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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8.13 조회 2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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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mi: Dance 2018 레지던시를 다녀와서:
한 발자국씩 더하며 나아가는 협업이 창작자에게 남기는 것

허윤경_안무가



Omi Dance residency ⓒArt Omi: Dance

미국 뉴욕주 겐트(Ghent)시에 위치한 아트 오마이 혹은 오미(이하 오마이)(Art Omi)는 1992년에 설립된 비영리 예술단체로서 시각예술, 문학, 번역, 음악, 무용, 건축 분야의 국제적인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운영한다. 뉴욕시티로부터 기차로 2시간 정도 달리다보면 나오는 허드슨 계곡의 마을 오마이의 탁 트인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옛 농장을 개조한 넓은 조각공원과 숙소, 작업실, 스튜디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나라의 창작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발전과 변화를 꾀하는 것이 설립 취지로, 각 분야별로 연중 다른 시즌에 운영된다. 무용분야의 경우 매해 여름마다 3주 간의 일정(이번 해는 7.16 - 8. 6)으로서,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온 10명의 무용가를 초대하여 협업, 교류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결과물이 아닌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성격이 강하다. 각 분야마다 운영 방식이 조금씩 다른데, 개별 프로젝트를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다소 열려 있는 상태로 공동작업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최종적으로 공연을 할지 여부도 참여하는 아티스트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처음으로 거실에 둘러 앉아 자기소개를 할 때 기억에 남았던 것은 먼저 어떤 대명사(pronoun)로 불리길 원하는지, 즉 she, he, them 등 젠더 개념이 포함된 혹은 젠더 프리(gender-free)한 대명사 등 정체성과 관련하여 어떤 대명사로 불리길 원하는지 이야기해달라는 요구. 이는 그, 그녀로 번역되는 식의 대명사를 잘 쓰지 않는 언어권의 사람으로서 인상적이기도 하였다. 우리말의 인칭대명사에는 어떤 정체성이 담겨 있나 돌아보게도 되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나 같이 영어문화권에서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이름을 가진 경우 외국 생활할 때 짧은 가명이나 전혀 관계없는 영어 이름을 써야 하는 상황과 연결되는 맥락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초반에 아무리 어려워도 나의 본명을 부르기로 하고, 틀리면 맞을 때까지 연습을 시켜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저런 소개 세션 끝에 다양한 사람들의 조화, 존중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 사회의 현 상황과 관계되며 이어졌던 것이었다. 예술감독이 눈시울을 붉히면서까지 이야기했던 모습에서 배척과 혐오에 대한 이슈가 몸으로 일상으로 연결되어있음을, 여기서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공감을, 그리고 이러한 현실의 상황에서 프로젝트의 특성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에 대한 나름의 묵직함을 상기할 수 있었다.



Omi Dance residency 워크숍 모습 ⓒArt Omi: Dance

이 레지던시의 또 다른 특색으로는 풍족하고 여유로운(abundant and spacious) 작업 환경을 들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스태프들이 입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고(식사를 준비해주거나 식재료를 사다주거나 침대를 갈아주거나 등) 연습실 등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아티스트들과 직접 접촉하며 스케쥴 조정 등의 행정적 진행과 여러 방향의 퍼실리테이터 역할 및 총괄을 담당하는 예술감독(artistic director)와 객원 멘토(guest mentor), 함께 일을 돕는 인턴과 자원봉사자들의 존재도 작업의 수고를 덜어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댄스 오마이에서는 매해 이전에 입주했던 예술가 중에서 한 명을 객원 멘토로 불러 경험자로서 입주예술가들을 돕고 예술감독과 함께 프로그램을 꾸려나가게 하고 있다. 흔히 예술가로서 생활할 때 부족하기 쉬운 시간적 공간적 여유, 그리고 함께 실험해볼 사람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풍요와 여유로움이 레지던시의 중심적인 컨셉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레지던시 자체도 하나의 실험이라면 이러한 작업 환경은 실험의 조건을 완성시키는 것이랄 수 있겠다.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인, 배불리 먹고 잘 자는 환경에서, 처음 보는 낯선 이들 10명과의 협동작업. 그것도 공연 여부를 선택할 수 있고 프로젝트들이 생성, 소멸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예술가에게 어떤 작용을 일으킬 것인가?

Ready Fire, Aim! (총, 발사, 조준!)

첫 주는 서로를 알아가는 기간으로서 본격적으로 진행할 협업에 앞서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이다. 각 아티스트가 다른 모두를 데리고 90분씩 워크숍을 진행하는 시간을 가진 후, 주말에는 외부 관객들도 초대하는 ‘살롱(Salon)’을 통해 7분씩 쇼케이스, 혹은 영상 상영의 형태로 자신의 작업 및 관심 주제를 소개했다. 이를 토대로 모두 모여 나머지 2주 동안 진행할 프로젝트들을 논의하고 소그룹들을 만든다. 9명이 두세 차례 돌아가며 각자 아이디어(프로젝트 주제)들을 제시하여 늘어놓은 뒤, 그 중에서 공통적으로 관심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모이는 방식. 많은 프로젝트 주제들이 다양한 방향에서부터 나와, 그것들을 성격별로 분류한 후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어떤 주제는 구체적인 움직임이나 스코어로부터, 어떤 주제는 특정 장소나 조각공원에 있는 미술작품으로부터, 어떤 주제는 다소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소재로부터 나왔다. 제시한 본인도 관심은 있으나 어떻게 진행될지 모호한 주제를 제기해도 큰 상관이 없었는데, 어차피 협업이기 때문에 주제를 성장시키는 것은 모두의 머리를 맞대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첫 주에 진행된 다른 작가의 워크숍 내용 등 레지던시에 와서 새롭게 접해보는 정보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시된 주제들도 꽤 많았다. 관련성이 있어 보이는 주제들은 통합되기도 했다.

보통 한 사람이 복수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프로젝트는 진행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거나 빨리 끝낼 수도, 자주 만날 수도 적게 만날 수도 있고 등등의 선택에 유연하게 열려있다. 공연은 프로젝트 구성원들의 선택에 따라 공연을 하지 않고 탐구 과정으로만 진행할 수도, 입주자들끼리 있을 때만 할 수도, 외부 관객을 불러서 하는 최종 쇼잉 때까지 공연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2주 후 총 12개의 프로젝트를 공연한 후, 그 중 10개를 최종 쇼잉 때 다시 공연할 수 있었다. 야외 공연과 실내 공연, 관객이 한 자리에서 보는 공연과 이동하는 공연 혹은 적극적으로 과정에 참여하는 공연 등 다양한 유형의 공연들이 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주의 ‘살롱’ 때도 느꼈지만 모험심이 강하고 적극적인 관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Art Omi: Dance residency 홈페이지에 소개된 안무가 허윤경 ⓒArt Omi: Dance

‘Ready, Fire, Aim’은 다른 입주자의 워크숍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잘 알려진 무용가이자 명언 제조기인 데보라 헤이(Deborah Hay)의 움직임 스코어 중 하나이다. ‘총, 조준, 발사’를 ‘총, 발사, 조준’ 으로 순서를 바꾼 것인데, 일단 생각대로 지른 후 다시 생각해보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거친 과정과 잘 어울리는 움직임이 아닌가 싶다. 전체가 모여서 하는 회의는 이틀에 한 번씩 있다. 프로젝트의 진행상황을 공유하여 프로젝트를 이어나갈 것인지, 지원이 필요한 것은 없는지 여부를 이틀에 한 번씩 점검하고 다음 이틀의 스케쥴을 조정하는 시간을 가진다. 작업 외에도 중간에 제도적인, 혹은 진행에 있어서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도 논의를 거친다. 전체 인원들이 다 같이 하는 몸풀이도 자원을 받아 진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움직임 메소드들도 접할 수 있었다. 스튜디오에는 긴 종이를 걸어놓고 작업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들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자유롭게 쓰거나 그릴 수 있게 해놓았다.

Ever-expanding Circle(무한히 팽창하는 원)

레지던시 중간 중간에는 우리들끼리 진행하는 소소한 이벤트들이 있다. 가끔은 레지던시가 어떤 국면을 맞이할 때 주로 예술감독이나 멘토가 게임처럼 즉흥 움직임 스코어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에버-익스펜딩 서클(Ever-expanding Circle)도 이러한 스코어 중 하나이다. 레지던시 기간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올해에는 구성원들 중에 가족의 건강과 관련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입주예술가 한 명과 인턴 한명이 레지던시를 중간에 떠나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소식을 접하게 되어서 두 명이 같은 날 떠나게 된 것이다. 이들을 바래다주기 위해 모였을 때 행한 이 움직임 스코어는 예전에 입주했던 작가 중 한명이 소개했던 것이라고 한다. 넓은 장소에서, 원으로 둘러선 사람들이 서로를 인지하고 그 연결성을 유지하면서 점점 무한히 멀어지는 아주 간단한 움직임이다. 물론 이번에는 기차 떠나는 시간 때문에 10분으로 제한해야 했지만. 2주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어느덧 진하게 정이 들어 다들 눈물바다가 된 가운데 넓은 풀밭에서 점점 멀어지고... 10분 후 다시 달려와서 좁게 섰는데, 그 와중에 일제히 얼굴로 날아드는 풀벌레들 때문에 다시 웃음이 터지고. 그 날 하루는 모두가 조금 감정에 북받친 상태였고 그 감정을 서로 돌보기 위한 대화들이 이어졌는데, 나는 이 또한 이 레지던시의 중요한 특색과 관련이 깊은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Omi Dance residency 워크숍 모습 ⓒArt Omi: Dance

느슨하면서도 강한 연대감이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으로 서로에게 다가가게 만들었고, 그것이 작업과 공연으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배제되거나, 그렇다고 자기주장을 숨기거나 하지 않는 균형이 이루어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낯선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놀라운 일이었다. 늘 그럴 순 없겠지만, 잠시라도 그런 균형을 경험한 것은 마음속에 좋은 자료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연까지 끝나고 난 후 마지막 날에도 스튜디오 안에서 여러 가지 마무리 즉흥을 했는데, 레지던시 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기억들을 움직임으로 꺼내보는 일종의 뒤풀이 공연을 진행하기도 하고, 공연했던 작품 중에 다 같이 해볼 수 것을 골라 재구성해보기도 했다. 최종적인 개인 및 집단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 났다.

레지던시 기간 동안 나는 어떤 프로젝트 주제가 씨앗이 되어,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특정한 모습으로, 때론 처음 막연히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잘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다른 어떤 조건들이나 공연을 만들 때에 견뎌야 하는 여러 가지 압박을 잠시 내려놓은 경우의 수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공연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 대해 또 하나의 관점을 더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협업을 통해 전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와 맞닥뜨리고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부터 모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시적으로 공연을 위해 달려가는 국제 교류 사업이 아닌, 깊이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 짧고 특별했던 오마이에서의 경험을 뒤로 한 채 모두들 다시 각자의 사이클로 돌아가며 멀어질 것이지만, 그래도 이 경험은 작업자로서 길을 가는 와중에 언제든 다시 꺼내어서 나 자신을 격려할 수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춤을 춤으로써 현상을 만들어내고 그 현상의 지금, 여기를 몸으로 사는 무용수로서, 우리는 무대 안과 밖에서, 자신의 내부와 다른 이와의 관계 사이에서 어떤 스코어를 수행하고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허윤경_안무가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몸 대 몸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무대 언어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함을 발견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안무가,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스페이스-쉽(Space-ship)>(2017), <Stand Up>(2015), <숨은 시선 찾기>(2015) 등을 안무하였으며, <미소서식지 몸>(2017), <시체옷>(2016), <숨의 자리>(2016)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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