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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10.26 조회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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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인의 서재]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춤인의 서재]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임경용_ 더 북 소사이어티 대표

줌아웃 에세이  더 북 소사이어티 대표 임경용 관련 사진

이탈로 칼비노 전집, 민음사, 이현경 옮김, 2014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무궁무진한 이야기는 모든 창작의 기본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영화나 연극이나 공연을 만든다. 그러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도 무궁무진하다는 점은 다행이다. 글이나 사진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도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물론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새로운 이야기(내용)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형식)이야말로 창작자가 가진 유일한 소임일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능숙한 이야기꾼이지만 그의 글들은 모두 서로 다른 방법론을 가진다. 가끔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가 무엇인지 질문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통해 그의 이야기에 접근할 텐데, 우리는 그들을 독자라고 부른다. 독자들은 서점에 들려 수많은 책을 살펴보고 그 중에 몇 개를 골라 자신의 집이나 출 퇴근 길에서 그것을 읽는다. 흥미가 있다면 집중해서 끝까지 읽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책은 어딘가 굴러다니다가 재활용 종이가 되거나 헌책방을 통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몇 년이 지나면 독자들은 분명히 자신이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재미있게 읽은 소설도 대강의 구조 정도만 기억이 나게 마련이다. 캐릭터의 이름이나 디테일한 설정까지 기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은 나중에 친구와 이야기 할 때 이럴 것이다. “그 책? 내가 몇 년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이탈로 칼비노의 후기작에 해당되는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1979)는 사실 이런 책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실망하고 이후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그는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환상적인 이야기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의 소설에서 환상적 요소는 1957년 『나무 위의 남작』을 비롯해 『반쪼가리 자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 같은 ‘우리 선조들’ 3부작을 비롯해 『보이지 않는 도시』와 같은 그의 대표작 전반을 관통한다. 그렇다고 그가 환상소설이라는 장르를 연구하고 그것에 몰두한 것은 아니다.
1967년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로 건너가는데, 68혁명을 경험하고 레이몽 크노와 롤랑 바르트, 조르쥬 페렉, 레비-스토로스와 같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탈로 칼비노는 잠재문학실험실인 울리포(Oulipo)의 일원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1967년에 레이몽 크노의 『푸른 꽃』을 이탈리어로 번역한다. 울리포의 일원으로 그들과 교류했던 경험은 칼비노가 글쓰기 행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 분명하다. 1979년에 발행된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야말로 그 증거가 될 것이다.
그의 소설 가운데 비교적 후기작에 속하는 이 책에서 그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뜻하는 소설의 ‘네러티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책을 처음 펼쳐든 독자들은 좀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당신은 지금 이탈로 칼비노의 새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읽을 참이다. 긴장을 풀라. 주의를 집중하라. 다른 생각은 모두 떨쳐 버려라. 당신을 둘러싼 세상이 흐릿해지도록 내버려 두라.”
이후에도 가상의 독자(실제로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일 것이다)에 대한 그의 말 걸기는 계속된다. 서점에서 책을 선택하고 그것을 집으로 들고 와서 편안한 자세와 이상적인 독서의 조건에서 책을 읽는 것. 이러한 설명은 독자가 책이라는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이탈로 칼비노는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내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그러니까 당신은 여러 해 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던 이탈로 칼비노가 신간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출간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당신은 서점에 들러 그 책을 샀다. 잘한 일이다.”

독자는 이렇게 칭찬도 듣는다.
첫 번째 장 이후에 펼쳐지는 10개의 장은 개별적인 소설이다. 마지막 11번째 장이 첫 장과 마주보는 구조라는 것을 고려하면 결국 이 소설은 10개의 단편 소설로 이뤄진 단편 소설집처럼 읽히기도 한다. 맨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다시 독자에게 말을 건낸다. “”당신 불도 끄지. 책 읽는 거 피곤하지 않아?” 그러자 당신. “조금만 더 보고.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인데 거의 다 읽었어.”” 그리고 소설은 끝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창작자라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배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소설가나 음악가들은 자기 머리 속에 만들 것이고, 영화감독이라면 세트장이나 현실의 어딘가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을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면 13인치 맥북 에어 스크린에서 보이는 인디자인 파일의 흰 화면이 배경이 될 수도 있다. 무용수라면 관객 앞에 놓인 극장이 배경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 배경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상의 공간일 뿐이다. 내가 교보문고에서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교보문고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이야기의 전개 상 서점이 필요했는데 마침 교보문고라는 장소가 서점이 가진 요소들을 충족했고 섭외가 되었을 뿐이다. 세트장이 실제 영화의 배경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세트장의 무대를 실제 공간으로 착각하는 영화감독은 어디에도 없다. 이건 다른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카메라를 향해 이야기를 거는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영화를 가끔씩 본다. 고다르나 우디 알렌의 영화처럼 말이다. 이처럼 무대와 관람석의 경계가 없고, 실제 공연을 하는 행위자가 끝까지 관람석에 앉아서 관객을 모른 척 하는 연극이나 공연을 가정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런 실험들이 있었을 것 같다. 존 케이지가 피아노에 앉아서 4분 33초 동안 아무 것도 연주하지 않고 다시 피아노 뚜껑을 닫았을 때 의자에 앉아 있던 관람객이 느꼈던 당혹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쨌든 존 케이지는 어떠한 음표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탈로 칼비노는 수많은 문자를 타자기를 통해 입력했고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울리포라면 아예 그것을 해독불가능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매우 재미있다. 가끔씩 독자들이 당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책 읽는 것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에 이야기들은 서로 얽히면서 서로를 지지하거나 부정한다. 독자는 그러한 과정에서 내가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것을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경험한다. 이 책에 나오는 구절처럼, 독자들은 글 쓰는 행위라는 물질성을 통해 글쓰기의 진실을 경험하게 된다.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임경용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이론과 영화 프로듀싱을 공부했다. 2010년부터 서점이자 프로젝트 공간인 ‘더 북 소사이어티’를 운영하고 있으며 비정기 저널 『공공 도큐멘트』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하다. 출판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 및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임경용_ 더 북 소사이어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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