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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5.09 조회 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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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자의 춤

정용준_소설가

일러스트 엄유정

예술의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근사한 단어가 있다면 아마 영감(靈感)일 것이다. 창조적인 작업물과 이 전에 본 적 없는 표현 양식, 일반적이지 않고 쉽게 해석되지 않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아름다움과 의미가 느껴지는 느낌적인 느낌. 예술가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질문에 대해 답하기는 어렵다. 예술가 본인도 말하기 어렵고 수용자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서로 그 부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가장 단순하고 편리한, 그러나 난해하고 애매모호한 단어가 영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영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

2.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자극. 기발한 착상. 예감이나 모종의 느낌. 이런 것들은 예술가의 것이지만 동시에 예술가의 것만은 아니다. ‘신령’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영감을 이해하는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느낌이 예술가에게 찾아와 그를 자극해 창조적으로 만들었다.’ 정도일 텐데, 이게 참 미스테리하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영감의 주체인가 객체인가. 영감이 왔을 때 예술가의 행위는 예술가의 것인가. 영의 것인가. 그때의 감각은 예술가의 것인가. 영의 것인가.

롤랑 바르트는 《마지막 강의》에서 “나는 오랫동안 글쓰기-의지 그 자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다는 자동사니까요.”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쓰기’라는 독립적인 의지가 작가 안에 있다는 생각이다. 남미의 작가 마리오바르가스 요사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몸 안에 기생충이 숙주에게 명령하여 먹고 싶은 것을 먹듯 글이라는 존재가 작가를 택해 이용한다는 식이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까지 생각했다. “소설가가 소설의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소설의 주제가 소설가를 선택합니다.”

나는 글이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신비적인 느낌과 방법으로 써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영감이라는 존재보다 작가의 명징한 이성과 실제적인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다보면 느닷없이, 불현듯, 순간적으로, 찾아와 나를 사로잡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래서 영감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내가 궁금하고 호기심을 품는 것은 이 영감을 구현해내는 표현 양식이다. 많은 예술가들은 영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작가에겐 펜이 필요하고 화가에게 붓이 필요하다. 그런데 댄서에겐? 글쎄. 몸 외에는 다른 도구가 없지 않나?(댄서가 아니므로 확신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영의 감각과 몸의 감각 사이가 완전히 붙어있다. 어떤 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매개체 없이 곧바로 몸으로 반응하는 댄서는 그래서 묘한 예술가다. 춤추는 자는 춤이라는 무형의 존재에게 완전히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춤이 원하는 것을 춤추는 자도 함께 원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충돌을 일으킬 것이다(물론 그때의 갈등과 에너지가 댄서에겐 더 근사한 표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춤을 하나의 인격체라고 상상해볼 때 춤이 말하면 댄서는 입술이 되어야 한다. 움직일 때는 몸짓이 되어야 하고 표정을 지을 때는 얼굴이 되어야 한다. 영감과 오감을 분리할 수 없는 지경. 안과 밖을 나눌 수 없이 붙어 있는 상태. 춤이 원할 때 춤추는 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살과 뼈가 상한다. 경우에 따라 마음과 영혼이 상할 수도 있다. 일상의 감각과 춤 출 때의 감각이 뒤섞여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도 상상해본다. 어쩌면 댄서는 춤을 몸 안에 간직하며 사는 숭고한 사제같은 것이 아닐까. 이쯤 되면 ‘춤과 하나가 되었다.’ 라는 상투적인 비유는 댄서에겐 실제다.

나는 그것이 두렵고 동시에 부럽다. 열등감을 느끼며 동시에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춤에 문외한인 내게 댄서는 언어가 다른 낯선 자고 성질을 파악 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생물이다. 극단까지 몸을 밀어붙여 춤을 출 때는 천성적으로 강한 육체를 타고난 우월한 동물처럼 보인다. 기이한 동작으로 팔과 다리를 기묘하게 움직일 때는 시적이고 아름다운 몸짓 언어가 된다. 언어 이전의 언어. 표현을 입기 전의 언어. 댄서의 춤은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관두고 그것이 내게 전하는 춤 언어를 이해하려 애쓴다. 춤에게 입술이 없어 말로 말하지 않듯 이해하려는 자는 또 받아들이려는 자는 그것을 단순한 귀와 눈으로 느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그저 몸의 한계와 극단으로 이해하면 춤은 기예이고 육체의 극단까지 밀고 올라간 우월함일 것이다. 이를테면 체조 같은. 그러나 춤에 의미와 메시지가 흐르고 있다면, 춤이 말하고 뭔가를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춤에는 소리가 없고 글자가 없으며 이미지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일일이 그것에 대해 해석해주고 몸짓을 언어화하는 가볍고 질 낮은 번역을 시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 어떤 언어는 쉬워지고 풀어써버리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무용이 이해와 공감이란 측면에서 난해하고 어려운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춤추는 자 너머의 춤에 집중할 수 있을까. 춤추는 자 이면에 숨어 있는 춤의 표정을 볼 순 없을까. 춤이 말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그가 말로 말하지 않고 설명으로 설명하지 않을 때 우리가 그것을 무슨 수로 이해해야 하나. 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다른 감각 기관이 필요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단순한 감상에 기대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 이해의 차원을 바꿔야 할 것이다.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사고 체계를 다르게 마련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그게 무슨 말이야’ 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댄서의 춤이야말로 가장 난해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는 영감의 언어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토마스 베른하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 천재가 아닌 두 명의 피아니스트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이 시대의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가의 삶과 욕망은 어떻게 발현되고 실현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소설 속 글렌 굴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실 피아노이길 원해, 인간이 아니라 피아노이길 원하지, 평생에 걸쳐 인간이 아닌 피아노이길 원해. 이상적인 피아노 연주자는 피아노이길 원하는 자야.” 나는 댄서가 춤추는 모습을 보면 어째서인지 글렌 굴드의 저 말이 떠오른다. 글렌 굴드가 피아노이길 원하는 피아노 연주자였다면 댄서들은 춤이길 원하는 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미 춤일지도 모른다. 춤추는 자의 춤은 춤추는 자다.

정용준_소설가 소설을 쓴다. 두 권의 단편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과 두 권의 장편 <바벨> , <프롬 토니오>를 펴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과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지내고 있다. 하마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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