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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4.27 조회 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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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적 무용학 (Critical dance studies)의 가능성

문지윤_큐레이터

학위논문의 요약본을 기고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처음에는 사실 난감했다. 물론 좋은 논문은 한 줄로 말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E=mc2의 수준은 아닐지라도!) 나는 불행하게도 끝끝내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Choreo-graphy: The Institutionalisation of the Body and the Event of Writing』. 긴 논문의 제목도 사실 본문을 끝내고 끙끙거리며 겨우 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몇 달 전 논문 심사가 끝나고도 무언가 끝난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무언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은 단순히 논문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만이 아니라 비평적 무용학이라는 지형 자체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직 진행 중인 다양한 안무적 실험에 대한 동시다발적 반응으로서의 비평적 무용학은 아직 많은 부분을 미술사적 방법론이나 대륙철학의 프레임에 의존하고 있다. 실천과 이론, 비평과 생산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이동하며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비평적 무용학은 아직 현장에서도, 아카데미안에서도 매우 불안정하고 어정쩡한 방식으로 위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적 무용학의 출발점은 사실 매우 명료하다.



코레오그래피


비평적 무용학은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굳이 안무라는 우리말을 대신해 코레오그래피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이 신조어 자체에 이미 어떻게 춤이 근대 예술제도 안으로 편입되었는지 증명하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코레오(몸)-그래피(쓰기). '춤추는 몸'은 왜 '쓰기'라는 행위와 결합되어졌던 것일까.

논문에서 나는 코레오그래피라는 개념어를 대륙철학의 주요 의제들과 연결시키고 코레오그래피라는 개념어를 작동시키는 일련의 동시대 안무적 실험들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일부러 하이폰을 넣어 코레오-그래피라는 개념어로서 동시대 안무적 실험들에 대해 비평적 글을 생산하고자 했는데, 이유는 코레오그래피라는 개념어가 자연발생적인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전략적 목적을 위해 누군가가 발생시킨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라틴어로 '몸'과 '쓰다'라는 단어들이 합성된 신조어인 코레오그래피는 마치 사건 현장에 항상 남는 단서들처럼 서양 근대 예술제도에서 춤이 쓰기 안으로 포섭되는 사건에 대해 우리에게 남겨진 단서이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왜 이러한 사건을 발생시켰는가.

코레오그래피가 지칭하고 있는 사건을 추적하며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는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원제:Exhausting Dance: Performance and the Politics of Movement)에서 16세기로 돌아간다. 코레오그래피라는 신조어의 기원으로 16세기 말 출판된 『오케소그래피』란 책을 주목하는데 이 책은 저자인 투아노 아르보가 카프리올이라는 가상의 인물과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카프리올은 "나귀의 머리와 돼지의 가슴을 가졌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춤의 대가이자 자신의 수학 선생님이었고 자신과 같이 변호사이고 또한 예수회 신부이기도 한 아르보에게 춤을 전수 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때 아르보는 근대 춤의 존재론을 결정짓는 중요한 화두를 꺼내는데 그것은 바로 무용의 아카이브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멜랑콜리아. 서양 근대 예술제도에서 춤이 안무로 포섭되는 과정에서의 드러난 욕망. 붙잡을 수 없는 '지금, 여기'에 대한 서양 근대성의 병적인 집착은 마치 쉼이 필요 없고 충전 따위는 필요 없는 요정과 같은 신체성을 지닌 주체성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영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발레리나에 대한 이미지. 만지면 부서질 것은 몸매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새처럼 날아오르는 역동적인 주체성을 가진 주체성. 춤이 근대 예술 제도에 포섭되면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규정하기 위해 생산한 전략이었다.

레페키가 이러한 주체성의 생산에 주목했던 이유는 춤에서 코레오그래피로 전환되는 시기와 근대성이라는 특정한 서양의 정치적 프로젝트 안에서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나아가는 식민주의적 주체성이 생산되는 시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페키는 식민주의적 주체성 생산에서 코레오그래피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는지 질문하였다. 춤이 왜 코레오그래피로 전환되었는지 질문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의 특정한 주체성이 코레오그래피라는 전략을 통해 어떻게 생산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승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스승님은 스승님의 젊음과 영원히 결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카프리올이 암시한 몸으로 쓰는 행위가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만질 수 있는 신체의 경계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전통적 주체 개념을 너머 부드럽게 혹은 잔인하게 흐르는 일직선성의 시간 개념을 뒤흔들고 방해하는 유령적 존재론이었다. 이제 몸으로 쓰기라는 특수한 근대적 기술로 인해 제자의 몸은 스승의 부재에도 스승의 몸과 결합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제자의 몸은 명령에 따라 (명령하는 주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며 억압적이며 훈육적인 작동방식 안에 포섭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비평적 자세가 동시대 안무적 실험들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제롬 벨의 이나 등과 같은 2000년대 초기 작업들은 바로 무용제도 안에서 훈육된 몸에 대한 비평적 시각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생각했던 것은 많은 동시대 안무가들의 전략이 기존의 제도 비판적 작업과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199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제롬 벨Jerome Bel, 에스터 솔로몬Ezter Salamon, 크리스틴 드 슈메츠Christine De Smedt, 조나단 버로우Jonathan Burrows, 마틴 스펜버그Marten Spangberg 등 일련의 유럽 출신의 안무가들의 동시대 안무 실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이들이 코레오그래피라는 장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해체하고 재조합 하는 특정한 인식론적 게임을 작동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억압적 신체를 생산하는 기술로서의 코레오그래피를 역으로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기술로 새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전략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1960년대 제도비판주의자들의 '거부'와는 뚜렷이 다른 방향성을 가지는데 이들의 거부가 밖을 향하고 있다면 현대 안무적 실험의 전략은 안을 향해 혹은 안에서부터within 출발한다.

나는 이것이 데리다주의자들의 해체의 전략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데리다주의자들의 해체는 기존의 텍스트를 좀더 가까이, 좀더 세심하게 다시 읽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를 통해 묵과되었던, 전제되었던 특정 위계질서에 숨겨진 욕망을 폭로하고 그 한계를 드려내고 그것의 상대적인 효과를 이용하여 기존 체제의 내부 붕괴를 의도한다. 이것은 이항대립적 '거부'도 아니고 모든 것을 포섭하려는 '확대'도 아니다. 해체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행위로서의 '다시 쓰기'이다.

코레오그래피라는 사건을 발생시킨 전략에 대한 연구. 그리고 그것을 해체함으로써 발생하는 새로운 '춤추는 몸'과 '쓰기'의 가능성. 이것이 내가 논문에서 시도하고 싶었던 방법론적 방향이었다. 코레오그래피라는 장치의 '해체적 다시 쓰기'를 통해 동시대 안무적 실험들이 추구하고 있는 정치적 효과는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레페키의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는 영어권에서 비평적 무용학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동시대 안무적 실험들을 대륙철학의 첨예한 의제들을 연결시키는 플랫폼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성'이라는 소제목이 드러내듯 레페키의 저자는 넓은 의미에서 퍼포먼스학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레페키가 이 책에서 연구하는 대상은 1990년대 이후 활동하기 시작한 유럽 출신 안무가들만이 아니다. 그린버그식의 분류법으로 안무가로 표현될 수 없는 윌리엄 포프엘과 같은 동시대 시각 예술가를 비롯하여 196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인 브루스 나우만 등의 작가들을 포함시키면서 레페키는 전통적인 무용학의 학제적 경계를 넘으려고 하였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레페키의 이러한 시도가 퍼포먼스학의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퍼포먼스 예술의 1세대 이론가 리차드 쉐크너가 설립한 뉴욕대학의 퍼포먼스학과는 사실 문학의 지배 아래 있었던 연극의 복종적 위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연극이 문학의 재현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라는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지식 시장의 필요에 대해 민첩한 미국 아카데미의 협조 아래 퍼포먼스학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퍼포먼스학이 기초하고 있는 "확장된 예술"이라는 개념이 결국은 대안적 영토를 생산하지 못하고,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일직선적인 시간 개념을 포섭하려고 하는 미술사-기계의 영향력 아래 기존 제도에 포섭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비평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특히 영어권 아카데미에서는 비평적 무용학이 역사주의적 관점 아래 포섭되어 버림으로써 동시대 안무적 실험에서 드러난 가장 급진적인 가능성, 즉 몸(서양 철학 전통에서 이성과 반대 되는 의미를 가진)을 해체적으로 쓴다(서양 철학의 근본인 로고스-중심주의에 반하여)라는 사건의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퍼포먼스학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지금 여기"라는 개념이 결국은 서양 근대성의 병적인 증후인 멜랑콜리아라는 감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퍼포먼스학의 가장 근본적인 패러독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동시대 안무가들의 실험들은 영어권에서 비평적 무용학이 그 기원으로 삼았던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그들의 후계자들인 1960년대의 제도비판주의의 '거부' 전략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논문을 쓰는 동안 에드리안 히스필드Adrian Heathfield나 조 캘러훼Joe Kelleher 등과 같이 기존의 퍼포먼스학에서 출발하지만 퍼포먼스를 통한 글쓰기, 혹은 퍼포먼스로서의 글쓰기 작업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작년 베르겐 어셈블리에서 처음 상영된 히스필드의 필름 작업 'Spirit Labour'은 조각가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제닌 안토니와 안무가 안나 할프린의 대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히스필드는 이를 자신의 비주얼 에세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비주얼 에세이는 어떻게 퍼포먼스로서의 쓰기가 가능한지 보여주고 있다. 또한 퍼포먼스를 발생시키는 쓰기를 통해 미술사-기계 너머, 실천으로서의 비평적 무용학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히스필드와 같이 비평과 실천 사이에서 작동하는 경우로 보야나 시브히크Bojana Cvejic의 활동도 주목해야 한다. 동시대 안무가들과 같이 드라마투르지 작업을 같이 하기도 하고 이들이 가장 신뢰하는 대변자의 역활도 하면서 시브히크는 점차 그 활동 무대를 넓혀가고 있다. 최근에는 알랑 바디유와 질 들뢰즈에 대한 글쓰기로 알려져 있는 정치 철학자 피터 홀워드의 지도 아래 코레오그래피를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을 통해 논의한 『Choreographing Problems』이라는 박사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쓰기' 작업들은 단순히 비평적 무용학이 철학의 언어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안무적 실험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철학적 화두를 작동시킬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이 반 아이켈Kai van Eikels, 보야나 쿤스트Bojana Kunst, 보얀 만체브Boyan Boyan Manchev 등과 같이 막시스트 비평적 글쓰기의 전통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안에서의 노동 시스템 등 특정한 정치 경제적 이슈를 동시대 안무적 실험과 연결하고자 하는 '쓰기'를 주목해야 한다. 특히 반 아이켈이 자비에 르 루와를 통해 비물질 노동 문제와 춤에서의 기교(virtuosity)에 대한 문제를 연결시킨 지점은 내 논문에서 매우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예술과 비물질 노동의 문제에 대한 연구로는 얼마 전 출판된 쿤스트의 『Artist at Work: Proximity of Art and Capitalism』도 주목할 만 하다. 또한 단순히 비평을 넘어 안무적 실험이 발생시키고 있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와 공동체에 대한 연구들은 비평적 무용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루디 레만Rudi laermans 들의 작업은 도래할 비평적 무용학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출판된 레만의 『Moving together: Making And Theorizing Contemporary Dance』은 공동의 것에 대한 첨예한 논의들과 동시대 안무적 실험에서의 협업의 문제를 연결시키면서 어떻게 안무적 실험이 '공동의 것'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발생시키는지 효과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비평적 무용학은 비평과 실천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교란시키며 그 영토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문지윤_큐레이터 골드스미스 시각예술과에서 서양 근대성이라는 특수한 주체 생산 프로젝트 아래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코레오-그래피 즉 몸으로 쓰기라는 기술의 출현과 이 기술이 동시대 실험들을 통해 해체되는 상황을 연구하며 『Choreo-graphy: The Deinstitutionalisation of the Body and the Event of Writing』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시의 즐거움》(아트선재센터)를 공동 기획하였으며 현재 주영한국문화원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이불, 김소라, 구정아, 김용익의 개인전을 Ikon 갤러리, Art Night, Spike Island 등과 공동 기획하였다. 이주요, 정금형, 더글러스 고든 등의 퍼포먼스/전시를 The Showroom, Delfina Foundation, Locus+와 공동기획하고 있다.


문지윤_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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