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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10.26 조회 7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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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글자, 타이포그라피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정신과 몸


몸은 누구에게나 있다. 인간은 몸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며, 느낀다. 이렇듯 몸은 우리의 지각을 몸 밖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가장 직접적인 매체다. 우리는 몸을 통해 타자를 만난다. 그런데도 몸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무언가 불편함을 느낀다. 이 불편함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형이상학의 오랜 역사는 정신과 몸을 대립의 관계로 설정했다. 존재에 대한 끊임 없는 질문에서 가장 먼저 절대자 신을 그 어떤 외부 조건에 의해서도 불변하는 정념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로부터 분리되어 이성의 힘으로 정신을 통해서 신과 연속의 관계를 획득했다. 이러한 관념은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을 포함한 그 외의 모든 물질을 대립의 관계로 만들었다. 몸은 이성을 바탕으로 정신이 수행하는 대리자일 뿐, 신의 오성(悟性)이 유도하는 바를 거스르는 모든 감각과 욕망의 기관이었다.



줌아웃 에세이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관련 사진



소리와 글자


여기 정신과 몸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에 놓인 또 다른 대상이 있다. 소리와 글자의 관계가 그것이다. 서구 형이상학에서 문자와의 전투가 시작되고 그로 인한 위기가 촉발된 18세기는 감수성, 상상력, 기호 등의 권리 복권이 오랜 로고스 중심주의에 갈라진 틈을 만들었다. 루소는 명시적인 술어로 보편 문자를 비난했다. 신의 오성은 생각하는 실체에 의해 순수한 자기 촉발로만 발생하는 것이고, 외부적이고, 감각적이고, 공간적인, 기표인 문자는 이런 신의 절대 현전을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자 언어. 그것은 위협적인 것, 대리보충, 필요악이었다.



줌아웃 에세이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관련 사진

나 자신만의 서명(signature)을 할 때, 나의 등 뒤에 이미 존재하는 감추어진 텍스트, Twitter에서 발췌, Wikipedia에서 발췌, https://twitter.com/derrida_bot


몸과 글자의 놀이


서구 형이상학은 공간 위주의 사유를 지속했다.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를 입증하려 했다. 시간은 변화하고 덧없이 움직이지만, 공간은 언제나 정확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를 쫓았던 사유의 전통 속에서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물음은 몸을 다시 불러들였다. 음성의 절대 권력 속에서 구텐베르크는 문자에 활자성(활자성은 안상수가 이상(李箱)이 한국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효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월터 J. 옹의 '문자성'을 타이포그라피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을 부여하며 자유롭게 만들었다. 몸이 상징하는 관계와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문자를 의미의 무수한 숲에서 연결과 확장을 반복하며 살아 움직이게 했다. 오랜 편견으로부터 문자가 회복한 권리는 글자에 실체적 몸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글자는 이제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닌 의미의 생성과 소멸에 직접 관여하는 그 자체로 매체이자 방법론이다. 글자를 부리는 디자이너는 타이포그라피라는 이름으로 글자를 소재로 의미의 관계망을 분절하고 다시 조합하며 글자와 주변 영역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탐험하는 방식으로 말을 건넨다.



줌아웃 에세이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관련 사진

초기 목판인쇄기, 1568, Wikipedia에서 발췌, https://en.wikipedia.org/wiki/Johannes_Gutenberg


각인된 습관


물질을 신의 영역으로부터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이질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데카르트적 전통은 실증과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증과학은 사물들을 필연적으로 공간화해서 사유한다. 공간적인 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잴 수 있고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필연적인 수학적 법칙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실증과학은 공간을 지배하는 기하학적 법칙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것을 사물의 존재 바탕에 이르는 모든 것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됐다. 문제는 현장과 학교를 불문하고 이러한 전통이 창의성을 가장 필요로 하는 분야에 양적 문제 해결방식에 대한 맹신, 지나치게 많은 것을 논리에 의존하려는 태도로 여전히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디자인 분야에서 직관의 힘은 마케팅과 브랜딩의 끝자락에서 형식을 생산하는 스타일링으로 전락했다. 예측하지 않은 잠재태를 실험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적 탐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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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실증과학의 대상으로 편입된 역사, Andreas Vesalius의 Fabrica에서, Wikipedia에서 발췌, https://en.wikipedia.org/wiki/Andreas_Vesalius


관계적 디자인을 향하여


급진적이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근대 제조 형식이 낳은 대표적 현상인 디자인의 태동기에 급변하는 생산과 소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잊혀 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 있었다. 모리스는 러스킨의 사회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불완전성이 모든 생명의 본질이라는 철학으로 자연과 생명에 대한 믿음과 고딕 건축의 소박하고 자유로운 공인의 손에 의한 예술을 진보와 변화의 표상으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그의 세계관에는 노동, 시간, 움직임, 창조자의 희열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몸의 가치를 잊었다. 지나치게 분업화된 시스템은 감각과 직관을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성과 논리에 의존했다. 다시 몸이다. 몸은 우리가 멀리했던 감각과 직관의 총체이자, 잊고 지냈던 자연의 원리에 지배 받는 궁극적 실체이다. 몸은 또한 물리적 움직임, 노동, 행위의 매개이자, 사회문화적으로는 큰 것에 반한 작은 것의 가치, 보편성에 반한 다양성의 가치, 기성에 반한 직접 만드는 것의 가치, 위에서 아래로에 반한 아래에서 위로의 가치에 대한 상징이다. 몸은 또한 관계, 교환, 연쇄 고리, 유대, 전이성, 마이크로-커뮤니티, 개입, 대화, 틈, 사건, 이웃, 구체적 공간, 공존, 로우 테크, 협상, 변수, 단역의 사회, 투영성, 참여, 접속 등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시각문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양태를 대변한다. 몸을 통해 다시 떠올리는 가치들은 세기를 가로질러 모리스가 꿈꿨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줌아웃 에세이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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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아웃 에세이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관련 사진


줌아웃 에세이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관련 사진


줌아웃 에세이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관련 사진

타이포잔치 2017, 사진: 문화수도 김진솔



[참고 문헌]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2015 개정판
김종갑,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 건국대학교출판부, 2004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2015
명승수, 『현대 디자인학의 지평』, 월간디자인출판부, 1989
이상봉, <서양 고대 철학에 있어서 공간>, 『철학논총』, Vol.58, 2009
이정우, 『주름, 갈래, 울림: 라이프니츠와 철학』, 기획출판 거름, 2001
안상수 (1995) '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李箱시에 대한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안병학 2002년부터 작업실 사이사이를 운영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을 바탕으로 작업해왔다. 사회, 문화, 정치적 입장에서 디자인의 미래 역할을 다시 설정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관계적 미학, 잠재적 형태를 꿈꾸며 타이포잔치 2017 총감독 했다. 홍익대학교와 런던 영국왕립미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홍익대학교에서 타이포그라피와 그래픽 디자인을 가르친다.


안병학_그래픽디자이너,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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