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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3.15 조회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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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뛰어 넘는 언어...'

언어를 뛰어 넘는 언어;
SDC - MR 교환프로그램을 다녀와서
이윤정_댄스프로젝트뽑끼 대표

춤인을 통해 이미 2016년과 2017년도에 뉴욕 무브먼트 리서치를 경험하고 돌아온 안무자의 글들이 소개되었고 그 글들을 통하여 다양하고 좋은 정보들이 많이 소개된 바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나는 이번 2018년 1월 2일부터 시작하는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시차와 기타 등등의 이유로 약 일주일 정도 먼저 뉴욕에 도착하여 적응하는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뉴욕에서의 전체 일정은 아래와 같다.

Movement Research MRX(Movement Research eXchange) Artist 참여
12월 26일 ~ 1월 1일 : 뉴욕 적응
1월 2일 ~ 1월 19일 : 3주간의 멜트 인텐시브 워크숍(Melt Intensive Workshop)
1월 20일 ~ 2월 4일 : 개인 리서치, 공연 연습
2월 5일 : Work-in-Progress 공연, 저드슨 처치(Jusdson Memorial Church)

무엇을 먹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먹을 것인가?


ⓒ이윤정

이 일정 동안 가장 큰 고민은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드는 고민이었다. 타지에 나가서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은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다. 하루 이틀의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 잘 고민해야 한다. 맛있는 것만 챙겨 먹었다가는 주머니가 금세 가벼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값도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게 입에 맞는 음식을 찾게 되면 금세 너무 행복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최근 들어 이렇게 감사하며 음식을 먹은 경험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서울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지 않았나? 뉴욕에서는 메뉴를 한참 째려봐야 겨우 하나를 정하고 또 한참을 기다려야 음식이 나왔다. 음식을 재촉하거나 직원을 큰소리로 부르지도 못하고 그냥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더 맛있었던 것일까? 기다림 끝에 얻어낸 음식들이라?
음식 선정을 도와주고 물을 가져다주고 음식이 나온 후에도 어떤지 물어봐 주고 최대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게끔 만들어 주었던 음식점 직원들이 생각났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서빙하고 나의 상태를 체크하는 그들의 섬세한 움직임은 음식값과는 별개의 무엇으로 다가왔다. 익숙하지 않은 팁 문화는 그들이 주는 서비스에 어느새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돈으로 느껴졌고, 어떤 때는 더 주지 못해 미안할 때가 있었다.
음식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사람을 먼저 만나게 된다. 나는 왜 이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을까? 한국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던 음식점 직원들을 투명인간처럼 대했던 생각이 나서 부끄러웠다. 맛있는 밥을 기분 좋게 기다리는 것. 누구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 어떤 상태를 만든다는 것.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내 몸의 상태를 만든다는 것. 공연 연습을 하기 전 몸의 상태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 연습 시작 전 무용수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그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연습실의 분위기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안무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또 어떤 날은 그날의 목표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날도 많지만 그들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마치 음식점 테이블의 벨을 누른다고 음식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재촉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무엇을 먹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을 것인가가 왜 중요한지, 안무자들이 무용수들에게 ‘무엇의 결과’가 아닌 ‘어떻게’의 과정이 왜 중요한지를 워크숍 기간 동안 만난 여러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 그리고 선생님들로부터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공간을 만든다


Abron Art Center ⓒ이윤정

워크숍이 주로 이루어졌던 아브론 아트 센터(Abron Art Center) 출입문 앞에는 안내와 경비의 역할을 하는 한 분이 있었다. 그 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짧은 인사를 건네고, 출입카드를 쓰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유난히 추웠던 뉴욕에서 첫 워크숍 때 안부를 물으며 상냥하게 다가왔던 그 문지기의 미소는 참 따듯했다. 뿐만 아니라 센터 직원들과 스튜디오 앞 MR 관계자들의 환한 미소. 모두 그 공간의 주인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워크숍을 이끄는 선생님들 또한 그 시간과 공간의 가이드로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데려가 주었다. 모두가 주체적으로 그 공간에 있었고 누구 하나 가라앉는 에너지를 만들지 않았다.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의 포근한 미소처럼,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직원들은 공간의 사용자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미소로 맞아주었다.

다른 몸 다른 방식


왼쪽부터 Claire Cunningham, Jess Curtis, 이윤정 ⓒ이윤정

이번 멜트(Melt) 수업에서는 세 분의 워크숍을 선택해 참여하게 되었는데, 나는 무엇보다 그들의 워크숍 진행방식이 궁금했다. 그들은 안무자와 무용수 사이, 교사와 학생의 경계에서 어떻게 영감을 주고받으며 무엇을 만들어갈지, 참여자와 진행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즉흥적인 사건들,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어떻게 대처할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워크숍을 진행할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클레어 커닝험(Claire Cunningham)과 제스 커티스(Jess Curtis)의 워크숍은 상대의 몸을 바라보고 듣는 훈련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방법들을 경험하게 했다. 클레어와 제스는 워크숍 내내 파트너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방법, 파트너의 움직임을 다양하게 읽어내는 방법, 상대의 몸과 마음을 존중하는 방법들을 소개했다. 그들의 부드럽고 유머러스하지만 한편으로 단호하기까지 한 언어사용과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들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클레어는 목발이 있어야만 걸을 수 있는 선천적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와는 그저 조금 다른 몸일 뿐이었다. 목발을 이용한 그녀의 춤은 깊고 또 깊었다. 그녀는 움직임을 안내 할 때, ‘나는 이 동작이 이렇게 되지만 너희들의 몸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너희들의 몸은 나의 몸과 다르기 때문에’라는 당연한 이야기가 나에겐 너무나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안무자와 무용수와의 관계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몸과 다른 무용수들에게 움직임을 안내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안무자와 무용수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몸을 통해서 세상의 편견들을 바로잡고 있었다.

언어를 뛰어넘는 언어

워크숍을 경험하면서, 내가 그 그룹 안에서 어떤 상태를 유지해야 할지,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하는지, 능동적인 자세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체크해야 했다. 예전에는 워크숍 안에서 부끄러운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부끄러울 시간도 없다. 예전에 그만큼 용기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간순간의 용기와 도전은 그 순간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 도전의 시간들이 모여 의미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 낸다. 참여자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려면 진행자가 얼마나 많은 경험이 있어야 하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경험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워크숍을 통해서 진행자와 참여자, 안무자와 무용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단지 움직임의 소스를 주는 사람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무용수의 움직임을 끌어내어 주고 그 움직임을 통해서 무용수가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 또한 안무자가 할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무용수가 움직임을 통해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서 나온 움직임들이 다시 모여 하나를 이루는 것이 작업이고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과정을 잘 밟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워크숍 기간 동안에는 전 세계 각지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과 문화들이 오로지 춤 하나를 통해 서로 만난다. 이 또한 짜릿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춤이 가지고 있는 말을 뛰어 넘는 말, 이것을 함께 나눌 때 진정 통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공연준비와 다양한 공연들


에덴스 익스프레스웨이(Eden's expressway) 리허설 중 ⓒ양소영


저드슨 처치(Judson Memorial Church) 공연 중 ⓒ이윤정

3주 간의 워크숍이 끝나고 2주 동안은 공연 준비하는 시간에 집중했다. 개인 리서치와 연습과정을 거쳐 저드슨 처치(Judson Memorial Church)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저드슨 처치에서 3-4명씩 아티스트들을 지원하는 공연이 이루어진다. 아티스트들이 현재의 질문들을 완성된 공연이 아닌 15분 정도의 과정중심(Work-in-Progress) 공연으로 준비한다. 어떠한 비평도 없이 아티스트의 과정을 지켜봐 주는 의미 있는 공연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서의 공연을 통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이곳에서의 공연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예술가들을 위해서 무브먼트 리서치가 직접 저렴한 가격에 연습실을 임대하고, 예술가들에게 더 저렴한 가격에(시간당 10달러)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연습실은 에비뉴 씨(AveC studio)와 에덴스 익스프레스웨이(Eden's expressway)연습실이었는데 두 군데 모두 오랜 세월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용한 만큼 예술의 혼이 느껴지는 듯한 장소였다. 맨하튼의 소호 노른자 땅에 있는 연습실을 저렴한 가격에 대여해 주는, 예술을 사랑하는 건물주들의 시민의식들도 본받아야 할 점들이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명동 한 복판에 이런 민간연습실이 있을 수 있을까? 영국은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되면 1층에는 꼭 예술과 관련된 임대사업을 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는 언제쯤 그런 세상이 올지 궁금했다. 그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에덴스 익스프레스웨이 연습실은 5층 건물의 3층에 있는 연습실로, 벽 한 면이 커다란 창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이 있다니! 이런 공간이 연습 공간이라니. 무거웠던 몸도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예배당을 치워 그곳에서 혁신적인 춤을 공연한다니, 우리의 교회는 이런 자유분방한 춤 공연을 위해 성스러운 교회 공간을 예배가 없는 날에 내어줄 수 있을까?
뉴욕이 문화의 중심이 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국가의 예술지원금이 많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전 세계의 예술과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실마리를 이번 레지던시 기간 동안 본 것 같다. 예술 그 자체의 다양한 힘을, 가치를,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경제논리의 잣대로 재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크숍 외의 시간에는 많은 공연을 들을 볼 수 있었는데, 다양한 형식과 주제가 공존하는 공연들을 보면서 많이도 부러웠다. 아직은 다양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대무용계도 이렇게 다채로운 공연을 볼 수 있을 때가 오지 않을까? 우리들의 노력으로 다양한 춤의 형태가 공존하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전설적인 예술가 데보라 헤이(Deborah Hay)의 공연을 보고 마음이 충만해졌던 기억, 클레어 커닝험과 제스 커티스의 공연을 보고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 이시마엘 휴스톤-존스와 미구엘 구티에레즈(ISHMAEL HOUSTON-JONES & MIGUEL GUTIERREZ)의 공연을 보고 완전히 실망했던 기억, 트럼프의 정책으로 인해 미트칼 알즈헤어(Mithkal Alzghair)의 트리오공연이 듀엣으로 변경되는 순간을 목격한 것(러시아 무용수가 입국을 거부당했다)등 다양한 공연들을 볼 수 있었고, 레지던시 기간인 1월에 아메리칸 리얼니스 페스티벌(American Realness Festival), 코일 페스티벌(COIL Festival), APAP/NYC 2018 행사기간까지 겹쳐 다양한 공연들을 접할 수 있었다.


데보라 헤이의 공연에서 커튼콜 중인 무용수들 ⓒ이윤정


클레어 커닝험과 제스 커티스의 <더 웨이 유 룩 (엣 미) 투나잇 THE WAY YOU LOOK (AT ME) TONIGHT> 공연 전 ⓒ이윤정


Abron Art Center ⓒ이윤정
나에게 레지던시란


Judson Memorial Church 앞 ⓒ이윤정


공연을 막 마치고 ⓒ양소영

나에게 레지던시란 아르바이트로부터 해방되어 모든 감각을 작업의 영감의 연장으로 귀 기울여도 되는 시간, 낯선 곳에서 잠시 머물며 새로운 공간과 문화 속에서 타인들을 만나고 나를 새롭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 낯선 곳에서 나의 감각에 민감해지고 그것을 통해 사고하고 영감을 얻는 귀한 시간인 것 같다. 레지던시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나누어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준 동료 아티스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특히 이양희 안무가, 양소영 작가와 무브먼트 리서치 예술가들의 섬세한 서포트에 감사드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준 서울무용센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모두들 서울무용센터에서 있을(5월 중순예정) 워크숍에서 만나요~! 뉴욕의 경험들 많이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이윤정_댄스프로젝트뽑끼 대표 댄스프로젝트 뽑끼 대표. 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최근에는 예술교육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11월 X 이윤정 춤 이어추기> 독립예술가 품앗이 프로젝트를 6년째 이어오고 있으며 안무작으로는 <1과 4>(2017), <75분의 1초>(2015-2016), <사소한 공간>(2013-2014), <사소한 말>(2014), <그늘에서 추다>(2013), <Go! Back Jump>(2012) 등이 있다. 건축가와 미디어 아티스트와의 다원 작업 <네방을 보여줘, 방춤>(2014), 전시 <메가스터디>(2015)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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