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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4.10 조회 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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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문학] 야스나리에게 /춤/은 영감의 시작이었다

허연_시인, 매일경제신문 기자

일러스트 엄유정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춤’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야스나리 스스로가 무용평론가였음은 물론이고 그를 대표하는 많은 작품들 속에 ‘춤’이라는 소재가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1968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 역시 무용평론가다. 그 유명한 소설의 첫 구절을 생각해보자.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이 장면을 보면 어떤 춤의 무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야기라기보다는 춤의 무대를 설명하는 듯한 미학이 묻어나지 않는가. 저자 자신이 복잡한 도쿄 어디쯤에서 눈 내린 시골마을로 가볍게 점프해서 내려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야스나리에게 ‘춤’은 미학의 정수를 만나는 하나의 창(窓)이자 촉수이다. 그는 "춤은 보이는 음악이고, 움직이는 미술이며, 육체로 쓰는 시이자, 연극의 정화다"고 말했을 정도로 춤 지상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작 중 '무희(舞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소설이 두 편이 있다. 한 편은 있는 그대로 <무희(舞姬)>이고 다른 한 편은 <이즈의 무희>이다. 그가 소설에서 ‘춤’을 어떻게 형상화 했는지 들여다보자.

<무희> 일본어판 책 표지

<무희>는 야스나리 탐미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 무희의 인생을 바라보는 건조한 시선이 압권인 이 소설은 절대허무에 매달린 야스나리의 문학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무희>는 야스나리 작품 중 가장 본격적인 무용소설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여인이 모두 춤 인생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 전체의 바탕화면이 무용인 셈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지 않았으므로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주인공 나미코는 젊은 시절 프리마돈나를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20년 째 이어가고 있는 여인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다케하라가 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결단을 내리지는 못 한다. 나미코의 딸인 시나코는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 위해 유명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자리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그의 꿈도 전쟁으로 인해 유학이 좌절되면서 무너져 내리고 만다. 시나코는 소녀시절 자신에게 무용을 가르쳤던 가야마 선생을 짝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나미코의 제자이자 시나코의 친구는 도모코는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나미코의 일을 도우며 무용을 배우지만, 재능만큼은 천재적이다. 하지만 가정이 있는 남자와 불륜에 빠지게 되면서 무용을 포기하게 되고, 결국 아사쿠사의 스트리퍼가 된다. 소설은 야스나리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어느 주인공도 승자로 만들지 않은 채 끝을 맺는다. 그들은 운명에 전투적으로 대항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운명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이 저항과 순응의 경계선에 세 명의 무희가 존재한다.
"인간이란 저마다 슬픔을 짊어지고 사니까요. 그이도 그래요. 슬픔이 너무 크면 그 밖의 다른 일들은 알고도 이해하지 못 하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들도 생기고요."
1950년대 무력함에 빠진 일본사회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굴절된 삶을 사는 세 명의 무희를 그린 이 소설에서 ‘춤’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다. 우리는 그의 수려한 문장에서 '허무의 춤'을 만난다. 그것이 승자도 패자도, 옳고 그른 것도 없는 야스나리가 생각하는 ‘춤’의 미학이다.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이즈의 무희> 포스터

"아아. 무희는 아직 술자리에 앉아 북을 치고 있군. 북이 그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빗소리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중략) 덧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또 탕에 들어갔다. 탕을 거칠게 휘저었다. 비가 그친 뒤 달이 나왔다. 비에 씻긴 가을밤이 청명하게 밝아졌다. 맨발로 욕조를 빠져나왔지만 뾰족한 수도 없었다. 2시가 넘었다."
<이즈의 무희>는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 의미를 더하는 상징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나'와 유랑가무단 5명이다. 가무단원 5명은 리더인 어머니와 큰 딸인 치요코, 치요코의 남편인 에이키치, 작은 딸인 14살짜리 카오루, 그리고 구성원 중 유일하게 가족관계가 아닌 17살 유리코다. 소설은 대학 신입생으로 이즈반도 여행을 온 주인공이 아마기 고개에서 유랑가무단을 우연히 만나 동행하는 이야기다.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나와 어린 무희 카오루의 관계를 묘사한 부분이다. 두 주인공이 미성숙한 호감과 연정 같은 걸 느껴가는 과정이 소설의 중심 이미지를 구성한다. 주인공 ‘나’는 아마기의 찻집에서 카오루를 처음 봤을 때 그녀에 대해 불순한 마음을 갖는다. 그녀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최하층 천민인 타비게닌에 속한 여인을 윤락 여성처럼 대하는 당시 일본 사회의 그릇된 인식도 한몫했다. 불순한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묘한 연정으로 변해간다. 가무단이 공연하는 소리를 자신의 숙소에서 들으며 나는 카오루가 더럽혀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얼마 후 온천욕을 하던 카오루가 자신을 발견하고 알몸으로 뛰어나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순수한 아이였음을 깨닫는다. 카오루에 대한 생각이 성적인 욕망에서 순수한 감정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소설에서 ‘춤’은 주인공에게 정화의 장치로 작용한다. 순수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설렘으로 다가오는 카오루의 춤을 보면서 '나'는 세속의 고민과 불안에서 벗어나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가지고 있었던 뒤틀린 고아의식과 우울함이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치유의 느낌은 카오루가 타인에게 자신을 평하는 말을 엿듣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은 좋아."
주인공은 어린 무희 카오루가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하는 말을 들으며 정화의 의식을 완성한다. 소설에서 어린 무희는 여신같은 존재다. 무희 카오루는 자신의 서툰 애정 표현으로 한 남자의 영혼을 구제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화된 주인공은 배를 타고 도쿄로 돌아간다. 그 마지막 문장을 보자.
"배에는 생선과 바다의 냄새가 물씬거렸다. 어둠 속에서 소년의 체온이 느껴지며 나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머리가 온통 맑은 물로 변했고, 물이 주르르 흐른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듯 달콤한 쾌감이었다."
정화된 자가 흘리는 눈물이다. 야스나리는 왜 춤을 통해 미학의 궁극을 보려고 했을까. 몇 가지 정황으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등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아 신감각파를 만든 야스나리는 예술지상주의자였다. 절대미를 찾아 헤매는 그에게 전쟁이나 이념, 국가는 어울리기 힘든 세계였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야스나리는 글로 써진 문학이나, 화폭에 표현된 그림, 혹은 영화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이들 예술은 필연적으로 어떤 주제와 방향을 가지게 되므로. 그리고 결국 왜곡되므로. 그래서 야스나리는 목적성이 가장 덜하고 몸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춤’에 몰두하지 않았을까 싶다.

허연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원하는 천사> <오십미터>?가 있다.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 한국출판학술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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