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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8 조회 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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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통춤 창작을 위한 전통춤의 지역성 파악
: 완송(完松) 이병옥 선생님과의 대담

이정미_피아니스트·문학 석사·문화예술교육사

2017. 12. 14.(목) 3:00~5:40
토즈(TOZ) 마이스 광화문 센터



줌아웃 대화 피아니스트·문학 석사·문화예술교육사 이정미 관련 사진

(좌측부터) 이병옥, 이정미


전통춤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


이정미: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병옥: 반갑습니다. 대담 자리가 마련되어 저도 기쁩니다.

이정미: 수십 년간 우리의 전통예술에 대하여 시대와 지역을 총망라하여 깊고 넓게 연구해오셨고, 올해만 해도 할미성대동굿과 경기향토소리에 대한 학술 고증과 자문에 힘쓰신 공로로 용인시 문화상을 수상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이병옥: 고맙습니다. 〈송파산대놀이〉와 같은 가면극과 토속적인 한국 민속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연구를 이어온 것 같습니다. 언제나 국민들이 공감하고 세계화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지요. 우선 전통을 잘 알아야 할 텐데 전통 자체가 예술성과 보편성을 가지려면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그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또 새로운 전통이 수립되고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이정미: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고대의 우리 무용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셨고, 수많은 현지 조사를 겸하시면서 전통춤 전반에 대하여 연구해오고 계십니다. 저는 특히 춤을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연구하신 부분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이병옥: 하하, 이 선생님의 연구도 참 신선했어요. 어떻게 살풀이춤과 플라멩코를 비교할 생각을 했을까요? 지금까지 없었던 시선인데 그러한 연구는 동서양의 문화를 고루 접해 본 경험에서 오는 것일 겁니다.

이정미: 그렇게 외국춤과 우리춤을 문화론적으로 한 번 비교하고 나니 이제 우리나라 각 지역 전통춤의 특성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원시시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오는 우리의 악무(樂舞)에 좀 더 접근하여 그 의미와 동작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참으로 다양한 춤들이 있고 우리가 모르는 춤들도 참 많은 것 같아요.

이병옥: 전통춤의 종류는 정말 많지요. 제 스승이신 정병호 선생님과 조사한 것만 해도 370여 종, 제가 더 찾아내어 보니 모두 500여 종 정도 됩니다. 이 중 무구를 갖추고 추는 무당춤만 300여 종이니 무구 없이 추는 춤까지 합하면 더 많아요. 그런데 정작 전통춤으로 알려진 것은 궁중무용 50여 종과 문화재로 지정된 몇 가지 춤, 민속춤 일부 밖에 없습니다.

이정미: 와, 놀라운데요! 춤들을 발굴하고 현지 조사하시느라 방방곡곡을 누비셨군요. 역시 무속이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춤들의 특성을 세세하게 파악하여 창작에 적절하게 또는 과감하게 응용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굿의 과정들을 예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시대의 무당이 된 마음으로요.

이병옥: 보통 무당이라고 하면 방울과 부채를 들고 춤추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무당이라고 다 방울과 부채만 들고 춤을 추는 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보편적인 도구이기는 하지만 영호남 지역에서는 방울, 부채를 들고 춤추지 않아요. 그런데 정작 그 지역에서 창작된 무당춤에 방울과 부채가 등장할 때가 있어서 참 아이러니하지요. 무당춤의 무구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경기도, 그리고 황해도와 같은 이북 지역에는 축귀적인 의미로 쓰이는 칼 종류가 무척 많아요. 삼지창, 대신칼, 칠성칼 등등……. 반면 축원을 하는 세습무들은 칼을 쓰지 않고 각종 제물(祭物)과 복색(服色), 농기구 등 생활용품을 무구로 사용합니다. 자기 향토의 전통춤에 대하여 잘 알고 널려있는 창작 소재를 포착해야겠지요.



제주도 칠머리당 영등굿의 원형성


이정미: 전통춤 연구와 개발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되면 좋을텐데요, 서울·경기권과 영호남 지방에 편중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제주도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여신 유형인 자청비가 등장하는 세경본풀이, 감은장아기가 등장하는 삼공본풀이, 설문대 할망 설화 등 매력적인 여신의 스토리와 독특한 향토색이 넘쳐나는 곳인데 그 지역의 특성을 드러내는 전통춤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이병옥: 맞습니다, 아직도 미개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일본 문화가 혼재하는 지역입니다. 또 고려시대에 기마민족인 몽골족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문화와 몽골말이 유입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본토와는 달리 초원지대에서 말을 타기가 좋은 여건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제주도 방언을 보면 한자와 전라도 방언, 일본말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 같지요.
일만 팔천 신이 있다고 하는 제주도에서는 무당을 ‘심방(神房)’이라고 하며 본토와는 다른 굿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닷가 지역은 배를 타고 나가 생명을 잃는 일이 잦으므로 굿을 많이 하고요, 추위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바로 ‘바람’입니다. 그래서 이 바람을 잠재워달라며 바람의 신인 영등 할망에게 비는 〈제주칠머리당굿〉 같은 영등굿이 대표적이지요. 수심방이 주도하는데 춤출 때 도약을 많이 하여 몽골 무당이 추는 것과 같은 북방 계통의 특성과 함께 조용하고 엄숙한 남방계통의 특성을 모두 볼 수 있어요. 음악은 타악기 중심이죠. 특이한 것은, 인도네시아 발리의 가물란(Gamelan)을 연주하는 것처럼 징을 엎어놓고 칩니다. 북은 약간 비껴 세워놓고 한 쪽은 내려치고 또 한쪽은 옆으로 쳐요. 이건 북방과 남방 문화가 절묘하게 혼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정미: 그럼 제주도 전통춤의 특성은 굿춤에만 남아있는지요? 민요와 함께 하는 동작도 있고 해녀들의 춤도 있지 않습니까? 북한에서 최승희가 마지막으로 안무한 춤도 해녀춤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병옥: 과거의 기록들과 현지인들의 춤 전승을 보면 농악가락이나 민속춤들은 원형성이 많이 사라졌지요. 이 시대의 춤과 음악으로 추어졌기 때문에 지역적인 허튼춤으로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굿에서만큼은 원형성이 살아있어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제주칠머리당굿〉, 제주도무형문화재로는 〈해녀노래〉, 〈영감놀이〉, 〈송당리마을제〉 정도가 지정되었습니다. 제주전통춤의 복원에 몇 분들이 앞장서고 있는데 제주 원로무용가 이연심 선생님이 그동안 제주춤 복원과 한국민속예술축제 출품 등의 노력과 공로로 향토무형문화재로 인정되었고, 해녀춤과 물허벅춤도 재현해서 무보집을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정미: 제주도에도 기방이 있었을텐데요. 조선 후기의 소설 〈배비장전〉을 보면 애랑이라는 기생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병옥: 그럼요. 각 지역의 기녀들을 뽑아 국가 행사 때 예술행위를 하였는데 그들을 선상기(選上妓)라고 했어요. 행사가 끝나면 다시 각 지방으로 내려갔고 궁중에서 익혔던 검기무를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공연하곤 해서 전국적으로 검무가 유행했죠. 조선시대 궁중이나 각 도의 감영에서 가장 인기 있던 춤이 바로 검무이며 근대 기록에서 봐도 전통춤 중에서 최고로 인기 있던 종목이 검무였어요. 그 다음이 승무였고요. 평양, 해주, 제주, 진주, 밀양 등에서 행해지던 검무의 패턴과 정서가 각각 다른 것은 우선 지방의 악사와 반주가 달랐기 때문이지요. 춤추는 이의 예술성이나 체형, 감각 등도 물론 달랐겠지만. 제주도 역시 18세기 이후 제주목사(濟州牧使)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와 이원조의 〈탐라록〉 등의 그림과 글에서 기생들의 춤 그림이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졌지요.



북한 무용에 대한 이해


이정미: 그렇군요. 지역민들이 그들의 문화가 얼마나 특별하고 가치있는 것인가를 인식하고 학자들의 연구도 계속 활발하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그 실상을 알기 힘든 북한 지역을 한번 살펴볼까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음악 자체를 잘 알 수는 없지만, 고구려는 삼국의 무용음악 중에서 가장 먼저 발달했던 음악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해봅니다. 중국과 인도 등과 교류가 있어서 서로 유사한 악기를 가지고 연주한 것 같습니다. 고분벽화를 통해 악기를 파악하고 춤추는 모습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그려진 상처받은 소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구석기 시대에 생존을 위한 제의적인 춤은 어떻게 추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곤 합니다. 그 벽화로부터 받는 비장한 느낌을 스페인의 투우사나 플라멩코 무용수의 동작에서 느끼기도 하지요. 투우와 플라멩코의 유사성에 대하여 연구하는 외국학자들도 있더군요. 선생님께서는 이미 고구려 고분벽화를 도상학적으로 자세히 분석하시면서 춤을 연구하셨지요. 이북5도 문화재위원이시기도 하고요.

이병옥: 그렇습니다. 고분벽화의 춤을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의 춤으로 분류하여 분석하고 전체적으로도 연구해보았습니다. 1985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남북한 공연 교류가 있었는데 양측 문화의 이질성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알고 동질성을 회복해보자는 취지로 국가에서 분야별로 학자를 위촉하였는데 춤 분야는 제가 맡게 되었지요. 북한문화자료실을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북한에서 1960년대부터 매월 발행하고 있는 36년 간의 월간지 〈조선예술〉을 비롯한 무용 관련 문헌을 일 년 동안 분석하여 〈북한의 공연예술2〉(고려원, 1991)를 발간하였습니다. 또한 북부 지역의 봉산탈춤, 은율탈춤, 북청사자놀이, 평안도다리굿, 평북성황대제, 서해안풍어제인 옹진 배연신굿과 대동굿을 하는 남하한 무당 김금화의 굿 등 문화재 15종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봉산탈춤 복원 영상을 보니 대사가 모두 생략되어 있었어요. 대여섯 시간에 걸쳐 스토리가 전개되는 탈춤의 대사가 생략되고 춤도 축소되어 있더군요.
아시다시피 유일사상만 내세우면서 김일성 사상으로부터 유래된 역사성과 당위성만을 강조하고 조선시대의 양반문화와 궁중문화, 종교성이 모두 배제되고 있습니다. 평등사상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혁명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김씨 일가 중심의 계급사회에서 노동과 주체사상 중시의 예술활동을 하고 있으니 전통은 사라지고 말았어요. 다양한 춤이 창작되었지만 그 정신과 동작이 순수하게 전통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줌아웃 대화 피아니스트·문학 석사·문화예술교육사 이정미 관련 사진

이정미 피아니스트·문학 석사·문화예술교육사


이정미: 월북한 최승희 등 여러 무용가에 의해 창작민속무용이 만들어졌고 악기 개량도 참 많이 했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지는 예술활동을 통해서는 순수한 전통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김정일의 지시 하에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들이 한글자모와 여러 기호들을 가지고 완성했다는 무용표기법은 흥미롭더군요.
스페인 내전 이후 독재자인 프랑코(F. Franco)가 통치하던 약 35년간 순수한 플라멩코의 전통이 무시되고 발동작의 빠르고 현란한 기교와 남성 무용수의 힘 과시, 공연 무대의 보여주기식 확장만이 이루어졌던 사례가 떠오르네요. 그 와중에도 정통성을 지키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 음지에서 계속되었지만, 북한의 경우는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라 안타깝습니다. 남한에서라도 북한 지역의 전통 문화에 대하여 가감 없이 계속 연구되었으면 합니다.



세시풍속으로 나눈 문화권과 전통춤


이병옥: 남한에서는 창작민속무용보다 전통무용이 강세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찬란했던 춤 문화를 이어받아 신전통무용이 생겨나야 할 텐데 대한민국 시대에 창작된 전통무용은 별로 없습니다. 전통에만 매몰되면 안됩니다. 한쪽으로 쏠려도 곤란하고요. 물론 ‘부채춤’이나 ‘북의 대합주’, 농악의 원형은 아니더라도 사라져가는 리듬에 생명력을 넣은 ‘사물놀이’ 등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신전통무용 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입니다.

이정미: 지난 여름에 마포아트센터에서 ‘무도회’라는 공연을 보았습니다. 여러 지역의 다양한 춤과 장단이 펼쳐졌고, 연출자이신 전통무용가 박경랑 선생님은 교방춤과 고성오광대놀이에 나오는 문둥북춤을 바탕으로 새롭게 안무한 춤을 1, 2부에서 각각 공연하셨지요. 특히 문둥북춤의 절절한 표현력과 ‘추한 미(美)’에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그 공연을 보기 전에는 그 분이 살풀이춤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새롭게 안무한 공연을 유튜브에서 보았는데 음악과 무구를 적절하게 응용하여 선택하고, 스토리를 담은 공연 등을 펼치시는 것을 보고 신전통춤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병옥: 영남지방 탈춤 〈문둥북춤〉에서는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 숭고미 중에서 ‘비장미’가 돋보인다고 강연한 적이 있어요. 가만있자……, 마포아트센터에 와서 공연을 보셨나요? 그때 취발이춤을 춘 게 바로 나인데.

이정미: 네? 선생님께서요? 그러고보니 팜플렛에 성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별출연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분이 바로 선생님이셨군요!

이병옥: 맞아요. 약 30분 추는 취발이춤의 엑기스만 뽑아서 약 7분간 공연했지요. 노장춤은 생략했고 소무를 통해 아이가 태어나고 교육시키고 하는 리얼한 장면이 나오죠.



줌아웃 대화 피아니스트·문학 석사·문화예술교육사 이정미 관련 사진

이병옥_전통예술 연구가·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무용평론가


이정미: 그 과정이 상당히 해학적이라 관중들이 무척 즐거워했지요. 세상에, 그때의 취발이가 바로 선생님이셨다니요! 끝까지 탈을 안 벗고 퇴장하셨죠? 그럼 오늘 구면이네요. 하하, 탈을 쓰신 모습을 먼저 뵙긴 했지만요. 지난 6월에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산대상좌춤을 추셨다는 기사를 보았고, 〈송파산대놀이〉 전수 조교 역할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접 춤을 추시는 분께서 오랜 세월 동안 깊이 있게 전통예술을 연구하시니 참 존경스럽습니다.
선생님의 글 중에서 우리나라 문화권역을 역사와 풍속에 따라 단오문화권, 백중문화권, 추석문화권으로 나누신 글을 읽고 흥미진진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인 〈송파산대놀이〉가 백중(百中) 때 가장 많이 연행되었고 현지인과 외부인 모두 어울려 놀았다고 하는데요, 문화권역을 그렇게 나누신 연유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해주시면 합니다.

이병옥: ‘백중’은 음력 7월 15일로 이때까지는 벼농사를 모두 끝내고 수확을 기다리는 농한기가 시작될 때의 명절입니다. 이제 호미를 씻어서 기름칠하여 걸어놓는 ‘호미걸이’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곧 놀이의 이름이 되었어요. 그 해에 가장 열심히 일을 잘한 청년이나 머슴에게는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주듯이 하얀 어사화를 주었고 나귀 대신 지게를 태워주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위치상 인도나 열대지방의 도작(稻作, 벼농사)보다 쌀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복잡하고, 훨씬 부지런하게 일해야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게 일했으니까 그만한 상을 내리는 거지요. 백중 이후에는 절대 논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햇빛을 잘 받아 벼꽃이 피고 충분히 영글도록 가만히 두어야 하죠. 잡초가 자라봤자 수확기까지 약 한 달이니 그건 별 영향이 없어요. 일반적으로 민속학계에서는 중부권을 단오추석문화권이라고 하는데 저는 백중날의 중요성이 부각되기에 중부권을 백중문화권이라고 명칭을 주장하고 있지요.

이정미: 그렇다면 길고 힘든 노동을 끝내고 놀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수확 전까지 힘을 비축할 필요도 있었겠고요.

이병옥: 맞아요. 서울과 경기, 수도권에서부터 경상도권까지 이어지는 백중문화권의 또 다른 민속놀이로 〈밀양 백중놀이〉가 있고 여기서도 춤판이 크게 벌어졌지요. 지도상으로 표시하면 전체적으로 서해안 쪽은 북상하고 동해안 쪽은 남하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지역에서 백중날 놀이가 발달했어요. 송파에는 그 시기에 전국 각지, 심지어 강원도 오지에서부터 배를 타고 온 장꾼들까지 모여 연일 시끌벅적했으므로 5일장이 아니라 매일 장이 열렸어요. 그러니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상소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장꾼들은 백중날 하루 전에 와서 진을 쳤고 사람들은 모여서 낮에는 씨름, 줄타기, 길놀이나 풍물놀이 등을 하고 밤에는 송파산대놀이를 하면서 거의 일주일간 놀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비해 태양숭배사상이 강한 북방 쪽은 단오가 중요합니다. 현장조사를 해보니 북쪽 지방은 춥고 수확이 잘 안되니까 농사 결과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어요.

이정미: 양기(陽氣)가 풍성한 단오 때 춥고 산이 많은 북쪽 지방에서는 일단 모심기를 해놓고 명절을 즐겼겠군요. 우리나라 대표적인 축제인 강릉단오제 때 행하는 여러 굿이나 관노가면극을 통해서도 창작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관령국사성황을 모시고 국사여성황당으로 행렬을 지어 가는 길에 부르는 〈영산홍가〉 속에는 신격을 가진 부부가 만나게 되는 설레는 감정이 가득 들어있는 것 같아요. 전승되는 이 노래에 어울리게 신의 이야기를 표현해내는 무용 작품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병옥: 하하. 소재는 널려있지요! 이처럼 한강 이북과 강원도 지역 및 경상도 북부지역의 단오문화권, 한강 이남 경기지역과 경상도 남부지역의 백중문화권, 그리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서 풍부하게 소출을 얻을 수 있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남쪽 일부지역의 추석 문화권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연중세시풍속 중에서 축제성이 강하고 중심되는 세시문화를 가지고 이렇게 나누고 나면 대략 고구려 강성기 영토, 신라 강성기와 경남의 신라문화권 지역, 백제문화권 및 가야 지역과 일치하게 됩니다.

이정미: 추석문화권에서는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흥겹게 놀았겠군요.

이병옥: 그렇습니다. 호남지방에서는 강강술래가 대표적이고 영남지방은 월월이청청(月月而淸淸)으로 놀았지요. 노래와 춤이 하나되어 여성을 상징하는 달을 보면서 역동적으로 놀던 풍속인데 추석 때 가장 많이 놀았죠. 도작문화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 민족의 예술적 재능은 뛰어나다고 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면 집단 제천의식인 영고(迎鼓)와 동맹(東盟), 무천(舞天)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음주가무(飮酒歌舞)’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미 3세기 경에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의 예술행위를 보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족이라고 한 것이죠. 또 한·중 수교가 되던 1992년 즈음에 제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거기 학자들이 말하기를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특히 조선족은 악가무가 뛰어난 민족이라고 했어요. 3세기에도 20세기에도 같은 말을 들었으니 놀라운 일이지요.



영남과 호남 전통춤의 특성


이정미: 문화권역을 나누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지형이나 기후 등의 자연적 조건, 언어와 역사, 현지인의 예술적·정신적 공감대나 경제적 요인까지 들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요인이 지역문화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을텐데요. 우리 민속춤의 예술성은 영호남 지방의 춤에서도 매우 진하게 우러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영호남의 예술적인 특성에 대하여 비교해가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통 ‘한, 흥, 멋, 태’라는 말로 우리의 가무를 표현하면서 호남 지방은 ‘한과 멋’의 예술성이, 영남 지방은 ‘흥과 태’의 예술적 감각이 돋보인다고 하지요. 정서적인 면을 표현할 때는 다소 주관성이 개입할 수 밖에 없고, 이분화하여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지만 이런 해석이 나오게 된 근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병옥: 역사적으로 영남은 신라권, 호남은 백제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면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권에서는 기쁨과 흥에 겨운 신명나는 ‘흥(興)춤’이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신라권은 서라벌을 중심으로 호족들과 양반문화가 강세인 만큼 예기들의 기방춤은 표현력이 뛰어나고 춤맵시가 예쁜 ‘태(態)춤’이 발달했지요. 반면에 망국의 한을 품은 백제권에서는 춤보다는 한맺힌 노래가 먼저 나왔겠지요. 왕족과 백성이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간 날을 기일 삼아서 매년 굿을 할 정도니까요. 망국의 슬픔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어서 그만큼 한이 깊게 서려있는 시나위음악이 발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恨)’은 슬픈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슬픔을 통해 정화되는 ‘속멋’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과 멋’이 담긴 정서의 춤이 발달하게 되었지요. 이 지역의 음악 자체가 땅 밑으로 꺼지는 듯한 진중함과 한스러움을 담은 시나위음악이고, 육자배기토리에 맞추는 진양조와 중모리, 중중모리의 장단 구조는 춤 반주가 아니라 한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의 반주입니다. 호남지방의 춤은 형태적으로 보면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지도 않고 움직임이 적은 무거운 춤입니다. 심적으로는 넓고 깊고 풍요롭더라도 동작에는 ‘감춤의 미학’이 들어있다고 봐야죠.

이정미: 명무이셨던 조갑녀, 장금도 선생님의 민살풀이춤이 떠오릅니다. 지금 설명해주신 그대로 상당히 진중하고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시나위’라는 말을 광의적으로 보아서 신라 사뇌가가 그 기원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지만 보통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전라도 무속음악에서 나온 육자배기토리의 허튼 가락을 삼현육각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말하는데, 이 음악이 어디까지 퍼져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이병옥: 통영과 진주, 서울, 경기도까지 전파되었고 배를 타고 부산까지도 갔다고 봅니다. 옛날에 문화가 전파된다는 것은 곧 그곳으로 사람이 갔다는 말이지요. 원래 영남에는 시나위음악에 맞추는 살풀이춤이 없었지요.

이정미: 그런데 영남에도 통영수건춤, 진주 논개살풀이춤, 권명화류 살풀이춤 등이 추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병옥: ‘살풀이춤’이라는 용어 자체도 원래 우리나라 무용계에 없었고 그냥 ‘수건춤’이라고 했어요. 1930년대에 한성준이 일 년에 두어 번 전라북도 정읍에 가서 세습무 예인 집안의 자손인 전계문으로부터 보름 정도씩 춤을 배웠어요. 그때 수건춤을 추는데 그 장단이 살풀이장단이었어요. 특히 영남지방에는 살풀이장단이 없었으니 당연히 살풀이춤이 없었지만 시대가 흐르고 교류가 되면서 통영, 진주, 대구 등지에 파급된 것입니다.

이정미: 아, 그래서 1935년 한성준이 부민관에서 첫 공연을 할 때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썼나 봅니다. 그때 살풀이춤을 누가 추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요. 보통 살풀이춤을 기방계, 신당계, 재인계, 창작살풀이춤 등으로 나누는데 춤추는 이의 여러 배경과 무구 등을 모두 고려하면 어느 한 계통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병옥: 들고 추던 무구로 보면 기녀들이 소맷자락에서 꺼내거나 목에 걸치던 수건이나 재인의 손수건, 무당들이 진오귀굿이나 오구굿에서 찢거나 고풀이할 때 쓰던 긴 천이 다르므로 이를 기준으로도 계통을 나눕니다. 춤이 나오게 된 배경까지 모두 살펴서 보통 김숙자류는 신당계, 한영숙류는 재인계, 이매방류는 기방계로 봅니다. 살풀이춤은 굿의 요소가 많지만 예술로 승화된 춤이지요. 하지만 시대가 지나갈수록 혼합되고 계통적 특성보다는 무대예술에만 비중을 두다보니 계통성이 퇴색되고 있어서 안타까워요.

이정미: 영남권으로 돌아와서, 정소산의 제자인 백년욱이 보유자로 되고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된 〈정소산류 수건춤〉은 살풀이춤이 아니고 입춤 형식이라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이병옥: 그렇지요. 정소산은 이왕직아악부에서 궁중 무용을 배우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그래서 꼿꼿하고 반듯한 궁중무용의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이 독특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반면 대구 권명화는 전라도 출신의 춤 선생인 박지홍에게서 춤을 배웠어요. 세습을 기피하면서 당골 세습무가 사라지던 그 시대에 굿판이 없어지다 보니 기예가 뛰어난 호남권 예인들이 영남권으로 넘어가서 자리잡고 가르치곤 했어요. 대구에 강태홍 선생이 먼저 정착했다가 재주가 많다보니 경주나 마산, 부산까지도 가서 가르쳤어요.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기도 하고 가야금병창에도 능했습니다. 명창 박지홍도 나주 출신인데 후에 대구 달성권번에서 가르쳤죠. 춤반주를 하던 사람들은 춤을 가장 잘 알아요. 장단을 잘 아니까 기녀들보다 더 잘 가르칠 수도 있지요.

이정미: 한성준도 무용가 이전에 명고수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명무들을 배출해내었나 봅니다.

이병옥: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영남의 굿거리장단은 살풀이장단과 정서는 다르지만 장단 구조가 같아서 같은 맥이지요. 결국 살풀이춤과 수건춤의 맥은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오랜 세월 지켜본 바로는 무복(舞服) 색이 점점 흰색으로 변했죠. 한영숙 같은 경우 처음엔 물색 옷이었다가 소복으로 되었고요.



영호남의 두 명무


이정미: 영상을 보니까 금박무늬가 있는 치마를 입을 때도 있었더군요. 그리고 이매방은 살풀이춤을 출 때 장식적이고 고전적인 미감을 한껏 살려서 남바위를 쓰고 바지저고리와 쾌자, 무복(巫服)과 같은 두루마기 등에 우아하게 색을 넣어 입었고요.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럽고 대삼과 소삼이 조화를 이루면서 고도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는 춤사위가 나오게 된 것은 남도 시나위권의 예술적 환경 덕분이었을까요?

이병옥: 이매방 선생님은 침선장보다 옷을 더 잘 만들었죠. 추석문화권의 풍성한 예술적 환경 속에서 본인의 타고난 예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그러한 춤이 나왔다고 봐요. 아동기에 이미 목포권번에서 춤과 북을 익혔고 15세에 승무 공연을 대타로 해서 갈채를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고 정적인 춤, 대지지향적이며 한스럽고 멋드러진 춤사위가 일품이지요. 호남의 기방계통춤의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정통성을 보존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베이스는 변하지 않지만 이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본인과 제자들의 춤을 통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활동 환경이 바뀌거나 예술성의 깊이나 개인의 성품, 체형 등이 모두 다르니까요.

이정미: 역시 춤은 역동적인 것 같습니다. 구전심수(口傳心受)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이 바로 ‘가족’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매방의 가계 역시 무업을 해 왔고, 진도 지방의 풍부한 악가무들도 박병천의 가계를 비롯한 세습무 가족들의 활약으로 이어져왔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다소 폐쇄적이고 현대로 올수록 그들의 관습이 깨어지기는 했지만 세습무 가계나 플라멩코를 발전시켜 온 집시 가문은 철저하게 부권 중심이었지요. 남자들은 악사 역할 등 모든 예술 활동에 통달하면서 전 과정을 지휘했고 여자들은 춤을 추었던 점이 매우 유사합니다. 이매방의 경우 호남의 여러 스승들로부터 배웠고, 소학교 시절에는 북경의 매란방(梅蘭芳)으로부터 배우면서 크게 영향을 받아 예술성의 폭이 확장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스승의 역할도 지대하겠지요? 그 지역에 살면서 지역성과 정통성을 고스란히 전해주거나 제자의 모델이 되어주는 존재가 스승이니까요.

이병옥: 그렇습니다. 호남의 드넓은 평야에서 대지지향적이면서 정적인 춤사위와 답지무, 한과 신명이 표출되는 여성적인 춤이 추어졌고 그것이 기방, 즉 권번을 통해 더욱 예술적으로 피어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명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스승이 있었기에 그러한 춤이 나온 것입니다. 스승을 뛰어넘어 자신의 개성과 예술성을 확보한 사람이지요.

이정미: 호남지역과는 대조적으로 백중문화권에 속했던 영남지역의 춤과 음악은 좀 더 표출적이고 온 몸을 쓰거나 도약하는 춤으로도 나타난다고 보여집니다. 자연 환경과 역사 등이 모두 묻어나는 것이겠지요?

이병옥: 영남지역은 평야와 험한 산악지대가 공존하고 바다를 접하는 지역도 있어서 하향춤과 상향춤이 공존합니다. 수직과 수평의 춤이 어울리면서 춤의 형태와 종류가 다양하지요. 학사위와 배김새춤, 허튼춤, 흥겨운 굿거리춤, 박력있는 덧배기춤 등등……. 그리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기쁨으로 인해 유희적이거나 도약하는 춤이 많습니다. 남성적인 탈춤과 농악춤도 발달했지요.
특히 우리나라 지방도시 중에서 씻김굿과 다시래기 등으로 유명한 호남의 진도와 함께 2대 무형문화재 지역으로 꼽히는 진주는 영남 최고의 예향입니다. 검무, 삼천포농악, 한량무, 교방굿거리춤, 오광대 등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보통 의기 논개를 떠올리면서 애국충절의 도시, 의암별제를 행하는 도시라고 알고 있지요.

이정미: 네, 현장답사를 가서 진주성과 남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야경을 보면서 압도된 적이 있습니다. 충직하면서 시원시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주권번이 있었고,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자긍심이 강하고 충신도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탁월한 소리꾼이자 춤꾼이었던 김수악이 의암별제에서 논개살풀이를 출 때 색깔있는 천을 사용한 점이 특이했습니다. 또 그는 음악가로서 장단과 구음을 스스로 맡아서 했고, 살풀이춤에 흥겨운 소고춤을 함께 넣는 시도를 한 점도 매우 돋보였어요. 전통을 이어받아 지켜내면서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과감하게 한 예술가인 것 같고, 그의 살풀이춤은 기방계통 춤이지만 한스러움과 역동성을 모두 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병옥: 네, 호남지방 출신이 영남지방으로 와서 춤이나 음악을 전수한 예를 아까 살펴보았는데 반대로 김수악은 진주권번에서 목포나 광주 등으로 가서 소리와 춤을 가르쳤지요. 그만큼 뛰어난 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진주의 지역성에서 연유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가야문화의 바탕 위에 백제와 신라의 문화가 혼합되었기 때문에 영호남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넓게 보면 가야에 북방 유민이 남하하고 정착하면서 형성된 문화까지 더해져서 진취적인 단오문화권 춤의 특성까지 나타나므로 우리나라 전체 문화권의 특성이 혼재합니다. 그러니 춤이 발달할 수 밖에 없지요. 소리 또한 영호남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해안 지방이 아니므로 한맺힌 시나위 음악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이정미: 결국 한·흥·멋·태를 모두 가지고 있는 도시라고 볼 수 있겠군요. 영남의 여러 야류나 오광대, 하회별신굿 등에서는 덧배기춤과 같이 도약이 많은 흥겨운 춤을 추지요? 전신을 사용하면서 굿거리장단이나 자진모리장단에 맞추어 추는 우직한 춤사위들은 참 매력적입니다. 현대의 아이돌 스타들이 전통춤은 아니지만 외국 가수들에 비해 멋지고 현대적인 군무를 소화해내는 것도 이처럼 흥겨운 가면극에서 춤을 즐기던 조상들의 영향력 때문이 아닐런지요. 특히 사라져가는 수많은 전통춤을 발굴해내어 무대화시킨 한성준의 공로가 대단하지요? 영남덧배기춤도 그가 무대에 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성준의 활약과 서울·경기권의 전통춤


이병옥: 맞아요. 어릿광대와 유랑광대 생활로부터 터득한 여러 가지 예술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장안 최고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지요. 고수 생활을 하면서 생활이 마침내 안정되었고, 국창 박기홍과 화성재인청 출신의 예인들 및 기생들과 함께 광무대라는 극장에서 활동했어요. 재인 이동안이 활발하게 공연했죠. 그러다가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음악을 맡았지만, 그 때 무용을 담당했던 이강선이 개인사정상 못하게 되어 한성준이 춤도 맡아서 가르치게 되었어요. 체계적으로 춤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경험과 음악에 대한 이해력 덕분이며 무엇보다 우리 전통춤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이었다고 봐요. 하지만 1900년대 초기 협률사와 광무대 시절 한성준과 이동안의 다양한 춤들을 전승시킨 스승이 있었다는 것을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화성재인청 출신이며 어전광대로 유명했던 김인호가 당시 무대에 오른 여기들을 가르쳤고 한성권번, 한남권번에서 춤을 가르쳤는데 이때 반주자가 한성준이었기에 80여종의 춤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동안이 기억하는 30여 종의 춤들도 스승 김인호부터 전수받은 춤들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정미: 충남 홍성 출신의 한성준이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지방 구석구석의 향토적 춤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었을까요? 궁중 무용의 요소가 많고 양반 취향의 춤사위가 자주 나오게 되지는 않았는지요? 조선 후기에 신재효가 판소리를 집대성하면서 서민들의 진솔한 스토리가 담긴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등을 공연 작품으로 부각시키지 않았던 것처럼요. 그가 정립한 춤 속에 하류층의 몸짓과 정서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였는데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에는 제약이 있었을텐데요?

이병옥: 신무용이 거세게 들어오고 부각되던 일제강점기였지만 한성준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춤을 배우고 발굴하는 작업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중에서도 화성재인청 출신 김인호와 정읍의 재인 전계문 등의 직접적인 가르침도 많이 받았지요. 1874년생이니 무용 활동 초기에 봉건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지만 일본 공연을 통하여 오히려 우리 전통춤의 우수성을 증명했어요. 원래 전국을 떠도는 유랑 예인이었다가 궁중에서도 자주 활동했기 때문에 하류층에서부터 상류층까지의 예술을 폭넓게 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거쳐갔는데 전통무용가들은 물론이고 특히 최승희나 조택원 같은 신무용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지요. 최승희의 작품 〈에헤라 노아라〉는 단기간이나마 그가 한성준으로부터 태평무와 한량무를 배우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겠지요. 일본에서 빅히트했던 춤입니다. 사회 풍조의 영향을 받아 최승희도 무당 또는 기생이나 추는 것이 전통춤이라고 생각했다가 일본에서 약 보름간 한성준으로부터 열심히 지도를 받았습니다. 결국 전통춤을 이해하지 않으면 개성있고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창작무도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정미: 그렇군요. 저는 최승희와 같은 예술가가 이 시대에 많이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창작무들이 현대에 만들어졌더라도 참 경이로웠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잠시 영상을 통해서 본 〈수건춤〉은 좀 낯설었어요. 경쾌하게 기쁨에 겨워 추는 춤처럼 보였고, 반주음악은 가야금을 여러 대 놓고는 시나위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연주하더군요. 북한 관객의 취향에 맞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중심인 서울·경기지역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우선 서울에서 한성준에 의하여 수많은 춤이 무대화되었고, 중심 지대이다 보니까 매우 다양한 양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하여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병옥: 우선 이 지역은 위도와 기후로 보면 중부지역이며 중방문화권에 속하면서 북방과 남방문화권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단오와 백중, 추석을 모두 중요한 명절로 여겼고 여러 종류의 춤이 고르게 발달한 지역이지요. 조금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한강 이북과 이남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한강이북은 강신무 중심의 한양굿과 해서탈춤들의 영향으로 도약이 많고 동작이 강한데 비해, 한강이남은 세습무 중심의 경기도당굿이나 화성재인청춤으로 동작이 부드러워서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농악에서도 경기북부지역 농악은 농사풀이적인 원초 형태이고 경기남부농악은 판굿 중심의 예눙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중방문화권은 궁중무악의 영향과 산대계열의 탈춤과 시나위음악 및 춤들로 이뤄진 백제문화권의 특징이 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정미: 그렇군요. 조선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우리나라의 모든 춤문화를 포괄할 수 있는 지역이며, 특히 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유교적 봉건주의 내의 궁중문화가 꽃피었다가 지금까지 보존 전승된 지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작년에 종묘제례악과 일무가 프랑스 국립샤이오극장에서 공연되어 절찬을 받은 적이 있는데 예술 사조가 빠르게 바뀌는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이처럼 느리고 장중한 음악과 엄숙한 격식을 갖춘 춤이 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프랑스인 관객들은 그 공연을 통하여 절제와 느림의 동양적 미학을 만끽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외국인들에는 새로운 예술이므로 원형성을 최대한 유지하여 외국에서 공연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이러한 경우나 파격적인 창작을 위해서나 모두 전통을 제대로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듭니다.

이병옥: 물론입니다. 특히 서울·경기 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고구려문화권과 백제문화권, 궁중문화권과 서민문화권, 서해안지역과 내륙지역, 산악와 평야지역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중첩되는 지역도 많으며 지방으로부터 진출한 예인들도 많아서 얽혀 있는 전통춤의 생성 배경에 대하여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악으로 예를 들면 무당과 농악대가 함께 마을 제사를 지내며 농악의 전승력이 한강 이북과 이남으로 나누어 각각 약하고 강합니다. 소지역으로 나누면 각각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지요. 산대놀이에서 볼 수 있는 춤사위들은 해서지방의 탈춤이나 영남지방의 오광대, 야유와는 달리 다양하고 섬세하며 중성적입니다. 도약춤이기보다는 답지춤이고요. 굿춤을 보면 한강 이북은 도무가 많은 강신무의 춤이 많고 이남은 도무하지 않고 비껴서 들락거리거나 돋움새로 추는 세습무의 춤이 많아요. 그런데 이 세습무의 춤은 강신무의 영향을 받은 것이어서 무복을 굿거리마다 갈아입고 다양한 무구를 사용하는 무구춤이라는 점에서 남부지방 세습무와는 또 다른 춤입니다.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이 얽혀 있던 궁중문화와 우리나라 북부와 남부의 문화가 융합 또는 완충된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줌아웃 대화 피아니스트·문학 석사·문화예술교육사 이정미 관련 사진



백제금동대향로를 통해 본 무용문화의 예술성


이정미: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는 전염병인 메르스로 온 나라가 긴장해 있을 때 현장답사를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한산한 국립부여박물관에 갔다가 백제 금동대향로를 보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향로 하나에 응축된 무한한 신비로움에 넋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논문을 쓰는 과정 중에 향로 뚜껑의 봉황 아래에 다섯 명의 악사가 들고 있는 악기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그 중 완함과 북을 통해 남방계통의 문화와 교류한 흔적을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부여 지역의 논바닥에서 발견된 이 물건에 대하여 아주 세부적으로 분석하신 선생님의 논문이 있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건국 초기에 지금의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자리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가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까지 확장되면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는데 금동대향로는 그 문화의 결정체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고구려 벽화에 이어 이 향로를 분석하시면서 무용학적으로 내리신 결론은 무엇인지요?

이병옥: 이 향로 하나에 105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정신세계가 응축되어 나타날 만큼 가치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분벽화의 사방 벽면에는 주로 무용과 관련된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지상세계의 삶을 표현한 것입니다. 고분기둥과 천장받침대와 천장부분에는 구체적으로 무용과 관련된 그림은 없지만 율동적인 그림들이 많고 이것은 천상세계의 삶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금동대향로에는 실제로 춤을 추는 장면이 한 곳도 없지만 인물과 동물, 조류 모두가 춤추는 듯한 율동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정미: 아! 그렇게 분류될 수 있는 거군요. 고구려 안악3호분에서는 서역인 또는 인도인으로 보이는 무용수가 인도춤 카탁(Kathak)의 스와스티(swasthi)동작을 취하고 있지요. 만(卍)자 모양으로 몸을 꼬는 그 동작이 복을 불러오는 자세라는 카탁 무용수 오인우의 설명이 있었는데요, 발목에는 방울띠 같은 것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인도 무용수가 맞는 것 같아요. 궁구르(ghungroo)라는 수많은 쇠방울은 원래 종교적인 인도춤인 카탁을 출 때 발목에 차는 무구거든요. 참 재미있는 것이, 북인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스페인으로 넘어간 집시들도 정착 초기에 발목에다 악기 역할을 하기도 하는 방울을 차고 춤을 추었다고 해요. 안악3호분 행렬도를 보고 장례의식과 연관시켜 생각하면서 고구려에서는 장사 지낼 때도 춤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고 하는 학자가 있던데 집시들도 장례식때 밤을 지새우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예술적 교류 또는 전파의 흔적을 볼 수 있어서 넓게 보면 한 지역의 문화나 지역성이라는 것은 고유성과 수용성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현상 같아요. 신라의 오기(五伎)를 통해서도 주변국이나 서역인과의 교류 흔적을 추정해 볼 수 있고요.

이병옥: 그래요, 백제금동대향로를 부분별로 분석해 보면 봉황의 비상하는 모습, 다섯 마리 기러기의 비상하려는 모습, 다섯 기악천신이 나는 모습, 신령들의 각각 다른 자태들, 농경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 반인반수, 인면조신, 인면수신 형상들의 움직임, 수렵신이 말을 달리는 모습, 호랑이와 곰, 원숭이, 사자, 멧돼지, 산양의 생생한 모습, 두 명의 역사(力士), 고분벽화에서와는 다르게 단정하게 옷을 입은 수박희(手搏戱), 동물을 탄 역사(力士), 날개 달린 짐승 둘, 나는 새와 물고기, 용의 모습 등이 등장하면서 우주에서 움직이는 생명들의 무용적 감수성과 율동미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정미: 신비스럽고 멋진 소우주, 미크로코스모스(Mikrokosmos)네요!

이병옥: 종합해보면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불교의 ‘연화화생(蓮華化生)’, 북방민족의 샤머니즘문화 중심의 무속문화설을 융합한 ‘무불선(巫佛仙) 삼합민족사상’, ‘수렵농경혼합문화’, 북방민족의 천신가무사상과 남방민족의 지신가무사상이 혼합된 ‘음양조화사상’, ‘천지인(天地人) 가무사상’ 등을 모두 주장할 수 있어서 ‘복합민족문화론’의 입장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남방문화가 혼합된 양상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중국 한나라에서 쓰던 박산향로의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요.

이정미: 그처럼 중국과 인도에도 없는 훌륭한 유산을 남긴 백제가 비록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망하기는 했지만 문화적으로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심 지역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백제 문화에 대하여 더욱 연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 우리 무용의 고대사부터 철저하게 연구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병옥: 일본에는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우리보다 열 배 이상 많아요. 그 정도로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전파해 준 것이 많은 우리 민족입니다. 그런데 우리 학자들이나 예인들이 연구와 예술활동을 너무 안이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젊은이들은 k-pop을 통해 세계적으로 문화를 리드하고 있으니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점차 사라져가는 각 지역 문화의 전통을 계속 살려야 보존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생명력을 가지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정미: 네, 우리 전통춤과 음악에 대한 연구가 더욱 다양한 시각에서 지속적으로 깊이 이루어지고, ‘진정한 한류란 이런 것이다.’라고 내세울만한 작품이 풍성하게 창작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대담을 마치고자 합니다. 긴 시간 동안 임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병옥: 고맙습니다.




이병옥_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미_피아니스트, 문학 석사, 문화예술교육사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후 연주자로 활동하며,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서 ‘살풀이춤과 플라멩코의 비교 문화론적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현대음악, 동·서양의 예술 및 통합예술에 관하여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춤을 익히는 체험을 병행하면서 이론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정미_피아니스트·문학 석사·문화예술교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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