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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4.10 조회 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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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공공성

심보선_시인


무용의 지금

간혹 무용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무용 공연, 즉 개인 안무가의 작품 공연이라는 접근법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력했고, 어떤 이들은 거리로 나갔고, 어떤 이들은 시민들과 함께 춤을 췄다. 이들의 고민은 현대 무용의 미적 혁신과 대중화로 모아졌다. 이 두 고민은 어찌 보면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무용인으로서는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미적 혁신은 모든 예술에 해당하는 과업이다. 그런데 대중화는 무용계에 너무나 절박한 과업이다

서울시는 2012년과 2014년 <통계로 본 서울시민 여가문화생활>이라는 제목의 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조사의 하위 항목인 ‘장르별 관람률’에 따르면, ‘음악 및 무용 발표회 관람’은 2012년 전체 8개 분야에서 4.9%로 4.2%인 ‘전통예술공연 관람’ 다음으로 가장 낮았고, 2014년에는 오히려 4.8%로 관람률이 떨어지면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음악과 무용을 분리하여 무용만을 따지면 상황은 최악이다. 2016년 통계청의 전국 ‘문화관람횟수’ 통계에 따르면 1년간 무용을 관람한 평균 횟수는 0.04회였고 아예 관람을 하지 않은 비율은 98.7%였다.

무용 공연을 통한 수입은 늘 적자다. 무용인들은 공적 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가까스로 지원금을 받아도 수입의 일부에 불과하다. 주요 수입은 예술 활동과 직접 관계없는 활동에서 나온다. 따라서 무용인들은 공적 지원금을 받을 때 늘 요구되는 ‘무용의 공공성’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무용을 시민들의 삶과 연결시키고 싶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세워야 하는 명분으로 느끼는 것이다. 상황이 여유가 있으면 전자에, 상황이 절박하면 후자에 방점이 찍힐 것이다.

무용의 공공성이란 그 자체 고유한 주제로서 탐구되지 못한다. 무용의 공공성은 여유 있는 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혹은 절박한 자의 비빌 언덕으로 인식된다. 무용의 공공성은 무용계가 집합적 차원에서, 혹은 제도적 차원에서 학습하고 실험해온 주제가 아니다. 이는 다른 예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의 공공성은 너무나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위대한 예술은 그 자체로 공적 가치를 가진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예술가들은 그러한 당연한 인식을 (특히 기획서를 쓸 때) 말로 풀어내어 타인을 설득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논리와 어휘를 이제야 만들어가고 있다. 예술의 공공성에 관한 한 예술가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무용의 공공성과 난제

그런데 무용은 다른 장르에 비해 더 어린, 혹은 성장이 더딘 아이처럼 보인다. 무용을 대중화하는 것은 왜 어려울까? 무용의 공적 가치는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무용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왜 커 보일까? 이 질문은 겉보기보다 복잡하다. 미국의 “일반 사회 조사(General Social Survey)”에 따르면 “현대 미술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수가 “그렇다”고 답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시를 보고 “나도 이렇게 쓸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느낀다. 실제로 나는 시민들과 함께 시 창작 워크숍을 해봤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꽤나 세련된 시를 즉석에서 써보였다.

미술과 문학은 공통점을 갖는다. 미술과 문학을 구현하는 매체는 사람들에게 불편이나 불안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누구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도구를 다룰 수 있다. 특히 현대적이면 현대적일수록 기예와 기술의 비중은 낮아진다. 현대 미술과 문학은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제작할 수 있는 종류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현대 미술과 문학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미술과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여긴다. 미술과 문학의 공공성은 자유도와 참여도가 결합된 함수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용은 현대이건 전통이건 특별한 기예를 요하는 것 같다. 무용은 대충 이렇게 나뉜다. “배우지 않고도 출 수 있는 춤”, “배우면 쉽게 출 수 있는 춤”, “배우면 웬만큼 출 수 있는 춤”, “배우고 배워도 출 수 없는 춤”. 마지막 춤, 즉 “배우고 배워도 출 수 없는 춤”은 일견 ‘재즈’와 비슷해 보인다. 나는 드럼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드럼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재즈 드럼을 칠 수 있나요?”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삶을 바꿔야 합니다.” 이 말은 재즈 드럼의 기예는 시간을 할애해서 배우는 것만으로 습득할 수 없다는 말이었고 결국 재즈 드러머가 되는 것은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공공성을 회복한다는 것

그렇다면 현대 무용도 재즈 드럼과 같은 것일까?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삼아 표현하는 데도 드럼의 연주 기술을 배우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학습과 숙련이 필요할까? 현대무용을 배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무용 강사는 자신이 아는 안무를 선보이고 학생들은 그 안무를 반복하고 동작과 순서를 외워서 익숙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 안무를 보완하고 변형하고 발전시켜나가면서, 이 과정을 또 다시 반복하고 암기하면서 무용을 배운다. 이는 마치 드럼의 기본 패턴을 반복하고 외우면서, 보다 복잡한 패턴으로 나아가는 학습 과정과 유사하다. 그런데 다시 물어보자. 정말 무용을 배우는 것과 드럼을 배우는 것은 같아야 하는가? 앞서 분류한 무용의 등급과 상관없는 무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우리 몸이 갖는 한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몸 감각의 한계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몸으로 삶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몸에는 이미 공동체의 삶의 가능성과 한계가 담겨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걷고 뛰고 움직이고 멈추는 몸의 운동은 실존적 안무이자 사회적 안무의 일부이다. 무용의 공공성이란 무용을 통해 발생하는 사후적 효과가 아니다. 무용의 공공성이란 몸의 공공성이자 공공성의 몸이다. 새로운 공공성은 새롭게 배치되고 움직이는 몸들, 그 몸들의 관계와 연결에서 비롯된다. 무용의 공공성은 기존의 무용의 난이도를 조정하여 참여도와 자유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다. 무용의 공공성은 이미 우리에게 속한, 우리가 사용하는 몸의 참여도와 자유도를 높이는 것이다.

심보선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슬픔이 없는 십오초》(문학과지성사, 2008)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1) 《오늘은 잘 모르겠어》(문학과지성사, 2017)산문집《그을린 예술》(민음사, 201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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