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2.23 조회 3137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기: 샐리 베인스의 『포스트모던댄스』

[춤인의서재]



[춤인의서재]는 무용가, 이론가, 춤 애호가 등 다양한 필진이 참여해 무용인에게 영감을 주는 책을 소개합니다. [춤인의서재]에 소개된 책은 서울무용센터 로비에 비치해 둘 예정이니, 자유로이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기: 샐리 베인스의 『포스트모던댄스』

허명진_무용비평가

줌아웃 에세이 무용비평가 허명진 관련 사진

『포스트모던댄스』, 샐리 베인스 지음, 박명숙 옮김, 삼신각



“모든 것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리처드 아머의 코믹 역사북 시리즈 식으로, “모든 것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할 때 ‘이 책’에 해당할 만한 책은 무엇일까. 다짜고짜 던진 서두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자리를 샐리 베인스의 『포스트모던댄스』라는 책으로 채워보기로 했다. 이것이 꽤 철 지난 얘기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컨템퍼러리 댄스에 접근하기 위해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이트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국제적으로 ‘핫’한 안무가들이나 기획을 돌아보더라도, 최근까지도 머스 커닝엄을 들먹이고, 이본느 레이너와 대담을 하며, 스티브 팩스턴을 초청해서 워크숍을 하는 것 등을 흔히 볼 수 있다. 한데 국내에서는 그때 이들의 연습실에서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진지하게 접근하는 무용가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온도차와 시차가 발생하는 국내적 여건이나 상황에 대해 짐작하지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손에 닿을 만한 기회나 자료가 상당히 결여된 와중에 이 책은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다행히 포스트모던댄스에 접근하기 위한 필독서 중의 필독서이지만, 이 책이 과연 제대로 읽히고 있는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인 것도 사실이다.



현상학으로


그 원인 중 하나는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를 통해 이 책에 접근하곤 한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그러한 접근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포커스를 ‘현상학’으로 옮겨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 책에서 현상학의 영향을 직접 언급한 대목은 딱 한 군데 정도로 기억하지만, 당시 현장 한복판에서 접하고 목격했던 모든 것에 대한 저자의 기술을 포함하고 있는 이 책은 사실 현상학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 본령을 짚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그 지점은 이 낡아 보이는 경향에 여전히 지금의 많은 안무가가 지대한 관심을 두고, 또다시 거듭해서 들여다보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현상학 자체도 최신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술이 감각과 지각, 체험의 영역을 다루는 것인 한, 그러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현상학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전제되어 있다. 가령, 삼각형이라고 했을 때 흔히 그러하듯 세 변이 맞닿는 어떤 형태를 떠올리는 것과 그것을 어떤 재질과 색깔의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렸는지 크레용으로 그렸는지, 혹은 비뚤비뚤하게 매끈하게 그렸는지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느끼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기하학 이론상의 삼각형, 이 세상에 없고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삼각형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그려진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자는 것이 현상학이라면, 그것은 예술의 영역과 가까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바꿔 말해 예술이라면 삼각형에서 떠올리는 기존의 관념을 벗겨내고, 즉 현상학적 용어로 ‘괄호를 치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세계에 눈을 돌리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이 다퉈야 할 것은 우리에게 이미 주입되어 있고 자동화되어 있는, 심지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선입견, 사전 관념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삼각형을 앞에 두고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모양보다 어떻게 그 그려진 궤적 하나하나가, 색채와 질감이 눈에 들어오게 할 것인가? 어떻게 이미 스며 있는 고정관념과 습관에 기댈 수 없게 만들 것인가? 예술가라면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다시 말하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당시의 여러 작가는 물론 포스트모던 안무가들이 저드슨 교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고민을 했다고?
사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새롭게 다시 보고 발견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느 인류학자의 실험을 참고하자면, 백인 여성과 인디언 여성의 대화를 찍은 짧은 필름을 한 학생에게 날마다 보게 했지만 늘 같은 반복에 지루해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3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까지 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기존 관념과 착각, 환영에 사로잡혀 실제의 사태를 대부분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의 구절들을 좀 더 다르게 음미해볼 수 있지 않을까.



“포스트모던댄스에서 안무가는 관객에게 춤 보는 방식을 가르치며, 관객이 공연에 품는 예상에 도전하고, 보다 면밀한 탐구를 위해 춤의 부분을 나눠 구성하고 진행되는 동안 그 무용에 주석을 다는 등의 비평가가 된다.”(p.35)

“실제적 시간으로 다시 주의를 돌려놓음으로써 무용은 관객의 주의와 인식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켰다.”(p.182)



제4의 벽


이렇게 보자면, 이 책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머스 커닝엄과 지각(perception)의 정치학”이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의 글 또한 어떤 맥락인지 짐작이 갈 것 같지 않은가? 머스 커닝엄에 대한 이 책의 기술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우연과 탈 초점의 원리 등과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사실 커닝엄 역시 위에서처럼 ‘보는 것의 문제’와 관련하여 예외가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차원에서 이 책에 가끔 튀어나오는 ‘환영주의자(illusionist)’나 그에 반하여 데보라 헤이나 팩스턴, 레이너 등이 내놓았다는 ‘실제에 기초를 둔 지속체제’, ‘즉시성과 구체성의 감각’ 등과 같은 문구들을 새삼스럽게 다시 살피게 된다. 또한 루신다 차일즈의 작업이 촉발하는 ‘본다는 의식적 행위의 자극’, 메레데스 몽크가 탐구하는 ‘관객에게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들을 수 있는 방법’ 등의 의미를 좀 더 새겨보게 된다.
이런 게 작품을 너무 철학적이고 어렵게 만들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조차 선입견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그 철학이나 이론이라는 것은 매우 신체적이고 구체적인 감각과 맞닿지 않는가? 그저 춤에 대해, 공연에 대해 이미 기대하는 것과 충돌하므로 불편해하는 것 아닐까?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러 주요한 컨템퍼러리 댄스 안무가들이 이러한 기대, 이른바 ‘제4의 벽’과 상대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자기가 믿는 세계에 머물 것인가, 꿈에서 깰 것인가, 파란약? 빨간약?



삼신각 출판사와 연락이 닿지 않아, 표지 사용에 대한 저작권 요청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관계자께서 연락 주시면 후속 절차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명진 무용전문지 《몸》 기자를 거쳐 2003년 무용예술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공연예술지 《판》 편집위원, 국립현대무용단 교육&리서치 연구원을 거치면서 무용의 접점을 다변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허명진_무용비평가


목록

댓글 0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