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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5.10 조회 4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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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토크: 질문에서 대화로 공영선 안무작 <곰에서 왕으로>

허영균_예술·공연예술 출판사 1도씨 디렉터

ⓒ김민재

이 대화는 공영선 안무작 <곰에서 왕으로 - 묶음전>을 공연하기 약 2주일 전, 연작에 참여한 안무가, 퍼포머 3인과 한 명의 개근 관객, 프로듀서 그리고 관찰자가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2018년 1월 17일 <곰에서 왕으로 - 바위 편>을 시작으로, 한 달 간격으로 세 번의 공연을 마친 뒤 마지막 ‘묶음전’만을 앞둔 시점이었다. 철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책 『곰에서 왕으로』에서 제목을 빌려온 이 작업은 ‘야생적 사고의 회복’과 ‘상징으로 남은 신화의 흔적을 개인의 그것과 엮어나가는’ 안무가 공영선의 보이는 세계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훗날 ‘질문들’이 되었던 그 의심은, 2017년 혹은 그보다 훨씬 앞선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관찰자이자 이 글의 필자인 나는 <곰에서 왕으로>를 탄생시킨 질문들과 그 질문에 종종 답을 주었던 책 속의 문장들을 일부 추렸고, 그것을 토픽으로 테이블토크를 기획했다. 빨간색과 보라색인 두 종류의 카드의 뒷면에 각각 키워드와 문장이 적혀있고, 참여자들은 각 카드를 한 장씩 뽑는다. 두 장의 카드에서 연결점을 찾아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그에 대해 답하는 식으로 대화는 이어진다.

우리에게 상실된 야생적 사고는 이 작업을 통해 과연 얼마나 회복되고 복기 되었을까? 바위, 동물, 원이라는 상징물과 관계 맺으며 신화로 엮였던 세 명의 퍼포머는 지금쯤 신화의 어디를 헤매고 있나? 무대 위에 부재하면서도 무대를 움직이는 관객이라는 ‘실재’에게 퍼포머들은 개인의 신화를 엮어 나갈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가?

대화를 통해 묻고, 듣고자 했던 이 일련의 문장들은 공연이 끝난 지금, 비로소 ‘질문에서 답으로’ 자리를 찾아간다.


대화의 방식

테이블 위에 두 가지 색의 카드가 놓여있다.
빨간색 카드에는 키워드가 보라색 카드에는 지시어가 적혀있다.
참여자는 각각 한 장의 카드를 뽑아, 그것을 스스로 하나의 질문으로 만든다.
참여자는 자기가 만든 질문에 대하여 자유롭게 말한다.
참여자의 이야기가 끝나면, 누구든 자기 생각을 덧붙일 수 있다.

참여자는 자기의 질문을 상대방에게 1회 토스할 수 있다.

빨간색 카드 보라색 카드 표

빨간색 카드

상징

본능-특성

꿈-태몽-해석

사실/실재/진짜 - 허구/부재/가짜

시간

바위

동물

교육 - 습득/상실/제거

신화

시대 - 과거/ 가상/ 지금

사고(Thinking)

보라색 카드

어떻게

무엇인가

어디서

언제인가? 언제 **했는가?

무엇을 **했는가?

가장 신뢰/의지하는 감각은 무엇인가?

적(的)이라는 것



질문과 답변


상징

가장 신뢰/의지하는 감각은 무엇인가?


공영선 ⓒ옥상훈
공영선 : 정보화된 감각이 아닌 것, 불현듯 나타나는 의도치 않은 충동적이고 우연적인 감각이 주는 정보를 가장 신뢰해요. 어떤 상황을 마주해버렸을 때 반응으로 나타나는 필터로 걸러지기 전의 감각이요. 저는 감각에 의지하기보다는, 감각을 많이 써먹으려는 의지가 있어요. 전 무엇에든 의미를 붙이려고 하는 편이에요. 고지식한 사람들은 이런 내 의미놀이를 두고 제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누군가에겐 '환상 만들기'일뿐인 '의미 붙이기' 놀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감각의 종류보다 감각하는 형태가 저에겐 중요한 거죠. 이야기하다 생각났는데, 결국 그런 감각체 안에는 개인의 상징이 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누구나 상징화의 과정을 겪지 않나요?
박유라 : 그럼 그 감각을 감각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뭐예요? 그 시점에, 그 감각이 작동하기 위해서.
공영선 : 나는 그걸 수련 중인 것 같아요. 지나가다 귀여운 강아지가 옆을 걸어갈 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들려오는 예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내 상태는 어떠해야 할까? 그리고 그걸 보고, 듣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작업을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의 상태가 아닐까요?
허영균 : <도깨비가 나타났다>에서도 '보이는 것을 믿을 것인가, 믿는 것을 볼 것인가'라는 주제가 있었잖아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보기'를 정보를 습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귀로 들었던 것도 시각적으로 복기해 주었을 때, 정보의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 같고요.
공영선 : <도깨비가 나타났다>에서 '본다'는 시각적인 걸 말하기보단, '실재한다, 실재하지 않는다'의 의미였어요. 형태가 있다, 없다의 차이. 그래서 시각 매체보다는 바람, 진동 같은 장치를 무대에서 많이 사용했어요. 4D처럼.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 육감이라고 하는 감각의 총합체를 가장 신뢰하는 것 같아요.

본능, 특성

무엇인가



박유라 ⓒ옥상훈
김승록 : 연결되는 질문이라서 이어서 제가 말할게요. 전 이 두 카드를 "본능/특성이란 무엇인가"로 읽었는데, ‘본능이나 특성은 어떻게 감각해야 하는가?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어요. 본능의 특성은 감각하려는 것 같은데,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관객은 보는 것을 통해 감각하려고 마음을 먹고 온 사람이기 때문에 뭔가를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그 노력으로 인해서 창작자가 A를 말하지만 B를 보기도 하고요. 어떤 작가들은 자기가 의도한 것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공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공연은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새소리도 극장에서 들려오면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 같잖아요. 없던 이야기도 만드는 공간이 극장이고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처음에 총에 대해 썼으면, 끝나기 전까지 꼭 총을 써먹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처럼 공연은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감각으로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일상과는 다른 점이고요. 저 역시 관객으로서 공연을 보러갈 때, 무대 위의 상황들을 지나치게 의미화하는 것일까 고민도 하는데요.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감각적으로 뭔가 재미있는 것 같아! 싶은 느낌이, 뭔진 몰라도 그 질문들을 끌고 갈 수 있게 하는 힘이, 공연의 지닌 장치이고 힘인 것 같아요. 본능의 특성은 결국 감각적 특성을 야기하는 것이고, 머리가 아닌 감각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박유라 : 저는 반대로, 감각으로 오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아요. 저는 게으른 관객인 것 같은데, 감각으로 나에게 다가오기 전까지는 감각하려고 노력하지 않거든요? 감각 당할 때를 기다리는 거죠. 그래서 어떤 공연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고, 어떤 공연에서는 반대로 풍부하게 느끼기도 해요.

적(的)이라는 것


김승록 ⓒ옥상훈
김기영 : 올해부터 공연을 보는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놀러 온 사람의 마음으로 공연을 보는 거죠. 이건 또 다른 관객을 믿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보라색 카드에 적힌 '-적(的)이라는 것'을 목적이라고 해석하면, <곰에서 왕으로 - 원 편>을 보며 생각했던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 퍼포머가 등장했을 때는 무대를 철거하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보였어요. 전선을 감고, 조명을 철수하는 행위에는 목적이 있는 거죠. 그러다가 목적을 잃고, 전선을 휘-이 한 바퀴 돌렸을 때, 그것이 유희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무엇인가 창조되기 시작했어요. 백스테이지에 있는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무대 위에서 세상을 창조하는 느낌이 들어서 재미있었어요. 마지막에는 무대 위의 도구들이 태양, 산, 바람으로 보이기까지 했어요. 기능적인 목적을 잃었을 때가 감각하는 순간의 시작인 것 같아요. '재미있네?'로 나의 의도가 확 바뀌게 되는 순간으로부터 진짜 무언가가 일어나는 거죠.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목적 있음과 없음에서 감각이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공연을 볼 때, 그런 상태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박유라 : 신화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했어요.
김승록 : 그러면서도 항상 '알 수 없음'이 함께 있어요. 안다는 것과 감각은 다른 것 같거든요. "재미있네? 호호호" 할 수 있다고 해서, 왜 재미있는지 다 알 수는 없거든요. 기억에 오래 남는 공연이나 전시를 생각해보면, 처음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경우가 더 많아요. 다만 그 행위가 일어났던 관람하는 시간 동안은 집중할 수 있었어요. 무엇에 집중했는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내가 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과 이야기 하거나 혹은 배치된 텍스트나 이미지, 분위기를 통해 어느 날 문득 그때 느낀 즐거움, 감동, 깊은 인상 등이 수면 위로 불쑥 올라오거든요. "앎"이 나중에 찾아온다고 할까요? 마치 약발이 올라오듯이 말이에요. 어느 순간에 자각이 찾아오는 거죠.

시간

무엇을 **했는가?


신진영 : 저는 작업자의 최측근에서 처음부터 함께 존재하거나, 구상이 완료된 작업의 최종 단계에서 합류하는 포지션이 되곤 해요. 거의 늘 시간에 쫓기는 포지션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잘 해야 하는 일은 '타임 플래닝'이에요. 시간을 잘 다루는 것이 저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죠. 그러다보니 시간 자체에 대한 이해와 타인의 시간에 대해 공감하는 감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타인이 어떻게 시간을 셈하는지 목격하는 것도, 작품 안에서 시간을 컨트롤 하는 것도, 그리고 '지속성', '영속성'과 같은 시간을 포괄하는 현상, 용어 자체도 좋아하고요.
한번은 제작과정 중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작가의 콘셉트 안을 받자마자 저 나름대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과정생산을 위해 어떤 범위까지 조력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정말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런 작업이었는데요. 참 묘한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이 작품은 어떤 것이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작업이기도 했어요. 해당 작업의 전시/퍼포먼스가 종료되고 이후 1년 동안 솔직히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었고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딱 1년 후에 그 작업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다시 2년이 흘러 또 다르게 확장된 의미로, 형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작업은 '생명', '삶', '영속성'에 대한 작업이었고 제게는 '시간성', '카운팅', '매개(=관계성)'에 대한 개념, 감각을 건강하게 정립하게 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점은 제가 어떻게 작업에 합류할지, 제 기능을 할지에 대해 설정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곰에서 왕으로> 제작에 있어서는, 공영선 안무가가 이미 스스로 시간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기에 단순히 날짜를 상기시켜주는 기능이기보다 다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적 질문을 경유할 수 있게 하는 기능으로써의 타임키퍼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욱 또렷하게 직시하고 동시에 엉뚱하게 선회하기를 반복하면서 얻는 무엇이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곰에서 왕으로 - 바위 편>을 할 때만 해도 뭐가 뭔지 몰랐었거든요. 고백하건데 "뭐하자는 거지?" 이게 감상평이었던 것 있죠. 도대체 신화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건지, 그렇다면 신화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이고, 안무가에게 신화의 정의는 무엇인지 등 정말 정리되지 않는 점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마지막 편인 <곰에서 왕으로 - 묶음전> 제작에 접어들면서 안무가가 품은 신화에 대한 현재의 정의, 상상, 가능성에 대해 동의하고 신화 속에서 시간을 다루고 배치, 조작하는 방식에 대해 분석해보게 되었어요. 이에 따라 관객에게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명시하기보다는 관객 스스로가 작업 속에 즐비한 요소들을 특정 단서로 상정하여 신화적 상상을 통해 신화의 역자가 되고, 다차원을 넘나드는 경험을 전유해 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초기 인류학자들이 흔들의자에 앉아 전 세계를 경유하고 이해했던 것과 같이 객석이 그 흔들의자가 되고 관객이 그때의 인류학자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안무가가 신화를 다루는 여러 가지 감각에 대해서도 추리해 보시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어요.
공영선 : 흔들의자 비유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아요. 이 비유를 언제 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가을이 되어서 단풍이 들 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아름다움이 짠 하고 와버리잖아요? "지금 가을이니까, 단풍이 들었고, 단풍은 붉고 아름답다…"하는 생각의 흐름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유라가 했던 말과 승록이 했던 말을 합쳐서 내 이야기를 하자면, 감각하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관객에게 짠 하고 갖다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랄까요. 이게 저의 궁극적인 생각인 것 같아요. 우리가 단풍을 볼 때처럼. 모든 것은 자기 삶에 끼워 맞춰서 의미가 탄생하는 것 같고, 그러기 위해 이유를 찾는 것뿐이지요. 자기 삶과 연결되는 어떤 시점이 오면, 그때부터는 자기의 논리, 자기의 사유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 과정이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가장 궁극적이고도 유치한 방법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곰에서 왕으로>라고 할 수 있어요.
박유라 : 저는 안무자가 퍼포머를 통해서 혹은 이용해서 취미를 관객의 눈앞으로 대령하는 과정이 공연이라고 보는데, 퍼포머로서 어떻게 해야 맞을까? 영선 언니가 얘기한 운동성에 빼곡하게 충실해도 되는 걸까 싶거든요. 그 빼곡한 퍼포머를 보면서 관객들은 말랑말랑한 사유가 가능한 걸까요?
공영선 : 감각이 사유를 불러올 때, 그 사유가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고 봐요. 실은 나를 포함하여 퍼포머들에게 원하는 건, 감각적인 존재로서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뿜뿜하는 것이거든요. 가만히 있더라도 뿜뿜이 보이는 상태, 그 상태여야지만 감각이 물리적 거리를 뚫고 관객석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지금까지 나는 어떤 퍼포머를 보고 싶었나, 어떤 퍼포머가 가장 강력했나 생각해보면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것을 뒤로 감추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그 사람의 상태가 보일 때 가장 감각적이었어요. 그건 나에게 목표라는 말과 같아요. 정확한 목표가 있는 움직임이니까요.
김기영 : 영선 씨의 작업을 볼 때 느낀 것은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어쩌면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행위들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눈을 감고 돌을 뛰어넘는다든가, 미친 듯이 돌다가 갑자기 중심을 잡고 선다든가 하면서요. 퍼포머가 감각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나(관객)에게 다르게 전달될지라도, 분명한 목표와 지시를 갖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 느껴졌어요.
공영선 : 기영 씨가 노동과 유희라고 말해준 부분이 나에게는 생산과 유희였어요. 노동보다는 생산. 쓸데없는 짓 하기. 이후에 무언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있는 일 자체가 재미있어서 할 뿐인 것의 대조가 <곰에서 왕으로 - 원 편>에서 가장 잘 보였던 것 같아요. 퍼포머가 노동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김기영 : 퍼포머가 조명을 달고 불을 켤 때는 마치 창조주처럼 보였어요. 가장 위대한 순간은 어쩌면 가장 쓸데없는 일을 할 때 생겨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조촐하고 가장 위대한 행위가 중첩된 느낌을 받았거든요. 세 편의 공연을 보는 동안 이미지가 찍히듯 각인된 장면이 꽤 있었어요. <곰에서 왕으로 - 바위 편>에서 퍼포머가 바위에 깔려 있는 이미지라던가, 포그가 반쯤 사라졌을 때 퍼포머가 관객석 가까이로 와서 천천히 도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곰에서 왕으로 - 동물 편>에서는 움직이며 내는 소리들, 퍼포머의 숨소리, 그가 집중하고 심취해 있는 것들이 다가왔고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구체적인 무언가를 수행해야 하는, 저 사람의 집중에 관객도 집중하게 되는 거죠. 그 집중의 에너지가 뿜어져서 관객석으로 전달되는 것 같아요.
박유라 : 영선 언니가 무대 서기 전에 내게 한 말이 "유라야, 네 시간을 충분히 가져"였어요. 그런데 저에겐 우리 모두의 시간을 내 시간처럼 써야 하는데서 오는 난감함이 있었어요. 나는 그런 게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거든요. 나라는 퍼포머가 움직이고자 하는 충동이 들 때까지 모두가 시간을 써가며 기다려야 하는 것 말이죠. 어쩌면 퍼포머의 기량은 움직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당위를 스스로 찾아내는 데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너무 어렵죠?
공영선 : 그거 어려워? 그건 안무가가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박유라 : 공연 때까지 찾아지지 않으면?
공영선 : 그럼 안무가가 잘못했네.
김승록 : 그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해요. 저는 안무가가 첫 단추를 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장 처음으로 '화두'에 대해 흥미를 느낀 사람이요. (누구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에) 처음으로 호기심을 느껴버렸기 때문에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남들은 궁금하지도 않은 걸 혼자 재미있다고 하는 바보처럼. 안무가가 퍼스트 리더라면, 퍼포머가 세컨드 리더라고 생각해요. 퍼포머는 버려질 수도 있는 안무가의 흥미로움을 처음으로 공감해주는 최초의 관객인 거죠.

태몽, 꿈, 해석

어떻게

<곰에서 왕으로 - 묶음전> ⓒ옥상훈
김승록 : 영선 누나로부터 처음 들은 것은 '야생적 사고, 신화적 사고'라는 테마였어요. 방법이나 구조적인 것을 결정하는 건 안무자의 권한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테마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큰 과제였어요. 작품 중에 전선을 돌리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매일 다르게 전선을 돌렸고, 영선 누나는 매일 다른 피드백을 했어요. "간단하게 돌려봐, 아무렇게나 돌려봐, 너무 힘들게 돌리지 마." 적정 지점을 찾아야 하니까요. 그 지점을 찾기 전에는 모든 것이 바보가 바보에게 피드백 하는 것과 같아요. 처음 느낀 바보가 그 다음에 느낀 바보에게 말하는 거죠. 이 과정이 저에게는 "감각의 연습"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돼요. 관계라고 해야 할까? 계속 나눠온 이야기 속에서 겪은 시간들도 포함해서요. 그래서 저는 아까 신진영 PD가 말했던 타임테이블 얘기가 무섭더라고요. 이 무렵이면 사람들이 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작품 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 몰랐던 부분이거든요. 한 걸음 밖에 있는 사람 눈에는 그 일련의 변화에 차례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놀라웠어요.
허영균 : '꿈, 해석, 태몽'이라는 키워드는 이 작품이 탐구하는 '개인의 신화'와 관련이 있어요. 저는 태몽이 개인이 지니고 태어난 최초의 신화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태몽을 통해 주어진 해설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진행되지는 않지만, 인간은 그런 해석과 해설을 즐거워하고, 그것에 믿음과 희망을 부여하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것에 의지하고요. 누군가 태몽을 해석하고, 당사자가 그 해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곰에서 왕으로>가 궁극적으로 관객과 나누고 싶어 하는 '신화가 개인에게 엮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공영선 : 딴 얘긴데, 관객 피드백 중에서 후기 중에서 되게 기분 좋았던 것이 꿈에 나왔단 얘기였어요. 또 다른 관객은 자려고 누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고 그러더라고요. 너무 좋았어.
김승록 : 다르게 말하면 꿈같은 공연이고, 무의식적인 공연이었단 얘기네요.
공영선 : 내가 진짜 원하는 반응이었어.

교육 - 습득/ 상실/ 소거

보라색 무엇?


박유라 : 저는 안무자가 한 말을 습득해요. 그런데 그걸 상실해야만 수행할 수 있어요. 완전히 습득하고, 완전히 상실해야 목적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공연을 할 수 있어요. 저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작업에 다가가는 무용수거든요. 언니의 작업이 습득과 상실 그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무용수로서 진짜 자유로운 신체를 가져야 하고, 잔소리도 많고요. 개인의 시간도 가져야 하고 또 그걸 상실해서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작업인 것 같아요. 교육을 받을 때와 그 교육을 적용해서 공연을 만드는 건 뿌리부터 완전히 다른 일이에요. 교육을 받을 때는 그 시간이 참 재미있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습득하고, 공연은 안무자의 의도대로 하려고 노력해요. 습득한다는 것 자체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자기와의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이기고 나면 내가 보고, 믿는 것이 되는 것 같아요. 습득이 곧 믿음과 관점이 되는 거죠. 그래서 무언가를 배울 때는 그게 거의 나의 종교가 돼요. 그럼에도 그것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위험하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안무자와의 작업이 가능하니까요.
공영선 : 그건 정말 보편적으로 이야기 나올 수 있는 주제 같아요. 유라는 정말 열심히 배워요. 안 그럴 것 같이 보이는데, 정말 미스테리야.
박유라 : 열심히 배우는 것이 너무 즐거워요. 배운다는 것이 수동적인 일 같지만, 은근히 능동적으로 마음이 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흥미로워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불교 경전이 폭류경인데, 거기서 말하길 "가만히 있지도 않아, 애쓰지도 않아"라고 해요. 내 삶에 이 태도를 적용하려고 노력해요. 딱 그 정도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딱 그 정도로 안무가의 의도를 받아들이고, 그 정도로 퍼포머의 테스크를 받아들여야 해요.
신진영 : 그렇다면 관객들이 우리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로, 능동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바라봤으면 하나요? 어떤 기준이 있을까요?
공영선 : 정말 묘한 것 같아요. 왜 그 얘기 했잖아요. "알 것 같은데" 정도에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이게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는데, 에세이를 안 좋아해요. 에세이는 일종의 실용서처럼 느껴져요. "삶은 이런 거야."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소설도 일정 부분 에세이의 기능을 하지만 삶은 이런 거라고 말하진 않잖아요. 읽고 난 후에 삶이란 어떤 것이구나 하는 정의가 독자에게 맺히게 하는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박유라 : 그렇다면 (비견할) 삶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공영선의 공연은 굉장히 무의미한 거네?
공영선 :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랑 굉장히 친한 언니가 편집자였는데, 모두가 읽을 책은 아무도 만들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어요. 마치 그런 것처럼 모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공연을 만들고 있어요. 지금도 내 공연을 굳이 보지 않았더라도 기영 씨는 이 주제에 대해 이해하고 고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오늘 이 자리에 이 작업에 대해 "아~" 할 수 있는 사람만 모여서 아뿔싸했어요. 저는 모두를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타이밍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봐요. 누군가에게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먼 미래에 올 수도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김승록 : 보편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이 작품이 비교적 범용성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공영선 : 그건 너의 희망이야?
김승록 : 희망이라기보다는 제가 느끼는 이 작업이 특징이에요. 관객으로서 요즘 저의 화두는 "왜 봐야 하는가?"인데요. 제가 항상 하는 질문이 "왜 봐야하지? 내가 이걸 왜 보지?"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교육된 관객이거나 혹은 비뚤어진 관객인 것 같은데, 창작자가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자신이 공감했던 것을 보여주려고 하고, 그것이 내 취향과 결이 완전히 다를 때면 "왜 봐야하지?"에 대한 답이 되지 않으면서 놓아버리는 지점이 있었어요. 공감이 아니라 동감 혹은 이해의 수준으로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내 취향은 아니야." 혹은 "네 얘긴 잘 알겠지만, 나에겐 전혀 울림이 없는 작업이야"라는 태도였어요. 그에 비해서 이 작업은 범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이유는 안무자가 바라는 것, 공감시키고 싶은 것이 확실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서 오히려 모두가 볼 수 있는 작품인 셈이죠. 저는 게으른 무용수에요. 어쩌면 유라와 반대인데, 내가 열심히 하는 부분은 나의 지분을 찾기 위한 행위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거예요. 열심히 하다 보니 내 것이 되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다른 사람의 생각인데도,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이 내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게 무용수로서의 제 태도에요. 그런 나에게 있어서, 이 작업은 매력이 있어요. 안무자가 하려는 말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라서요.
공영선 : 작품 만드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 같은데, 그걸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건 조심히 말해야 하는 부분이긴 한데. 이 작업은 정말 모든 패가 관객에게 있어요. 자기가 기대하는 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관객도 있을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없어요. 이런 광경을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뻘짓은 뭐야, 뭐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나는 그게 딱딱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에 대해서는 그냥, 내가 놓아버리는 것 같아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허영균 :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모습 역시, 그 관객의 야생적인 모습일 수 있을까요?
공영선 : 무조건 '왜'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든 것을 미궁 속으로 빠뜨리는 사람 같아요. "왜 뛰어다녀?", "왜 바위 밑에 깔려 있어?" 논리적인 접근이나 전개, 해결이 없으니까요.
허영균 : 그런데 질문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 더 파고들어 보면 답할 수도, 질문할 수도 없기도 한 것 같아요. 가령, 태어날 때 나는 분명히 의지가 없었고, 지금도 다시 돌아간다면 안 태어났을 거 같은데, "네가 1등으로 달려와서 태어난 거다, 이미 넌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어."라고 하잖아요.
공영선 : 며칠 전에 제가 이메일 보냈잖아요.
박유라 : 새벽 세 시에. 아이고.
공영선 : 그 메일을 진짜 금방 썼어요. 오타도 별로 없고 심지어는 문장력이 있었더라고. (웃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였나 봐요. 스태프들이 한번 휘몰아치고 간 뒤에 생각해 봤어. 나는 이 작품까지 오는데 최소한 3년이 걸렸어요. 이 3년 동안 나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분명히 하려는 과정도 있었지만 되도록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두려고 노력하긴 했거든요. 난데없이 찾아오는 오렌지처럼, 그냥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왔어요. 하지만 스태프들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을 만나요. 그 시간 안에 나의 3년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메일을 쓴 거예요. 이 작품의 시발점에 대해서요. 이 작업을 더 이해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3년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한 거죠.
저는 진짜 열심히 산 사람이거든요? 선생님들이 제일 예뻐하는 학생, 우리 엄마 아빠가 일분일초도 걱정하지 않는 딸? 일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학생이었어요. 엄마가 자라고 하는데도 "엄마 나 독서실에서 새벽 3시에 집에 올 거야."하고 정말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애였어요. 일생을 열심히, 성실로 살아오다가, 안무 작업을 하려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답이 없는 거예요. 천재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잘하고 싶은 욕심만 넘치는 시간을 너무 오래 견뎠어요. 안무는 열심히 해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오래 견뎠어야 했는데, 그러다가 내게 실마리가 찾아온 것이 그 날이에요. 누군가는 나에게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읽어보래요. 근데 소용없었어요. 괴리감만 느낄 뿐. "그래 너 잘났다. 근데 나는 아니잖아." 할 뿐이었어요. 그러다가 그날 이후, 기다려보자는 마음으로 바뀐 것 같아요.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면서 내가 가졌던 모든 논리의 세계를 내려놓게 되었어요. 그때까지 나는 내가 정말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진실을 향하려는 비범함을 지닌,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것이 와장창 무너진 거죠. 나는 내가 춤을 잘 춰서 춤을 추는 줄 알았는데, 그저 잘 하고 싶어서 해온 사람이었던 거죠. 교육된 나를 어떻게든 버리려고 노력한 과정을 통해서, 열심히 살았던 내 원래 모습과 이제는 정말 많이 멀어진 것 같아요.
김기영 : 그렇다면, 나는 달라진 이후의 공영선을 만난 거네요. 작년 9월에 처음 만났는데, 굉장히 본능적이고 야생적인 사람이라는 매력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내가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달라지려고 그래요."라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함께 강원도 화천에서 뛰다 레지던시를 했는데, 영선 씨는 매일 5시 57분에 공연을 하기로 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인지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창작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노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나 역시 최근에 그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해방된 관객』이라는 책도 들춰보면서. 책을 중반부까지 읽었을 때, 작가의 의도를 강요하지 않는 방식에 심취해 있었어요. 나는 교육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어떤 공연에서 내 의도를 하나도 설명하거나 드러내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관객의 반응은 "뭐야?"더라고요. 오히려 다양한 해석이 불가능해 보였어요. 그래서 아예 드러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보를 어디까지 노출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나의 출발점까지를 알려주는 식으로요. 그리고 관객이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여지는 충분히 열어두지만, 작업에 대한 의도는 창작자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 점에서 <곰에서 왕으로> 시리즈가 똑똑한 공연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봤던 것 같아요. 꼭 이성적, 논리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감각적인 측면을 다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잘 알고 배치하고, 구성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객들에게 매 장면을 어떤 상징으로 해석하기를 강요하지 않지만, 왜 이런 방식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의도, 그리고 행위에 대한 태도의 방향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공영선 : 아까 승록이 얘기를 통해서, 이 공연을 원치 않는 사람을 공연에 오지 않게 하는 것도 피디나 홍보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객들 역시 온갖 경험을 다 하기 위해 공연장에 오는 건 아니니까. 관객으로서 경력자가 되면, 작품도 더 잘 고르고 안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공연도 많아질 거예요. 책도 고르는 것부터가 독서의 시작이라고 하잖아요. 극장에 온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리란 생각에서 시작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을 열고 온다고 믿는 거죠. 카톡 친구목록에 있는 모두에게 "공연 보러 오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객석이 덜 차더라도 내실 있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기운이라는 것이 돌고, 그게 퍼포머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요. 이번에 ☆이 공연할 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랑이 무대 위로 뿅뿅뿅 날아가는 것이 보였어요. 나는 유라와 승록에게 빚진 사람이란 생각이 있거든요? 근데 그날 관객석에는 나에게 빚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온 거예요. '내리 빚'이라고 해야 되나. 나에게 어떻게 해서든 사랑을 보내주려고 하는 마음이 무대 위 퍼포머에게 다가간 것 같아요.

사실/ 실재/진짜 - 허구/ 부재 /가짜

무엇을 **했는가?

<곰에서 왕으로 - 묶음전> ⓒ옥상훈
김승록 : 단백질과 탄수화물만 먹어도 몸을 유지할 수 있지만 실제로 중요한 건 누구와 먹느냐인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수행하는 것과 발현되는 것의 태도가 중요한 것으로 느껴져요. 모든 것이 이미 허구인 것을 알지만, 그걸 판타지라고 이야기해요. 보잘 것 없는 진짜를 허구이면서도, 신화적인 것에 빗대어 사실과도 같다고 말해주는 게 공연이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도 두 명의 퍼포머는 참 달라요. 하지만 그래서 저에게는 <바위>, <동물> 편에 대한 판타지가 있어요. 저 혼자만의 '이랬으면 좋겠다'는 상상이 가능해요. 마지막 묶음전이 누군가에게는 처음 보는 <곰에서 왕으로>일 수도 있어요. 어쩌면 자기들 안에서 스스로 허구를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신진영 : 저 역시 공영선 안무가처럼 무지막지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이 명확했고, 설계도 잘하는 편이었고요. 철인3종 경기 선수였기 때문에 더욱 운영 능력이 중요했거든요. 자주 활용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모두 똑같은 질량의 에너지가 담긴 물통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어요. 똑같은 물통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누구는 빨리 사용하고, 누구는 느리고 오래 사용할 수도 있겠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운용 감각에 의해 에너지 물통을 사용할 적기와 적정량을 측정, 결정하는 것인 것 같아요. ‘어떻게’에 대해서 기억나는 일화도 있어요. 기계비평가 이영준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대학교 수업 때 이런 얘길 해주셨어요. 딸에게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면서 딸이 "아빠는 어떻게 키가 작아?"라고 물어봤다고 했던 것 같아요. 왜 작냐고 물어봤다면, "어렸을 때 못 먹고…" 뭐 이렇게 답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라고 물어보니까 꽤 곤란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질문을 바꾸어서 던지는 훈련을 해보라는 강의였던 것 같아요. 스스로 질문을 바꿔 던져가며 풀리지 않는 것을 직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곰에서 왕으로>는 안무가가 설정한 상징들이 나열되지만 확정적인 이미지, 해석이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것이 오히려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조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기영 : 나도 <곰에서 왕으로>를 볼 때 왜가 아닌 어떻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아요. 각 장면을 보면서 '왜 이런 행위를 하지?'가 아니라 '어떻게 한 걸까? 어떤 태도로? 어떤 대화를 통해 만든 작업일까?'가 궁금했어요.
박유라 : 나도 그 지점을 정확히 해주길 바라는 사람이니까, 작업을 받아들이는 거 같아. 내가 임의로 뭔가를 수행했을 때, "유라야 네가 지금 이렇게 했는데, 내 생각은 이 장면은 이러이러한 거니까, 다르게 해주었으면 좋겠어"라고 해주길 바라는 거지. 그게 가능하니까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봐.
공영선 : 이건 정말 사실과 허구 사이에 있어요. 그리고 그 사이야말로 관객에게 진짜 전달하고 싶은 부분이에요. 거기에 내 의도가 들어가는 거죠. 내가 퍼포머일 때는, 내가 분명히 맞다고 생각하는 것도 안무가와 생각이 다를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은 안무자가 아니라 퍼포머니까, 관객에겐 퍼포머가 가장 가까운 '실재'고 '사실'인 거죠. 거기서부터는 과장, 재단, 축소가 필요하게 돼요. 그래서 '실재와 허구, 진짜와 가짜'가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는 거고요.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은 수행성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실재와 허구를 어떻게 기름칠 하듯이 넘나들 수 있지?"하는 고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원 편>에서 전선이 막 앞으로 수상하게 내려올 때, 보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뒤에 사람이 있어서 저 전선을 내리고 있다는 걸 알지만, 알면서도 수상한 느낌을 받고,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이 공연의 속성인 것 같아요. 아니면 오히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감각에 더 가까울 수도 있고요.
김승록 : 저는 좀 웃긴 게, 내 기준에서는 언제까지나 대놓고 속인 것이거든요. 대놓고 속인다, 대놓고 속아준다는 감각이에요. 작업의 특성상 <동물 편>과 <원 편>의 차이일 수도 있어요. 내 기준에서는 전혀 폭력적일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고, 안무가도 자기가 보기 싫은 걸 하지 말라고 하니까. "5초 정도로 돌려봐"라고 하면, 내 기준에서의 5초를 가늠하면서 하거든요. 이건 무용 작업의 특징인 것 같아요. 누군가는 호흡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이미지라고도 표현하는데, "따라따라라라" 이렇게 해줘 하면, 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해요. "우리는 지금 속이는 중인데, 나 또한 속일거야"가 아니라 나를 속이면서 하는 거예요. "속이려고 하니까 이렇게 속아줘."라는 생각으로요.
공영선 : 이 작업을 준비하며 읽은 것 중에 "우리는 더 이상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라는 글이 기억에 남아요. 우리는 꿈꾸는 것과 신화를 구분지어서 이야기 하지 않지만,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크 테 공연을 보면서 내가 그렸던 그 미래도시 포스터가 생각이 났어요. 학교 다닐 때 한번쯤 그리는 상상화. 신화를 더 큰 범주 안에서 생각하면 그것 또한 (꿈의) 하나의 변주된 형태라고 생각해요. 미니홈페이지의 방 꾸미기도 현실이라는 신화의 다른 형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허영균 : 어떤 것은 작업이고, 어떤 것은 거짓말일까? 어렵죠. 진짜 진실한 거짓말을 통해서, 가장 진실한 허구로, 진짜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공영선 : 그래서 나는 『사피엔스』를 읽으며 정말 위로 받았어요. 허구에 힘을 실어주니까요. 나는 허구를 하는 사람이니까요. 예술은 생산성이 없고, 사회적 기능을 덜 한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 하고 있을 거니"란 이야기를 들어요. "사람들이 매일 같이 몇 명이 죽어나가는 이 시점에 너네는 어떻게 그렇게 꿈을 꿀 수 있니?"하고 공격 받는 것이 굉장히 저에겐 컸어요. 내가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게 된 사건이 용산참사인데, 굉장히 늦은 편이었다고 생각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어요. 내가 춤을 춰서 뭐하나, 나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나조차도 "춤 춰봤자 뭐해? 사람들이 저렇게 죽는데…"하면서, 예술이 지닌 힘을 못 믿고 있었던 거예요. 허구라는 이유로. 그걸 이겨내는 게 매우 오래 걸렸어요. 내가 왜 예술을 하는지, 예술의 어떤 힘을 믿는지.
신진영 : 관점은 다를 수 있는데, 저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진영이가 하는 일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잖아"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이제 주저하지 않고 분명하게 말해요. "응, 이 작품을 안 봐도 세상은 돌아가. 그런데 네 삶을 안 봐도 세상은 역시 돌아가." 작품이 좋고 나쁘고도 영향을 주겠지만, 예술 작품을 본다면 아마도 세상을 감응, 측정하는 폭이 1cm만큼은 달라질 거라고 말해줘요. 예술 작품 안에는 현실 세계에서도 적용 가능한 사유가 묻어있고, 현실에 전달하려는 이야기도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뉴스에만 집중해서 세상을 지각하고 살아가는 해답을 터득할 때, 예술가들은 그 외의 다양한 방법과 감각으로 다르게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공영선 : 저는 그렇게 말하고, 믿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어요. 열 살 때부터 춤을 췄는데, 대학생이 되니 "내가 이걸 왜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작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데까지 오는 시간이 한참 걸린 거죠.
신진영 : 결국 제가 지향하는 최종 목표점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시스템이 좋아졌으면 하는 점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스템은 훗날 예술 작품이 하나의 처방전으로 제안되고 실제로 기능했으면 하는 거예요. 현실에서 어떤 아픔과 문제에 직면했을 때, 약과 비슷한 효능 정도로 간주되어 어떤 작품을 보라고 권장해주는 사회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가들, 이 분야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우리부터가 작품 활동에 소재, 도구로 사용하느냐 마냐 하는 여부를 떠나서 현실세계에 대한 이해와 예민한 분석, 해석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것이 예술가의, 그리고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라고 보고요.
공영선 : 쓸 데 없는 것이 가장 궁극적으로 쓸 데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을 때, 드라마 <선덕여왕>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요. 선덕여왕은 분명히 착한 사람인데 사람을 엄청 죽이는 거예요. 모두 자기의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자기는 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사고방식으로 구성된 세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있고, 그것이 한 순간도 멈추었던 적이 없어요. 그러니 사는 것이 너무 절망적이에요.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다보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이, 우리의 의지밖에는 없어요. 우리가 설정한 방향밖에는 방향이 없는 거예요.
공연 이후

대화를 마치고, 모든 사람에게 한 장의 빈 카드를 전달했다. 여기에는 공연 이후 서로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것을 비공개로 적기로 했다. 다섯 장의 카드의 뒷면을 여기에서 젖혀본다.

무엇을 보았나요?
꿈과 신화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10년 후의 개인 활동에 있어 <곰에서 왕으로>가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나요?
지금, 신화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개인의 관점이 없는 것도 관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개인을 탓할 수 있는가?

공영선

<곰에서 왕으로> 안무가이자, <바위-편>의 퍼포머. 바다와 햇빛과 고래를 좋아하는 여자로 춤 기반의 공연 예술 일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간과 미래의 가능성으로써 믿음과 감각에 주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유라

<곰에서 왕으로 - 동물 편> 퍼포머. 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첫 솔로 안무를 마친 신입생. 점점 더 나와 나의 신체를 없애고 움직임과 순간을 남기는 것이 소위 순수한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김승록

<곰에서 왕으로 - 원 편> 퍼포머. 무용수이다. 때때로 안무 활동을 하며, 쉴 때는 커피와 요리, 여러 가지 기술을 연습하고 익히는 것을 즐긴다. 즉흥성과 자율성, 세대와 세대의 연결에 관심이 많으며, 자신만의 작업에 대해 탐구 중이다.

신진영

<곰에서 왕으로>의 프로듀서. 작업자에게 그리고 작업에 필요한 '프로듀싱'이 무엇인지 찾아나가고 있다.

김기영

<곰에서 왕으로>의 개근관객. 전통연희를 기반으로 행위하고 창작하는 공연예술가이다.

허영균

관찰자이자 편집자로 <곰에서 왕으로> 프로젝트와 함께 했다. 테이블 토크를 기획, 진행하였다.


*본 대화의 일부는 <곰에서 왕으로>의 작업 여정과 기록을 담은 책 『□에서 ○으로』(저자: 공영선, 박유라, 김승록, 김기영, 신진영)에 실렸습니다.

허영균_예술·공연예술 출판사 1도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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