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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12.28 조회 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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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인의 서재] 해상도 높은 세계를 그려나간다는 것

[춤인의 서재]



해상도 높은 세계를 그려나간다는 것

정다영_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줌아웃 에세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정다영 관련 사진

홍진훤&김연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사월의 눈, 2017


김연수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보다는 그의 세계관을 좋아한다는 말이 맞겠다. 하지만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모두 읽어보지는 못했다. 특별히 나는 그의 단편 소설과 에세이, 인터뷰를 좋아한다. 이를테면 『여행할 권리』와 『소설가의 일』, 『세계의 끝 여자친구』, 「Axt」에 실린 인터뷰 같은 글인 셈이다. 이 글들은 짧은 호흡으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김연수 작가의 세계관을 지리적으로 압축한다면 김천, 일산, 버클리로 대표되는 미국 서부 어디쯤이라 생각한다. 그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도시보다 거기서 한 발짝 빗겨나 있는 곳에 더 마음을 두는 듯 보인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문학을 공부하고 종종 번역도 하는 그는 태평양 너머 도시의 감수성도 공유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갖고 머무른 몇몇 도시들은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매번 김연수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어떤 공간과 장소들을 연상하며 언젠가 꼭 방문하고 싶은 실제 장소로 구체화하곤 했다. 그리고 여기, 그의 단편이 실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에는 도쿄와 로테르담, 제주와 사쿠라(市)가 등장한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사진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홍진훤의 사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와 김연수의 글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가 결합된 이 책은 이미 알려진 대로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하는 책이다. 연애소설을 연상케 하는 책 제목과 표지 디자인은 한껏 독자를 배반한다. 하지만 온전히 배반했다고만 말할 수도 없겠다. 이 글은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세월호를 담고자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 작가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또 다른 단편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를 떠올렸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역시 청춘의 끝자락에 있는 어떤 지나간 사랑의 이야기였지만 ‘용산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너와 나는 어떻게든지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작가의 일관된 세계관이 담겨 있는 글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이야기 방식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반복해서 말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가 읽은 그의 텍스트 속에서 그는 흐트러짐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피력했으며 이야기들은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속에서 발화되고 있었다. 소설(가)의 책무란 잊혀져가는 혹은 잊힌 것들을 호출하는 것이라 채근하면서.

“저는 언어적으로 볼 때는 논설의 세계와 소설의 세계가 확연히 다르다고 봐요. 논설이나 설교는 보편적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단어를 써야 해요. 소설은 딱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구체적인 단어를 쓰는 건 세계를 좀 더 현실 세계와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 ‘김연수라는 퍼즐’, 김연수+노승영 인터뷰, 「Axt」 8호, 2016.9/10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의 '나'와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의 '희진'은 삼십대 여성이다. '나'가 남산길을 내려오며 차창 밖으로 떠올린 기억과 '희진'이 제주가는 배 속에서 읊조린 노래는 연결되어 있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매우 구체적인 단어로 기술된 “해상도 높은 세계”에서 픽션은 현실과 중첩되어 있다. 적어도 내겐 2009년과 2014년에 일어난 말 그대로 '참사'인 두 사건들이 더욱 픽션으로 느껴진다. 불과 5년 사이에 참사는 반복되었다. 그 사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선명하게 물이 들었지만, 책등의 단단한 중심으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파리한 분홍빛 책 표지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가 2009년 남산을 중심으로 한 서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라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2014년 몇 군데의 국내외 장소를 아우른다. 소설의 화자인 ‘내’가 거주하는 로테르담, 여주인공인 희진이 현재 머물고 있는 도쿄, 그리고 나와 희진이 함께 있었던 과거의 사쿠라, 마지막으로 희진이 혼자 회상하는 제주까지. 김연수의 글을 먼저 읽고 이 책의 또 다른 저자인 홍진훤의 사진을 보지만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다.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할수록, 이 글의 진원지이자 종착지가 어디인지 독자가 짐작하게 될수록, 우리는 지난 4월 이후 대다수가 겪은 불가해함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부재한 제주의 명소 사진들이 여기 있다. 이 책에 담긴 사진은 홍진원 작가가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일정표에 나와 있는 장소를 찾아 촬영한 것이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처음에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제주라는 장소로, 2014년 4월 16일이라는 시간으로 수렴한다. 사진소설이라는 기획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탈주하지 않도록 둘을 단단히 붙잡는다. 기억은 이로서 한 겹의 단단한 보호막을 씌우게 되었다. 전시장에 부분적으로 소개된 사진 연작, 단편소설 모음집의 일부로 삽입된 텍스트는 각각 발췌되어 이 한권의 책으로 엮여 서로를 추동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시간과 장소를 매개하는 두 개의 이미지를 기억하고자 한다. 먼저 책의 처음과 끝에 담긴 홍진훤 작가가 포착한 제주의 바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희진이 제주가는 배 위에서 떠올린 마크 로스코의 벽화 연작들이다. 희진은 이렇게 말한다. “캄캄한 바다, 경계를 무너뜨리며 서로 뒤섞이는 두 개의 어둠. 그건 어쩐지 그 해에 가와무라 미술관에서 우리가 함께 보았던 마크 로스코의 벽화 연작들을 떠올리게 하더라고.”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제주의 바다 사진과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서로 닮아 있음을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다. 이 두 이미지는 우리를 심연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이 사건을 설명하기에, 구체적인 단어는 찾기 어렵다. 한편, 세상은 바뀐 듯 했지만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상도 높은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보다 선명한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구체적인 말을 찾으려 애써야 한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믿음을 가져가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단어를 찾기 위해 두 작가들처럼 이미지를 내미는 일을 선행해도 좋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 역시 동요된 마음이 움직임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느낀다. 이 깊은 겨울이 지나 내년 봄이 되면 희진이 가와무라미술관에서 보았다는 어둠과 빛을 나도 바라볼 계획이다. 그 때쯤 가와무라미술관이 있는 사쿠라시에 이름 그대로 벚꽃이 만개할 것을 기대하면서.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으며,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아카이브를 매개로 한 전시 만들기에 관심이 있다. 최근 기획한 전시로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이 있으며, 2018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로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정다영_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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