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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5.09 조회 7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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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봄: 한국 무용수의 해외 오디션 도전기

황환희_무용수, 안무가, 댄스 티쳐

길고 어두웠던 겨울을 밀어내고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베를린에도 왔다. 상쾌한 바람은 높고 푸른 나무들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고, 갖가지 색을 입은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여 춤을 추고 있다. 파란 하늘 사이를 뚫고 내리 쬐는 햇볕에 반사된 그들의 춤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이 도시를 흔들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운 변화를 이렇게 보고 있으니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마음먹은 대로 잘 될 것만 같은 희망과 의지가 솟아난다. 때가 되면 변화는 찾아오고 우리는 그 변화에 적응한다.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베를린 우퍼스튜디오(Uferstudios)에서 댄스필름 프로덕션을 위한 무용수 오디션이 열렸다. 프로젝트의 감독이자 안무가인 베로니카 리즈(Veronika Riz)와 나는 2010년 처음 만난 이후로 여러 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다. 그녀는 내게 이 프로덕션의 리허설 디렉터를 제안해 왔고, 오디션에서 무용수 트레이닝과 심사를 함께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무용수에게 오디션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책임감 가득한 마음을 안고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500명이 넘는 무용수가 오디션에 지원했고 우리는 이력서와 댄스영상을 살펴본 후, 60여 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베를린으로 초대했다. 춤 하나가 인생의 전부인 양 캐나다, 호주, 영국, 포르투갈, 러시아 등지에서 트렁크를 끌고 배낭을 맨 채 도전을 꿈꾸는 젊은 무용수들이 우퍼스튜디오를 찾아 왔다.

오디션이 진행되는 스튜디오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의 긴장감과 기대감, 그리고 절실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가슴 떨림이 자신을 작게 만들어 버리는 것만 같은 이 순간을 나 또한 경험했었기에, 이번에는 내가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그들이 그들 자신일 수 있도록 배려했다.

3번의 콜백(callback)을 걸쳐 올라온 무용수들의 파이널 열기는 엄청났다.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조바심도 나는 법이다. 확고한 의지와 투지가 넘쳐나는 젊은 무용수들은 신체의 한계를 넘나들며 그들의 몸을 무용실 바닥에 내던졌다. 오디션에서 우리는 2명의 메인 여자 무용수와 2명의 서포트 롤을 결정했고, 메인 남자 무용수는 결정짓지 못했다. 그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춤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은 슬쩍 어딘가로 숨어버린 거침없었던 10년 전 나의 모습이 나를 마주하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댄스필름 오디션 심사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내 마음 속에서 남아 맴도는 울림에 응답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디션이란 무용수에게 하나의 도전이며 모험이고 또 다른 시작이다. 지금 이렇게 써 내려가는 글은 누군가에게는 그냥 흘려보내는 이야기일 수 있을 테고, 또 누군가에는 정말 필요한 정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해외에서 10여 년 동안 살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무용수에게 많이 받아 온 질문에 대한 나의 경험과 관점 그리고 정보를 나누고자 한다. 외국에서 활동하기를 꿈꾸는 무용수들에게 건네는 이 메시지는 어쩌면 그들이 진짜로 듣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2009년 1월 8일, 서울에서 독일 북부 도시 브레멘(Bremen)으로 커다란 빨간 트렁크에 석 달 치의 갖가지 실림을 꽉꽉 채워 내 마음이 달려가는 곳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그때 간절히 원하던 것은 ‘예술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었다. 한 마디로 예술을 통해 먹고 살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환경을 만들거나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이 작업하고 싶었던 예술가가 ? 피나 바우쉬(Pina Bausch), 사샤 발츠(Sasha Waltz)는 내 학창시절의 로망이었다. - 이곳에 있었기에 내 여정의 첫 도착지를 독일로 선택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 나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셨던 유미나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일하고 싶은 무용단이 있다면 그 무용단이 자리한 도시의 수돗물을 최소한 1년은 마셔야 한다.", "내가 해마다 해외로 나가는 이유는, 나는 고등어인데 한국에는 갈치만 있기 때문이야. 밖에 나가서 다른 고등어를 만나면 숨통이 트여.” 솔직히 그때는 이 말의 뜻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수돗물은 무엇이며 생선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언제나 그렇게 아리송한 은유를 많이 하셨기에 그때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교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학생이었기에 아직까지 선생님의 주셨던 말씀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수돗물을 식수로 애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 가정의 수도관에서 나오는 물뿐만 아니라, 공공시설이나 화장실 세면대에서 나오는 수돗물도 자연스레 그냥 받아 마신다. 나는 아직도 수돗물을 마시진 않지만 - 내 입맛이 까다로운 이유로 ? 교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는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고 몸에 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사고방식, 생활환경 그리고 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려면 그곳에서 1년은 살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옳은 말씀이다. 또한 같이 일해보고 싶은 특정한 무용단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서 모닝 클래스를 받으며 그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작업 환경을 알아 볼 수 있다. 또한 안무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혹시나 단원의 부상으로 급작스레 리플레이스로 들어갈 기회가 있지는 않은지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이런 기회는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무용단 공연을 직접 보며 영감을 키우고 안무자의 작업을 이해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만약 안무자의 작업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디션에서 안무가가 상상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리고 예술적 신념과 정신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동지애와 친밀감이 확장된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고등어와 갈치의 비유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은 많은 응원이 되며, 예술가를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큰 힘이다.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3개월 간 관광 비자로 유럽에 체류하면서 오디션을 최대한 많이 보고 직업을 얻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목표였다. 그래야 취업비자를 얻어 합법적으로 외국에 체류할 수 있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으니까. 한국을 떠나기 전,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받았던 교육과 경험들을 비추어보았을 때, 충분히 성장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년간의 예술 고등학교, 6년간의 실기와 창작 활동에 중점을 둔 학사, 석사 과정과 여러 학교에서 쌓은 선생님으로서의 경력, 그리고 LDP무용단 활동과 개인, 단체 안무 경력들이 내 자신감의 밑바탕이었다. 단지 ‘언제’와 ‘어떻게’만이 관건이었을 뿐 나는 분명히 나와 같이 작업하고 싶은 안무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에는 내 로망인 무용단에서 작업하게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3개월로 부족하다면 학생 비자 또는 어학 비자, 그것도 아니면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만들어 이곳의 수돗물을 마시며 고등어가 노는 물에 최소 5년은 있을 작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독일에서의 콜링은 어쩌면 운명이었던 것 같다. 하는 일을 모두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기 직전의 12월,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몇몇의 무용단에 나의 이력을 보내고 초청장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지원한 곳 어디에서도 초대받지 않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1월에는 해외로 나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밀어붙여 볼 요량이었다. 이런 마음가짐을 다지던 중 갑자기 독일 올덴부르크 주립극장(Oldenburgisches Staatstheater)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오디션 통보 후 단 이틀 뒤가 오디션이었기에, 나는 고민할 여유도 필요도 없이 바로 독일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독일은 마침 나를 양손 벌려 맞이해줄 무용가 친구인 미미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살고 있는 올덴부르크 옆 도시, 브레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고 나의 겁 없던 ‘무용단 찾아 삼만리’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동안 브레멘에서 지내며 오디션을 보러 이 도시 저 도시, 이 나라 저 나라를 넘나들며 많은, 아주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오디션이 없을 때에는 친구가 당시 활동하고 있던 브레멘 시립무용단(Tanztheater Bremen)에서 모닝 클래스를 듣거나 베져(Weser)강을 따라 조깅을 하며 마음과 체력을 다잡았다. 가는 길에 많이 넘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의 방향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목적지에 언젠가는 도착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올덴부르크 기차역과 브레멘의 베져강, ©Hwanhee Hwang

브레멘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내 생에 첫 번째 오디션이었던 올덴부르크 주립 무용단의 오디션은 하나에서 열까지 나에게 아주 많은 인상을 남겼다. 발레 클래스로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오디션에서는 무용단의 두 가지 레퍼토리를 배워 평가를 받았으며, 휴식 후에는 안무가가 주는 주제로 즉흥을 했다. 이 과정 중에 셀렉션이 계속해서, 그리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클래스 직후, 여러 명의 무용수가 떨어졌으며, 첫 번째 레퍼토리 후 몇 명, 두 번째 레퍼토리 후 몇 명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다 7시가 넘어 즉흥 테스팅을 받는 무용수는 10명 남짓 남게 되었다. 마지막엔 피부가 아주 하얀, 금발에 짧은 커트를 한 러시아 무용수와 나를 두고 안무가는 갈등을 했다. 나는 자신이 있었고 그 오디션을 즐겼다.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렇게 무용단에 입단하게 되는 것인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날의 오디션은 저녁 9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사실 보통의 오디션은 이렇게 늦게 끝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 미미에게 시시콜콜 모든 상황들을 이야기하며 잠 못 이루는 긴 밤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기대와 희망을 안고 기다리기를 며칠, 무용단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이 첨부된 이메일을 받았다. 아시아 무용수 한 명이 내년 시즌부터 무용단을 떠나기로 해서 그 자리에 내가 적합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 무용수가 마음을 바꿔 무용단 활동을 더 하기로 결정해서 날 채택할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하고 나의 미래에 행운을 빈다고 했다. 결과의 내용에 많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럼 그렇지 이렇게 일이 쉬울 수는 없지.'라고 생각하며 오래 낙심하지는 않았다. 또한 나중에 그 안무가가 다른 무용단의 안무자로 이직했을 때 그가 나를 기억하고 다시 초대를 해주는 기회가 오기도 했다. 좋은 인상을 남기면 기회는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이 경험을 통해 또 한 번 배울 수 있었다.

그 후 몇 번의 오디션을 더 거쳤고 마침내 행운의 여신은 나의 열정에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반드시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니 꿈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내게 제일 처음으로 러브콜을 보낸 스타머 프로덕션스(Stammer Productions)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콜렛 새들러(Colette Sadler)가 이끄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프로젝트 베이스가 베를린이었기에 나는 베를린에서 취업 비자를 얻었다. 그 후 2년에 걸쳐 만하임, 하노버, 벨기에, 이태리 등에서 주로 독립 안무가와 프로젝트를 하며 많은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2011년 cie toula limnaios 무용단에서 1년여의 생활을 마치고, 2012년 2월, 운명처럼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사샤 발츠를 만났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나에게 리허설 참여를 권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와 스튜디오에서 만나 아침을 시작하거나 함께 공연 투어를 하며 세상의 여러 곳을 여행하고 있다. 서로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인생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상에 열정과 혼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은 없다고 믿는다.

샤샤발츠와 스튜디오 리허설 모습, © Ute Zscharnt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르는 얼굴이 여럿 있다. 대학 선후배나 혹은 같은 처지의 한국인 무용수가 그들의 꿈을 위해 항해하다 내 인생에 찾아드는 경우가 제법 많다. “외국에서 활동 하고 싶어요.” 나도 그랬고 많은 무용가들이 한 번쯤 지나가는 말로, 혹은 아주 진중하게 이 질문을 물어온다. 해외에서 작업하는 환경이 전반적으로 한국보다는 진전되어 있고 기회가 다양하긴 하지만 외국의 경우도 녹록한 것은 아니다. 내가 건너 온 다리를 건너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혹은 한국적 가치관에 의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목적지도 없고 정처 없이 헤매는 가운데 마냥 좋은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하는 경우에는 난감해진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주소를 가지고 어떻게 가야 할지를 물어올 때 그곳에 가기 위해 어떤 다리를 건너야 하는지, 다리를 건너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이 있는지, 그곳 근처에 근사한 곳이 어디에 있는지 추천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외로 외국에 나와 활동을 하겠다고 하는 무용수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무용수들이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견문을 넓이기 위해, 아니면 프로 무용수 생활을 멋지게 몇 년 간 경험하고 싶어서, 또는 한국 생활로부터의 도피나 일상의 일탈을 위해서 등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아주 다양하다. 어떤 이유이든 외국에서 무용수로 일을 하기 위해서 공통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작점을 정해라.

어떤 무용단이나 안무가와 작업을 하고 싶은지, 어떤 환경 속에서 살고 싶은지를 고려하여 나라와 도시를 정한다. 첫 출발지 선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먼저 오디션 지원을 하고 초대된 무용단이 있는 도시로 가기

타 국가로의 이동 경로가 용이한 도시에 베이스를 두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오디션 때마다 도시 옮겨 다니기

좋은 전문 무용수 트레이닝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진행하는 센터가 있는 도시로 가기

둘째, 오디션 준비하기.

영문 이력서인 CV(Curriculum Vitae)만들기는 첫인상을 넘어 첫 번째로 통과해야 하는 까다롭고 중요한 과정이다. 내가 심사한 오디션의 경우도 500명이 넘는 무용수 중 60여 명을 서류심사로만 추려낸 것을 기억하자.

정확한 정보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워드 파일을 만들어 이름, 성별, 생년월일, 거주지, 신체조건, 학력사항, 프로 무용수 경력과 안무 작품을 표기하고 수상경력이나 특별 활동, 취미나 특기가 있다면 소개해도 좋다.

영상 만들기 : 활동경력이 많거나 다양한 스타일의 춤을 보여 주고 싶다면 비메오(Vimeo)나 유튜브(YouTube)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에 잘 편집된 영상을 올리고 웹 주소를 첨부한다. 또한 단 하나의 영상자료만 첨부하도록 규정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솔로, 듀엣, 군무, 특기 그리고 헤드샷의 모습을 잘 편집한 파일 하나는 꼭 준비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영상의 길이는 너무 길지 않게 2, 3분 정도가 적당하다.

오디션 공고 자주 확인하기 : 오디션 공고 및 워크숍, 공연과 페스티벌 등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무용 전문 사이트의 리스트를 참고하자. 오디션 공고가 매일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유럽 사이트의 경우 공고의 내용이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등이 섞여있기도 해서 간혹 지원을 할 수 있는 오디션을 놓치는 경우가 있으니 잘 확인하고 또 확인하자.


www.danceeurope.net

www.dancemagazine.com

www.tanznetz.de

au-di-tions.com

www.dancingopportunities.com


데드라인이 지난 오디션도 한 번 더 두드리기 : 안타깝게 데드라인이 바로 얼마 전에 지나버린 공고를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포기하지 말고 CV, 비디오와 함께 정말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내용의 모티베이션 레터(motivation letter)를 이메일로 보내보자. 실제로 후배 중 한 명이 데드라인이 지난 곳에 지원서를 보냈고 비디오로 그의 춤을 본 안무가는 그를 오디션에 초대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오디션에서 선발되어 지금까지 그 무용단과 계속 같이 일하고 있다.

셋째, 기회를 만들어라.

한국에서 많은 무용수들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정형화된 오디션을 통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트레이닝, 워크숍 찾아다니며 수업 받기 : 트레이닝 센터에 작고 큰 오디션 공고가 드문드문 올라온다.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는 온라인이나 잡지에 광고를 하지 않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식이 전해지거나, 트레이닝 센터 게시판에 작은 전단지를 붙이는 경우가 많으니 유심히 살펴보자. 특히 안무자가 진행하는 워크숍을 찾아다녀라. 안무자가 마음에 드는 무용수를 발견하면 바로 캐스팅을 할 수도 있고 현재 새로운 무용수가 필요치 않은 상황이라면 기억해뒀다가 다음 오디션에 초대를 한다거나, 무용수가 부상을 당했을 때 급히 리플레이스로 들어갈 수도 있다. 대부분 리플레이스 후, 작업 성향이 잘 맞아서 다음 프로덕션에 초대되고 지속적으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 후배는 많은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그 시기에 3주 동안 진행된 어떤 안무가의 워크숍에 트레이닝을 위해 참여했다가 워크숍 마지막 날 안무가가 새로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에 캐스팅되었다. 그 후 둘은 몇 년 동안 많은 작업을 했다.


때로는 오디션의 경쟁 열기가 너무 심해 무용수를 찾지 못해 힘들어하는 안무자가 더러 있기도 하다. 참고로 사샤 발츠는 2005년에 공식적인 오디션을 통해 2명의 여자무용수를 선발했고 그것이 그녀가 치른 마지막 공개 오디션이었다. 사샤가 말하길, 오디션 환경에서 한 무용수의 개성과 능력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오디션에서의 경쟁적인 분위기가 무용수에의 감성을 제한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후 사샤는 워크숍 참여자나 공연에서 새로 만난 무용수에게 관심이 있으면 리허설에 초대해 그 무용수의 가능성과 개성, 창의성 등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것이 그녀의 무용수 캐스팅 방법이다.


적극적인 소셜 활동 : 무용공연을 본 후 안무가를 찾아가서 작품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시작으로 자연스레 자신의 존재를 알려라. 안무가에게 느낌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본인이 지닌 개성을 안무가에게 어필하면 그들이 먼저 연락처를 물어보거나 리허설에 한번 와 보라고 할 것이다. 또한 무용 공연이 아니더라도 다른 전시회와 공연을 보며 자신이 지내는 곳의 예술 활동 환경을 이해하고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라. 그리고 말하라. “I'm looking for a JOB(나는 직업을 찾고 있어요).” 만나는 사람들에게 “I'm here for auditioning. If you hear anything, please let me know(저는 여기 오디션을 보러 왔어요. 혹시 어떤 정보든 듣게 된다면 제게 알려주세요).”라고 이야기해두는 습관을 가지자. 한 무용수가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다른 곳에서 제안이 들어올 경우 시기가 겹치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변에 알고 지내는 무용수를 소개시켜 줄 수 있고 안무가 또한 추천을 부탁한다. 그때 그 사람 머릿속에 당신이 첫 번째로 떠오르게 하라.

공연 후 무용단원들과 나누는 담소. 보통 극장의 바(bar)나 예술가 출입구 근처에 가면 무용수들, 리허설 디렉터와 안무가를 볼 수 있다. 용기를 내어 작품을 본 소감을 시작으로 말을 건네 보자, © Florian Schmitt
넷째, 작업 성격을 이해하라

무용단원의 생활과 프리랜서 무용가로서의 작업 방식과 생활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현실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경험이 쌓이게 되면 예술적 신념이 강해지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 개인의 욕구에 따라 무용단이나 프리랜싱을 선택할 수 있지만 대부분 첫 시작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자를 얻어야 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라도 프러포즈를 보내면 간단히 대답하면 된다. "YES."

무용단 생활(풀타임) : 시, 주립극장에 소속되어 있는 무용단과 개인이 이끄는 무용단에서 풀타임 계약을 줄 수 있다. 무용수가 계약을 먼저 끝내지 않는 한 보통 무용단 측에서 연말이나 연초에 연장 계약을 제안한다. 작업 성향이 맞는 안무가와 안정된 환경을 이미 찾았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지만, 많은 무용수들이 본인과 예술관이 맞는 안무가를 찾는데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본능에 따라 무용단을 옮기거나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경우도 생기고, 부상이나 연륜에 따라 춤을 접는 등 변수가 있을 수 있다. 매 시즌 마다 신작 작업과 레퍼토리 공연을 병행하며, 많은 시간이 리허설과 공연에 투여 된다. 극장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일상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해외에 처음 도착하면 은행 계좌 개설, 주거 등록, 보험 가입, 세금 정산, 비자 신청 등 꽤 복잡하고 어려운 문서 작업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무용단 매니저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특히 비자 연장 신청 시 풀타임 무용단 계약서가 있는 경우는 별 다른 문제없이 연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프리랜서: 좀 더 자유롭고 독립적, 주체적인 환경에서 일하길 선호하는가? 이런 경우에는 장기 계약을 통한 무용단 활동보다는 프리랜서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평균 한 프로젝트의 기간은 3개월 정도인데, 그 기간 동안 프로덕션과 계약을 하고 계약이 끝나면 공연이 있을 때만 재계약이 이루어진다. 차후 공연 계획이 없다면 프로젝트는 그것으로 끝이 난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곳을 찾아 다녀야 하기에 많은 여행을 한다. 이를 통해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어와 생활 방식, 사고를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스레 우리 몸속에 남아 예술작업의 지평을 넓혀 주는 토대가 된다.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수입과 일하는 기간, 휴가 기간이 일정치 않고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오디션을 보러 다녀야 하기 때문에 장기 계획을 구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주변에서 프리랜서로 활동 하는 친구들을 보면 일을 찾는 것에 매우 적극적이다. 대부분 일 년에 한 두 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무용 센터에서 티칭을 하거나 무용 학교 등에 안무를 해 주기도, 개인 안무 작업에 몰두하기도 한다. 초기 활동 시 일정치 않은 수입과 활동 이력은 비자 연장이 조금 까다로워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어떤 도시에서는 계약 기간만큼만 비자 기간을 주기도 하기에 곤란한 경우가 가끔 생긴다. 모든 서류, 문서 작업을 혼자 해결해야 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으니 주변에 도움을 청해 방법을 찾도록 한다.

다섯째, 자기 계발에 힘써라.

해외에 막상 나왔다 해도 갈망하는 무용단이나 안무가의 프로젝트 오디션 공고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설사 오디션이 있다고 하더라도 많지 않은 해외 활동 경력으로 오디션에 초대되지 않을 확률이 크다.


언어 공부 : 한국에서 온 실력 좋은 후배들이 오디션에 초대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 이유를 해외 활동 경력이 없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런 경우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데 어려움이 있거나, 언어능력의 한계로 소통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어떤 안무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는 예술의 결과는 몸-춤으로 상당 부분 표현되지만, 이곳의 작업 환경에서는 많은 의견을 교환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자신의 의사를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소통 가능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 유럽의 경우, 작업을 하는 나라와 지역에 따라 주 사용 언어가 영어, 독일어, 혹은 불어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영어 구사 능력을 키우라고 말하고 싶다.


경험 쌓기 : 만약 지금 한국에서 대학에 재학 중이라면 방학 기간을 이용해 해외에서 열리는 댄스 페스티벌에 참가해 많은 공연을 보고 인텐시브 워크숍을 받아라. 오픈 임프로비제이션 잼에 참여하여 새로운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춤을 춰라. 조그마한 작품이라도 스스로 안무해 솔로 또는 듀엣의 형태로 만들어 해외 안무가전에 도전하라.


너 자체로 충분하다 : 눈에 띄는 의상,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등은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전달하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춤은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되거나 영상 편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실시간으로 행해지는 살아있는 예술이다. 한 컷의 이미지가 본인을 특별한 무용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정체성이 강한 무용수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를 모방한 겉모습이 아닌 자신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초기에 유럽에 왔을 때 나는 아주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어떤 안무가는 나의 긴 검정 생머리가 자신의 작품에 오리엔탈리즘을 더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부각시키길 좋아했고, 어떤 안무가는 내 긴 생머리가 모든 동양 무용수들이 내세우는 진부하고 통일된 캐릭터라며 내 머리를 풀지 못하게 했다. 같이 작업했던 안무가 콜렛 새들러는 나의 검정머리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신체 부분으로 이것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내 머리카락은 내가 지닌 손바닥과 귀와 같이 신체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듯 안무가의 시선을 좀 더 끌기 위해 어떤 외모적 스타일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 많은 안무가의 입맛을 어떻게 다 맞출 것인가? 의외로 자주 받는 질문인 “오디션에서 튀려면 어떻게 해요?”에 대해 난 이렇게 말한다. “Truly be yourself. That is more than enough(온전히 당신 자신이 되세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공연 후, 성공리에 끝난 한 시즌을 마감하며, © Florian Schmitt

“함께 춤추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춤춰라. 바로 그곳이 당신의 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시작한다면 이미 절반이나 해낸 것과 같다.”

<KREATUR>의 공연 장면 - Sasha Waltz & Guests의 2017년 신작, © Sebastian Bolesch
황환희_무용수, 안무가, 댄스 티쳐 무용수, 안무가, 댄스 티쳐로 베를린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예술가이다. Waltz & Guests 무용단 정단원 무용수로 2012년부터 일해 오고 있으며, 개인 작업으로 안무 활동과 전문 무용수를 위한 워크숍 진행을 함께 해 오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예술사 및 전문사를 수료 했으며 LDP 무용단 활동과 티칭 및 안무 작업을 했다. 대표 안무 작업으로는 울산시립무용단 <태화강 이야기>, 서울시립극단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개인 작업으로 <listen to me>, <Habituate>, <gefallt mir>, <how l felt>, 다큐멘터리 필름 <sehnsuch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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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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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개2018-05-23

    정말 좋은 기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