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7.12 조회 2644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기획연재] 퀴어와 펑크 시학, 세상 편견을 뿌리친다

뉴욕의 춤과 공공예술, 그 현장에 다가서다 4.

- 브롱스예술·춤아카데미(BAAD)

김채현_무용평론가

브롱스에서 재출발한 유능 댄서



바드의 입구 ⓒ김채현

거리의 배틀, 힙합이 유래한 곳이 뉴욕의 브롱(크)스(Bronx)라는 건 알 사람은 안다. 힙합과의 인연으로 브롱스를 알게 되는 수가 많다. 맨해튼 북쪽에 위치한 브롱스는 뉴욕시의 다섯 자치구(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스, 스테이튼) 중에서는 지금도 물론이고 한때는 미국에서 삶의 조건이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자연 경관도 특출나지 않은 터에 열악한 탓인지, 뉴욕 가이드북에서도 굳이 브롱스를 거론하지 않아도 무방했고 뉴욕에 살지 않아도 그곳의 세계적 야구장 양키스타디움쯤은 아는 외지인들도 브롱스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다. 브롱스가 맨해튼 바로 곁에 위치하지만 우리에게 생소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은 곳.

브롱스예술·춤아카데미(Bronx Academy of Arts and Dance, BAAD)는 지난 20년간 브롱스 지역 성소수자(LGBTQI), 여성, 무용가, 유색인종의 예술적 권리를 선도하는 데 매진해온 조직이다. 이 단체를 1998년 결성한 이래 지금껏 조직을 이끌어온 남성 무용가 아서 아빌레스(Arthur Aviles)는 빌 티 존스(Bill T. Jones)의 무용단에서 1987년부터 8년간 활동한 바 있다. 빌 티 존스는 흑인 태생으로서 백인 남성 파트너 아니 제인과 흑백 혼성 무용단을 결성한 인물로 90년 무렵 자기가 30대 후반이던 때 뉴욕에서 주목받는 위치에 있었다. 아빌레스는 발레, 컨템퍼러리댄스, 체조, 레슬링 등을 수련하여 대학 졸업 후부터 빌 티 존스 무용단의 중심 무용수로 활약하며 <뉴욕타임스> 등 춤 평단의 주목을 끌다가 돌연 자기 무용단을 결성해서 독립하였다. 올해 BAAD(바드)를 방문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빌 티 존스와 헤어진 이유를 묻자 빌 티 존스 무용단에서의 전문 무용수로서의 갖춰진 길보다는 열려진 춤 활동에 더 끌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서 아빌레스(Arthur Aviles) ⓒ김채현

지금에 이르러 빌 티 존스는 뉴욕 극장춤의 핵심인 조이스 시어터 인근에서 그 입지를 크게 굳히고 있다. 실험춤 운동 조직인 댄스 시어터 워크숍(DTW)과 함께 소극장과 스튜디오를 겸비한 뉴욕 라이브 아츠를 공동 소유하고 있을 정도다. 빌 티 존스와 함께 했더라면 역시 무용수로서의 내일이 보장되었을 것임에도 아빌레스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갔다. 자기 무용단을 세우고 두어 해 활동하다가 마침내 안착한 곳이 브롱스였던 것은 좀 의외의 일로 보인다. 아빌레스가 극장춤의 황무지나 다름없는 브롱스에서 춤 인생을 재출발한 것을 전문 무용인의 입장에서 언뜻 수긍하기 어렵겠지만 성장기를 브롱스에서 보낸 아빌레스의 배경에 비추어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면이 있다.

뉴욕의 불모지, 유령 천지가 되다



1977년 브롱스의 실상을 목격하는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위키피디어

당시 브롱스는 극장춤의 황무지였던 것은 물론이고, 특히 1980년대까지의 브롱스 자체가 삶의 불모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전반 브롱스에서 디제이 쿨 허크가 힙합을 창안하고 몇 해 지나 흑인 폭력배 출신 아프리카 밤바타가 디제이로서 힙합에 가세하던 때 브롱스는 불모지화(不毛地化)를 급격하게 겪고 있었다. 그런 황폐함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다음의 일화는 유명하다.

1977년 어느 날, 브롱스가 외부로 내세울 유일한 자랑거리인 양키스타디움에서 월드 시리즈를 방송하던 도중 야구 실황 중계 캐스터가 갑자기 “신사숙녀 여러분, 저기 브롱스가 불타고 있습니다!”고 외쳤다. 실제 야구장 주변에 발생한 대형 화재를 일어나던 그대로 알린 방송이긴 하지만, 캐스터는 관심이 화재를 진압하는 데 있은 것이 아니라 브롱스에서는 가난한 (유색) 주민들이 매일 같이 방화를 저지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황폐해진 브롱스로부터 매일같이 주민들이 떠나가고 있었고, 크고 작은 건물의 임대주들은 건물을 재건축하거나 리모델링하기보다 차라리 화재 보험 보상금을 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방화의 주범이 주민들이라는 호도된 여론과 달리 임대주 계층이 실제로 방화를 주도했음이 밝혀졌고, 70년대를 지나는 10년 동안 브롱스(당시 인구 140만명 선)는 전체 건물의 10%가 불타거나 텅텅 비워진 탓에 유령 도시가 되어버리고 만다.

1950년까지만 해도 브롱스는 백인 중산층이 거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던 안정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 뉴욕시를 콘크리트로 뒤덮는 새로운 도시계획이 마치 쓰나미처럼 밀어닥치던 그 시기에 브롱스에서도 지역 중앙을 관통하는 도시고속도로가 추진(1963년 완공)되면서 브롱스에서 백인들이 떠나가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주거지로서 매력을 잃어가던 그 몇 해 사이 지역 인구 구성이 백인 다수에서 유색인 다수로 돌변함과 아울러 이후 근 20년간 지역의 생활수준 저하, 미국 경제의 악화, 뉴욕시의 파산과 같은 일련의 사태는 브롱스를 결핵, 약물중독, 범죄, 가정붕괴, 에이즈가 창궐하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황폐한 브롱스 거리, 1964년 ⓒ위키피디어

혹자는 이를 두고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구조적인 도시 살상(殺傷)의 사례라 부르기도 한다. 브롱스에서 힙합이 발생한 이면에는 이처럼 아비규환을 연상케 하는 브롱스의 매우 처참한 정황이 드리워져 있다. 당시 역대 대통령들도 브롱스를 방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지만 결국 지역을 일으켜 세우려는 자각이 현안 해결의 키가 되었다. 도시 그래피티에서 명료하게 대변되듯이, 힙합이 이른바 도시 살상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자 그 자체가 생사를 건 투쟁이었다는 지적은 그래서 납득이 간다.(쿨 허크와 아프리카 밤바타 등 힙합꾼들이 브롱스의 관례적 동네 파티인 ‘블록 파티’들에서 힙합으로써 축제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주민들과 함께 에너지를 다져간 사실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색인·퀴어 입장 견지해온 BAAD

바드를 방문하기 위해 브롱스의 웨스트체스터스퀘어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웨스트체스터 애비뉴는 힙합의 발상지들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80년대 이후 브롱스를 살리기 위해 진행되었던 노력 덕분인지, 역 주변은 매우 정돈된 느낌이었다. 브롱스가 유령 천지라는 것은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바드는 역에서 몇 블록 떨어진, 뉴욕시의 도시 유산으로 지정된 조그만 예배당의 일부를 공연장과 사무실로 쓰고 있다. 말끔하지 않은 분위기에 매우 단출한 설비지만 70석 남짓의 소극장은 그들의 문화 아지트로서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바드의 소극장 ⓒ김채현

바드는 몇 가지 다음의 정례 이벤트로 활동을 펼친다. ≫ ‘BlakTinX’(감사해요 흡혈귀) 공연 시리즈: 10월 한 달 간. 미국 흑인과 라틴 계열 예술인들이 뒤섞이는 형태로 진행된다. 춤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연극, 이야기 고백하기 등 다양한 장르가 참여한다. ≫ ‘BAAD! ASS WOMEN’(바드! 당당 여성) 페스티벌: 3월 한 달 간. 여성들이 여성들을 충전하는 이벤트. 춤 공연, 토크, 세미나, 영화, 시극 등 다매체를 통해 여성 폭력과 현실 등을 다양한 색깔로 담론화한다. ≫ ‘GET TOUGH!’(거칠게): 2월. 퀴어와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영화제. ≫ ‘BOOGIE DOWN DANCE’(세게 추어라): 5월 한 달 간. 흑인 무용가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취지로 시작되었고 브롱스 지역 거주 무용가들 및 그들만의 춤을 제시하는 이벤트로 넓혀 진행된다. ≫ ‘OUT LIKE THAT’(그렇게 내질러): 6월 한 달 간. LGBTQ를 선명하게 표방하는 공연예술제 형태로 무용인과 연극인 중심으로 진행된다. ≫ ‘Trans Visionaries’(비전을 넘나들다) 공연 시리즈: 2017년 하반기에 시작. 무용인, 음악인, 카바레 가수, 희극 배우, 시인, 행위예술가 등이 한 무대에 서는 이벤트로 기획되었다. 브롱스 지역의 카페와 레스토랑을 밤에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면서 특히 트랜스젠더와 관습에 맞선 젠더 활동을 환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식사를 하며 즐기는 형태로 매달 열린다. 이외에 바드는 여름 방학에 6~9살의 아동들을 위해 5주 간의 춤 교실을 연다.



바드 공연에 출연한 사람들 ⓒ김채현



바드 이벤트 '당당 여성'의 한 컷 ⓒ김채현

바드의 이벤트에서는 무엇보다 미국 흑인과 유색인 그리고 퀴어의 입장이 확고하다. 아빌레스는 인터뷰에서 브롱스 지역에서 이 같은 입장을 관철하는 데 매진하도록 만든 동기를 예술에 관한 욕구 이전에 자신이 살아가는 커뮤니티를 충전(充電)하고 싶은 소망에서 찾았다. 자신이 성장기를 보냈고 사정도 익숙한 브롱스에서 그가 재출발한 것은 어쩌면 예술의 고향 회귀 같아 보인다. 그가 귀향할 때의 브롱스는 그나마 성장기 때보다는 호전된 편이어서 예술을 매개로 커뮤니티를 충전하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바드의 활동상을 두고 ‘브롱스의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자란 풀뿌리’라 평한 바 있다. 구조적 도시 살상이 할퀴고 간 불모지에서, 바드는 퀴어와 펑크 활동을 매개로 흑인과 유색인의 정서를 일관되게 공유하며 전파해왔고 앞으로도 지속해나갈 것이다.

4회에 걸쳐 게재된 기획연재 <뉴욕의 춤과 공공예술>은 이번 호로 종료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셨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채현_무용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민음사),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사회평론)를 비롯 다수의 논문, 그리고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등의 공저와 ≪춤≫(청년사), ≪미적 체험의 현상학≫(민음사)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 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춤 영상 문고를 개설할 예정이다.


목록

댓글 0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