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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5.25 조회 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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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인의 서재] 『자아연출의 사회학』
- 예술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가이드

[춤인의 서재]



『자아연출의 사회학』
- 예술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가이드

정진세_극작가·비평가

줌아웃 에세이 극작가·비평가 정진세 관련 사진

『자아연출의 사회학』, 어빙 고프만, 진수미 옮김, 현암사.


“인생은 연극이며, 세상은 연극적 무대(Theatrum Mundi).” 이 말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계시 혹은 소명으로써 제 역할을 다하며 사는 세계관을 이른다.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민중들은 천국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굴레처럼 지워진 세속의 '과정'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즉슨, 이 말은 고된 현세에 대한 일말의 위안이었으며,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개개인의 체념 상태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테아트럼 문디’가 중세의 상황을 ‘연극+신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개념이라고 한다면, 책의 제목인 ‘자아연출의 사회학’ 은 현대의 상황을 ‘연극+사회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말이라 하겠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민주사회로 진입한 ‘지금 여기’ 의 개인들은 자기표현을 통해 상황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더 이상 신(神)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반면, 속세에서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나(self)’ 들의 감시를 신경 써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도 사실이다.

저자인 어빙 고프먼은 이 책에서 “개인이 일상에서 남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방식, 자신에 대해 남들이 받게 될 인상을 유도하고 통제하는 방식, 남들 앞에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일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무수한 '역할' 은 나름대로의 당위성과 타당성을 갖고 있다. 브레히트가 ‘게스투스(gestus)’ 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화된 역할에서 파생된 진부함을 비판했다면, 외려 어빙 고프먼은 그러한 역할행동의 진부함이 갖는 '효과'에 대해 논하고 있는 셈이다.

미리 밝히자면, 이 책은 자기연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대신 자기연출이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사례 분석한 쪽에 가깝다. 저자가 밝힌 일상에서의 ‘연극적인 상황’ 은 실제로 그 역할에서 요구되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협업의 방식으로 고안되어온 방식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연출 혹은 연출은 위한 팀은 왜 필요할까? 현대사회에서 상대를 물리적으로 혹은 감각적으로 통제할 절대적 수단은 없다. 상대방을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이미지를 연출하고 조정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상대방의 반응을 유도해 내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이 상대에게 제공하는 정보량을 조정하거나, 특정한 담론을 극적으로 포장하거나, 본래 의도를 적당히 은폐하고 노출하는 기법이 동원된다. 개개인은 아무런 사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 안에는 목표 달성을 위한 ‘큰 그림’ 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연출된) 표현들이 선보이는 ‘무대’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앞무대’와 ‘뒷무대’라는 두 개의 상반된 연출 공간을 제시한다. ‘앞무대(front)’가 공연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편적이고 고정된 양식에 따라 상황을 정의하게끔 하는 개인의 공연 부분이라면, ‘뒷무대(back stage)’는 사람들이 공연에서 조성된 인상과 어긋난 면모를 알면서도 버젓이 드러내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상의 경험이나 직업교육의 정보 전달을 통해 알게된 전문직들의 퍼포먼스가 ‘프런트’에 해당한다면, TV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접하게 된 프로페셔널의 속내가 ‘백스테이지’에 해당될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백스테이지의 모습이 충격적인 사실을 증언하는 르포나 다큐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예술계의 뒷무대


무대예술가의 입장에서는 책이 전하고 있는 ‘무대’에 대한 은유를 은유로 떠올리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독서과정에서 본인의 머릿속을 채운 이미지는 1차원적으로 연상되는 무대와 배우의 모습들이었다. 이를테면, ‘무대’에서의 진실한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배우는 무대 옆 대기공간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극장 바깥에서 흡연을 하며, 분장실에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는다.

앞무대에서 진지하고 선량한 모습을 보인다고해서, 뒷무대에서도 꼭 일치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외려, 공연기간 내내 극심한 긴장상태에 놓여있는 자아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뒤에서는 퇴행적인 방식의 배출이 양해될 수 있는 것이다.

“뒷무대식 언행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허물없이 주고받는 호칭, 일사불란한 의사결정, 불경한 말투, 노골적인 음담패설, 불평불만, 허술한 옷차림, 단정치 못한 자세, 사투리나 수준이하의 어법, 중얼거리는 말투와 큰 소리, 거친 농담과 조롱, 남들을 배려치 않는 사소하지만 상징적인 언행, 콧노래나 휘파람, 군것질, 트림과 방귀 따위다.” (164쪽)

본문에서 나타난 뒷무대의 모습은, 너무나도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배우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주는 동시에, 관습화된 연극의 모습을 은연중에 폭로하고 있다. 의도와는 다르게 저자가 전달한 내용은 예술계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예술계의 이면은 진실의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일상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자기모순을 비롯하여, 앞에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추악함, 무대 상연을 통해 얻게 되는 실제적인 보상의 초라함, 여기서 비롯되는 박탈감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뒷무대는 앞무대에서 행해지는 연출 혹은 기만적 행위에서 오는 자기-소외를 해소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양한 역할구성으로 이뤄지는 공연 프로덕션의 경우, 그 곳에서도 재차 소외되는 멤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한국예술계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자기연출의 사회학이라는 개념은 특정소수를 위한 처세술로 굴절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최근 문제가 되는 예술계의 사례들은, 연습실에서 벌어지는 성차별, 뒤풀이에서 일어나는 성추행, 행사를 준비하면서 발생하는 인격모독적 행위 등 뒷무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다. 결과적으로 모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 업계의 전문성 제고를 위해 구성된 자아연출의 팀은, 앞서 언급한 일들로 인해 야만적인 팀워크로 평가절하되며, 중세적인 프로덕션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자아연출의 방향은 비인간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셈이다.

저자는 “팀마다 특정 상황 정의의 안정적 유지에 골몰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실을 감추거나 하찮게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쯤 교활한 음모자 노릇을 실행하는 공연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대목을 통해 예술계의 관습과 적폐는 쉽게 구분되지 않으며,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동시에 조직의 문화를 바꾸는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조직의 문화적 가치는 조직의 여러 문제에 대해 참여자들이 느껴야할 감정을 상세히 규정하는 동시에 참여자들이 속으로 어떻게 느끼든 간에 겉으로 유지해야 할 틀을 규정”한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상대방(관객)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의식이며, 더 나아가 그 개인이 속한 조직의 문화임을 기본적으로 전제함으로써 도덕적인 차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연출의 사회학과 자아연출의 미학


『자아연출의 사회학』은 - 현재 한국에서 소개되고 유통되는 방식과는 다르게 -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로 읽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물론, 본인은 어느 순간부터 예술계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안내서로 읽었다.) 책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특정 상황에서 요구되는 극적인 역할들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선행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연극적인 프레임으로 사회적인 고찰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극작가인 본인에게는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요컨대 책의 핵심을 제멋대로 파악해보자면, 현실에서 양가적인 상황은 언제나 발생하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 진실규명이나 가치판단 보다도 - 해당하는 모두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상황에 참여하고 있으며, 저마다의 연출이 존중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픈 부분은 ‘비평’의 속성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자기연출을 시도함에 있어서 “개인이 계산된 비의도성을 내보이려 시도해도, 그것을 꿰뚫어 보려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조작하는 능력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른바, 통찰력과 자기성찰을 기반으로 하는 ‘비평적 능력’은 언제나 과잉 연출된 상황들을 적발해낼 것이며, 이러한 견제를 통해 연출은 포장된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의 간극을 줄이는 방식으로 발달해 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민주사회를 통해 얻어낸 ‘자기’라는 주체는, 서로를 기만하거나 배신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호적인’ 작용을 통해 발전해나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라는 직업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진부한 관행이 아니라 냉철한 관객일 것이다. 자아연출의 사회학과 더불어 자아연출의 미학이 요청되는 순간이라 하겠다.

어떤 사회적 특성을 지닌 사람이든 타인들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존중과 대우를 받을 도덕적 권리가 있음을 보장하는 원리에 따라 사회가 조직된다. 이와 관련된 두 번째 원리도 있다. 자신이 어떤 사회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거나 명시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 주장과 일치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다. (24쪽)




정진세_극작가·비평가 독립예술과 예술생태계를 위한 담론에 관심이 많다. 극단문에서 드라마 작가와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서 편집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술계를 지지하고 있는 다양한 하부조직 및 하위문화에 주목하고 있다. 그 주목의 결과물로 유사축제, 유사극장, 유사거리를 구성하고 있다.



정진세_극작가·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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