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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5.25 조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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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먼둥(먹구름)>과 인생의 패턴들을 움직임으로 안무하다.
- 인도네시아 안무가 피트리 서탸닝시의 현대무용 <먹구름>을 보고

[독자기고]



<메가먼둥(먹구름)>과 인생의 패턴들을 움직임으로 안무하다.
- 인도네시아 안무가 피트리 서탸닝시의 현대무용 <먹구름>을 보고

천윤희_웹진 《춤:in》 독자

줌아웃 독자투고 웹진 《춤:in》 독자 천윤희 관련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1.
북 치는 소리와 함께 무대가 밝아졌다. 붉은 긴 천이 휘장처럼 천장으로부터 양 쪽으로 늘어져있다. 그 앞에 배를 닮은 철조 구조물 위와 아래에 위태롭게 서있는 댄서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타원형 그릇 위에 맨발로 서 있다. 한동안 균형을 잡으려는 미세한 움직임만 보이다, 점차 댄서들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바닥의 모래와 철제 볼의 마찰음이 중첩되어 퍼진다. 차르르 차륵 일정치 않지만 파도소리일까. 바람소리일까. 곡식을 체에 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조용하고 미세하며 일상적인 듯한 움직임과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스르륵 잠이 올 것만 같았다.
흰옷을 입은 댄서들이 공간으로부터 나오자, 댄서들은 극심한 추위와 고통에 시달리는 듯 온몸을 떨며 괴로워했다. 다른 댄서가 와서 어루만지면 평안이 찾아오는 듯 했다. 둘은 함께 다시 보폭을 맞추어 움직였다. 어떨 때는 둘이 함께 고통을 마주하기도 했다. 어떤 댄서는 혼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스스로 나아졌다. 이들이 구조물 안과 밖으로 움직이는 동안 발의 움직임에 따라 모래들이 쓸리는 소리, 모래 먼지 들이 무대 위로 피어오르며 관객석까지 먼지바람이 난다. 이들은 함께 울부짖는 듯 하기도 했고, 함께 웃는 듯도 했다. 그들의 내면이 표정과 몸의 움직임 속에 느껴졌다. 상호의 움직임들. 그들의 생생한 고통과 회복의 패턴이, 오고 가며, 혼자서 혹은 여럿이 신체를 통해 무대 위에 넓게 한동안 표현되었다. 그동안 무대 중앙의 공간 안에 있는 한 댄서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천천히 판 위에 선을 긋고 있다. 선과 선이 모여 완성된 형상은 ‘집’이다. 댄서는 그 집 그림을 관객이 보는 구조물 정면에 건다. 그리고 어느 새 무대의 한쪽 끝에는 ‘흔들목마’를 타고 있는 한 여인이 등장했다. 무대에서 댄서들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 아이 같아 보이는 여인은 ‘흔들목마’를 타고 있다.
무대에는 인도네시아 전통악기 인 듯 보이는 현악기와 관악기, 타악기의 연주가 계속되며, 댄서들의 움직임과 조명과 무대의 분위기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댄서들은 구조물을 중심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며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구조물 아래층에 모두 8명의 댄서들이 철의 마찰음 소리를 내며 도르래 같이 잡아당기자 천천히 그들이 선 바닥 전체가 천천히 기계음과 함께 위로 올라간다. 그 위로 비가 쏴아 내렸다. 그 빗속에서 안도하고 환희에 차 보이는 댄서들. 그들은 다시 한 명씩 한 명씩 의지해가며 따로 또 같이 구조물로부터 나온다. 흰 옷의 댄서들이 꽃무늬가 화려한 셔츠를 덧입고 다시 등장했을 때 그들의 손에는 흰 명주 천으로 감싼 곡식이 들려 있었다. 이들은 객석으로 걸어 들어와 마주하는 관객들에게 곡식을 선물했다.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은 댄서들이 구조물에 거꾸로 있던 네모의 판을 뒤집는데, 그 안에 든 이미지는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과 항해하는 배 그림이었다. 이것으로 ‘메가먼둥’, 먹구름 공연은 끝났다.



줌아웃 독자투고 웹진 《춤:in》 독자 천윤희 관련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
언론에서는 이 공연을 인도네시아의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가 ‘무용수의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거대한 먹구름’ 패턴을 선보인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무용 공연은 처음이었고, 또 무용을 좋아하지만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신체가 만들어낼 ‘먹구름’이란, 소나기 쏟아지기 전의 고요와 함께 폭발적인 순간을 기대하며 비발디의 사계의 여름 ‘3악장’ 과 같은 느낌을 원했던 것 같다. 역동적이고 거대하고 가슴 시원해지는 듯한 그 무엇 말이다. 그러나 공연을 보면서 내내 느낀 것은 이 무용은 매우 시각적이며, 내밀하며, 섬세한 내면의 이야기를 신체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움직임으로 채운 공연이고 다양한 소리 외에 언어는 어디에도 없었건만, 연극처럼 이야기가 내면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내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구나 싶으면서도, 농경문화와 해양문화가 어우러져 사는 인생들의 삶의 단면들을 보는 듯도 했다.
‘메가먼둥(먹구름)’은 이 시대 돋보이는 인도네시아 젊은 안무가로 일컬어지는 피트리 서탸닝시(Fitri Setyaningsih)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지원을 통해 안무한 작품으로, 그녀의 유년기 기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늘의 구름이 그녀를 어떻게 실어 나를지에 대한 상상은 인도네시아 전통 천 문양 공예인 ‘치레본 바틱(Cirebonese batik)’의 모티프인 ‘먹구름’으로 연결되고 결합하여 안무적 상상력으로 구체화되었다. 유년기의 안무가가 왜 구름에 실려 가는 상상을 했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순간을 기억케 하는 시각적 상징처럼 구름이 기억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구름이 살아 움직여 그녀를 데리고 가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이 공연은 음악, 안무, 세트 디자인, 의상이 함께 어우러져 씨실과 날실처럼 ‘먹구름’의 패턴을 디자인하고 표현해 낸,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요소를 동시에 담고 있는 특별한 작품이다. 한편 관객으로서는 ‘먹구름’의 상태가 가진 은유적 이미지가 어쩌면 다양한 삶들의 갈등 속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를 잘 표현한 것 아닌가 싶다. 먹구름이 오면, 자연계 내의 세계는 그 긴장과 갈등이 증폭하나 곧 비가 쏟아진다. 해갈되는 것이다. 갈등하고 풀어지고 다시 새로운 갈등의 씨실과 날실의 작지만 연속적인 움직임의 연속이 우리의 가정이며, 역사이며, ‘항해’중인 인생이다. 그것은 곧 안무가 피트리 서탸닝시가 현대 무용을 통해 담고자 하는 또 하나의 몸의 언어였고 삶의 언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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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아시아문화전당



천윤희_웹진 《춤:in》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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