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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3.15 조회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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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질문을 던지는 ‘기술’, 프로젝트 <반(Bahn)>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는 ‘기술’, 프로젝트 <반(Bahn)>
글_조형빈(웹진 《춤:in》 편집부)



프로젝트 <반> 공연 사진 ⓒ낯선자들
기술의 변화와 예술

최근 기술을 발달은 눈부실 정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아주 가깝게는 휴대폰으로부터 시작해서, 지난 세대가 상상 속에서만 그렸던 말을 알아듣는 가전제품까지 기술은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을 바꾼 기술들은 예술 작품 안으로 들어와 기존의 예술이 지니고 있던 예술의 매체적 특성 자체를 뒤흔들고 그것을 새롭게 정의내리게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시청에서 서울문화재단의 주관으로 열린 제 9회 서울시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에서는, ‘기술 혁신 시대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논의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의 기술들 속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그리고 예술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이 심포지엄을 통해 이야기 나눈 바 있다.
그렇다면 공연 작품의 측면에서, 기술은 퍼포먼스의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한 논의가 있기 훨씬 전부터, 기술(도구)의 발전은 새로운 예술들을 끊임없이 탄생시켜 왔다.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대부분의 경우 그 혁신성으로 인해 기존의 예술들이 부침을 겪을 것이라(혹은 몰락할 것이라) 예견되었지만, 오히려 그런 기술들은 기존의 예술을 몰락시키기보다 아예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경우가 많았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기술은 존재하는 예술 그 자체를 흔들기보다, 거기에 새로운 예술을 더해 다른 것을 만들어나간다는 뜻이다. 다양한 공연예술 작품들은 이미 그 안에 기술적인 부분들이 상당히 들어가 있지만, 그 외연을 무대 밖으로 확장시키는 유연함을 생각해볼 때 우리가 퍼포먼스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은 어쩌면 무궁무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술들은 기술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공연의 형태를 해체하고 바꿔치기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프로젝트 <반>에서는 이런 예술의 매체성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만한 기술들이 작품으로 틈입하는, 바로 그 찰나를 관찰할 수 있었다.
2월 9일과 10일 양일간 진행된 프로젝트 <반>은 최근 우리 주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된 여러 기술들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공연이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하 앱)을 이용해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을 관객이 돌아다니면서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하는, 특별한 형태를 띤 공연이었다. 이 공연의 무대는 극장이나 고정된 장소가 아닌 세운상가 전체였기 때문에, 앱의 가이드를 따라 관객이 직접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보통 상호작용의 개념이 들어간 예술 작품의 경우 관객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 그 구조가 단순하기 마련인데, 프로젝트 <반>은 세운상가 일대를 모두 무대로 삼고 거기에 다양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관객이 작품을 보다 깊이있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프로젝트 <반> 공연 사진 ⓒ낯선자들
세운상가를 탐험하는 프로젝트 <반>

공연은 스피커와 거울이 달린 헬멧을 쓰는 것으로 시작된다. 얼마 전 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리모델링 된 세운상가 꼭대기 층 ‘서울옥상’에서 헬멧을 나누어받고, 관객이 각자의 스마트폰을 켜서 거울이 붙어있는 헬멧과 연결하면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진행된다. 헬멧은 시야를 가려 관객이 때때로 현실과 차단되어 스토리 안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고, 동시에 헬멧 뒤에 달린 스피커가 일정 장소에 도착하면 음악을 재생하여 공간의 분위기를 더욱 배가시켜 주었다. 특히 앱은 이 공연의 필수요소로, 관객은 예약 시 제출하였던 이메일 주소로 스마트폰 앱의 다운로드 링크를 사전에 받게 된다. 공연을 관람하기 위한 일종의 숙제인 셈인데, 메일에 적혀있는 안내를 따라 앱을 관객 본인의 스마트폰에 설치해야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는 안내가 사전에 공지되기도 했다.
장비가 모두 준비되고 앱을 실행시키면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앱에는 기본적으로 메세지와 지도가 표시되는데 메세지 창에는 ‘반’이 보내오는 메세지가, 지도에는 관객 본인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 이동해야할 다음 장소가 GPS를 통해 표시된다. 관객이 앱을 켜면 ‘반’이 친근한 사람에게 말을 걸듯 메세지를 보내오면서 이동할 곳을 알려준다. ‘반’은 자기를 찾아달라며 메세지를 보내오고 이 소녀를 찾아가는 과정에 QR 코드와 거울을 이용한 미디어 아트, 360도 VR영상 등의 다양한 기술이 동원된다.
소녀의 메세지를 따라 장소를 이동하다보면 세운상가 곳곳에 기술 장치들과 더불어 ‘무대적 장치’들이 함께 놓여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때로 벽에 붙어있는 종이이기도 하고, 직접 앉아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예 방 하나를 통째로 무대세트로 구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치들은 첨단의 기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세운상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시간들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관객이 진짜 가상의 이야기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
이를 테면, 옥상에서 내려와 매점으로 향하다보면 철문에 QR 코드가 붙어있고 메세지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의 추억의 장소인 매점 앞에 종이 더미에 둘러쌓인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고 있는 남자가 앉아있는 식이다. 매점은 공연의 여부와 상관없이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매점이지만, 앉아서 글을 적고 있는 남자는 극적 연출의 일부다. 이렇게 실제 공간과 극이 혼재되고, 더불어 계속해서 ‘반’이 보내오는 메세지들이 관객이 극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도록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프로젝트 <반> 공연 사진 ⓒ낯선자들

이제 관객은 ‘반’의 안내에 따라 세운상가를 한 층 한 층 내려가면서 ‘반’의 추억이 묻어있는 장소들을 하나하나 탐험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는 메세지들로부터 ‘반’의 정체와 상황을 추리하게 되고, 이 추리를 바탕으로 관객은 세운상가를 따라 걸으며 곳곳에서 ‘이야기’를 발견해 나간다. 여기에서 프로젝트 <반>은 일종의 추리극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의 정체는 처음부터 숨겨져 있고, 몇 가지의 단서만이 주어진다. 메세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가지고 출발하여, 지시하는 대로 장소를 옮겨가다 보면 곳곳에서 더 많은 힌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매우 극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내가 공연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아예 실제로 존재하는 소녀로부터 문자를 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프로젝트 <반>이 보여준 것들

프로젝트 <반>은 세운상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아니, 무대로 하고 있다기보다는 세운상가 그 자체에 공연이 녹아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싶다. 관객은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연스럽게 세운상가 곳곳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적재적소에 배치된 예상치 못한 기술들을 따라 ‘이야기를 체험’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을 ‘공연’이라는 카테고리로 부르는 것이 맞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관객은 분명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지만,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은 아주 친숙하면서도 생소한 기술들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이 공연은 주인공 ‘반’이 메세지를 보내오는 것이 내러티브 전달에 있어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공간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앱이 공연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 GPS와 지도는 공연의 초반부터 관객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로, 넓은 세운상가 곳곳을 단지 작은 스마트폰 하나를 가지고 누비고 다닐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QR 코드들은 다음 이야기로의 진행이나 특정 영상이나 소리의 재생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돕니다. 또한 특정 위치에 도달하면 벌어지는 360도 VR 영상은 똑같은 풍경에서 촬영된 영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들을 마치 현실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주효한 역할을 한다.



프로젝트 <반> 공연 사진 ⓒ낯선자들

이처럼 다양한 기술을 극에 넣음으로써 단순한 공간에 불과했던 세운상가에 장소로서의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저 헬멧과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뿐인데, 관객은 세운상가라는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이 공연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 - 지나가는 행인, 일하는 사람들 등 - 이 보지 못하는 같지만 다른 세계를 걷게 된다. 기술이 새로운 형태의 내러티브 체험을 구성하고 도와준 것이다.
또한 작품의 스토리는 ‘이주자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어오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거친 세운상가라는 공간과, 이 땅에 낯선 사람으로 초대된 ‘반’이 겹치는 지점은 흥미롭다. 세운상가는 전기전자 전문 상가로 시작했던 지난 시절, 이곳의 기술자들이 모이면 잠수함이나 미사일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특출난 전문성을 가진 기술자들이 밀집한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기술을 통한 새로운 이야기의 방식을 실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극적으로 다가온다. 프로젝트 <반>은 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이주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운의 강한 장소성과 ‘반’의 이주성이 보여주는 극적인 대비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주민의 ‘장소없음’에 대한 질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프로젝트 <반> 공연 사진 ⓒ낯선자들
나가며

프로젝트 <반>은 여러 가지 기술들을 동원해 치뤄진 흥미로운 실험이었다. 이야기의 끝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는데, 많은 장치들을 이용해 이야기를 촘촘히 짜올렸던 것에 비해 이 ‘이야기 체험’을 극적 구성으로 이끌어내는 데에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인물을 추적해 나가는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또다른 극적 장치가 가동할 수 있도록 마무리 구성을 좀 더 탄탄하게 다졌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반>이 여러 가지 기술을 통해 시도한 실험들은 우리가 공연을 체험하는 과정 자체에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여기에서 기술은 예술의 매체성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관객은 어떻게 이야기로 빠져들어 가는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프로젝트 <반>은 지난해 10월 한-영 교류행사인 ‘커넥티드 시티-플레이어블 시티’에서 테스트버전으로 초연되었던 것을 발전시킨 공연이다. 또한 앞으로도 작품을 더 발전시켜 해외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도 한다. 이 흥미로운 ‘내러티브의 실험’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또 어떤 질문을 더 던질 수 있을지 자못 기대가 된다.

프로젝트 <반> 공연 사진 ⓒ낯선자들


글_조형빈(웹진 《춤:in》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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