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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8.31 조회 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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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들>>과 무용수 사이의 애매모호함

공영선_안무가

이 전시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막상 글을 시작해보려고 빈 페이지와 마주 앉으니 온통 끊이지 않는 질문들만 쏟아진다. 이 글에서는 직업 무용수로 무대에 막 서기 시작했을 때부터 최근 몇 년간의 안무작으로 이어온 질문들까지 무용을 생각하는 나의 애매모호함이 고스란히 드러날 듯하다. 따라서 우여곡절을 겪어가는 무용수의 입장에서 철저히 써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들과 애매모호하게 이어가는 현재에 대한 자기 고백일 것이다. 그것이 전시 리뷰가 가져야할 적당한 역할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무용수들>>이 무용수에게 무엇을 질문하였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어떠한 생각으로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리뷰1. 전시를 보며;


<<무용수들>> 전시에서는 저항하는 신체,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써의 신체를 보여준다. 이들의 몸은 대치하고 있다. 맨몸으로 길 위에, 무장경찰 앞에, 죽음 앞에, 생을 향하여 절실함으로 존재한다. 이들의 제스처는 뚜렷한 목적을 띠고 현장에서 기능하거나 기능하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전시장의 전체적인 인상이라면 인상이랄까, 가장 직관적으로 다가온 감상이었다. 사실 거기에는 분명히 현장에 위치하는 실재하는 몸과 재현하는 몸이 섞여있지만 재현하는 몸 또한 미적 대상으로 장식하기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때문에 실재하는 몸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형태로 읽히거나, 정치적 사회적 관점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일곱 명의 작가들의 작업을 안무의 관점에서 관찰하자면 현장의 행위를 프레임 안으로 가져오면서 구조화시키거나 재배열을 통해 기존의 맥락을 탈락시키고, 현장으로부터 오려낸 행위를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이들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용수들'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는 데에는 작업 과정을 안무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이유에서이다. 요아킴 코에스터의 <타란티즘>과 이고르 그루비치의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두 작품에는 실제로 훈련된 무용수들이 등장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무용수가 아닌 등장인물들 역시 작가적 시점을 거치며 무용수로 변모한다.



줌아웃 프리뷰 안무가 공영선 관련 사진

사진제공 아트 스페이스 풀

앞서 언급한 실제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두 개의 작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행위의 재현을, <타란티즘>은 상태의 재현을 구현한다.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실제와 재현의 두 영상을 나란히 상영하고 있는 영상 작업이다. 왼쪽 영상에는 폭동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오른쪽에는 이를 재현하는 무용수들이 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폭동에 가담하는 사람들의 실재하는 절실함의 몸짓이 내러티브에서 떨어져 나와 반복과 리듬의 안무기법이 가미되어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춤으로 변환된 것이 어쩐지 불편하다. 사회적, 정치적 사건이 예술작품에서 다뤄질 때, 이것을 미적 대상화 한다는 것에 대한 문제는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타란티즘>의 무용수들은 일종의 경련이 일어난 듯 죽을 것처럼 혹은 살기 위해 격렬히 움직인다. 이 작품을 움직임의 형식적 재현과 구별하여 상태의 소환, 재현의 관점으로 관찰하였는데, 이 점에서 안무가로서 가지는 재현에 대한 극복과 실재성에 대한 고민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내가 안무 작업을 통하여 찾고자 하는 실재하기란 '움직임을 향한 존재'를 극복하고 그곳에 실재하기 위한 시도와 노력의 상태이다. 충분치 않을 수 있지만 특정 상태에 도달한, 혹은 도달하려는 과정으로써 실제적인 몸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과도 같이 자발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몰입하는 태도를 이끌어낸다는 면에서 <타란티즘>의 무용수들을 (분명 의도는 다르겠지만)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었다.



줌아웃 프리뷰 안무가 공영선 관련 사진

사진제공 아트 스페이스 풀


리뷰2. 전시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전시를 떠올려보며


다시, 그들은 왜 <무용수들>이 되었을까?
전시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이들의 신체는 매체의 프레임으로 ‘원래의 목적을 괄호침으로써’ 몸짓의 미학적, 정치적 가능성을 전달한다. 이에 따라 전시장에서 목격하는 정치적, 사회적 신체의 목적성이 작가의 혹은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제거 당함으로써 무용수로 변용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간단하게 각 작업들의 내용은 숨기고 아울러 관통하는 형식에 주목해 보았다는 말로 이해 가능하다. 전시를 모두 둘러보고 전시장을 나와서야 프로그램을 읽어보며 작품들을 다시 떠올려보는데 기획자가 의도하는 바를 읽어 내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나는 그 맥락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먼저 기획자의 표현대로 '원래의 목적을 괄호 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첫째로 들었다. 감상에 있어서 내용을 삭제시키고 형식 그 자체로 주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형식적 차원에 주목하기에 너무나도 비켜나갈 틈없이 있는 그대로의 몸과 몸짓이 나열되어 있는데 말이다. 그런 연유에서 의도와 감상이 만나지 못하고 엇갈려 멀어질 뿐이었다.

줄곧 궁금해왔던 질문이 있다. ‘미술에서 생각하는 무용은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을 이 전시에서 다시 던지게 된 것은 내가 '무용수들'을 발견하게 된 연유와 기획자가 '무용수들'로 명하는 이유가 전혀 다른 것 같다는 추측을 남겼기 때문이다. 기획자가 말하는 비무용의 신체 제스처가 매체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면서 무용으로 변용한다는 주장이 의아했다. <타란티즘>과 <이스트사이드스토리>는 역시 예외로 두고 말한 것인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의 춤이 영상매체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과정에서는 무용이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 것이었는지, 전통적 의미에서 무용 너머에 있는 무용이지만 어딜 보아도 의심할 여지없는 무용이었는데 말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설치미술작가의 작업에 무용수로 참여하였는데 작가가 나에게 요구한 것 중에 ‘무용이 아닌 것 같은 무용’, ‘최소한의 무용’과 같은 표현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둘 사이에서 소통의 편의를 위하여 암묵적 합의를 거친 표현이었지만 이처럼 나 스스로도 '무용'의 범위를 정확하게 가려내기가 어려웠고 ‘무용’이 뜻하는 바가 곳곳에서 각기 다른 정의로 혼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춤, 퍼포먼스, 행위 등 단어의 의미가 반복하여 또는 비교하여 사용되고 있으니 더더욱 혼란스럽다.



줌아웃 프리뷰 안무가 공영선 관련 사진

아트 스페이스 풀


전시 제목이 <<무용수들>>이라서 굉장히 흥미가 가는 전시였으나 동시에 ‘무용수들’이라고 지칭하는 데에서 많은 의문들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연유에서 역시나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나에게 무용이란 것이 워낙 오랜 연인 같기도 하여 익숙함으로부터 비켜서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기회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전시가 무용 바깥으로부터의 사유를 이끌었으니 역시나 성공적인 전시이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뷰어로써는 이런 애매모호함으로 글을 쓴다는 게 여간 고생스러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전시가 가리키는 바에 눈을 맞추고 집중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었는데 아마도 무용하는 사람이 ‘무용’을 소재로만 바라보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몸만 쓸 줄 알고 글로 예술을 배우지 못한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프로그램에 실린 기획자의 글 ‘운동의 환영, 망설임, 변용: 영상매체와 신체 제스처’가 내겐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글을 마무리 짓는 이 시점까지도 전시의 ‘도’도 모른 채 이렇게 애매모호한 리뷰를 써도 될까? 하는 질문이 든다. 그러나 ‘원래의 목적을 괄호 친’ 곳에서 생겨나는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을 애매모호함이라 생각해 보기로 한다.




공영선 안무가. 공영선은 바다와 햇빛과 고래를 좋아하는 여자로 춤 기반의 공연예술 일을 하고 있다. 인간과 미래의 가능성으로써 믿음과 감각에 주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최근에 같은 맥락 안에서 <소초리 달 뜬 밤(2016)>, <도깨비가 나타났다(2016)>, <Do you believe what you see? Do you see what you believe?(2017)>를 안무하였다.


공영선_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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