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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3.30 조회 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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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춤·시민·표현: 극장을 넘어 사람·생명을 춤추다
: 안나 핼프린과 커뮤니티댄스

[기획연재] 춤·시민·표현



〈춤:in〉에서는 시대 흐름을 주시하여 기존의 춤 담론을 주도해온 개인적 창조의 패러다임을 넓혀서 2017년 한 해 동안 시민을 위한 표현이 돋보이는 춤 표현 활동을 연재한다. 〈춤:in〉은 춤과 정치·권력·인권 사이의 담론을 발굴하여 ‘시민 사회 및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시민과 공생하는 춤 표현의 가치를 적극 사고하는 계기를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본란에서는 시대·문명·사회와 춤의 선순환적 조화를 성취한 특이 사례들이 함께 조명된다.


극장을 넘어 사람·생명을 춤추다
: 안나 핼프린과 커뮤니티댄스

김채현_춤비평가

3년 후 100살을 앞둔 무용가 안나 핼프린. ‘현장’ 무용가로는 세계 최고령이 분명할 핼프린은 나날이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다. 일찍이 공연장 속 예술춤 일변도의 관점을 벗어나 커뮤니티댄스를 개척한 이래 핼프린은 예술춤과 커뮤니티댄스 양면에서 일가견을 이루었다. 2년 전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표현예술 치유 워크숍을 지도한 바 있고, 미국 캘리포니아 타말파이스에서 36년째 해온 참여형 커뮤니티댄스 〈지구 행성의 춤〉을 올해 6월에도 열 예정이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안나 핼프린 〈시티댄스〉, 1977


1977년 여름 핼프린은 자신이 오래 거주해온 샌프란시스코에서 〈시티댄스〉(Citydance)를 펼쳤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곳곳과 자연 환경을 무대로 온종일 추진된 〈시티댄스〉는 시민 주축의 도시 퍼포먼스였다. 핼프린은 춤이 개인과 가족, 공동체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소신을 기반으로 이 행사에서 춤의 핵심 목적을 되살려 삶에 조화와 온전함을 부여하기를 의도하였다고 밝혔었다. 그 즈음에 시장 등 시(市) 고위직이 암살되는 사건처럼 샌프란시스코의 당시 도시 분위기는 다소 흉흉하였다. 핼프린은 분노와 분열로 찢겨진 도시를 다시 통합하는 데 〈시티댄스〉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시티댄스〉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12시간 동안 도시 중앙의 언덕에서 시작한 행렬이 도심을 지나 1마일 정도 떨어진 부두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중간의 아홉 지점에서 준비된 춤을 펼쳤고 동참자 개인들 나름의 춤들도 제한 없이 가능하였다. 핼프린의 제자 무용가들이 선도하고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1천명의 시민들이 사실상 공동 작업자로 참여한 이 행사는 놀이와 제의가 결합한 형태를 띠었다. 도시와 환경을 재발견하는 계기로서 퍽 의미심장했던 〈시티댄스〉는 그 직후 유럽에서 수차 펼쳐지고 이후 80년대에 지속된 〈지구 감싸기〉(Circle the Earth) 작업의 모태가 되었다. 덧붙여, 40년 전 당대 현실과 춤 상황에서 〈시티댄스〉는 앞서나간 작업이었다.

시민 위주의 커뮤니티댄스는 오늘날 안나 핼프린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곤 한다. 커뮤니티댄스의 바탕이 거의 전무하던 시기에 핼프린은 커뮤니티댄스를 개척한 점에서 커뮤니티댄스의 선구자이다. 핼프린의 커뮤니티댄스는 일반인 참여와 치유를 지향하는 것이 대종을 이룬다. 전자는 공공 장소에서 대규모로, 후자는 전문 공간에서 소집단을 대상으로 진행되어왔다. 핼프린이 개척한 커뮤니티댄스는 자신의 춤 관점과 욕구에 따라 방향이 정해졌으며, 이런 점에서 당대와 호흡하는 시의성(時宜性)이 강하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커뮤니티댄스를 개척하기 이전에 핼프린은 대학을 졸업해서 60년대까지 예술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 우크라이나 이민 2세로서 어릴 적에 춤에 입문하고 핼프린은 1938년 위스콘신대학[1]에 진학하였다. 여기서 핼프린은 자신의 일평생 춤 행로를 결정지을 무용과 교수 마가렛 도블러와 대학원생 로렌스 핼프린을 만난다. 두 사람은 특히 핼프린의 커뮤니티댄스 작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먼저,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교육철학에 찬동한 도블러는 몸 수련과 창작의 일치, 몸과 정신의 분리 부정과 같은 이념을 축으로 ‘춤추는 사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여기서 도출되는 몸 자료와 정서가 춤의 기초, 창작의 원천을 이룬다’는 춤철학을 핼프린에게 각인시켰다. 핼프린의 일평생 춤 활동은 도블러의 춤철학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원생 로렌스가 생물학을 전공하던 중에 안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직후 로렌스는 하바드대학원에서 바우하우스[2]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에게서 건축 디자인을 교육받았다. 로렌스와 결혼한 안나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로렌스의 건축 작업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로렌스는 인간과 사회에 적절한 건축 디자인을 추구하는 공공건축 철학의 소유자였고, 커뮤니티 계열 작업에서 실질적인 현장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등 안나의 평생 동반자였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남편 로렌스 핼프린이 디자인한 분수대공원, 미국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정착 이전 1940년대에 핼프린은 뉴욕의 도리스 험프리 무용단에 소속한 적이 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예술춤 즉 당시의 현대무용계와 관계를 지속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고선 자기 무용단을 창단하였으나 뉴욕에 비해 현대무용 여건이 너무 다르고 열악해 고전하다가 50년대 전반에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에 파격적 대우로 입단하였다. 하지만 안무자인 그레이엄과 틀에 맞춘 춤사위를 맹종하는 무용수들에게 맥이 빠져 마침내 현대무용계와 결별하고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독자적 행보를 걸었다.

어린이, 일반인, 도시 환경, 인성(人聲), 다원 매체 등을 활용한 작업으로써 핼프린은 60년대 중반에 뉴욕에서 일어나던 포스트모던 댄스의 기류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찌감치 자기 홀로 조성해나갔다.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산 속에 자리한 거처에 남편이 지은 소형 야외극장(Dance Deck)은 향후 활동의 발판이 된다. 이본 레이너, 사이먼 포티, 트리샤 브라운 등 핼프린의 자기발견형 워크숍에 참가하여 자극을 받고 뉴욕의 포스트모던 댄스를 일구는 데 동참한 무용가는 상당수 된다. 1965년 핼프린은 등장인물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데 남녀 누드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 작품 〈퍼레이드와 변화〉(Parades and Changes)로 미국 춤계에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이 작품은 이후 수차 재공연되었다.) 그리고 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 춤계에서 퍼진 접촉 즉흥을 이미 60년대에 핼프린 스스로 창안해서 전파하고 있었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1972년 핼프린은 직장암 판정을 받고 치료하였다. 3년 후 직장암이 재발하자 몸 움직임과 시각적 드로잉 형상을 이용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가 완치하였다. 이 암 발병 건은 개개인의 생명에 춤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을 무용가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핼프린은 “암이 발병하기 전에 나는 춤을 위해 살았다. 암 발병 후 나는 삶을 위해 춤추었다”고 고백할 만큼 춤 인생에서 대전환을 이루었다. 이 개인사는 70년대 중반 이후 핼프린의 작업이 커뮤니티댄스 위주로 진행되도록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78년에 딸 다리아와 함께 타말파연구소를 설립해서 심리학, 치유 기법, 춤, 미술, 퍼포먼스 기법 등을 통합한 치유와 교육 프로그램 ‘생명/예술 과정’(Life/Art Process)을 개발하였다. 그 취지에 맞춰 타말파연구소는 이제까지 활발한 모습을 보여왔다.

1979년부터 타말파연구소 인근의 산에서 7건의 여성 연쇄 살인이 발생하자 산에 인적이 끊긴 것은 물론 지역 사회의 삶도 황폐해졌다. 이 산을 되살리기 위해 81년 4월 핼프린은 타말파연구소 수습생, 워크숍 참가자들과 함께 〈산 속에서, 산 위에서〉(In the Mountain, On the Mountain) 작업을 이틀간 추진하였다. 첫날 저녁 공연장에서 희생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연자들은 희생자를 위한 입문 의식을 치르고 그 무대에서 수면을 취하였다. 이튿날 산의 정기(精氣)가 살아나도록 새벽에 버스로 산 정상으로 이동해서 사람들과 나무를 심는 등 헌납과 재생 의식을 진행하였다. 그 36시간 후 경찰은 범인 관련 제보를 받았고 3일 후 범인은 체포되었다.

이 일이 있고나서 106살의 인디언족 무당이 타말파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산 속에서, 산 위에서〉 같은 정화 의식이 완결되려면 5년 동안 그 의식을 반복해야 한다는 무당의 조언대로 핼프린은 해마다 이름을 달리해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85년에는 〈산 감싸기〉(Circle the Mountain) 이름으로 그 작업이 연속된 후에 이를 본떠 86년부터 〈지구 감싸기〉 시리즈로 10년 동안 타말파이스를 비롯해서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도 열렸고, 87년부터는 〈지구 행성의 춤〉(The Planetary Dance)[3]을 수년간 미국과 해외에서 진행하였다. 주로 대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지구 행성의 춤〉은 커뮤니티 사람들의 참여를 움직임과 예술 및 환경을 접목해서 구현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연 속에서 땅(大地)과의 대화를 유도하여 참여자들의 치유를 도모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안나 핼프린 〈지구 행성의 춤〉, 2007


1980년부터 핼프린은 암치유교육센터 등 여러 암센터에서 암치유 프로그램을 수행하였고, 이로써 당시 만연하던 에이즈와 HIV 치유 사업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계기로 에이즈와 HIV의 환자들로 남성 무용단과 여성 무용단이 핼프린의 지도를 받아 결성되었다. 1989년 〈지구 감싸기〉 작업은 〈위급한 생명의 춤〉(Dancing with Life on the Line)을 주제로 이들 두 무용단이 진행하여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일깨운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보이는 소수자에 대한 평등의식처럼 핼프린은 자신의 무용단 구성에서, 인종 차별이 공공연하던 미국 사회에서 60년대 말부터, 벌써 흑백 차별은 물론 유색인에 대해 전혀 차별을 두지 않았다.

사람과 생명의 시각에서 핼프린은 춤을 바라본다. 1994년 자기 어머니가 99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자 암으로 떠났던 예술춤 극장 무대를 찾아 자기 할아버지를 소재로 한 독무 〈할아버지의 춤〉을 추었다. 핼프린이 70대 중반에 극장 무대에 다시 서게 된 계기가 어머니의 죽음이었던 것은 개인의 정리(情理) 차원보다는 춤에서 생명 현상을 각별하게 여겨왔음을 나타낸다. 이와 아울러 무대에서도 다듬어진 몸매를 우선시하는 사회 풍토와 생명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는 이런 행동은 2005년의 작업 〈흔들대는 노령자들〉(Seniors Rocking)이 은퇴한 노인 50명으로 진행되는 이벤트로 연장되었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안나 핼프린 〈위급한 생명의 춤〉, 1989


핼프린의 춤은 예술과 삶 사이에 아무런 경계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통찰력 앞에서 누가 춤춰야 하는가? 왜, 어떻게 춤춰야 하는가? 같은 물음은 부질없어 보인다. 핼프린의 커뮤니티댄스는 자신의 체험과 시민의 일상에서 춤 과제를 지속적으로 발견, 표현하면서 시민들이 생명이라는 인간 본유(本有)의 차원에서 치유를 체험할 것을 지향한다. 이런 복합적인 작업을 그녀가 초고령에 이르도록 자유자재로 추진할 수 있은 원동력도 그와 같은 믿음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1] 1926년 미국 최초로 학부에 무용 전공 과정을 설치하였고 핼프린이 진학할 당시에 미국 대학 내에서 무용 전공 과정은 위스콘신대학과 베닝턴칼리지에만 있었다.
[2] 독일에서 건축을 중심으로 생활, 디자인, 예술, 기술의 통합을 추구하여 혁신에 앞장섰다. 창시자 그로피우스는 히틀러 나치스 시기 미국에 망명하여 하바드대학에서 가르쳤고, ‘형식이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남겼다.
[3] 〈지구 행성의 춤〉은 핼프린이 81년 〈산 속에서, 산 위에서〉 이후 야외에서 진행한 대규모의 커뮤니티댄스를 통칭하는 이름으로도 쓰인다.



[참고 자료]
· 안나 핼프린 공식 웹사이트 바로가기
· 타말파연구소 공식 웹사이트 바로가기
· 안나 핼프린 소개 영상 바로가기
· 지구 행성의 춤 소개 자료 바로가기
· 시니어스 로킹 소개 자료 바로가기




김채현_춤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민음사),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사회평론)를 비롯 다수의 논문, 그리고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등의 공저와 『춤』(청년사), 『미적 체험의 현상학』(민음사)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춤 영상 문고를 개설할 예정이다.


김채현_춤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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