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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8.31 조회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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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춤·시민·표현: 춤,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가다듬다 : 리즈 러맨

[기획연재] 춤·시민·표현



《춤:in》에서는 시대 흐름을 주시하여 기존의 춤 담론을 주도해온 개인적 창조의 패러다임을 넓혀서 2017년 한 해 동안 시민을 위한 표현이 돋보이는 춤 표현 활동을 연재한다. 《춤:in》은 춤과 정치·권력·인권 사이의 담론을 발굴하여 ‘시민 사회 및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시민과 공생하는 춤 표현의 가치를 적극 사고하는 계기를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본란에서는 시대·문명·사회와 춤의 선순환적 조화를 성취한 특이 사례들이 함께 조명된다.


춤,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가다듬다
: 리즈 러맨

김채현_춤비평가

2001년 늦여름에 9·11테러1)가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날도 무용가 리즈 러맨은 그해 10월 미시건주 앤아버에서 발표할 〈할렐루야〉 연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연작은 1998년에 시작한 후 몇해 사이 여러 도시를 거쳐왔고 미대륙을 횡단하여 2002년에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앤아버에서의 〈할렐루야〉를 제작하기 위해 9월 11일 아침에도 단원들 및 지역민들이 실습장에 모여들었다. 9·11테러 속보가 초를 다투며 전해지는 그 자리에서 러맨은 “이런 엄청난 뉴스를 우리가 어디서 들었는지 이제부터 기억할 것이고 우리의 낙원을 계속 이야기해보자”면서 〈할렐루야〉 준비를 속행하였다.

작품 〈할렐루야〉의 제목은 기독교의 용어를 은유적으로 차용한 것으로서, 현대 미국의 현실에서 찬양의 참모습을 물으며 찾아가는 행보를 거듭하여 모두 15개 도시에서 지속되었다. 미국에서의 불평등, 사회 불의, 인간의 고통을 진단하는 취지로 착상된 〈할렐루야〉는 예컨대 어느 도시에서는 흑인들의 실상이 어떠한지,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없는지 같은 물음을 덧붙였다. 각 도시를 순회하며 해당 도시의 관심 현안을 배경으로 미국의 현실을 성찰하는 공연 취지와 동일한 맥락에서 앤아버에서의 〈할렐루야〉는 9·11 사태를 반영하였다. 중동에 대한 군사 개입이 날로 고조되는 정세에 휘둘리지 않고 〈할렐루야〉는 9·11 사태를 통찰하는 차원에서 불교까지 포함한 다양한 종교계 인사들의 돈독한 충언을 작품에 녹여내었다. 전문 무용인과 각 지역 전문가, 일반인들의 협동 작업으로 5년간 진행된 〈할렐루야〉는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공론화한 주요 춤으로 평가받았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할렐루야〉


〈할렐루야〉 제작을 총괄 감독한 리즈 러맨(1947~ )은 무대 예술춤과 커뮤니티댄스 사이 적절히 균형을 취하면서 양쪽에서 종횡무진 활약해왔다. 커뮤니티댄스 개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시절에 러맨은 제 홀로 커뮤니티댄스를 모색하였다. 그녀는 유아 때부터 춤 소질을 보였고 청소년기에도 발레(와 현대무용)에서 고품질의 춤 과외를 받았다. 그런 끝에, 1962년 백악관 잔디밭에서 러맨과 친구들이 케네디 대통령2)에게 발레를 선사하는 모습은 당시 유명한 화보 잡지 〈라이프〉에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자녀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도록 하며 서민들의 일상사를 옹호하고 예술의 힘을 신뢰하며 사회를 외면하지 않을 책임을 강조한 그녀의 가풍(家風)은 러맨의 춤 행로를 때때로 뒤흔들었다. 당시 성장하던 민권운동을 지지한 부모를 따라 대안학교에 입학한 후 발레를 접었으며, 다시 대학 과정으로 베닝턴 칼리지3)에 진학하였으나 그만두었고, 이내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진학한 대학도 그만두었다가, 결국 매릴랜드대학에서 춤 학위과정을 밟는다. 이후 뉴욕으로 가서 현대무용을 비롯 여러 춤 스타일을 닦고 안무가로서 입문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사이에 당시의 춤 흐름을 파악하면서 러맨은 다시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때 실망감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뉴욕대학 구내 공연에 잠시 흥미 있었다. 무용수들은 끔찍했다. 출연자 친구들과 무용가가 대부분인 관객들은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발버둥쳤다. 춤 공연에는 내가 찾는 것이 없었고 나는 내가 다른 중요한 그 무엇을 찾는 줄 알게 되었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백조의 호수〉(1982), 가운데가 리즈 러맨

이후 뉴욕에서 미국 춤계로부터의 탈출구로서 그리고 생계를 위한 궁여지책으로서 러맨은 고고 댄서 아르바이트에 종사하지만, 엄청난 성차별에 염증을 느껴 1년만에 포기하였다. 이때의 고생담은 1974년 첫 작품 〈뉴욕의 겨울〉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안무가로서 진로를 정하게 된 것 같은 러맨을 다시 뒤흔들 결정적 계기가 어머니에게서 왔다.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한동안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면서 자기 가족 이야기를 춤으로 만들 것을 결심하였다. 이를 위해 노년층을 찾아 나서고 어느 요양원에 춤 교습을 제안하였으나, 춤 치유가 매우 드문 세태에 요양원은 코웃음부터 쳤다. 아무튼 1975년 요양원에서 춤 교습을 시작한 첫날 교습생들에게서 냉랭한 무반응에 직면한 그 순간부터 러맨은 교습생의 눈높이와 소통에 바탕을 둔 춤 교습에 눈 뜨면서 생애 최대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요양원 춤 교습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그녀는 1976년 여러 연령층의 전문·일반인으로 구성되는 무용단 댄스 익스체인지(Dance Exchange)를 결성하였다. 지금 열 명 남짓의 20대~70대의 무용수로 이뤄진 이 무용단4)은 그동안 러맨의 절대적인 춤 연구개발 동반자였으며, 몇 해 전 러맨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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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기원의 물질(The Matter of Origins)〉(2010)


2010년 리즈 러맨은 유럽핵연구센터5) 의뢰로 〈우주 기원의 물질(The Matter of Origins)〉을 제작 공연하였다. 과학자 3명이 무대 실연에도 참여한 이 작품은 우주의 기원과 물질의 작동 문제를 춤 감성과 과학적 사실 양면에서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2006년에는 유전자 실험의 윤리와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멘델 이래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원리, 생물학적 과정, 치매 유발 유전 질환 등을 소재로 한 〈흉악스런 아름다움: 인간 유전체(Ferocious Beauty: Genome)〉를 춤과 영상 이미지로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모두 해당 전문 과학자들과 수년간의 토론을 거쳐 제작되었다. 러맨은 일반적인 소재의 춤 작품뿐만 아니라 이처럼 춤에 낯선 과학 분야까지 작품화하는 데 적극적이다. 다시 말해, 커뮤니티댄스를 비롯해서 그녀에게서 춤과 춤 이외의 것 간의 장벽은 도무지 존재하지 않거나 무시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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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스런 아름다움: 인간 유전체(Ferocious Beauty: Genome)〉(2006)


리즈 러맨의 커뮤니티댄스는 스스로 개척한 것이다. 커뮤니티와의 소통에 최우선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장기간에 걸쳐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은 그녀의 강점으로 여겨진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96년 포츠머스의 예술기관 의뢰로 제작한 〈해군조선소 춤(The Shipyard Dance)〉이다. 미국 핵잠수함과 전함을 건조한 포츠머스는 해군조선소가 2백년 전부터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 미국 정부의 폐쇄 방침이 알려졌었다. 그러자 도시의 역사를 조선소 중심으로 기억해야 할 필요 때문에 커뮤니티댄스가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후 2년간 러맨과 댄스 익스체인지는 그곳에서 상주하며 현역·퇴역 군인(과 그 가족)을 비롯 ‘모든’ 관계자들, 조선소 노동자, 커뮤니티 구성원들까지 면담하고 토론을 거쳐 공연 내용을 설정하였다. 러맨은 만나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여 춤 소재를 수집하고 또한 준군사비밀인 기지를 일시 개방할 것을 교섭해서 그 도시의 모두가 군사 기지 내부에서 작품에 접근하도록 했다. 3주 동안 옥외에서 커뮤니티 사람들과 함께 전개한 이 공연에 대해 그녀 자신이 자평한 바를 따르면, “춤 덕분에, 사람들은 전에 없던 방식으로 해군기지와 커뮤니티의 정보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러맨은 90년대 이전 참여자들에게 춤을 전수해서 무대에 세웠던 방식을 그녀 스스로 90년대초에 들어 상투적인 것으로 깨닫게 된다. 그러던 터에 〈해군조선소 춤〉부터 러맨은 커뮤니티댄스 제작 방식을 혁신하였다. 즉, 커뮤니티댄스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대대적으로 수렴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였던 것이다. 참여자들의 움직임에서 안무 자료를 착상하고 소통을 적극 실행하는 등 일반인 참여자들을 예술 ‘동반자’로 수용하는 태도가 틀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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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조선소 춤(The Shipyard Dance)〉(1996)


리즈 러맨과 댄스 익스체인지가 만든 춤 작품은 커뮤니티댄스를 포함해서 250편 남짓으로 알려져 있다. 대작(大作)이 상당수 차지하는 이들 작품이 다루는 것은 이민, 생태계, 노화, 장애, 인종 차별, 빈곤, 역사 기억, 전쟁의 트라우마, 퀴어미학, 유전공학, 핵물리학 등 (미국 사회의) 시민 삶의 전영역을 망라한다고 보아 무방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청소년기 때부터 익히 들어온 예술이 사회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자기 식으로 풀어낸 결과로 해석된다. 러맨에게서 예술과 커뮤니티의 결합은, 그녀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순수 예술과 (포괄적 의미의) 정치적 시각이 춤에서 종합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그 결과, 커뮤니티의 전반적인 문제와 정서를 춤으로 수렴함으로써 러맨은 시민 지향의 대화(civic dialogue)를 폭넓게 실현할 수 있었고, 이는 민주주의의 신장(伸張)이라는 시대정신을 춤으로 매우 명료하게 구현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혹자는 리즈 러맨을 ‘춤의 민주주의자’라 지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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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 Muscle, Bone: 건강과 가난의 사연들〉(2013), 어번 부쉬 위민과의 합작 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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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ing Wars〉(2014)


1) 9월 11일 아침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민간 여객기 4대를 납치하여 두어 시간 사이에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충돌해서 WTC 빌딩을 붕괴시키며 자살한 테러 사건. 항공기 탑승객 266명과 국방부 관리 125명, 세계무역센터 민간인 약 3천명이 사망했고, 이후 미국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향해 대 테러 전쟁을 감행하였다.
2) John F. Kennedy(1917~1963). 1961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민권신장 등 진보적 정책을 적극 펼쳐나가던 도중 암살당하였다.
3) Bennington College. 미국 동부에서 1932년 창설된 춤 교육 기관으로, 마사 그레이엄과 도리스 험프리의 젊은 시절 초창기 현대무용을 비롯하여 60년대까지 현대무용 성장과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4) 이 점에서 세대 통합형 무용단으로 분류되며, 그 구성의 특성상 댄스 익스체인지는 전문 무용수들만이 출연하는 공연에 비해 기량과 양식이 뒤처진다.
5)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대형 입자가속충돌기를 갖춘 연구소. 100개국 넘는 나라의 과학자들이 참여해서 건설하였다.
6) 참고로, 러맨은 평소 마르셀 뒤샹의 다다 미학에 찬동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참고 자료]
· 리즈 러맨 공식 웹사이트 바로가기
· 댄스 익스체인지 공식 웹사이트 바로가기
· 〈해군조선소 춤〉 바로가기
· 〈Healing Wars〉(2014) 영상 자료 바로가기
· 〈우주 기원의 물질〉 영상 자료 바로가기
· 〈흉악스런 아름다움: 인간 유전체〉 영상 자료 바로가기




김채현 춤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민음사),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사회평론)를 비롯 다수의 논문, 그리고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등의 공저와 ≪춤≫(청년사), ≪미적 체험의 현상학≫(민음사)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춤 영상 문고를 개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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