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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2.23 조회 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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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춤·시민·표현:공공 장소의 표현, 춤으로 깨어나다- 스테판 코플로위츠의 장소춤

[기획연재]춤·시민·표현



<춤:in>에서는 시대 흐름을 주시하여 기존의 춤 담론을 주도해온 개인적 창조의 패러다임을 넓혀서 2017년 한 해 동안 시민을 위한 표현이 돋보이는 춤 표현 활동을 연재한다. <춤:in>은 춤과 정치·권력·인권 사이의 담론을 발굴하여 ‘시민 사회 및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시민과 공생하는 춤 표현의 가치를 적극 사고하는 계기를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본란에서는 시대·문명·사회와 춤의 선순환적 조화를 성취한 특이 사례들이 함께 조명된다.


공공 장소의 표현, 춤으로 깨어나다
- 스테판 코플로위츠의 장소춤

김채현_춤비평가

춤 공연장에서 옥내 극장의 비중은 절대적이고, 옥외 극장도 있다. 옥내와 옥외의 차이점이 있어도 둘 다 극장으로서의 기본 속성은 엇비슷하다. 예컨대, 주위로부터 차단되고 객석과 무대는 분리된다. 오늘날 극장 말고도 여느 건물의 옥내외, 공공 통행 지역, 도시와 자연환경, 사회역사적 기념지, 갤러리 로비, 노후 건물 등 각양각색의 공간들을 아우르며 춤 공간이 확장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다.

장소춤(site dance)은 극장이 아닌 공간을 춤 공간으로 선택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다. 특정한 장소를 소재로 하여 춤을 진행하므로 ‘장소 특정 춤’이라고도 부른다. 그 장소는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한 곳으로서 대부분 공공장소이다. 극장 춤이 극장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사실상 전무한 데 비하여, 장소춤에서는 춤이 행해지는 특정 장소가 춤의 바탕이 되는 동시에 성찰의 대상으로 되는 특이점이 발견된다. 이처럼 극장 아닌 다른 공간이 춤 공간으로 선택될 경우, 그런 공간은 극장과는 다른 속성을 갖기 마련이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Red Line Time>, LA, 2013


2013년 4월 이틀간 LA의 지하철 레드 라인 14개 역에서 장소춤이 있었다. 지하철 역사 안팎에서 8명의 출연진이 2시간 동안 진행한 이 공연을 사람들은 따라가며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역 내의 시간 흐름, 그리고 각 역의 환경 이미지가 춤 소재로 활용되었다. 우리 주변에서 간혹 봐왔던 지하철 공연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역을 이동하며 열차에서 하차해서 다음 열차에 승차할 짧은 시간 동안 각 역에 어울리는 춤 포맷으로 진행하였다. 이 행사를 수행한 스테판 코플로위츠(S. Koplowitz)는 이렇게 공공장소를 겨냥한 장소춤을 집중적으로 수행해왔고, 그가 지금까지 미국 안팎에서 발표한 장소춤은 90건에 육박한다. 그는 말하자면 장소춤의 대가로 불릴 만하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Stephan-Koplowitz <Natural Acts in Artificial Water>, 2012 ⓒEd Schipul


장소춤은 50년 전부터 루신다 차일즈, 메레디스 몽크, 트리샤 브라운, 안나 핼프린, 에이코-코마 등등의 많은 무용가들과 플럭서스그룹, 해프닝 작가들이 개척하였다. 장소춤들이 커뮤니티댄스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제는, 장소 특정 미술처럼, 춤의 한 장르로 분류되기 시작하며, 장소춤의 필요성에 대해 국내에서도 공감대가 커간다.

30년 전에 코플로위츠는 뉴욕 그랜드센트럴역 안의 대형 창틀 3곳에서 장소춤을 펼쳤다(<창문 내기(Fenestrations)>). 맨해튼 심장부에 소재한 이 역은 100년 전에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보자르 양식의 장려한 건축물로도 유명하고 뉴욕 근교·통근 열차 운행이 매우 잦아 온종일 사람들로 붐빈다. <언덕 위의 집> 노래를 배경으로 그는 고향 집과 기차역의 정서를 묶어 현대 사회 속의 분주한 일상사, 임종, 기도하는 모습들을 15분 동안 엮어내었다. <창문 내기>는 30년 전에 2일간 초연되고, 18년 전에 4일간 재공연되어 모두 8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전해진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장소춤을 수행하는 안무가는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장소춤을 가장 집중적으로 집요하게 추구해온 인물로는 코플로위츠가 선두에 꼽힐 것 같고 이 방면에서 독보적이 아닌가 한다. 그는 학부에서 음악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춤을 전공한 늦깎이이다. 그 후 제이콥스필로우 댄스 페스티벌[1]의 장학생으로 선발될 만큼 극장 공연에 심취하였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옥내 극장에서 폐쇄적 분위기를 간파한 동시에 현대무용이 공연장이라는 섬에 고립되어 대중들의 시선에서 멀어간다는 심증을 갖는다. 이로 인해 코플로위츠는 20대 중반에 기존 관행에 구애받지 않는 공간에서의 춤을 꿈꾸기 시작하는데, <창문 내기>는 그의 첫 장소춤으로서 당시 그의 나이 30대 초반 때의 일이었다.

코플로위츠의 장소춤이 이뤄지는 장소는 어느 한 부류가 주도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다양하다. 1999년 독일 에센에서 초청받아 그가 5일 동안 장소춤을 열은 곳은 탄광이다.[2] 에센에서 멀지 않은 부퍼탈에서 피나 바우쉬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옥내 극장 무대에다 붉은 이탄(泥炭, 석탄의 일종)을 깔아놓고 자신의 출세작 <봄의 제전>을 1970년대 중반에 연출하였다. 이와는 퍽 대조적으로, 코플로위츠의 출연진들은 석탄에서 코크스를 제조하는 가마, 대형 회전 바퀴 같은 탄광 현장의 거대하며 우람한 산업 설비들 사이에서 <석탄 속의 몸>을 펼쳐 보였다. 석탄을 고르는 수작업(즉, 몸작업)을 모티브로 한 집단의 움직임들에서 소름 끼치는 황량한 세계가 마치 파시즘의 세상처럼 재현되었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산업 유산으로 남은 독일 에센 졸페라인 탄광 외부 (왼쪽 위) / <석탄 속의 몸>, 에센, 1999


9·11테러 발생 3년 후 코플로위츠는 뉴욕의 아이콘 같은 웅장한 건축물들(맨해튼, 브롱크스, 브루클린 지역의 6곳)의 여러 정면 계단을 춤 공간으로 설정하고 연결했다. 계단에서의 몸구르기를 기조로 일어서기를 표현하는 <장대한 계단에서의 작업: 비상(The Grand Step Project: Flight)>은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와 뉴욕이 거둔 성장세,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융합하기를 의도하였다. 여기서 각 50명의 합창단과 무용단이 전반·후반을 15분씩 별도로 진행한다. 그의 장소춤 공연에서 합창과 무용이 제각각 전후반을 구성하는 경우는 흔하다. 8일간 날마다 3회 공연된 이 공연을 관람한 연인원은 2만 명에 이르렀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The Grand Step Project>, 2004


코플로위츠의 장소춤은 위의 공간들을 비롯한 대형 공원, 인공 폭포, 박물관·도서관 로비 등의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2008년 LA 지역 강줄기를 따라 12개 지역을 이동하며 8일간 펼친 <물맑은 풍경(Liquid Landscapes)>은 물의 문제를 환기한 공연으로 지역민과 함께 사회 현안을 다룬 장소춤이다. 이 장소춤 포맷은 그후 2년 더 다른 곳에서 활용되었다.

일반적으로 특정의 장소 환경에 결부된 감성적·미적 특성, 역사적 내력, 사회적 이슈를 환기해서 궁극에는 해당 장소의 가치를 보존·확대하려는 것이 장소춤의 목적이다. 장소춤에서 안무가는 공간에 새로운(또는 다른) 의미와 정서를 투여한다. 이런 관점의 장소춤 안무가로서 코플로위츠는 공간 디자이너를 자처한다. 그의 작업에는 대개 건축가, 작곡가, 디지털 작가가 공동으로 참여하며, 그의 장소춤은 미적 세련미를 곁들인 움직이는 대형 설치 미술(installation)이기도 하다. 또한 코플로위츠가 장소춤 작업에서 경관의 시각적 처리에 고심하고 수십 명의 합창단에게 전반부를 맡기는 것은 해당 장소에 대한 애착심을 고취하려는 뜻의 발로이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Liquid Landscapes>, LA, 2008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Liquid Landscapes>를 응용한 영국 장소춤, 2009


공공장소의 장소춤에서는 극장에서의 차단과 분리 같은 메커니즘이 정지한다. 극장에서는 움쩍도 하지 않을 관객이 공공장소에서는 현장을 수용하는 ‘참여자’로 바뀐다. 이 참여자는 일반 통행인이자 지역 주민 또는 시민이다. 장소춤에서는 이벤트를 주목하고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참여가 성립된다. 장소춤의 공간은 안무자·출연진이 관람자와 더불어 공유하는 장소이며, 장소춤 안무가가 장소에 부여하는 의미와 정서가 관람자의 것과 무관하기는 힘들다. 장소춤에서 공간의 공유는 이처럼 춤·의미·정서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반이 된다. 이에 따라 장소와 춤의 사회적 맥락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출연진과 관람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기본인 것은 이 때문이다. 장소춤에서 안무가와 참여자를 통해 장소는 제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는다.

장소의 공유를 위해 코플로위츠는 장소춤을 준비하면서 무엇보다 해당 주민들의 의견(즉, 여론)과 장소의 내력, 이슈를 수집하는 과정부터 밟는다. 하지만 극장을 벗어나 특정 지역을 소재로 한다고 해서 예술성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많은 관객이 일반 무대 공연(즉, 예술춤 공연)에 대한 기대치를 갖고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고려하여 그의 장소춤에서는 가급적이면 지역이나 인근의 전문 무용인들이 출연진의 주축을 이룬다. 그리고 지역의 전문인들이 참여하고 지역민이 관객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의 장소춤은 커뮤니티 댄스의 성격이 짙다. 장소춤의 의미와 정서 측면에서 시민 참여자들의 표현을 대행하고 창의적으로 매개하면서 그는 해당 장소를 새로운 표현과 체험 속에서 일깨우는 동시에 길거리 일상의 민주 의식까지 춤으로 수렴해왔다.

코플로위츠는 2017년 샌프란시스코 베이츠춤축제에서 다매체의 장소춤(출연진 50명)을, 2018년 미네소타 노스필드에서 춤, 극, 음악, 미디어아트의 장소춤(출연진 수백 명)을 진행할 예정이다.



[1] 이사도라 덩컨 생존 시기 미국 현대무용을 개척한 세인트 데니스의 남편 테드 숀이 1942년 미국 최초의 춤전용 극장을 마사추세츠주 서부 내륙 휴양 지대 제이콥스 필로우에 세웠다. 그 전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매년 여름 2달간 댄스 페스티벌을 열어 현대무용 관객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2] 에센은 독일 서부 루르공업지대의 중심 도시. 탄광과 철강 산업이 성했고 30년 전 탄광 산업이 쇠퇴하자 탄광 산업 지대 보존 작업이 유네스코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참고 자료]
· 코플로위츠 공식 웹사이트, 주요 작품 영상 및 비평 소개 바로가기
· <Fenestrations> 소개 영상 바로가기
· <The Grand Step Project> 소개 영상 바로가기
· <Liquid Landscapes> 소개 영상 바로가기
· <Liquid Landscapes>를 응용해서 2009년 영국에서 수행한 행사 소개 영상 바로가기
· <Red Line Time> 소개 영상 바로가기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민음사)를 비롯 다수의 논문, 그리고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등의 공저와 『춤』(청년사), 『미적 체험의 현상학』(민음사)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춤 영상 문고를 개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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