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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6.06.23 조회 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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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기억하는 표정

김해주_독립큐레이터

하나의 춤을 보는 것은 여러 가지 시각적 관찰이다. 관객인 나는 앉은 채로 참 많은 장면들이 이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크게는 춤을 추는 사람의 무대 위 동선을 따라간다. 좌에서 우로, 뒤에서 앞으로 이동하며 선들이 연속하고 겹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신체 각 부분들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골반과 발의 움직임, 팔과 손끝의 움직임 그리고 이들이 서로 연동되거나 어긋나면서 만들어지는 균형과 긴장의 연속을 본다. 가끔 춤을 볼 때 일부러 관객석 앞자리를 골라 앉기도 한다. 무용수들의 몸의 진동과 그 에너지를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어서이다. 무대를 딛는 그들의 발의 리듬이 마치 스피커 앞에서 베이스를 듣는 것과 유사하게 신체의 진동으로 전달된다.

가까이에서는 댄서들의 표정도 잘 볼 수 있다. 가끔 안무가들이 몸의 움직임을 안무하는 것처럼 무용수들의 표정에 대해서도 얘기하는지 궁금해진다. 피나 바우쉬(Pina Bausch)와 자비에 르 로이(Xavier Le Roy)의 춤에서 무용수들의 표정은 확연히 다르다. 한쪽의 표정은 다채롭고 풍부하고, 다른 한쪽은 거의 변화가 없다. 어느 쪽이 더 많은 연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나의 공연은 시간의 덩어리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각적 정보들의 연속이기도 하다. 수 만개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를 떠올리면서 공연도 시각적 장면들의 연속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Dissonant


벨기에 작가 마논 드 부르(Manon de Boer)의 <dissonant>와 한국 작가 오민의 <A Sit>이라는 영상 작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두 작업 모두 전문 무용수가 솔로로 등장한다. 카메라는 관객의 눈 보다 더 가까이에서 이들의 몸과 표정을 따라간다. 그런데 이들의 표정은 감정을 드러내거나 혹은 절제된 감정으로서의 무표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표정이다.
마논 더 부르의 <dissonant>은 커다란 창문이 있는 댄스 스튜디오에서 한 명의 댄서가 가만히 서서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1992년부터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eaker)가 이끄는 무용단 로사스(Rosas)에서 활동해 온 신시아 로메이(Cinthia Loemji)이다. 음악을 듣는 그녀의 얼굴에서 감정의 동요가 읽히지 않는다. 선율을 다 삼키려는 듯 집중하는 모습이다. 음악이 끊어지자마자 마치 출격하듯, 나간다. 물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면서 동시에 정확한 전환으로 움직이는 그녀를 한동안 카메라가 따라가는데, 딸각 소리와 함께 화면이 꺼진다. 잠시 숨소리와 약한 발소리만 들리는 채로 검은 화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밝아진 순간 여전히 움직임을 계속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화면이 정지된 상태에서도 움직임을 이어가는 운동의 여정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바깥 풍경이 보인다. 나무들이 많이 흔들리는 바람이 부는 날인데 햇빛은 밝다.


Dissonant


중간에 등장하는 암전의 장면은 이 영상을 촬영한 16mm 필름을 교체하는 시간이다. 한 롤에 3분인 필름을 교체하기 위한 검은 단절이 10분 남짓한 영상 속에 두 번 등장한다. 매체의 조건을 활용한 이 작업은 소리의 녹음과 영상의 녹음이 분리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면서 하나의 장치가 멈춘 순간에도 여전히 시간과 움직임이 단절되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지의 부재는 몸의 현존을 강조한다. 음악을 기억한 그녀가 그 음악을 품은 채로 춤을 추는 것처럼, 그녀의 춤을 시각적으로 경험한 관객의 눈은 검은 화면 위로 춤의 잔상을 바라본다. 집중하며 음악을 각인시키기 위한 표정, 음악 없이 움직임만 이어지는 장면, 그리고 검은 화면 이 세 가지 장면은 각기 서로에 대한 상보적인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요소가 탈각되었을 때 그 탈각된 자리를 기억하는 운동을 돕는 것이다. 영상에서 로메이가 움직이다가 잠깐 멈춰서는 순간이 있다.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녀 안의 음악과 춤이 딸깍하며 조립되는 순간인데, 보는 이에게도 역시 무언가 불이 켜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A Sit>


오민의 영상 <A Sit>에는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권령은이 등장한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내내 눈을 감고 있다. 박자를 지시하는 신호에 가까운 소리들이 간간히 개입한다. 그녀는 계속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상체를 움직인다. 어떤 춤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춤을 연습하는 춤이지만 동시에 춤의 동작을 복기(復棋)하는 과정이다. 카메라가 가까이에서 그녀의 모습을 담는다. 앉아 있다는 것의 한계는 대신 목소리와 머리의 움직임이나 표정과 같은 움직임을 불러온다. 긴장과 한계 안에서 펼쳐지는 다른 형태의 자유로움이 있다. 앞서 마논 드 부르의 열려 있는 스튜디오 공간과 달리 이 영상은 한정된 공간만 비춘다. 화면에는 의자와 무용수, 그리고 회색 벽에 걸린 직선의 선반이 보인다. 이 전체 장면이 마치 엄격한 비율에 맞춰 정리된 회화같다. 이 작업에서 오민 작가는 벨기에 작가 에릭 뒤카에르트(Eric Duyckaerts)의 짧은 글에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다. 2015년 뒤카에르트가 자신의 전시를 위해 쓴 글 “신체에(그리고 그 언어에) 대한 질문으로서 안무의 무질서하고 깊이 있는 변화들, 그리고 안무의 감동적 순간들을 포착하기 위한 기술적인 수단들이다.” 이 그것이다. 그의 전시 제목인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뮤즈들 중 하나인 춤의 여신을 뜻한다. 보통 현악기를 한 손에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묘사되는 여신이다. <A Sit>에서 줄곧 의자에 앉아 있는 댄서는 악기를 손에 든 대신 차라리 악기가 되어 음악을 따라간다. 댄서의 머리 위에 맞춰 가로지르고 있는 하얀 선의 선반과 댄서를 포착하는 화면의 구도가 음악처럼 다양한 리듬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춤을 머릿속으로 추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바라보는 나 역시도 “집중과 불완전함의 신호”를 따라 어떤 춤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A Sit>(사진제공 시청각)


이 두 무용수의 춤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표정은 보는 사람에게 ‘기억하려는 운동’에 동참하게 이끈다. 춤은 모두가 각기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운동’ 가운데에 발생하고 그 구체적인 형태는 누구 하나에게 같지 않은 추상적 형태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작업을 소개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춤이 발생한다는 시적 상상에 가치를 부여하거나 관객이 작업을 완성하게 된다는 해석의 자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보통 춤의 장면이 등장하는 영상은 과거 시점의 시간의 기록을 생각하게 되지만, 여기서는 영상을 보는 순간 춤이 발생한다. 영상이 과거에 기록된 춤이 아니라, 현재 머릿속에서 춤을 일어나게 하는 스코어로 작동하는 것이다. 퍼포먼스나 춤의 기록이 아니라 춤이 현재 펼쳐지는 순간을 만드는 영상. 화면이 곧 무대이다.


*오민의 <A Sit>는 2015년 10월 9일 부터 11월 14일까지 시청각에서 열린 전시 <Move & Scale>에서 소개되었다. 마논 더 부르의 <dissonant>는 이번 7월 15일 부터 31일까지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리는 전시 <무빙/이미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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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주_독립큐레이터 시각예술과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안무사회>(백남준아트센터, 2015), <결정적 순간들>(국립현대무용단, 2014), <Once is not enough>(시청각, 2014), <Memorial Park>(팔레 드 도쿄, 2013) 등의 전시와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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