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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4.11 조회 6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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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창작, 같이-안무하기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글, 정리_조형빈(웹진 《춤:in》 편집부)

일시 : 2018년 4월 2일 월요일 오후 2시 - 4시

장소 : 서울무용센터

참석 : 조형빈(웹진 《춤:in》 편집부), 권혁(시나브로가슴에 안무가), 안지형(시나브로가슴에 안무가), 이재영(시나브로가슴에 안무가)

예술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창작의 과정은 고되고 험난한 투쟁의 과정과도 같다.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며, 때로는 자신을 부정하고 때로는 자신을 뛰어넘어야하는 압박에 시달리는 것은 어쩌면 창작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 고된 과정에서 ‘협업’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한 사람의 한 사람에 의한 창작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한 여러 사람의 창작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 세 명의 안무가가 ‘공동창작’의 과정을 거쳐 만든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 온 단체가 있다. 단체 ‘시나브로 가슴에’는 모든 작업들을 안무가 3인이 서로 협업하여 진행하는 독특한 창작의 과정을 선보이는 곳이다. 단순히 안무가 - 안무가, 혹은 안무가 - 무용수의 관계를 떠나 멤버 7명 전원이 창작과정에 함께 참여한다는 ‘시나브로 가슴에’는 같이-안무하기(co-choreograph)를 궁리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이 독특한 여정을 함께 하고 있는 세 명의 안무가를 만나보았다.

왼쪽부터 안지형, 권혁, 이재영, 조형빈 ⓒ양동민

협업을 위한 발판들

조형빈: 오늘은, 함께 작업하고 안무하는 과정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흥미로운 지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나브로 가슴에’는 안무자가 세 명이라, 과연 어떻게 세 명이 같이 안무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들으실 것 같은데요. 먼저 세 분이 어떻게 처음 만나고 함께 활동을 시작했는지부터 짚어보고 싶어요.
이재영: 안지형 안무가는 학교에서 처음 만났어요. 저는 편입생이었고 지형이는 신입생으로 입학을 해서 춤을 같이 배웠는데, 그때부터 계속 같이 춤춰왔어요. 정말 오래 호흡을 같이 맞춰왔고, 함께 살았던 적도 있었죠. 그때는 아무래도 어렸을 때였고, 활동을 한다기보다 같이 배우는 단계에서 오래 같이 했었어요. 권혁 안무가 같은 경우는 나중에 저희가 한참 활동을 할 때 학교로 편입으로 오게 되어서 알게 되었고요. 권혁 안무가는 그 전에 스트릿댄스 분야에서 오랫동안 이미 춤을 춰 왔기 때문에 무대 경험이 많은 상태였어요. 그러던 중에 저희가 학교를 졸업하면서, 몇 명이 주말마다 연습하는 모임을 가졌거든요. 즉흥이나 컨택, 무브먼트에 대한 연습들이 실질적으로 무대를 위해 필요한데, 마땅히 배울 곳이 없어서 우리끼리 리서치를 해보자며 동아리처럼 시작했던 모임이었어요. 그런 스터디 그룹같은 형태로 5년 정도 계속 해오면서 각자 개인 활동을 했는데, 2013년도에 저와 권혁 안무가가 처음으로 단체를 만들게 되었죠. 그런데 권혁 안무가가 또 1년 만에 군대를 가게 되면서 그동안에 같이 활동할 다른 사람들을 계속 구해야 했고, 2년 후 제대를 하는 타이밍에 안지형 안무가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같이 하고 싶다고. 그렇게 같이 뜻을 합쳐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형빈: 어떤 점에서 세 분이 서로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안지형: 저는 당시에 혼자 작업을 진행하면서 외롭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그리웠거든요.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이재영 안무가, 권혁 안무가와 함께 춤췄을 때가 굉장히 좋았었어요. 그래서 ‘시나브로 가슴에’라는 단체를 한다고 했을 때 그 안에 들어가서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당시에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심리적으로도 힘든 상태라 많이 망설였어요. 이미 이름을 걸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단체인데 제가 들어가서 누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조심스럽게 전화했는데 이재영 안무가가 흔쾌히 같이 하자고 이야기 해줬던 기억이 나요. 이들과 같이 춤추면 물 흘러가듯이 재미있고 좋았어요. 춤출 때 서로를 배려하는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이재영: 워낙 셋이 친했었고, 선후배 관계이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전에 이미 안지형 안무가와도 공연을 했고 권혁 안무가와도 공연을 했었지만, 프로젝트 작품의 게스트로 도와달라는 정도였지 같이 작업을 하는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다가 그때 세 명의 의견이 모아져서 “우리 본격적으로 진짜 단체를 만들어보자.”고, 우리 힘으로 단체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조형빈: 어떤 부분에서 상대방과 합이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이 사람과 같이 ‘작업’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재영: 굉장히 많이 듣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저희는 세 명이서 공동 작업을 계속 하잖아요. 다른 분들도 많이 물어봐요. 왜냐하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같이 작업을 하게 되면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어떻게 지속적으로 같이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거든요. 저희는 친하고 안 친하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해서 알았던 시간이 길어요. 그런 전제가 있는 거죠. 같이 함께 한 시간들이 바탕이 되어서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이 길다보니까, 그 일상에서의 삶까지도 오랜 시간 공유를 해왔던 거죠. 그러다보니 서로가 각자 어떻게 삶을 꾸리는지를 굉장히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작업을 할 때도 특별히 ‘협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진 않습니다. 권혁 안무가가 작업을 할 때는 권혁의 이름으로 작품이 올라가지만, 사실 오롯이 권혁 본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이름으로 올라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누가 안무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그런 관계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이재영 안무가 ⓒ양동민
안지형: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사실 충돌이나 마찰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어요. 내가 작업을 하려면 이 사람들이랑 같이 해야겠다, 이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형, 나 이 작업을 할 거야.” 이렇게 목적성을 가지고 만난 것이 아니라, 정말 같이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서 만났더니 그 작업의 시간들 안에서 방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거라고 봐요.
조형빈: 신기한 것이, 오래 알고 지내온 사이라고 하더라도 사실 합이 잘 맞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같이 살거나 오래 함께 지냈더라도 이 사람이 작업하는 것과 내가 작업하는 것이 전혀 다른 방향일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맞았다는 것이 독특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이재영: 저도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가치관이 계속 변하기 마련인데, 저희는 셋이 만났을 때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때였던 것 같아요. 저희가 같이 작업을 하면서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요. 서로에 대해서 존중하자는 것.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그 생각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방법으로 표현을 해보고, 또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표현 방법으로 표현을 해보고. 이런 방식들을 계속 시도할 때, “그건 아니야”라고 하기보다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반응하려고 하거든요.

공동창작의 과정들

조형빈: 작업과 조금 연관지어서 이야기해볼까요? 합을 맞추고 실제로 작업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이 되나요?
이재영: 안지형 안무가의 최근작 <신체, 파동, 소리>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중심이 되는 건 해당 안무의 안무가입니다. 그 사람의 머릿속, 생각에서부터 작품이 시작되니까요. 그렇게 안무자의 머리에서 아이디어가 시작되면, 권혁 안무가와 저를 포함한 모든 멤버가 그것을 다 같이 공유하는 시간을 가져요. 저나 권혁 안무가같이 경험이 조금 더 있는 사람이 조금 많이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 전체적으로 의견들을 다 같이 제시하죠. 그 시간을 굉장히 많이 가져요. 그랬을 때 안무자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표현을 다듬을 수 있고, 모두의 의견이 표현에 같이 녹아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저희의 작업이 콜라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저희가 다 같이 만들었다고 생각하죠. 작업 방식의 일종인 것 같아요.
안지형: 이런 것도 있어요. 누가 주제를 가지고 나오면, 이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제일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를 다 같이 고민해요. 그래서 그 방향성을 찾았을 때 안무가 셋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들까지 그 방향성을 이해하고 플레이했을 때 그 방향성이 확고하게 작품으로 표현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방향성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누가 맞고 틀리는지, 자존심 싸움 같은 게 없어요. 가장 좋은 방향성을 찾는 것이 모두의 목표이기 때문에.

안지형 안무가 ⓒ양동민
이재영: 만약 작업에 특정한 안무가가 존재하고 나머지 참여자들이 서포팅을 한다는 개념이라면, 그건 사실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희같은 경우는 서포팅의 개념이 아니라 각자가 이 작품, 작업에 대해서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형빈: ‘시나브로 가슴에’를 일종의 공동체로 본다면, 작업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멋진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효과적인 단계를 거쳐 작업을 하고 계시지만, 사실 개개인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잖아요. 혹시 작업을 하면서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달라서 불편했던 경험은 없으셨나요? 나는 이 방향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다른 방향이 더 좋다고 조언해 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권혁: 물론 그런 지점들이 있죠. 각자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건 그 중에 최선을 찾는 것입니다. 저희가 평소에 많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모든 작업에 있어서 확신을 갖지 말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의식이 흘러가듯 이야기를 나누는 게, 최선을 찾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불편하다기 보다는 조금 놀라울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들에 대해서 놀라고 동의하게 되는 경험들이죠.
이재영: 사람이 확신을 가지게 되면 굉장히 단단해져요. 단단하지만, 반대로 너무 단단해서 부러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확신이라는 것이 어떤 때에는 위험하게 작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어떤 창작을 할 때, 확신을 갖는 순간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확신을 가지지 말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조금 더 열어두고 다른 시선들을 수용하면, 내가 그것을 더 먼 발치에서 볼 수 있게 돼요. 안무라는 것은 넓은 시야로 보고 작업을 해야 더 수월해지거든요. 그러다 보면 상대방의 의견이 불편한 것보다 수긍할 때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권혁: 질문에 대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불편한 지점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며칠에 걸려서 생각한 것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다른 의견들이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내 생각이 흔들리게 되는 상황이 좀 불편한데, 이건 사람들의 소리가 내 의견과 달라서 불편한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나는 안무자로서 선택을 해야 하니까 거기에서 오는 불편함, 부담감 같은 것들이죠.
안지형: 작품을 끌고 나가야 하는 건 안무자잖아요. 그 장면을 내가 책임지고 어떻게든 끌고 나가야 하는데, 제가 제대로 이끌지 못했을 때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부족함이나 불편함 같은 것들이 그런 감정인 것 같아요. 그런데 또 그런 상황이 오면 옆에서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아요. 계속 놀리거든요. (웃음)
권혁: 안무자는 책임을 지고 선택하는 사람이고, 주위에서 의견을 제시해 주니까 오히려 의외의 부분이 힘들기도 해요. 이게 의견을 던져주는 게 아니라 차라리 교육이나 강요가 되면 “아 그래 저게 맞나봐.” 하고 억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런 것도 있는데, 생각해 봐.” 하면서 던져주면 고민에 빠지는 거죠.

권혁 안무가 ⓒ양동민
조형빈: 이런 식의 공동 작업의 방식은 당연히 안무가 1인이 혼자 작업할 때와는 다를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이 다르고, 또 각각 작업방식의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안지형: 전 혼자 작업할 때는 제 작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많이 힘들었어요. 시야가 닫혀있는 느낌이었죠. 이런 저런 방향성에 대해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동료가 없는 것이니까. 섭외한 무용수들을 데리고 책임을 지고 안무를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 시선을 확장하는 데에 한계를 느꼈어요. 작품이 자꾸 내 안으로만 들어간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모든 게 다 열려버린 상태에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게 ‘시나브로 가슴에’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바뀐 점인 것 같아요. 시야가 열리니까 이야기들이 정리되고, 춤으로나 마인드 측면에서나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조형빈: 안무라는 것이 사실 완벽히 정해진, 짜여진 틀이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안무하는 법을 가르치거나 배우고, 공유하는 것도 정말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 분이 가지고 있는 안무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요.
이재영: 우선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여기에 이렇게 손목시계가 있는데, 내가 태어나서 손목시계를 처음 보면 이걸 손목에 차는 것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이걸 계속 열심히 보다보면 시계가 돌아가고 있고, 시계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여러 가지 것들을 시도해보게 되겠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걸 손목에 찰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안무도, 계속 하다보면 본인의 안무법이 어느 정도 확립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그게 내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이제 그걸 넘어서기 어려운 상황에 다시 부딪히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이제 손목시계를 손목에 차는 법을 알지만, 그러면 이제는 이 손목시계를 계속 손목에 차기만 하겠죠. 안무라는 것, 창작이라는 것은 사실 새로운 것들을 계속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잖아요. 그러면 시계를 계속 손목에 차기만 하는 시점에서 끝이라고 봐요. 창작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해요. 저도 개인적으로 작업을 했을 때는 잘 짜여진 틀이 있었어요. 프레임을 만들고 나니까 그 프레임 안에서 작업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이렇게 같이 작업을 계속 하면서 느끼는 건, 우리는 더 이상 작업에 틀이 없구나, 하는 거였어요. 제가 지금 가장 흥미로워하는 부분이에요. 의도적으로 없애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우리끼리 계속 ‘프레임을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을 배제하고 작업을 하자는 거죠.
조형빈: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다보면 상대방의 작업 틀이 보이기도 할 것 같아요.
이재영: 명확하게 보이죠. (웃음) 그런데 최근 각자의 작업들을 보면, 이건 본인들도 알고 있어요. 이 작업은 내 작업이 아니야, 이런 생각들을 해요. 왜냐하면 같이 만들고 있는 거니까. 그러다보니 기본적으로 프레임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어요.
안지형: 안무에는 감각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감각적인 부분으로 나아가기 전에, 작품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이 작품에 대해 공유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다면 그 작품은 사실상 방향성을 잃어버린 거죠. 플레이어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관객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거든요. 안무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충분한 이해 없이 공간에 가서 춤만 추고 나오면 돼, 라고 생각하면 그건 제가 생각하는 안무 작업은 아닌 것 같아요. 저희는 작품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아이디어를 텍스트로 정리해서 다 같이 공유해요. 그 텍스트 작업에서부터 안무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권혁: 저도 비슷한 맥락인데, 춤에는 마음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작품이나 나쁜 작품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사람들의 호불호라는 게 있잖아요.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싫어하는 관객이 있을 것이고, 반대의 경우도 분명히 있을 거에요. 그래서 그 작품 안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마음을 다 해서 하는 것이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안지형: 그런 마음이 같이 모였을 때 최고의 작업 환경이 되는 것 같아요. 저희가 가장 원하는 환경이기도 하고. 그런 환경에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저희는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중이에요.
이재영: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죠. 작품이 굉장히 잘 나와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쳐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안의 플레이어들이 희생당한 경우도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이 플레이어들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그리고 이 작품은 좋은 작품인 것일까? 예술을 위한 예술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예술일까. 사회적으로도 그런 일들이 많죠. 좋은 결과를 위해 행해지는 많은 나쁜 행동들. 만약 수많은 좋은 행동들에 의해 나쁜 결과가 나왔다면, 과정에서 일어난 좋은 일들이 언젠가 나중에 힘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많은 경우에 결과는 예측할 수 없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의 모토이기도 하고요.

왼쪽부터 안지형, 이재영, 조형빈, 권혁 ⓒ양동민
조형빈: 작업에서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 볼게요. 이렇게 같이 작업하시면서, 이건 원래 나한테 없던 것인데 함께 작업하면서 생겼다, 라고 생각하시는 부분들이 있나요?
안지형: 저는 딱 한 가지 있어요. 자존감. 여기서 이 시간들을 함께 하기 전에는 스스로 자존감이 진짜 바닥이었거든요. 제가 춤을 추고 움직였을 때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이 보기 싫었어요. 그런데 ‘시나브로 가슴에’에서 같이 작업하면서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작품과 나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전화 한 통화로 시작해서 지금 여기까지 극복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뭔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저한테는 지금 가장 큰 부분이에요.
이재영: 저는 일단 아침형 인간이 됐어요. (웃음) 저한테는 영향을 주고받는 게 굉장히 큰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삶이 작업과 비슷하게 되는데, 그래서 삶의 방식을 함께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게 무척 중요해졌어요. 아까도 이야기 나온 것인데, 내가 혼자서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치지만 함께 이야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 계속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게 곧 작업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권혁: 저도 같은 맥락인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춤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성향이 좀 극단적이어서 텐션이 높을 때는 끝도 없이 높다가 떨어질 때는 끝도 없이 떨어지는데, 옆에서 영향을 받으니까 그런 것들이 완충이 돼요. 그리고 그게 춤에도 나타나죠. 움직임도 많이 달라졌고, 춤을 추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어요. 삶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확실히 춤도 변하더라고요.
이재영: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있어요. 권혁 안무가는 원래 진짜 움직이고 싶어하고, 피지컬적인 요소들을 사용하는 걸 좋아해요. 움직임, 에너지의 발산, 그런 것들요. 그런데 막상 작품으로 풀어내는 것들은 또 정반대의 것들이거든요. 그 사이에 자기 자신이 있어요. 뛰어가고 싶은 몸이 있는데, 또 가만히 있고 싶어하는 머리가 있는 거죠. 그 아이러니함이 굉장한 에너지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게 또 안무가 본인의 삶이기도 하거든요.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그런 것들이 보여요. 사람이 집중을 하다보면 그 안에만 있게 되는데, 저희는 또 밖에서 보고 원래 주제로 돌려놓고. 서로에게 계속 영향을 주는 드라마터그가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내가 잘하는, 내가 갖고 있던 프레임들이 무너지고 나도 몰랐던 새로운 프레임이 생겨나요.
권혁: 그러니까 확신을 할 수가 없어요. 작업에 있어서 언제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같이-안무하기와 삶의 방식

조형빈: 자연스럽게 최근 작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오게 된 것 같아요. 권혁 안무가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떤가요? 안무가 본인이 하고 싶었던 부분들을 다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권혁: 다는 아니지만, ‘다 했다’기 보다는 ‘뭘 했나’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그림에서 훨씬 발전된 형태로 공연이 완성된 것 같아요. 제가 최초에 구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동의할 수 있을 만큼의 작품이 되었어요.
이재영: 저희의 방식인 것 같아요. 만족감이 높다고 하면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예술가는 목말라야 돼, 완벽함을 추구해야 돼’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요. 오히려 매번 작품을 만들 때마다 만족하고 있어요. 이번 공연도 플레이어로서 굉장히 만족해요. 하면서도 재미있고 즐겁고. 아마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모두가 다 같이 했다고 생각하죠.
조형빈: 비슷한 맥락에서, 처음에 권혁 안무가가 생각했던 아이디어에서 작품이 많이 변화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가장 크게 변화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꼽아본다면?
권혁: 처음에는 무용수 개개인의 모습들이 많이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용수 하나하나가 모여 여섯 명이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을 생각하면서 시작했죠. 그런데 저희가 리서치 기간을 갖고 계속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방향성이 바뀌었어요. 개개인의 캐릭터에 집중하지 않고 큰 그림을 그리는 이미지 작업으로 가는 것으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무대 위에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작품이 조금 더 쉬워졌다고 생각해요. 처음의 아이디어를 따랐다면 관객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는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관객에게 여지를 더 줄 수 있게 되었어요. 비우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죠.
이재영: 이 과정이 세 명이 같이 동의하고 온 것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요. 무대에서 캐릭터들을 드러내다보면 전달 자체가 너무 명확해지는 거죠. 그러면 무대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바뀐 작품을 보면, 확신이 아니라 생각을 제시하고 있죠. 이 정도로 이야기를 풀면 더 다양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작품이 훨씬 유연해졌다고 봐요.
조형빈: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가실 것 같아요. 사실 창작자들이 혼자 작업을 하면 힘든 부분들이 많은데,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렇게 좋은 파트너들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죠. 저는 이런 방식의 창작을 권유하고 싶은데, 이건 또 권유해준다고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재영: 저도 많은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우선 내가 이 안에서 너무 좋으니까. 그런데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찾아 헤맨다고 그 사람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일부러 찾으려고 하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이 주변에 반드시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자기 자신이 모를 뿐인 거죠. 저도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으니까. 그래서 이런 부분은 결국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여러 사람들과 경험을 하고, 자연스럽게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서로를 알게 되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목적성 없이 만나서 같이 지내다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상대방과 만날 수 있거든요.

왼쪽부터 안지형, 이재영, 권혁 ⓒ양동민
조형빈: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릴까 합니다. 지금의 작업 방식이 잘 정착된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나아가고 확장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이재영: 그런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저희는 이걸 일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특별한 목표점을 설정해놓지 않아요. 그냥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삶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그걸 작품과 연결시키고, 그 시점에 있는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권혁: 그래서 이걸 무용단이나, 단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저희는 그냥 ‘시나브로 가슴에’라고 생각해요. 그런 단체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죠.
이재영: 저희가 예전에 ‘컴퍼니’라는 단어의 어원을 알고 감동받은 적이 있었어요. company는 ‘함께(com) 밥(pan)을 먹는다’는 의미더라고요. 우리가 생각하는 컴퍼니는 사실 되게 밀접한 사이를 말하는 거였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실질적으로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매일 보고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함께하는 삶을 무대로 올릴 수 있고.
안지형: 행복하게 같이, 사람이 중요한 환경에서 함께 뭉쳐서 저희끼리 잘 살 수 있으면 그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조형빈: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시나브로 가슴에’의 모습에서 공동체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작업적으로도 정말 많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쩌면 여러분들은 너무 익숙해서 의식하지 못하시는 부분들도 있는 것 같지만, 작업적으로나 삶으로서나 추천하고 싶은 ‘공동’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런 삶의 방식이, 좋은 작업으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권혁
한성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하고 ‘시나브로 가슴에’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2014 동아무용콩쿨 현대무용부문 금상 수상 등의 콩쿨에서 입상하여 댄서로 두각을 나타냈고, 군 제대 후 댄서와 안무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Modafe Spark Place를 통해 안무가로 데뷔하였고 이후 3편의 시리즈 작업으로 안무가로서도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표 출연작으로는 <이퀼리브리엄> <휴식> <해탈>, 안무작으로는 <empty> <질주> <cittaslow>가 있다.

안지형
이재영, 권혁과 함께 ‘시나브로 가슴에’ 안무가로 활동 중이며 전통 소재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창작자로서 사람과 삶의 휴머니즘을 통해 관객과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한다.

이재영
2006년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서울댄스컬렉션에서 <바벨>로 최우수 안무상, 같은 해 한국현대무용협회 신인 안무가상을 수상했다. 2014년 서울아트마켓 팸스초이스에 <휴식>이 선정되며 국제무대로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하여 해외의 주요 축제 및 극장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으며, 2015년 스페인 마스단사 안무대회에 참가해 작품 <휴식>으로 Best Performer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형빈
대학에서 사회학과 문화학을 전공하고, 무용에 관한 문화연구를 해오고 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 글을 쓰며 무용월간지 등에서 기자와 칼럼니스트로 글을 실었다. 현재는 웹진 <춤:in>의 편집부로, 기획과 편집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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