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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1.25 조회 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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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문학] 무엇을 춤이라 부를까
춤을 무엇이라 부를까

[춤과 문학]



《춤:in》에서는 2018년 한 해 동안 춤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시인, 소설가 등 문학인의 글을 연재한다. 문학 속의 춤, 춤 속의 문학, 나의 문학과 춤 등 춤과 문학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필자들의 독특한 시각을 통해 나온 한 편의 글은 흥미로운 정보를 전달함과 동시에, 그 자체로 새로운 창작품으로서 《춤:in》의 독자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무엇을 춤이라 부를까
춤을 무엇이라 부를까

박세미_시인

내게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춤을 추는 자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시인 김수영은 말했다. 하지만 이어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이라 부언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고 있지는 않다. 나 또한 시를 쓰면서 온몸을 쓰고(사용하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히곤 하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에 비해 춤은 그 자체로 ‘온몸’이다. 그런데 오히려 춤에 대해서는 몸의 미학 너머로 몸에 깃든 정신, 이를 테면 영혼의 펄럭임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된다. 이 역시 달리 설명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온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혼이 깃든 춤을 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와 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패했으므로,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사랑하는 시인들의 시 속에서 춤을 찾는 일 뿐이었다. 시 안에서 춤은 무엇이라 불리고, 무엇을 춤이라고 부르고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호명의 방식을 우리는 ‘은유’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이미 은유에 대해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시하여 대상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표현법’이라고 배웠지만, 사실 시에서 ‘은유’는 단순한 수사법 이상의 지위를 갖고 있다. 하나의 세계를 규명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내린 정의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불러보는 것이다. 춤이 아닌 것으로 춤을 불러보는 시, 춤이 아닌 것을 춤이라 부르는 시들이 있다.

반짝이는 슬픔

나를 보는 소년의 눈이 그랬다
그리도 참혹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인가
묻고 싶었다
매섭고 얕은 발자국을 피해 다니는 것
나는 그것을 춤이라 칭하고 있다
요란한 사랑은 너무나도 조용하게 사라진다
쉽게 우는 사람은 쉽게 슬픔을 잊는다

- 성동혁, 「붉은 광장」 부분


이 시에서는 ‘매섭고 얕은 발자국을 피해 다니는 것’을 춤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한다. 요란한 사랑은 너무나도 조용하게 사라지니 매섭고, 쉽게 우는 사람은 쉽게 슬픔을 잊으니 얕다. 그 매섭고 얕음을 피하려니 처음엔 폴짝거렸을 것이고, 피해 갈 발자국이 많을수록 조금 더 높고 멀리 껑충 뛰어야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춤이라 부른다면, 그 슬픔, 조금은 반짝일 수 있을까. 반짝이는 것은 깊다. 밤하늘에 별이 송곳처럼 박혀 있듯.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발레의 점프 동작

- 최현우, 「발레리나」 전문


여기 반짝거리는 또 하나의 맨발이 있다. 위 시의 화자가 처음 본 것은 당신의 부서지는 발목이었고, 당신이 자다가 몰래 내민 발이었다. 우리는 발목에서 가여움을 본다. 특히 춤을 추는 발목에서 슬픔을 본다. 동시에 발롱! 더 높게 발롱!하는 맨발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추락을 했을 당신의 온몸, 그 온몸의 추락을 견디는 발. 시인을 이렇게 당신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을 최초의 춤이라 명명한다.


누군가 어디론가 움직이는 것

나비는 봄의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고
낙타는 사막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고
인간은 허공의 방향으로 번지고 있고
나는 거울의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다

(…)

그러므로
봄이며
봄의 방향이며
봄의 춤인
나비여

그러므로
허공이며
허공의 방향이며
허공의 춤인
인간이여

그러므로
사막이며
사막의 방향이며
사막의 춤인
낙타여

그러므로
길의 방향이며
거울의 방향이며
길이며 거울의 춤인
나여

이원, 「거울의 춤」 부분>


이 시를 읽는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주체, 방향, 움직임, 이 세 가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교차되는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치 춤을 감상하듯이.
여기서 주체는 나비와 낙타와 인간, 그리고 나다. 방향에는 봄의 방향과 사막의 방향과 허공의 방향, 그리고 거울의 방향이 있다. 그렇게 주체들은 어떤 방향으로 날아오고 걸어가고 번지고 뛰어간다.
이 시에서 춤은 생명이고 심장이고 본질이다. 봄의 심장(춤)은 나비에게 있고, 사막의 생명(춤)은 낙타에게 있으며, 인간의 본질(춤)은 허공에 있는 것이다. 하여 거울에 비친 허상의 실체(춤)는 나다. 누군가 어디론가 움직이고 어느 순간 스스로 방향이 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자신이 춤이 된다.


마지막에 선 자의 몸

자백해, 모든 밤마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니?

진술서를 적어두고
도망가자

검정 거울 위에서
빙그르르 돌면
한 마리는 도망가고
거울 속 돼지들은 남는다
돌돌 말린, 서로의 꼬리를 물고
박자를 맞추어 돈다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사형선고를 받은 돼지는
마지막 똥을 누고 달린다
아무도 뒤쫓아 오지 않는데

심장박동처럼
완벽하게 규칙적이고 멈추지 않는 것
악수하고 싶지 않아
평행선 같은 거니까

용서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원래 깨끗한 동물입니다
자신의 배꼽을 마주볼 때

몸서리칠 때가 있다
스스로에 대하여
가장 가까운 곳, 진흙탕을 뒹군다

- 박세미, 「춤추는 돼지」 전문


부끄럽게도 나의 시다. 이 시는 이런 순간에 쓰였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치는 순간에, 자신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순간에, 끝내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던 순간에. 그 마지막 순간에 왜 춤을 추는 돼지들이 내 앞에 나타났을까. 아니 왜 돼지들은 춤을 춘 것일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돼지들은 무서웠을까. 최대치에 이른 공포를 규칙적인 박자 안에 숨기고 싶었을까. 아니면 지나온 자신의 생에 대한 찬사였을까. 죽음 앞에서 춘 춤은 그들에게 온전한 해방이었을까.

-

엄밀히 따지자면 이 글은 춤과 시의 많은 속성들을 놓치고 있다. 하지만 시 안에서 호명되고 있는 춤의 다른 이름들과 춤이라 불리는 어떤 존재들을 통해 춤의 구체적인 질감을 만져보고 싶었다.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 다시금 보편성에 이르는 것이 문학의 신비함이기도 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시들 속에 박혀 빛나고 있을, 춤이라 호명되는 수많은 편린들이 더 궁금해진다.




박세미_시인 1987년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전공했고,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지금은 월간 「SPACE(공간)」 기자로 일하고 있다. 매일 아침, 곧 발간될 첫 시집 원고를 읽고 출근한다. 퇴근 후엔 원고를 고친다. 그래서인가. 아침엔 기분 좋게 깨고, 밤에는 우울한 상태로 잠이 든다.


박세미_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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