘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꼭 가운데에 배치하지 않아요. 구석구석에 위치를 하는데 그 이유가, 노래를 하는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의 대형이 어떤 구조로 조직화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안무적인 이유는, 안무가 본연적으로 기하학적인 대형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안무는 푀이에의 기보 체계를 활용해 춤의 ‘기하학적’인 측면을 ‘쓰는’ 것이었다
조형빈: 여기서 ‘안무적’이라고 우리가 표현을 하는 것은 짜여져 있는, 이라고 해석하면 될까요? ‘안무적’이라는 표현을 해석하신다면?
최기섭: 제가 정의하고 있는 ‘안무적’이라는 개념은, ‘사전계획으로서 움직임의 기하학적 구조를 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행위가 포함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사전 계획을 한다, 두 번째는 움직임을 다룬다, 세 번째는 기하학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네 번째는 쓴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안무적인 것’의 의미이자 역사적인 안무 개념의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안무라는 것은 무용기보법의 출현을 통해서 형성된 개념이거든요. 안무는 코레오그래피인데, 코레오는 춤, 그래피는 쓰는 행위라는 뜻이에요. 이 코레오그래피는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는데, 이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프랑스의 라울 오제 푀이에라는 사람입니다. 음악에서는 현재 우리에게 통용되고 있는 악보 체계가 있잖아요? 푀이에는 그것처럼 춤을 기보할 수 있는 그런 체계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체계에 부여한 이름이 ‘코레오그래피’였던 거죠. 그런데 푀이에의 체계 외에도 현재까지 발명된 무보 체계는 80개가 넘어요. 그렇다면 모든 무보 체계를 이용해서 춤을 쓰는 행위를 안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보통의 무용 기보체계는 춤을 기록하기 위해서 기록을 해요. 춤의 연행 이후에, 춤을 보존하고 기억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체계가 활용되었던 거죠. 그런데 그것과는 다르게, 역사적으로 독특한 목적으로 사용된 두 가지 무용 체계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라울 오제 푀이에라는 사람의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루돌프 폰 라반의 체계예요. 둘 다의 공통점은, 첫 번째로 둘 다 100년이 넘는 시간 오랜 시간동안 사용되었다는 점이에요, 심지어 라반의 체계는 ‘라바노테이션’이라는 형태로 발전하면서 오늘날에도 다양한 분야에서도 사용되고 있죠. 두 번째로는 창작과 분석의 매체였다는 점이에요. 마치 작곡 행위처럼 푀이에의 체계는 쓰는 행위를 통해서 춤을 창작하는 매체로 사용되었어요. 또한 라반의 체계는 창작의 매체뿐만 아니라 움직임 일반의 원리를 분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어요. 그의 관심은 움직임과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의 체계가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한 매체였던 것이죠.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무보 체계의 이름이 모두 ‘안무’였다는 사실이에요. 따라서 푀이에의 시대와 라반의 시대에 ‘안무’는 각각의 무보 체계를 활용해서 창작을 하거나 분석을 하는 행위를 일컬었습니다.





Raoul-Auger Feuillet, Choreographie, ou l'art de decrire la Dance, Chez l’auteur et chez Michel Brunet, 1700.
Rudolf von Laban, Choreographie, Eugen Diedrichs, 1926.
조형빈: 아까 안무를 정의해주셨는데요. 우리가 지금 안무를 한다고 하면, 어떤 것을 구성하고 짜는 창작의 의미를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은 어떻게 이렇게 변화가 됐을까요?
최기섭: 라반의 시대까지는 그런 쓰기 행위가 요청되었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비디오 기록체계가 나오고 춤이라는 실천 자체의 변화도 있었죠. 라반의 체계가 움직임 일반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하기 위해서 고안된 체계이기는 하지만, 기록될 수 없는, 혹은 기록되는 것이 의미가 없는 춤에 대한 사유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안무에는 ‘쓰기’라는 의미의 행위가 탈각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1960년대, 포스트모던댄스 안무가들에 의해서 ‘안무’라는 말이 사실상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로 사용이 되기 시작해요. 그들에게서 그리고 현재 우리에게서 ‘안무’의 의미는 ‘사전 계획으로서 움직임을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금 제가 아까 처음 정의했던 안무의 본질적인 의미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사전계획으로서 움직임의 기하학적 구조를 쓰는 것’인데요, 여기에서 뒤의 두 가지 행위가 탈각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안무는 더 이상 ‘기하학적인 구조’를 보여주지도, ‘쓰는 행위’도 없죠. 우리는 안무를 ‘작품 창작’이라는 넓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춤의 연행 이전에 움직임을 구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조형빈: 안드레 레페키는 저서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서 안무가 어떻게 모더니티와 연결되는지를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죠. 거기서 언급되고 있는 안무의 속성들이 지금 말씀하시는 안무의 정의와는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최기섭: 일단 안무가 모더니티와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지적은 적절합니다. 푀이에의 무보 체계 ‘안무’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안무는 근대성의 주체를 생산하는 장치였어요. 발레의 시대가 지나 모던댄스의 시기에 접어들었을 때 춤이란 한 명의 예술가 천재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예술 이념인데. 여기서 춤이라고 한다면 움직임 자체보다는 사실 그것이 무엇을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죠. 따라서 안무는 더 이상 쓰는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근대적의 주체를 생산해내는 도구이죠. 근대성, 즉 모더니티와는 별개로 포스트모던 댄스 시기에 ‘사전 계획으로서 움직임을 구성하는’ 안무의 개념이 당시의 안무가들의 관심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이유는, 그들이 춤의 본질적인 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그런 물음을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일종의 ‘모더니즘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춤에 있어서 본질적인 매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움직임’이라는 답을 찾은거죠. 그래서 그런 움직임에 천착한 실천, 그것이 이제 모더니즘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안무가 사전계획으로서 움직임을 다루는 행위이기 때문에 모더니즘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형빈: 그러면 좀 넘어와서. 지금의 이야기를 좀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 그리고 동시에 또 이 땅에서, 한국에서는 안무라는 개념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고, 어떻게 변해왔을지. 혹은 변해갈지, 그런 얘기들을 좀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쓰셨던 논문에서 라반의 라바노테이션 기법을 사용하면서 ‘춤과 노동’이라는 것을 언급하시는데요. 동시에 그 안무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정치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어요.



최기섭 ⓒ양동민
최기섭: 라반에게 있어서 안무는 움직임 일반의 조화로운 원리를 다루는 것이었어요. 따라서 그것은 당시 영국의 산업사회에 적용하기가 유용한 모델로 작용을 했어요. 라반의 안무는 움직임과 공간의 유동적인 원리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장의 노동 생산성 향상에 그의 안무가 활용되었던 거죠. 말하자면 라반의 안무가 생산하는 것은 노동하는 몸이었던 것입니다.
조형빈: 사실 이것이 지금 제가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싶은, 지금의 안무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와 조금 연결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안무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고려했을 때,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창작의 개념의 안에서 우리는 안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런 문장이 가능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말씀하셨던 안무의 정의도 역사적으로 변해왔잖아요.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요소들이 있었다가 여기에서 탈각되는 것들이 생겼는데, 현재 남겨져있는 이것들도 다 탈각이 되거나, 혹은 앞으로 우리가 넘어갈 수 있는 다른 영역이 있을까요?
최기섭: 저는 그런 극복을 위한 실천이 분명히 있었다고 봅니다. 포스트모던댄스 안무가들은 움직임이라는 매체, 춤의 가장 본질이 되는 움직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움직임을 다루는 것이 안무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던댄스 안무가들에 의해 안무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죠. 따라서 안무 개념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비판을 시도한 시도들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안무를 ‘사전계획으로서의 움직임의 구성’ 이라고 했을 때, 사전계획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실천들이 있었어요. 먼저 ‘즉흥’의 가능성을 발견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즉흥은 물론 완전히 무작위적인 상태로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느 정도는 약속된 범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그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알 수 없어요. 사전에 계획을 할 수 없으니까요.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고. 주 댄스 시어터의 토마스 하우어트와 데이비드 잠브라노 같은 사람들이 주로 시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안무의 ‘사전계획’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실천 중 다른 하나는 ‘공동 작업’인 것 같아요. 더 이상 안무가 단독의 주체에 의한 사전계획이 아닌, 공동주체에 의한 사전계획이 기존의 안무의 대안으로 제기되었던 것이죠. 이제 ‘사전계획으로서 움직임의 구성’이라는 안무의 정의에서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살펴보죠. 무엇보다 제롬 벨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제롬 벨 같은 경우는 농당스라고 불리죠. 그의 작품에는 춤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이 없어요. 기존의 우리가 춤이라고 했을 때에는 춤같은 형태로 움직여야만 하죠. 하물며 미니멀리즘으로서 이본 레이너의 작품에서도 그녀는 춤 같은 움직임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니멀화된 움직임조차 비판했던 것이 제롬 벨입니다. 앞서 말한 즉흥 그룹의 실천에서 안무의 기존 정의에서 남는 것은 움직임 하나 뿐이에요. 제롬 벨 같은 경우는 기존의 안무 개념에서 움직임이 사라지고 사전계획만 남아요. 흥미로운 것은 토마스 하우어트나 제롬 벨은 모두 안무 개념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비판적인 실천을 했기 때문에 본인을 안무가라고 지칭하지 않아요.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서 ‘컨셉’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안무 개념에 대한 비판적인 실천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전계획 자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한다거나, 아니면 움직임 자체에 대해서 다른 것을 제시한다거나. 아, 여기에 한 가지 사례가 더 있을 것 같습니다. 기존의 안무에서 움직임이라는 건 인간의 움직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잖아요. 그런데 인간을 출연시키지 않는 안무도 등장을 하게 되어요. 대표적으로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봄의 제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어떻게보면 상당히 안무적인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안무적인 작품의 무용수들은 기계들이에요. 천장에 매달린 기계들이 분진을 뿌려대면서 상당히 기하학적인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안무를 하거든요. 다만 인간이 없을 뿐이죠. 이 작품 역시 본인이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기존의 안무 개념에 비판을 제기하고 대안 가능성을 제기하는 실천이지 않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조형빈, 최기섭 ⓒ양동민
조형빈: 안무라는 개념도 그렇고, 움직임이라는 개념도 그렇고 굉장히 유동적이라는 생각이 좀 들어요. 물론 기섭씨 연구에서 정의하고 있는 안무라는 개념이 있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안무라는 넓은 의미의 개념에서 본다면, 상당히 다양한 것들이 또 그 안에 포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움직임의 측면에서 본다면, 제롬 벨의 작품들은 과연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제롬 벨의 작품 안에서도 어떤, 작품 안에서 떠돌아다니는, 부유하는, 움직이는 개념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저는 어떻게 보면, 제롬 벨이 쥐고 흔드는 움직임을 만드는 것들도 그 안에 안무로서 있다는 느낌도 또 들거든요.
최기섭: 맞아요. 그런 사고를 우리에게 개방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기존의 움직임이라고 하면 무용수가 뭔가 공간을 활용해서 움직이는 것을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이제 우리가 생각하는 안무에 대한 기본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제롬 벨은 움직임에 대해서, 그것이 꼭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움직임이어야 하는가, 그런 비판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안무에 대한 또 다른, 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조형빈: 저희가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우리 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죠. 그런데 재미있게도, 예술계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우리 예술계의 획일화된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생긴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주체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야심만만한 생각이 갑자기 들기도 하네요.
최기섭: 네, 그런 생각들이 많은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형빈: 지금도 제 주위에는 재미있는 작업자들이 여럿 있지만, 훨씬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한 줌에 잡히는 그런 사람들 말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 사실 저 같은 사람도 일하기도 더 재미있을 것이고.
최기섭: 사실 춤이란 무엇인가, 라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런 춤의 매체적 특성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춤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구조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그것은 비단 예술계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 구조에 대한 통찰로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무용계에 필요하고. 그리고 동시대적인 질문, 그럼으로써 컨템포러리한 춤을 만드는 출발점이 되지 않는가. 컨템포러리라는 건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건 아니에요. 어떤 새로운 형식, 그런 걸 만들어내는 건 어떤 동시대적인 혹은 컨템포러리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본원적인 질문. 그것이 컨템포러리를 컨템포러리하게 만들죠.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날 이론과 실천이 그런 경계가 무화되는 지점에 있어서 그런 질문들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이론이 자꾸 실천으로, 예술 작품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이론은 여지껏 자신의 역할을 저버린 적이 없어요. 이론은 늘 이론을 해왔어요. 다만 이제는 실천이, 이론이 제기하는 질문들을 하게 된 거죠. 이론이 실천에 침투를 한 것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예술가들이 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론의 영역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개념을 묻고, 구조를 묻고, 비판을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기섭 ⓒ양동민
조형빈: 이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생각했던 것들 중에, 과연 이 ‘안무’라는 주제를 어떻게 ‘지금의 이야기’로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좀 더 깊이있게 오래 대화를 나누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최기섭: 제가 요즘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주체성의 생산과 명령의 억압적인 힘을 생산했던 안무적인 것이 본질에 내재한 힘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오히려 몇 개의 작품들에서 지극히 안무적이면서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라든지, 안무가 포착하고 포획하려고 했던 그런 힘이 어긋나게 되는 순간들을 오히려 지극히 안무적인 작품들에서 발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들을 아직 논문으로 정리를 하지는 않았는데. 이것들이 요즘에 제 주된 관심사인 것 같아요. 안무라는 것, 정확하게 구조를 짜고 기하학적인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는 거죠. 기존에는 그것이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고,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면. 오히려 거기서 전복적인 가능성이 발견이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역설이라고 생각을 해요. 명명하는 힘의 본질이 안무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안무적인 것의 역설적 가능성’를 드러낸 공연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올해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의 <바이올린 페이즈>였고, 다른 하나는 2015년에 한국에 내한을 했던, 아직까지도 계속 성황리에 투어를 하고 있는 작품이더라고요. 올리비에 뒤부아의 2012년 작품 <비극>이라는 작품이에요. 안무적인 것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죠. 두 작품 다 공통적인 건, 전통적인 의미에서 안무적인 개념과 부합하는 작품이에요. 사전계획으로서, 움직임의 기하학적인 구조를 쓴다. 이들은 써서 안무를 해요. 상당히 기하학적으로 구조화가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두 작품은 기존의 안무가가 고정시키려고 했던 것, 그것은 제가 봤을 때 무용수 개개인의 특이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결코 포착할 수 없지만 포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안무의 기본적인 욕망이에요. 무용수를 정해진 구조 속으로 포획시키려고 하는 욕망이죠. 그런데 이 두 작품은, 그렇게 포착하려는 행위의 불가능성 자체를 보여주고 있어요. 안무를 통해서 그것을 포착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용하고 불가능한 일인지를 안무를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저는 이 작업들의 ‘안무’에서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또 한 가지, 안무가 어떤 주체성의 상상이었다면, 제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타자들이거든요. 기존에는 안무가가 주체였으니까, 이제는 무용수가 주체가 되어야지. 그러면 안무가는 타자가 되잖아요. 그래서 결국 주체성 싸움은 끝이 없는 싸움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건 타자들이라는 것인데. 저는 앞서 언급했던 지극히 안무적인 두 작품들에서, 제가 봤던 건, 안무가 포착하려고 하지만 포착할 수 없는 그것. 그건 결국 개개인의 몸이거든요. 조형빈이고, 최기섭이고. 각자의 이름을 가진 특이한 개별적인 존재들. 그 존재들이 결국 그런 안무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했을 때 결국 드러나는 건 타자거든요. 그리고 그걸 관객으로서 보고 있는 나 또한 타자라는 생각. 그럼으로써 결국 내가 그걸 지금 이곳의 의미가 다시금 상기가 되는 것 같아요. 타자로서의 내가 저 타자와 이곳에 함께 있는 경험. 어떻게 보면 실존으로서 함께 있음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오늘날 안무가 제안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건 참여의 문제랑 연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오늘날, 비단 무용을 떠나서 연극, 퍼포먼스, 모든 것의 화두는 참여의 문제에요. 공연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관객과 퍼포머의 만남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참여가 큰 화두로 요즘 떠오르고 있는데. 무용에서는 참여의 문제가 아직까지 그렇게 뜨겁진 않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러한 점에서 무용도 타자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요즘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조형빈: 여지껏 제기했던 문제들이 주체성과 주체를 어떻게 해체하느냐에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제는 타자성을 어떻게 같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가. 흥미롭네요. 앞으로 해석하고 도전해볼만한 여지가 많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시간이 다 되어서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안무를 둘러싼 다양한 개념과 변주의 이야기들,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왼쪽부터 최기섭, 조형빈 ⓒ양동민


조형빈_웹진 《춤:in》 편집부 대학에서 사회학과 문화학을 전공하고, 무용에 관한 문화연구를 해오고 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 글을 쓰며 무용월간지 등에서 기자와 칼럼니스트로 글을 실었다. 현재는 웹진 <춤:in>의 편집부로, 기획과 편집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최기섭_안무가, 무용이론연구자 한양대학교 생활무용예술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협동과정 공연예술학 전공 석사 졸업 후 현재 동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라시내와 최기섭 2인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異仁’을 결성하여 안무 실천과 이론을 가로지르는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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