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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7.11 조회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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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끝, 세계의 시작 : 그림자의 춤에 관한 주석

양경언_문학평론가





ⓒ엄유정
1cm가 여는 세상

만약 고개 숙인 아이의 위축된 마음을 보살펴야 하는 잠깐의 시간이 무용수에게 주어진다면, 이 무용수는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용을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활용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무용전공자인 지인과 나누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몸을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려는 아이가 자신이 딛고 있는 바닥만 쳐다본다거나 벽과 마주하고 있다면, 아이 곁에 질소 풍선을 두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풍선이 바닥에서 출발해 천장까지 두둥실 떠오를 때면 한 쪽으로만 고정되어 있던 아이의 시선은 풍선을 따라 위로 향하는 순간을 잠깐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전부라 여겼던 세계 이상의 공간을 얻는 일이 일어난다. 위축되어 있거나 긴장된 상태가 만들었던 아이의 좁았던 시야는 천천히 그러나 일순간 넓어짐으로써, 종국에는 아이의 마음까지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다.

방금 앞의 문단을 읽은 독자는,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가 방 한가득 풍선을 풀어놓고 특정한 사물과 사람의 몸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몸짓의 변화를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겪도록 했던 <흩어진 군중(Scattered Crowds)>(2002)과 같은 작품을 떠올릴 수 있겠다.1)포사이스가 언급했던 ‘안무적 사물(chreographic object)’까지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감정에 귀 기울였을 때 촉발하는 예술적 표현이 있듯 ‘나’의 몸 바깥에서 나와 관계하는 여러 사물들 혹은 존재들과 어떻게 엮이느냐에 따라 촉발되는 표현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바닥이나 벽만 쳐다보고 있던 아이가 허공을 거쳐 천장까지 시선을 던지게 되는 경우도 풍선이 아이의 몸 곁에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언급한 사례에서 이 글이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무엇보다, 별 것 아닌듯한――숙였던 고개를 가만가만 들었을 뿐인――움직임을 통해서도 아이의 시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야가 단지 1cm 정도만 넓어졌을 뿐일지라도 얼마든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요컨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물 그 자체만이 아니라 주어진 사물의 가장자리에서 촉발된 풍경, 그것과 더불어 열리는 풍경을 인지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1) 윌리엄 포사이스에 대한 설명은 서현석, 「“왜 춤을 추는가?”」, 『K-Contemporary』(국립현대무용단, 2013), 20면 참조.
무용수가 껑충 뛰어오를 때 바닥에 홀로 남겨지는 것

이원의 시 「그림자들」(『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2012, 49면)에서는 우리가 눈으로 무용수의 움직임 그 자체만을 좇을 때는 결코 알 수 없을 장면을 짚어낸다. 잠시 읽는다.

바닥은 벽은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그림자들은 등이 얼마나 아플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는 그림자들의 힘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한 사내가 또는 한 아이가 난간에서 몸을 던질 때 미처 뛰어오르지 못한 그림자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몸은 허공 너머로 사라졌는데 아직 지상에 남은 그림자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 이원, 「그림자들」전문



시인이 그림자들의 통증과 근육, “심정”과 “생각”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마다, 이 질문은 어쩐지 그림자 주인들에 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자 주인들이 채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림자의 움직임에 남겨졌을 가능성이 시인의 눈에는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무용수가 높이 뛰어오를수록 바닥에 남겨진 그림자의 농도 짙은 색감에는 허공에 던져진 무용수의 몸이 품고 있는 강도 높은 긴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림자 주인’이라는 말을 썼지만 이쯤에선 무엇이 무엇의 주인이라는 표현이 굳이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그림자는 그림자 주인이 있는 풍경을 완성하는 주요한 매개로 있다.

물론 우리는 무용수가 어떤 심정으로 허공에 몸을 던지는지에 관해 백퍼센트 안다고 자부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상황이 개시하는 어떤 세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무용수의 움직임과 그것이 남기는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장면을 통해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에겐 그림자의 움직임도 춤의 연장이다. 누군가의, 또는 무언가의 발끝에서 시작하는 그림자까지 포함해서 바라볼 때야 짐작할 수 있는 이 세계의 은폐된 비밀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감춰졌던 그 비밀을 막 인지하기 시작한 이의 격정 역시도 위의 시에는 있다.

끝에서 시작하는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누군가의 몸짓에만 고정하지 않고 그 몸짓이 관계하는 벽과 바닥에 비춰진 그림자를 향해 조금 더 연장하는 것만으로도 그 몸짓에 대한 다른 이해를 구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존재, 어떤 사물의 끝에서 시작하는 그림자의 형태를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면 혹은 어떤 존재, 어떤 사물의 끝과 끝이, 가장자리와 가장자리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전엔 나누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사물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의 가장자리가 촉발한 풍경을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언제나 ‘도약’에 가까운 일들이 빚어진다. 홀로 고립되어 있는 줄로 알았던 것도 그림자에 묶여 있고 허공에 존재하는 무언가와 관계하고 있음을 상기하다보면, 이 세상에 ‘홀로’란 없다.

나는 무용수들이 허공을 고려해서 동선을 만드는 이유를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다. 그들의 발끝에 걸려 있는 그림자가 이미 춤인 이유에 대해서도. 그들은 사물의 끝에서 시작되는 움직임과 거기에 이르렀을 때야 들리기 시작하는 목소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걸 진작부터 체득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 자신의 움직임을 통해서야 개시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양경언_문학평론가 1985년 제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 문학평론 부문에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 김민정론」이 당선되어 문학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착각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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