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액트-션]은 전 세계 및 한국 무용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전환'의 지점이 되는 행동/활동을 돌아보고 공유하는 코너입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발언하고 행동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통해 ‘나’와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진 생생한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전개할 무대와 관객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무대가 설계되어 진지한 관심을 가진 관객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훨씬 깊은 존중을 받으며 매력적인 관계로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임을 보이고자 한다."
-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중에서
지난 10월 17일 서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무용수-되기>를 공연했다.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가 주관한 장애·비장애 동행 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에 오픈포럼 2일차 프로그램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작품의 세 개 장면 중 첫 번째 장면을 중심으로 작업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애와 예술 그리고 장애예술의 언저리에서 어떤 지점들을 고민했는지 나누어보고자 한다.
변호사이자 작가로서 원영은 법이 삶의 가능성을 여는 장치인 것과 별개로 (소수자의 삶이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의 존재 유무에 따라 얼마나 가능하거나 불가능해지는지 생각해 보라) 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투명하고 확실한 법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유한한 몸으로서 사랑하고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에게 드러나고 건네질 때 비로소 삶은 단지 가능하기만 한 것을 넘어서 살아갈 만한 무엇이 된다. 삶을 가능한 것 그 이상으로 여는 문제가 정치적 투쟁이나 법적 개입 너머에서 미학적 물음을 요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그리고 각자 모두의 몸을 '고유한' 무엇으로 드러내는 일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원영은 몸을 매개로 하는 예술로-연극으로, 그리고 무용으로-확장해 왔다.
한편 기섭과 나는 동시대 안무의 '가능성'이 안무의 불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역설에 주목해 왔다. 안무는 '춤-쓰기choreo-graphy'의 기술로서, 움직임을 고정하여 춤을 반복 가능한 것으로 붙들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하지만 춤은 동일한 안무를 정확하게 수행하고자 할 때조차 매번 다른, 특이적인 사건으로 발생한다. 안무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도래하는 것이 그것의 실현 불가능성이라면, 이는 오히려 하나의 기회가 된다. 안무적 이념은 무용수가 투명하고 확실한 존재 ― 무용의 역사에서 때로는 ‘천사’로 때로는 ‘기계’로 비유되어 온 무결점의 무시간적 존재 ― 이기를 요구하는데, 이 불가능한 요구의 필연적 실패에서 안무로는 결코 포섭되지 않는 몸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문화재단
법과 실존의 간극에 대한 관심과 춤과 안무의 간극에 대한 관심이 몸이라는 접점에서 만나는 것을 예감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물음으로 나아갔다. 안무의 한계에서 춤추는 몸이 안무와 다를 뿐 아니라 다른 몸들과도 다른 '고유한' 몸으로서 드러나고, 나아가서 그때마다 자기 자신과도 다른 사건으로서 ― 차이 자체로서 ― 도래할 수 있다면, 몸의 불완전함과 유한함이 결여나 불능이 아니라 차이를 동일성의 부정으로 포획하는 이분법의 논리를 무력화하는 역량으로서 드러날 수 있다면, 어떤 몸짓이 가능한 춤 너머의 '불가능한' 춤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 몸짓은 누구나 가능한 존재 그 이상의 존재로서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물음으로 열릴 수 있지 않을까.
<무용수-되기>의 첫 장면은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트리오 A(Trio A)>를 재연하는 것으로 했다. 무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법한 유명한 작품을 재연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기섭이었다.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안나 테레사 드 키어스메커((Anne Teresa De Keersmaeker) 등의 이름이 오갔고, 내가 <트리오 A>를 제안했다. 처음에 원영은 이 장면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용사적으로 상징성이 있는 작품을 가져와서 비판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것은 의미있는 시도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기획이 앞설 뿐 실제 춤의 차원에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겠냐는 의문이었다. 결국 원영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마 그냥 일단 한번 해보자고 했을 것이다.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문화재단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을 보면서 기섭이 안무를 땄다. 원영과 같이 해보면서 하체의 움직임은 휠체어의 움직임으로 대체하고, 휠체어를 기동하느라 추가된 움직임은 최대한 본래 안무에서의 상체 움직임과 매끄럽게 연결시키고, 여의치 않은 동작은 삭제하거나 변형시켰다. 그런 다음에는 원영의 동작에 맞춰서 원래 안무를 다시 변형시켜 기섭의 동작으로 만들었다. 원영이 모든 동작을 날리지 않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템포를 상당히 늦췄다. 원영의 <트리오 A>를 원본으로 삼은 기섭의 <트리오 A>도 똑같이 느린 템포로 가게 되었다.
라이너의 움직임을 휠체어에 탄 원영의 움직임으로, 이를 다시 기섭의 움직임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트리오 A>는 분명 <트리오 A>이지만 <트리오 A>와는 다른 어떤 춤이 되었다. <트리오 A>를 추는 가운데서 <트리오 A>를 거스르지 않을 수 없는 춤. <트리오 A>를 추는 데 실패함으로써 <트리오 A>를 추고,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트리오 A>를 '실패'에 이르게 하는 춤. 라이너의 춤과 우리의 춤 사이에서 그리고 원영의 춤과 기섭의 춤 사이에서 이중으로 작동하는 같음과 다름의 긴장, 그 차이와 반복의 유희 속에서 어떤 이분법의 논리도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닿을 수 있을지가 중요해 보였다.
<트리오 A>는 1966년 저드슨 교회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우리는 1978년 라이너가 기록을 위해 따로 촬영한 영상을 참고했다. 작품에서 라이너는 평상복에 운동화를 신고서 팔을 돌리거나 발을 흔드는 등의 일상적인 동작들로 구성된 움직임을 수행하는데, 그저 움직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움직임들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어떤 움직임이든 춤이 될 수 있다는 움직임의 '평등'을 현시한다.
무용의 역사 속에 기념비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평등'의 춤을 원영과 함께 다시 추는 일에는 어떤 이중의 작동이, '아이러니'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원영이 작품을 변형시키지 않고는 출 수 없다는 사실이 "움직임의 평등"이라는 말을 껄끄럽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영과 기섭의 춤이 어쨌든 <트리오 A>로서 추어진다는 사실이 "어떤 움직임이든 춤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문화재단
어떤 해방이 있었다면 그 성과와 한계가 물음에 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이너가 운동화를 신고 춤 춘지 이미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모든 움직임이 춤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춤이 되는 움직임과 그렇지 않은 움직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춤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낡은' 물음이 되었다. 춤이란 규정할 수 있는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것으로서 열려 있으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춤이 모든 움직임에 열려 있다면, 지체장애 장애가 있는 몸의 움직임에도 뇌병변장애가 있는 몸의 움직임에도 열려 있을 것이고, 결국 춤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다시 묻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춤이 모든 움직임에 열려 있다면, 그 모든 움직임은 모든 몸들에게도 열려 있는가? 모든 움직임은 춤이 될 수 있다고 할 때, 그 평등의 움직임을 추는 몸은 어떤 몸으로 상상되었는가? 모든 춤이 장애인도 출 수 있는 방식으로 안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무용에 대한 우리의 미적 경험을 틀짓는 동시에 그 경험에 대한 해석의 근거를 제공하는 미학적 개념과 범주들이 마치 어떤 '보편적인' 몸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면서 몸들의 차이를 간과해 왔다는 이야기다. 가령 장애무용을 흔히 그러하듯이 '장애인이' 하는 무용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은연중에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는 '무용'을 비장애인의 일로 상정하면서, 장애무용을 '무용'의 테두리 바깥에 세우지 않는가? 어떤 움직임이든 춤이 될 수 있다는 명제가 예컨대 장애인의 움직임'도' 춤이 될 수 있다거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춤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 명제가 전제하는 몸에 대한 사유를 문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영과 기섭의 <트리오 A>가 어떤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비판에 그치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을 경유하여, 그 비판 너머에서, 원작이 상징하는 평등한 춤의 이념을 지금 여기에서 보다 급진적으로 실현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장애인이 그 춤을 춘다는 점에서 평등하고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무대에 선다는 것을 그 자체 높이 사는 이 비근한 경향은 장애예술의 윤리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를 뒤섞어 버리며, 결국 둘 중 어느 것도 제대로 논하지 못하게 하는 곤궁을 낳는다) 몸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재고한다는 의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섭과 원영 두 사람이 각자의 <트리오 A>를 함께 출 때, 이 광경에서 일차적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두 사람이 수행하는 동작의 다름인데, 이는 사실 안무의 차원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차이이다. 이러한 차이는 언뜻 장애인으로서 원영이 가진 몸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한계란 몸의 가능과 불능의 문제이다. 우리는 장애를 불능으로, 비장애를 가능으로 곧장 연결 짓는 일에 익숙하지만, 사실 한계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장애인의 한계는 장애로 분류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각자의 <트리오 A>를 출 때 실제로 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생각해 보면, 아마도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춤춘다거나 그런 것보다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안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이때 춤추는 몸이 그때그때마다 발생시키는 특이적인 정동과 감각은 춤추는 몸의 차원에서 차이 자체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가령 두 사람의 몸을 비교해서 파악되는 그런 차이가 아니라, 원영은 원영대로 기섭은 기섭대로 각자의 '고유한' 몸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차이이다.
2020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서울문화재단
만약에 우리가 원영은 변형된 안무를 추되 기섭은 원래의 안무를 추기로 했다면 어땠을까. 기섭은 라이너의 <트리오 A>를 라이너처럼 잘 출 수 있었을까? 만약에 훈련된 무용수인 기섭이 아니라 타고난 몸치인 내가 <트리오 A>를 춘다면 어떨까. 나는 <트리오 A>를 출 수 있을까? 어찌저찌 춘다면 그 춤은 원영의 <트리오 A>보다 라이너의 춤에 가까울까 더 멀까?
가능과 불능의 문제인 한계와 달리, ‘역량’은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 예컨대 춤을 얼마나 잘 출 수 있는가의 문제다. 문제는 장애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너무나도 자주 장애를 곧 불능의 문제로 생각하며, 그리하여 몸의 한계와 역량을 혼동하거나, 역량의 차원 자체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역량의 차원에서 정당한 질문은 "원영은 라이너의 <트리오 A>를 출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답이 뻔한 것은 애초에 어떤 물음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원영은 그의 한계에 적합하게 새로이 안무된 <트리오 A>를 얼마나 잘 출 수 있는가?
원영이 라이너의 <트리오 A>를 추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는 애석한 일이 아니다. 원영은 그 자신의 <트리오 A>를 뛰어나게 잘 출 수 있고, 이는 누구누구처럼 잘 추는가 하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그의 '고유한' 춤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영의 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춤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자신의 한계 너머에서 춤추기 때문이 아니라 (넘을 수 있다면 한계가 아닐 것이다) 안무의 한계에서 그리고 그의 몸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한계에서 춤추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각자 모두에게는 어떤 한계가 있다. 그 한계로 인해서 많은 것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계가 우리의 역량을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한 것으로서 주어져 있는가와 우리가 몸의 존재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이에 언제나 어떤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는 만큼이나, 우리를 떠밀고 가로막는 힘은 결코 우리를 움켜쥘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