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4.27 조회 5127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소진되는 춤, 딸꾹질하는 안무

[춤인의 서재]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학』

[춤인의 서재]



소진되는 춤, 딸꾹질하는 안무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학』

김보경_시각문화연구자

줌아웃 에세이 김보경 관련 사진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학』, 안드레 레페키 지음, 문지윤 옮김, 현실문화, 2014



“지체된다는 것은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근대성의 시간을 늦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의 ‘제스처’를, 그것의 템포를, 총체적인 퍼포먼스의 멈춤과 강약을 나타내려하는 것이다.”
-호미 바바




이 책은 1990년대 말부터 유럽 무용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흐름들을 비평적으로 개괄하고자 뉴욕대학교 퍼포먼스학과 교수인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가 2006년에 출판한 책이다. ‘소진되는 춤Exhausting Dance’이라는 책의 원제가 말해주듯이, 저자는 춤에 관한 기존의 이해를 장악해온 지배적 관념에 치열하게 반응하는 일련의 흐름들을 목격하면서 ‘정지성’으로 대표되는 안무적 전략이 어떻게 근대성과 재현의 경제에서 벗어나 현전의 다른 경제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저자는 춤이 안무로 전환되었던 16세기의 역사적 사건에 주목함으로써 안무를 근대 초기의 발명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최근 연극, 무용, 미술, 음악, 퍼포먼스 등 여러 인접 장르들을 흡수하면서 장르가 모호해진 동시대 예술의 현상 속에서, 이 같은 비판적 지점은 안무의 존재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성찰할 수 있는 접근을 제공한다. 또한 저자는 철학과 안무적 실천이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정치적, 존재론적, 생리적, 윤리적 질문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따라서 안무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적 실험을 작동시킴으로써 근대 시기 억압적 신체를 생산하는 기술로 사용되던 안무가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움직임의 정치학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주체성 생산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현대의 안무적 실험 전략이 역사적 아방가르드나 제도 비판과 같이 밖을 향한 ‘거부’가 아니라, 안에서 출발하는 내부로부터의 체제 붕괴라는 점이다. 즉 현대의 안무적 실험 전략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며, 확장이라는 명목 하에 모든 것을 포섭하고 흡수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안무적 실험들은 ‘안으로부터의 전략’, 즉 기존의 지배적 관념이 지배하는 지형학적 환상 속에서 비가시적인 억압으로 작용하던 기제들, 효과들을 드러내고 해체하며 이것들에 새로운 관계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안무적 실천들은 이 같은 움직임의 정치학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으며 무용학이라는 학제의 경계를 넘어 연극과 회화, 행위예술, 설치미술로 확장되는 안무적 실험을 행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예술과의 장 속에서 춤의 고유한 경계를 넘어 안무를 재설정하고, 몸과 주체성, 나아가 움직임과 정치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는 계기를 촉발한다.



안무의 존재론: 부재하는 마스터의 목소리


스승의 춤을 물려받기 위한 제자의 마음에서 출현한 코레오그래피(Choerography)라는 조어에는 안무의 존재론적이고 역사적인 효과들이 모두 들어있다. 즉 우리가 코레오그래피의 어원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본다면, 안무는 존재론적으로 부재와 죽음을 떠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안무가 본성상 “유령적”임을 말해준다. 춤은 글쓴이의 죽음, 혹은 그 죽음의 가능성을 그 구성 요소로 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춤을 춘다는 것 자체에 내재한 병적인 핵심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멜랑콜리아다.

춤이 안무로서 새로운 운명을 시작한 그 역사적 순간을 생각해보면 흥미롭게도 운동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법과 글쓰기였다. 법과 글쓰기는 부재하는 현전에 접속하기 위해 개발된 방식으로 춤은 안무 덕분에 고립된 방에서도 지금 여기에 없는 이들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춤과 글쓰기의 결합인 안무는 이 같은 글쓰기가 작동시키는 효과, 즉 반복되는 기표 속에서 작동하는 법의 리듬과 역사적 시간의 생성을 낳는다. 여기에 언어와 안무의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부재하는 마스터의 목소리를 상기시키는 명령하는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성을 소진시키기, 정지성을 작동하기


그러나 춤의 소멸을 유예시키고자했던 그 간절함은 근대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운동성’으로 대두되던 근대의 정치학과 맞물려 끊임없이 스펙터클한 움직임을 보여주려는 욕망과 결합된다. 자기 충족적 시스템이라는 환상 속에서 작동하는 근대의 스펙터클한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생태적 재앙과 식민지적 약탈로 초래되는 개인의 비극, 공동체의 붕괴를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은 오늘날의 춤과 퍼포먼스가 어떻게 식민주의에 도전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트리샤 브라운, 마리아 라 리보, 윌리엄 포프엘, 베라 만테로의 작업은 이 점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90년대 초의 일련의 사건들, 즉 걸프전쟁, 보스니아 전쟁, LA 폭동 등은 폭력적이고 인종차별적 사건들을 마주하는 움직임의 존재론과 정치학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들었다. 북미와 유럽의 실험적인 무용가와 안무가들은 정지성을 작동시킴으로써 춤과 움직임의 정치학을 수행하고자했다. 정지성은 재현의 선형적 시간성을 “존재의 감각, 육체적인 현전을 느끼는 감각”으로 교체한다. 즉 정지성은 시작과 끝이 있는 연극적 시간에서 벗어나 “비-연극적 시간 안에서 숙고”하게 만드는 감각이다. 정지 행위, 즉 춤의 소진은 동시대 안무적 실천의 자기비판이 “존재론적 비판에서 나아가 정치-존재론적 비판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는 “후기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를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경제 일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자기비판의 수행”인 것이다. 몸은 자기 충족적으로 닫힌 개체가 아닌 열린 존재로서, 끊임없이 자기-주체화와 자기-통제의 방식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저항과 ‘되기’의 방식도 생산하는 역동적인 교환 시스템이다. 따라서 주체성은 지속적으로 삶을 재발명하는 수행적 힘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춤을 소진시키는 것은 근대성의 표상을 소진시키는 것이며, 근대의 운동적 주체와 그들의 창조방식을 그 허용 한계까지 소거시켜버림으로써 근대적 주체를 벗어나 새로운 주체로 나아갈 가능성을 여는 것이었다.



유아론, 관계적 신체, 정지된 행위, 넘어지는 춤, 비틀거리는 춤, 멜랑콜리한 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안무적 실험들은 몸에 선행하면서 몸의 구축을 결정하는 것들, 재현 기계에 참여하며 의미화를 결정하는 것들을 제거하고자 시도한다. 먼저 브루스 나우먼과 후안 도밍게스는 ‘방법론적 유아론’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 붙이듯이 조심스럽고 체계적인 안무적 실험을 창조한다. 자비에 르 루아는 근대성에 의해 제약된 몸의 개념에 도전한다. 그는 형태 없는 유아론을 통해 식별 가능한 개인으로서의 근대적 몸을 해체시키고 이를 관계적 신체로 교체한다. 제롬 벨은 정지성, 느림, 언어 유희적 움직임의 반복성을 사용함으로써 재현에 대한 비판을 개시한다. 벨은 재현을 단순히 모방으로 한정하지 않았고, 이를 권력으로 이해하였다. 그의 모든 작업은 어떻게 언어와 극장과 같은 안무의 ‘바깥들’이 실제로는 재현 체계에 총체적인 종속 구조를 만드는 데 공모하고 있는 지를 밝히고 있으며 주체성에 근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모호성에 대해 성찰한다. 트리샤 브라운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맥락 속에서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백인 남성 ‘마스터’의 유산을 비판한다. <드로잉 생중계>(2003)에서 그녀는 미술관이라는 시각적 기계 안에 새겨진 재현적 관성을 제거하는 동시에 결국 이 관성에 스스로를 종속시켜버리고 만다. 반면 마리아 라 리보의 퍼포먼스는 재현적 기능을 규정하는 극장과 미술관의 시각적이고 역사적인 동력을 방해하는 전략을 택한다. 윌리엄 포프엘은 ‘기어가기’를 통해 인종차별적, 식민주의적 기계로서의 서구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베라 만테로는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의 기억상실증 안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유령에 홀린 현전에 대한 안무적 성찰을 마련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들 모두는 기존의 이해를 장악해온 지배적 관념에 첨예하게 반응하면서 춤을 소진시키고 새로운 움직임의 정치학을 탄생시키는 안무적 실험을 실천했던 이들이었다.




김보경_시각문화연구자 영화 연구, 언어학과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영상문화학을 공부하였다. 안무와 공연예술로 관심을 확장 중이며 관련 연구와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영상문화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김보경_시각문화연구자


목록

댓글 0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