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수많은 예술가가 서울무용센터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작업을 해왔지만, 그들이 이곳에 온 계기가 무엇이며 어떤 작업을 했느냐에 대해선 소개할 기회가 없었다. 더욱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로 인해 활동이 여러모로 제약된 상태인 지금, 이 시기를 입주 아티스트는 어떻게 보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였는지 그들 작업의 시작과 마무리, 그 사이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 보려 한다. 12월호에서 소개할 작가는 ‘고스트그룹’과 조아라 이다. 아울러 올 한해 서울무용센터 레지던시를 운영하며 작가들과 이 과정을 함께했던 정경미 매니저의 소감도 함께 담았다.
사라지기 위해 쌓아 올리는 시간 /고스트그룹
비로소 보고자 할 때, 멈춰라
매년 말부터 그다음 해 초까지는 수많은 재단의 지원금 신청 기간이며, 한 해의 농사를 단락 짓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면 뭐라도 쥐어 짜내서 하고 싶은 것을 상상으로 버무리고 창조해낸다. 그렇게 창조해 낸 몇 글자로 앞으로 마주할 일 년의 발자국이 만들어지고, 희미해져 있던 작업은 윤곽을 드러낸다. 많은 부분을 지원금에 의지하는 예술인들은 이 시기에 몰려 있는 지원금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다들 고군분투하며 나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동지 같은 마음일 터이지만 지원사업 발표 결과에 따라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나 역시도. ‘비’를 안겨준 지원금 결과에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승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가 창궐하였고 모든 것들은 멈추게 됐다.
진공상태
아, 그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보자!
공연은 못 하게 되었고 내가 그렇다고 멈춰버리랴? 라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는 정말 멈춰버린 시간이었다. 우주의 진공상태가 내 턱 끝까지 다가왔다. 뭘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개념부터 사라졌다. 모든 일정이 주르륵 취소되니 ‘아 이렇게 분해되고 갈기갈기 찢어져야만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공상태의 시간 속에서 진주 같은 기회는 찾아왔다.
레지던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쇼케이스, 결과 공유회, 워크숍 등 결과를 낼 수 있는 어떠한 형식이라면 가능한 기회. ‘공연이라면 못해 볼 것들에 도전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올해 하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 끝에 레지던시에 입주하게 되었다. 그전에도 공연 연습으로 수년간 오고 간 공간이지만 ‘레지던시’라는 명칭이 붙고 나니 서울무용센터의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오로지 본질적인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 그리고 사람들. 공연을 위한 창조가 아닌 공연을 위한 움직임이 아닌, 그냥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늘어놓고 있는 요즘이다. 어떤 것의 제한을 받지 않고 마구잡이로 해보고, 그냥 그렇게 파고 들고 파고 들고, 질문의 질문이 꼬리를 물고 물어 길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시간은 영화 ‘인터스텔라’의 우주처럼 외부의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올 초에 겪었던 진공상태와는 또 다른 양질의 진공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이다.
서울무용센터 레지던시 ⓒ김혜윤
Zero
‘죽음’을 주제로 다섯 명의 창작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역할로 해낼 수 있는 리서치 방식을 다시 ‘리서치’ 하고 있다. 레지던시를 시작하며 우리나라의 굉장히 체계적이고 특화되어있는 예술교육을 받고 자란 나머지, 창작 방식 또한 공고히 굳어진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매 순간 너덜너덜(?)해지지만 굉장히 많은 ‘input’과 ‘output’들을 경험하고 이것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희년연구> 리허설 중 ⓒ김혜윤
현재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일환인 쇼케이스 <희년연구>를 준비 중이다. 희년이란 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돌아오는 안식의 해다. 이날은 노동자 해방의 날로, 자유가 선포되어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해라고 한다. 나의 50년 뒤에 올 희년을 생각하며 리서치가 시작되었다. 희년 연구는 한 마디로 '죽음'을 '안식'으로 바라본, 잘 죽기 위한 연구이다.
사실 최초의 작업 계기는 3년 전 가족의 죽음으로 겪게 된 '장례식'에서 고인에 대한 위로보다 '장례 제도' 안에서 선택해야 하는 많은 옵션과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시신의 온기가 식기도 전에 결정해야 하는 조건들은 위로받지 못한 죽음만 남기게 했고,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무언가 부족한 위로만 받은 것 같았다. 결국 시스템에 갇힌 덩어리진 몸을 발견했고, ‘잘 죽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에서 리서치가 시작되었다.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몸이 ‘소진됨(죽음)’을 통해 어떠한 형식으로 해방될 수 있는지, 그 해방의 끝이, 시작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와 동시에 후대에게는 처리해야 할 ‘짐’처럼 여겨질 죽음의 처리 과정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희년연구> 리허설 중 ⓒ김혜윤
만인의 숙제처럼 남아있는 ‘죽음’의 영역을 파고드는 시간은 쉽지 않다. 죽음은 몸을 제외하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자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0’의 순간이다. 그 순간을 공통의 이야기로 가져가면서 본질적인 부분을 파고들어야 하고, 해보지 않았던 방식들로 만들어가는 것은 너무 괴롭다. 반전이겠지만, 정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시대의 맥락을 읽어가며 그 안에서 새로운 방식의 예술을 만들어 내는 무수한 창작자들은 어디에서인가 그것들을 즐기고 있으리라. 바이러스의 출몰과 함께 ‘죽음’은 어디에서, 어떻게, 어떠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으로 더 가까워졌다. 생활 전반을 위협하고 모든 것들에 제한을 두게 했다. 하지만 그 제한은 열꽃처럼 우리를 더 애달프게 하며 모든 것들을 쉽사리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0’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은 ‘그냥 없는 해’, ‘사라진 해’라고 한다. 예술이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이라는 영역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도 사실이지만 모두가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0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할 것이다. 텅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쌓고 쌓다가 시간 내에 곧 사라질 ‘0’의 순간은 움직이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현장성의 실체이다. 이것은 꼭 지금의 시대와 닮아있다. 우리에게 ‘0’의 순간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를 가져다준다. 이 시간이 가고 있는 것이 아쉽다. 방을 빼고 나야 실감이 날 감정들이겠지만 몇 주 남은 공간의 특권을 누리며 넓고 높고 깊게 쌓아 나가봐야겠다. 그리고 나면 형체 없는 무언가가 남아있겠지. 마지막으로 꽉 찬 두 달 동안 고스트그룹과 함께해주신 최원석, 오윤형, 곽유하 무용수분들과 서울무용센터 직원분들께 감사드린다. 작업의 결과물은 사람으로 귀결될 때가 종종 있다. 지금이 꼭 그렇다.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주신 무용수 분들 그리고 곽해리나 선생님, 김솔 선생님, 정경미 매니저님. 모두가 하루 앞을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고군분투하며 레지던시를 지원해 주셨다. 애써주신 많은 분을 위해서라도 코로나19의 시대가 종식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리서치를 위한 리서치 ⓒ김혜윤, 류진욱
당신은 당신의 가능성을 믿는가?
별종, 하이브리드 혼종, 조아라의 <판소리움직임 탐구>에 관하여 /조아라
<판소리움직임탐구 1.3> ⓒ옥상훈
나는 ‘판소리’에서 ‘연기’로, ‘무용창작’으로 10년에 한 번 꼴로 전공을 바꾸고 경계를 넘어 새로운 판에 나를 놓아둔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면’보다는 ‘선’, ‘선’보다는 ‘점’에 가까운 활동을 한다. 점들 사이의 간격이 벌어져 있어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고 경계가 모호하다. 흔히 말하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이 늘 머릿속을 맴돌고, ‘나’라고 여겨왔던 ‘나’는 무너지고 처음부터 다시 나를 세워나간다. 그렇게 새로운 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까지 나를, 나와 관계 맺는 환경을 끊임없이 돌아본다. 그러다 보니 때론 문화의 차이를 느끼기도 하고, 경계인의 위치에서 환경을 낯설게 바라보며 관찰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게 나의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서울무용센터 레지던시 작가에 선정되어 입주한 첫날의 감회를 잊을 수 없다. 쾌적한 연습실과 호스텔, 창작자들에게 최상의 지원을 해주시는 모든 분의 친절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신의 가능성에 기회를 줄 테니 마음껏 시도해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 켠에는 과연 잘해나갈 수 있을까, 라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잠시 과거의 한 때가 떠오른다. 2014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한여름밤의 작은극장’을 통해 <수궁가가 조아라>라는 작품을 개발할 당시에 나는 연습할 공간과 대관비가 없었다.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소장님이셨던 유홍영 선생님을 찾아가 열심히 할 테니 연습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간곡히 요청 드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 지금은 사라지고 다른 건물이 세워졌지만 - 과거 미군 초소였던 한 평 남짓한 공간을 소개해주시면서 여기도 괜찮겠냐고 물으셨다. 창고로 사용 중이라 이런저런 물품들이 채워져 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그 공간도 감지덕지였다. 다행히 공간 사용 허락을 받아서 직접 도배를 하고, 연습할 물품 몇 가지를 들고 들어가 <수궁가가 조아라> 창작을 시작했다. 쪽문을 열어두면 들어오는 햇살을 벗 삼아, 비가 오면 빗소리를 벗 삼아 작창을 하고 대사를 외우고 소리 연습을 했다. 초소 바로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어서 자연 속에 있는 토굴에 들어가 있는 기분도 들었고, 마치 내가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 된 것처럼 좋은 작품을 만들기를 꿈꾸며 백 일 정도를 보냈던 것 같다.
다시 ‘나는 누구? 여긴 어디?’란 질문이 스친다. 내가 처음 서울무용센터를 방문했던 시점을 떠올린다. 2016년, 나는 거실에서 넘어져 오른쪽 팔꿈치에 있는 요골두가 여섯 조각나고, 인대가 끊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 계기를 전환점으로, 앞만 보고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을 멈추고, 몸을 돌아보며 춤을 추듯 삶을 살고 싶다고,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배우로서 섭외가 들어와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온전히 창작자 만으로서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두려움도 있었으나 새로운 길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2017년 움직임 탐구에 대한 갈망으로 처음 서울무용센터의 워크숍을 찾아가게 되었다. ‘우구루(Wooguru)’라는 안무가의 워크숍에 참여한 후 메일로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받았다.
“호흡하세요. 보다 마음을 열고, 꾸준히 호흡 운동을 인지하세요.
정신과 몸의 조화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웃음이 터졌던 날 대화 기억하시죠? 여기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긴장을 풀고 몸을 이어나가는 연습을 꾸준히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의력이란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됩니다. 스스로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변화를 택하신 것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유롭고, 즐겁게 오래오래 창작활동 이어가시길 응원합니다.”
워크숍 3일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을 만큼 당시 몸도 마음도 얼어붙고 긴장했던 상태였다. 우구루의 따뜻한 말과 응원이 힘이 되었다. 그 문구를 적어 집 화장실 벽에 붙여두고 지금까지도 매일 읽고 있다. 당시 나에게 무용계와 서울무용센터는 낯선 세계이었으나, 201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전문사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면서 무용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늦게 시작 했지만 천천히 내 방식대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판소리움직임탐구 1> ⓒ옥상훈
2020년, 내 나이 마흔 살에 비로소 <판소리움직임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판소리움직임 탐구>는 판소리의 원형에서 시작하여 몸을 통해 소리와 움직임을 통합하고 상호 연관성을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판소리움직임 탐구>는 호흡, 소리,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변화하며 끊임없이 생동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을 지향한다. <판소리움직임 탐구>를 통해 자유롭게 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에너지로서의 몸,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을 연결하는 채널을 넓히는 몸, 경계 없는 자유로운 몸에 대한 꿈을 꾼다. 앞으로 10년을 바라보고 결과로서의 공연보다 과정 중심의 작품을 만들어 관객과 소통하고 변화를 추적해나가고자 한다.
“멀고도 거치고도 험한 길이로다. 가다, 가다 보면 분명히 설 곳이 있느니라.
<어쩔 수가 없어> (작/연출/퍼포머: 조아라, 2015년) 공연 중 발췌
<어쩔 수가 없어>에서 무녀로서 내가 갈 길을 예고했던 것처럼, <판소리움직임 탐구>를 통해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지만, 힘들어도 하고 싶고 재밌으니까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무용에 대한 배움이 짧고 몸의 준비도 부족하지만, 서울무용센터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되어 서울무용센터에서 탐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된다.
<판소리움직임탐구 1> ⓒ옥상훈
레지던시 기간 동안 12월 11~13일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공연 예정인 <판소리움직임 탐구-조아라 편>를 위한 리서치와 더불어 <판소리움직임 탐구-무용수 편>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판소리움직임 실연자로 박유라, 신상미, 허윤경, 이렇게 세 명의 무용수가 참여했고, 배우 권영지가 기록을 맡았다. 조아라의 몸에서 시작한 탐구는 <판소리움직임 탐구-무용수 편>으로 나아간다. 워크숍을 통해 개성이 다른 무용수들의 몸에서 어떤 발견이 일어나는지, 발견으로부터 어떤 변형, 발전이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을 탐구했다. 11월 29일에는 소수의 관객을 모시고 무용수들과의 8차례 워크숍을 마무리하는 과정 공유회를 진행했다.
<판소리움직임 탐구 - 무용수 편>은 <심청가> 중 ‘범피중류’라는 대목에 집중했다. ‘범피중류’는 심청이가 세상사를 하직하고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서 빈 배에 몸을 싣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러 가는 부분의 소리이다. ‘범피중류’는 크고 넓은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배 한 척, 절벽 끝에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바다 한 가운데를 날아가는 새의 모습 등 다양한 이미지와 감각을 소리를 통해 구현한다. ‘범피중류’ 한 대목을 듣고 있노라면 소리의 운동성이 극대화되어 마치 소리가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또한 공간에 소리로 그림(드로잉)을 그리는 감각은 춤이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나는 ‘범피중류’ 대목의 소리가 ‘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범피중류’ 소리는 마치 물이 여러 형태로 변화하며 끊임없이 연결되고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큰 파도가 밀려오는 듯 하고, 소리 에너지가 밑에서 위로 올려지기도 하고, 뚝 떨어지기도 하고, 저 멀리 뻗어나가기도 하며 변화무쌍한 힘이 느껴진다.
‘범피중류’는 판소리 전공자도 부르기가 꽤나 어려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소리의 진폭이 넓어 다양한 영역의 소리를 막힘없이 낼 수 있어야 하고, 단전에서부터 시작한 소리는 가슴을 울리는 소리부터 정수리를 울리는 소리까지 소리의 울림점을 바꾸어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소리의 꾸밈음이나 미분음이 많으며 고음이 많아서 소리를 내기 위한 호흡이나 근육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소리를 배워 본 경험이 없는 무용수들과의 <판소리움직임 탐구>의 대목으로 ‘범피중류’를 선택한 이유는, 변화무쌍한 물의 특성처럼 에너지가 흐르고 연결되는 소리의 운동성이 움직임으로 확장하기에 적합한 대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리와 움직임의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호흡’으로부터 출발하는 소리 에너지가 몸을 통해 움직임의 에너지로 전환된다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리의 다양한 질감 변화는 그 안에 흐르는 호흡의 변화와 연결된다. 다양하게 호흡을 조절하고 변화시키는, 끊임없이 흐르는 에너지가 소리로 발현되고 움직임으로 발현되며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로서의 몸을 보고 싶었다.
‘판소리움직임’을 탐구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지점은 일단 무용수들이 판소리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소리를 배워서 잘 부르는 것이 목표는 아니지만, 판소리의 발성법과 운용 방법을 익히고 탐구하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판소리를 오롯하게 배우고 체화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줄탁동시’(

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줄’은 달걀이 부화하려 할 때 알 속에서 나는 소리, ‘탁’은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것. ‘어미닭과 병어리가 동시에 알을 쫀다’라는 의미로,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워크숍의 참여자 모두가 서로 마음을 모아 알에서 깨고 나와 세계를 넓혀 배워나가는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무용 언어에 익숙한 무용수들에게, 판소리가 ‘노래’만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열린 개념으로서 ‘판소리’를 만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는 ’범피중류‘ 소리를 전수할 때 판소리를 전공하고 연기와 무용창작을 전공하며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발성을 기본으로, 소리에 대한 태도, 세계관, 몸에 대한 인지와 소리에 대한 인지의 상관관계, ‘판’의 개념 등을 함께 나눴다.
<판소리움직임탐구 - 무용수편> ⓒ서울무용센터
판소리는 아니리(말) / 소리 / 너름새(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는 종합예술이다. 무용 창작자이자 워크숍 참여자들에게 판소리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혹은 무용수들이 적용할 수 있도록 소리꾼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나는 판소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부터 판소리의 형식이 확장되는 경험을 제시하고 싶었다.
<판소리움직임 탐구 - 무용수 편>을 통해 소리와 움직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소리와 움직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워크숍 참여자 스스로 질문하고 함께 찾아가는 장이 되길 바랐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질문들을 공유하기도 하고,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워크숍 참여자들을 잘 관찰하고 적합한 방향을 제안하고, 탐구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요구하며, 동시에 강요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항상 스스로 돌아보며 반성해봐야 할 일이다.
첫 4회 차는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배우는 것에 집중했다. 다행히 판소리가 낯설 텐데도 참여자들은 소리 내는 것에 대한 자의식(두려움이나 자기 검열)없이 막힘없이 소리를 냈고, 판소리 배우는 것에 재미를 느껴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는 듯했다. 각자 삶 속에서 여러 일을 진행하는 동시에 일요일 오전에 모여 아침부터 소리를 배우고 소리를 익히는 시간을 보내며 한 달을 보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껏 소리를 내면 속이 시원함을 느꼈다. 무용수들이 판소리를 배워 소리의 움직임을 춤으로 구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즐거운 마음이 생기고 감사했다. 무용수들은 오랜 시간 훈련을 통해 몸 지각능력을 개발하고, 공간과 몸의 관계, 공간 안에서 움직임의 조형성, 움직임의 리듬, 에너지 방사 등을 체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신기방기하게도 놀라울 정도로 이해와 습득이 빨랐고 소리가 쭉쭉 늘어갔다. 이런 능력은 소리꾼이 소리로 공간과 관계를 맺고 에너지를 방사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판소리움직임탐구 - 무용수편> ⓒ몸소리말조아라
참여자들과 <판소리움직임 탐구 - 무용수 편> 선행 워크숍을 세 번째 진행한 이후 다른 공연 연습 중에 ‘소리를 보다 편히 낼 수 있었다’, ‘음의 흔들림이 적어졌다’라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워크숍 리더로서 참여자들이 워크숍 시간에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계속 몸과 소리에 대해 스스로 관찰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반가웠다. 워크숍 3회 차부터 ‘범피중류’ 배우기와 더불어 ‘내 삶이 판소리가 되기까지’라는 테마로 각각 개별탐구를 진행했는데, 자신의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해 글을 쓰고, 글을 말로 발화하고, 소리 내고, 움직임까지 확장시키는 작업을 워크숍 회차를 거듭하면서 발전시켜 나아갔다. 세 명의 워크숍 참여자들은 개성만큼 발현되는 양상이 달랐는데, 이야기꾼으로서 말맛을 살려 리듬화 시키기, 역할을 넘나들며 템포와 존재감 변신하기, 소리의 질감을 다양하게 바꾸고 그에 맞는 신체 제스처를 찾기 등 다양한 가능성을 서로 지켜보면서 배워나갈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 <판소리움직임 탐구>는 소마(soma)적 관점으로 몸을 바라본다. 소리와 움직임, 그리고 말을 에너지의 진동으로서 바라보고 상호 연결되는 지점을 탐구한다. 소리/움직임/말이 ‘판소리움직임’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나아가 표현 방식을 개발하며, 워크숍/공연/피드백의 순환 고리를 통해 방법론을 구축하고자 한다. <판소리움직임 탐구>는 자아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하지만, 경계를 넘어 나아가 타인과 세상과의 소통까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판소리움직임 탐구>는 끊임없는 수행이다. 삶을 돌아보는 명상이다. 불필요한 몸의 긴장, 마음의 긴장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소리와 움직임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기 위해, 어떻게 효율적으로 호흡을 운용하고 불필요한 긴장을 없애며 에너지를 연결하고 순환시킬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소리와 움직임 사이를 넘나드는 나만의 순환의 방법을 찾고, 에너지 손실 없이 운용하는 방법을 획득한다면, <판소리움직임 탐구>를 하면 할수록 보다 건강한 몸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판소리움직임’를 통해 내 안의 신성과 순수한 내 본성과 만나고자 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을 보고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당신은 <판소리움직임 탐구>의 가능성을 믿는가? 질문은 여전하다.
코로나19와 함께 서울무용센터 ‘2020년 레지던시 오픈콜’ 운영 /정경미(서울무용센터 매니저)
2020년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우리 모두가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서울무용센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2월 초, 5월 초, 8월 중순, 12월 초 이렇게 롤러코스터 같은 코로나19의 심각한 상황에, 마치 줄타기 하듯이 코로나19의 눈치를 봐가며 ‘레지던시 오픈콜’ 선정 예술가들을 입주시키고, 코로나가 조금 안정되어 프로그램 진행이 가능할 무렵이 되면 결과 공유회를 진행하고 예술가들과 네트워킹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어려워지면 결과 공유회를 온라인으로 송출했고, 네트워킹도 온라인 “줌”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 구분 |
선정 팀(개인)명 |
입주 기간 |
비고 |
| 국내 |
공영선 |
2020.05.19.~06.25. / 10.20.~11.02.
|
진행 완료 |
| 손나예 |
2020.05.08.~08.07. |
| 김호연 |
2020.05.18.~08.09. |
| 정지혜 |
2020.06.15.~09.14. |
| 모든컴퍼니 |
2020.08.01.~11.26. |
| 최은진 |
2020.08.26.~11.04. |
| 몸소리말조아라 |
2020.11.01.~2021.01.31. |
진행 중 |
| 바리나모 |
2020.09.18.~10.19 / 2020.12.08.~2021.01.11. |
| 고스트그룹 |
2020.10.12.~10.31. / 11.09.~12.20. |
| 국외 |
SVALHOLM(덴마크) |
2021년 상반기 ‘버추얼(virtual) 레지던시’ 진행(예정) |
| Serena Chalker and Emma Fishwick(호주) |
| David Ferguson(캐나다) |
2020년 서울무용센터 레지던시 오픈콜 선정팀(개인)
2020년은 국내 9팀(개인), 해외 3팀(개인) 총 12팀(개인)을 선정하였다. 연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한 달 정도 늦추어지긴 했지만 5월 초 이태원발 코로나가 좀 잠잠해진 이후 자가 격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국내 선정팀(개인)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선정된 해외 3팀은 한국으로 입국하고 2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하고 레지던시 후 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상황을 부담스러워 했다. 또한 그들이 한국으로 오기 위해 항공료 등 기타 활동비에 대한 지원금을 받아야 하는데 현재 유럽은 한국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문화예술계의 펀딩(funding)을 받기가 쉽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현실에 놓여 있는 해외 선정팀들은 레지던시 입주 시기를 최대한 하반기로 늦추어주기를 희망했다. 처음에는 2020년 하반기로 연기하였고, 이 원고를 작성하는 현재는 내년 3월까지로 일단은 다시 미루어 놓은 상태다. 그런데 국내외의 코로나 상황이 내년 2~3월도 무언가를 예정할 수 없는 시국으로 치닫고 있어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와 있다.
국내 선정팀(개인)들은 개인 방역은 물론 센터 내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조심스럽게 리서치를 시작하고 안무를 만들고 연습을 하고 있다. 레지던시 입주 예술가들은 무용센터 직원들처럼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발열 체크를 시작으로 센터 내 모든 공간에서 하루 종일 마스크를 착용하며 지낸다. 사회적 거리를 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호스텔과 연습실도 한 칸 띄우고 배치하는 등 거리두기를 반영하고 있지만 레지던시 입주 예술가들은 이렇게 어려운 코로나 상황에 닫혀 있는 센터 안에서 거리두기를 해서라도 리서치를 할 수 있고,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고 감사해 한다.
서울무용센터는 코로나 상황에 프로그램의 특성과 성격을 구분하여 수용인원을 축소하여 제한적 공간 운영을 하고 있다. 렉처와 같은 강연은 2m, 워크숍과 쇼케이스는 3m, 연습은 4m 거리를 두고 공간면적 대비 수용인원을 30%대로 조정하여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정부에서 제시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에서 국공립시설은 평소 이용객의 30%로 수용인원을 유지하지만 무용센터는 이미 지난 5월 중순 재개관시 수용 가능인원을 30%로 제한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사회적 거리두기 비상조치 시행에 따른 공공문화시설 전면 운영중단을 시행하니 아무런 소용도 없는 노릇이다. 올해 코로나를 겪으면서 1년 후의 미래는 커녕 한치 앞 바로 내일도 예측할 수 없고,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으면서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레지던시 결과 과정 공유회 및 쇼케이스 또한 변화무쌍한 코로나 확진자 현황에 따라 수용 인원을 제한해야 하므로 소수라도 오프라인으로 진행한 팀(개인)이 있는가 하면 하필 센터가 휴관한 시점에 해당되면 온라인 송출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2020년에는 수월하게 넘어가는 상황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다. 코로나의 큰 확산세를 보인 2월초, 5월초, 8월 중순, 12월초 크게 4번의 고비들이 꼬불꼬불한 산모퉁이를 매일 지나가는듯한 그리고 롤러코스터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타는 듯한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 고비를 지나서 허리를 펴고 좀 걸을만 하면, 다시 고비를 찾아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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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선 리서치 과정 공유회 <축지법 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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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워크숍 <감각의 세계_까닭 모를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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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나예 쇼케이스 <형상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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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네트워킹
서울무용센터는 매달 1회 정도 ‘레지던시 오픈콜 네트워킹’을 진행한다. 12월에는 5월부터 12월까지 입주한 전 레지던시 선정 예술가들을 모두 초청하여 올 한해 진행했던 사항들도 서로 공유하고 다른 해에 비해 2020년 정말 고생했음을 나누고 격려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격상으로 이 또한 온라인 네트워킹으로 대체하여 줌이라는 온라인 세상에서 만나서 진행했다.
예전에는 온라인으로 네트워킹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온라인으로 회의와 강의는 물론 워크숍도 진행하고 하물며 네트워킹과 레지던시도 온라인으로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온라인 세상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코로나19 상황에 그냥 안주하지 않고 코로나19와 열심히 줄타기를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 가능성을 모색해 볼 예정이다.
해외 선정팀은 내년의 코로나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도 여전히 2021년 하반기에 입국해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한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될 2021년 레지던시 오픈콜은 무용센터에 입주는 국내팀으로 한정하고, 2020년에 한국으로 입국하지 못한 해외 선정팀들과 ‘버추얼(virtual) 레지던시’를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 레지던시계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기분이지만 이왕 레지던시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면 온라인 세상에서 해외 예술가들과 만나서 소통하고 프로그램 진행하는 등 열심히 알차게 잘 운영하고 싶다. 향후 코로나가 안정화된 후 ‘코로나19 이전 레지던시와 코로나19 이후 레지던시’를 논하는 자리가 마련하여 그간의 소회를 풀어보면 좋겠다.