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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8.09 조회 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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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람 <관통시팔>

춤 혹은 삶

김태희_자유기고가



<관통시팔>의 한 장면 ⓒ삼일로창고극장(photo_이강물)

이것은 김보람의 자전적 전기일까. 사방이 어둠으로 둘러싸인, 퇴로가 보이지 않는 작은 무대에 무용수가 홀로 빛을 밝힌다. 무대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긴장감을 더하지만, 손길 가는 대로 써 붙인 듯한 1부터 18까지의 숫자를 짚다 보니 빙긋 웃음 짓게 된다. 한구석엔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무용수의 '방'이 꾸려져 있고, 그 위로 '관통18'이라 적은 네온사인이 묘한 B급 감성을 더한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를 통해 여러 작품을 발표해온 그가 독무를 선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증이 들었다. 무슨 작품을, 왜, 어떻게? 그 공연의 제목이 <관통시팔>(7월 13~15일, 삼일로창고극장)이라는 걸 알고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감은 더욱 고조됐다. 명쾌하고 매력적인 제목 뽑기는 카피라이터나 에디터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었다. 공연을 보기 전부터 호기심을 불러모으는, 그런 데다 단순 '낚시질'에 그치지 않는, 안무가 김보람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제목이었다.

<관통시팔>은 삼일로창고극장 재개관과 함께 기획된 <빨간 피터들> 가운데 하나다. 2015년 폐관했으나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생명력을 다시 부여받은 삼일로창고극장이 지난 6월 22일 보수와 정비를 마치고 새로이 문을 열었다. 1975년 개관 이래 소극장 운동을 주도해온 에저또 소극장의 가치관을 이어 새로운 삼일로창고극장 역시 '예술 현장과 함께 하는 동시대 창작 플랫폼'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재개관을 기념해 준비한 4편의 공연 가운데 3편은 각각 한 명의 연출가와 배우가 호흡을 맞췄고, 단 1편만 무용가 자신이 안무하고 직접 출연했다



<관통시팔>의 한 장면 ⓒ삼일로창고극장(photo_이강물)

무용수에게 '혼자 추는 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독무는 많은 수의 대학에서 졸업을 위해 요구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이자 실력을 증빙하기 위한 수많은 콩쿠르에서 제시하는 조건이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로 몇 편의 작품을 만들었고 30여 년간 춤을 춰왔지만, 정작 자신만을 위한 춤은 준비해본 적이 없다는 김보람에게도 이번 작품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그 의미만큼 부담도 엄청났을 터. 무대 위 '반짝' 자신을 보여주는 3분짜리 솔로도, 20분 내외의 소품작도 아닌, 긴 호흡을 갖고 70분 동안 혼자 무대를 이끌어 가야 하기에 이 작품은 창작 과정만으로도 그에게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대무용만 아니라 발레, 한국무용, 방송댄스,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을 섭렵해 '김보람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그의 춤 스타일이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작품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날 무대에는 특정한 '그의 춤'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춤'이 있었다.



김보람은 70분 동안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세 차례나 갈아입으며 무대를 이어갔다. ⓒ삼일로창고극장(photo_이강물)

블랙박스 곳곳에 붙은 18개 숫자에 조명이 비추면서 작품이 전개된다. 70분 동안 그는 보이지 않는 파트너와 볼룸댄스를 추기도 하고, 무대 바닥에서 몸을 떼지 않은 채 움직임을 이어가거나, 때때로 잔망을 부리고, 반복적인 동작을 수행하며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시험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춤'에 대해 읊고, 동작에 구음을 붙여 음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윽고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서럽게 흐느끼기에 이른다. 이날 무대를 채운 것을 춤이라기보다 삶이라 부르면 좋지 않을까. 무대에 차례로 펼쳐진 김보람의 삶은 이내 춤으로 귀결됐다.

언젠가 인터뷰를 빙자해 안무 작업을 하는 그의 모습을 관찰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궁금증이 참 많았던 나에게 "'춤'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춤이 될 수도, 춤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김보람의 말은 어떤 답보다 명쾌했다. 중요한 것은 '춤을 추고 있다'는 인식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춤을 추고 있다는 인식, 김보람이 18개의 주제로 완성한 무대는 그의 삶이 곧 춤이라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패턴'이라는 제목의 4장에서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싸고, 집을 나가고, 일하고, 돌아오고, 다시 잠드는 반복적인 생활 패턴을 점차 빠르게 반복하며 그 안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의 리듬, 즉 춤을 만들어낸다. 김보람이 관객을 위해 만든 작은 핸드북에 적은 대로 "삶은 리듬이고 리듬은 춤이고 춤은 자연이며 우리는 댄스인간"이니까.



<관통시팔>의 한 장면 ⓒ삼일로창고극장(photo_이강물)

몇 편의 전작을 통해 뛰어난 음악적 해석을 보여줬던 그는 이번 작품에선 제한적으로 음악을 사용했다. 음이 소거된 공간은 몸으로 들려주는 사운드로 채워졌고, 신중히 선곡한 시 낭송과 몇몇 팝송이 흘러나올 때면 마치 몸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철저하게 계산된 안무를 수행하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았고, 관객과 함께하는 에피소드를 삽입해 진행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모습은 능수능란했다. 마지막 장면 '후회'에서는 기계음 같은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사운드로 제시하고, 툭툭 끊기는 단어의 음절을 모티프 삼아 창작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많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던 공연 제목은 열여덟 가지의 춤을 선보인다는 뜻 외에 다른 의미도 품고 있다. 이번 공연의 큰 주제였던 故 추송웅과 그의 작품 <빨간 피터의 고백>을 살펴본 김보람이 예술가로서 느낀 질투와 부러움 끝에 내뱉은 "와, 18"이란 감탄사(?)가 그것이다. 자신의 연극 인생 15년을 기념하며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서'를 직접 각색해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을 만들고, 기획부터 제작, 연출, 연기, 분장까지 도맡아 8년간 공연한 추송웅. <관통시팔>의 시작은 그에 대한 거칠고 농밀한 오마주였을지 몰라도, 18개의 춤을 관통해 무대에 남겨진 결과는 온전히 김보람의 것이었다.

김태희_자유기고가 발레를 전공했으나 몸으로 표현하기보다 공연예술의 잔상을 텍스트로 담아두고 싶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으며, 월간 '객석'과 서울문화재단, 국립극장에서 잡지를 만들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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